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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투쟁

29. 잘난 바보

gincil 2014. 2. 7. 01:47

나의 아내가 나를 찾더라는 이야길 들었다.

나는 집에다가 무슨 일인가 전화를 걸었다.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가 그것 보도 났습니다 했다.

나는 그 소릴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 설마 하면서도 의심이 생겼다. 세상에 대한 허탈감이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평소에 보던 친분만 믿고 남을 도운다고 내 딴에는 거짓말까지 해서 얻어다 준 돈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수표를 보고 믿어도 되느냐고 말까지 했고, 또 두 사람이 지급지 은행에다 조회까지 해 본 어음이었다.

그때 수산업 협동조합 부산시 다대지점 소장이라는 신분까지 밝힌 사람이 전화를 받은 것이다.

수표 이야길 하자 그 물건같으면 자기가 책임을 질 수 있다는 말을 했다. 나는 그 소릴 듣고 잠시나마 사람들과 사회를 의심한 내 마음에 부끄러운 마음까지 느낀 적이 있었던 것이었다.

생각을 할 때마다 죽일 놈들 하는 격한 감정이 속에서 위로 올라왔다. 배반이 상식이라고 믿어 온 속된 자들을 찾아서 거리를 헤매기 시작했다.

금방 눈이 뒤집혀질 것만 같았다. 12월의 쌀쌀한 기온을 피부에 느끼면서도 골목길에 숨어서 잠복까지 하며 기다린 끝에 돈을 가져간 영감님을 만났다.

나를 본 영감님은 처음에는 당황하는 척 하더니 곧 태연해진다. 자기도 받은 것이라고 시침을 떼었다. 그러다가 어쩔 수 없는지 나를 데리고 발행회사라는 곳까지 찾아 갔다.

나는 