삶의 진실을 찾아서

윤회에서 벗어나는 의미 본문

☆ 진실의 근원

윤회에서 벗어나는 의미

gincil 2013. 4. 10. 14:04

좋은 영혼을 이룬 자가 천상의 세계에 가는 것에 대해서는 부처님도 말한 적이 있다.


그리고 열반 이후에 존재하는지 안하는지에 대해서는 

스승께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정확히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열반이란 업이 정지된 상태로 마음의 평안을 얻은 상태를 말하며

해탈이란 모든 업이 사라져 완전한 자유를 얻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완전한 해탈을 얻기 전 업이 힘을 잃고 업의 충동에서 벗어나는 상태에 들게 되는데

이를 열반이라 한다.

열반에 이르게 되면 영생의 세계나 천상의 세계에 나게 된다.

그리고 해탈에 이르게 되면 천상의 세계나 

모든 만물이 시작되고 이루고 있는 우주의 근원의 차원에 들게 된다.


이삼한 성자는 이 근원의 차원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셨다.

업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으면 이 근원의 차원에 들수 없기 때문이다.

그분 또한 육체의 인연을 다하지 않아 아직 육체의 업을 갖고 계셨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많은 연구를 통해 무기라 하여 

부처님이 명확히 밝히지 않은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 있다.

즉 ① 자아 및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有限)한가 무한한가, 유한하기도 하며 무한하기도 한가, 유한도 무한도 아닌가, ②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③ 영혼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④ 여래(如來)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등이다. 


그런데 다른 경전 구절을 보면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는 구절이 많이 나온다.

그렇다면 이러한 구절들은 

여래(如來)가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를 밝히지 않았다고 하는 

무기의 정의와 배치된다.


이처럼 지금 불교는 논리상 모순이 많다.

기존 정설은 명확히 밝히지 않았다고 하는데도

경전에는 다시는 생명을 받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본래 뜻을 잘 알아야 한다.


기존 불교에서는 다시는 나지 않는다는 본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불교를 염세적으로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다.

불교의 최종적인 목적인 해탈이 세상을 더러운 것으로 인식하여 

인간의 몸을 벗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해는 부처님이 밝히신 모든 생명을 축복하는 법이

후대에 이르러 그 뜻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이

힌두교의 염세사상의 영향을 받아 왜곡한데서 비롯된다.


즉 좋은 음식이 변질됨으로써 오히려 인간의 삶을 더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나쁜 음식은 인간이 아예 찾지 않지만 

좋은 음식은 변질되면 인간이 알아보지 못하고 먹어 더 큰 문제를 불러오는 것이다.


지금 불교는 끝없이 도는 생명의 흐름을 더럽고 죄스러운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생명의 흐름인 육도윤회를 벗어나 다시는 나지 않는 것을 소망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거꾸로 뒤집힌 것이다.


생명의 끈을 찾아 완성으로 나아가는 길이 어떻게 죄스러운 것이란 말인가?


지금 불교도의 말처럼 만약 그대가 육도윤회를 벗어나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간단하다.


양심과 이치를 어기고 함부로 남을 해쳐 원성을 사고

욕망에 빠져 모든 쾌락을 즐기며 살면 된다.


그러면 그 영혼이 무지하고 무겁고 탁해지고 

온갖 인연에 사로잡혀 이 세상을 떠돌다 지옥의 고통 속에서 산산히 갈라지게 되고

마침내 미물로 변하고 흩어져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을 찾아 완성으로 향하는 끝없는 생명의 윤회 길은

결코 부끄럽거나 죄스러운 것이 아니라

영혼의 고결함을 가진 자만이 지니는 고귀한 인연이며 위대하고 성스러운 발걸음이다.


기존 불교논리에 따르자면

모든 진리를 밝히며 온갖 공덕행을 하는 것도

인간최고의 경지인 해탈을 이루는 것도

다시는 이 죄많은 세상에 태어나지 않기 위해서가 된다.


이것은 말이 되지 않는 논리적 모순이며

삶의 존엄함과 불교의 진리를 모독하는 것이다.


어찌 다시 나지 않기 위해 그토록 진리를 찾고 올바른 삶을 행하고 세상을 위해 공덕행을 하겠는가?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매일 매일 산다는 것이 신성하고 소중하며

우리는 소중한 생명의 인연을 받아 완성의 경지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는 나지 않는다는 말의 정확한 의미는 이러하다.


인간은 끝없이 생명으로 태어나

더 나은 자기를 얻고 완성에 이르려고 하는

생명의 고귀한 인연 속에 돌고 있다.


그리하여 좋은 인연을 만나 선한 생명의 순환을 통해 완성에 이르게 된 영혼은

마음 속에 세상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축복이 넘치고

모든 삿됨과 업의 충동에서 벗어나 마음의 평안을 얻고 

걸림없는 밝은 지혜를 얻어 세상을 실상 그대로 보는 깨달음의 눈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끝없는 자비와 사랑과 진실이 있어야 한다.

끝없는 자비와 사랑이 있어야 자신 속에 뜻으로 숨어있는 업을 불살라버릴 수 있으며

한점 거짓없는 진실이 있어야 마음에 강한 염력이 생겨

업을 극복하고 지울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끝없는 공덕행으로 자신 속에 있는 업을 태워가며

진실하고 강한 의식으로 자신의 업을 극복해나가면

마침내 업이 힘을 잃고 조용한 마음을 얻으며

맑은 의식 속에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치게 된다.

그때는 생각없이 세상의 뜻이 의식 속에 바로 비치는 깨달음의 지혜가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완성되어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얻기 때문에

생명으로 끝없이 도는 모든 인연의 힘이 다하게 된다.


이를 잘 표현한 구절이 잡아함경 사경에 있다.

“번뇌에 따라 움직인다면 그는 곧 번뇌에 따라 죽을 것이며

그러면 번뇌를 취하여 그에 결박될 것이다.

그러나 번뇌를 벗어나 살아간다면 번뇌에 따른 죽음도 벗어날 것이며

번뇌를 따라 죽지 않는다면 번뇌의 업도 취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때부터는 인연과 업의 충동에 끄달리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어디든 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여래 즉 

다시 예전과 같이 돌아와 똑같은 법을 펴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나지 않는다는 말은

혐오스런 세상을 다행히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힘든 여정을 거쳐 모든 것을 이룸으로서

윤회의 굴레에 졸업해 완성에 이른 것으로 해석해야 하며

생명의 인연에 끄달려 다시 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태어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 끝이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서도 침묵하신 이유에 대해 물었다.


깨달은 자라고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깨달은 자라도 우주선을 만드는 법을 미리 아셨을 리가 없다.

사실을 보고 들으면 맑고 완전한 마음에 모든 인과가 닿아 해결책을 보게되는 것이다.

그러니 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알 수도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말하지 않는 것이 올바른 처신이셨던 것이다.


싯달타가 이삼한님과 동급이라면 종말에 대해서 말씀하셨어야 한다고 했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 없으며 모든 것은 변한다.

따라서 언젠가는 부처님 법도 쇠망하게 된다.

그래서 부처님도 정법과 상법과 말법시대를 거쳐

미륵부처가 오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다고 했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인류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른 말로 이미 표현을 했다.

과거 일곱부처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일곱 번의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는 이야기다.


부처님의 정법인지 확인할 수 없지만 

대방등경이란 경전에는 말법시대의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공중에는 갖가지 두려운 불기운이 나타나고 

세간에는 부처님법이 다시는 없고 모든 계율과 경전이 사라지며 

온땅이 진동하고 모든 성과 집이 허물어지고 

모든 생명이 떨어지고 모든 샘이 고갈되며 땅이란 땅은 다 황폐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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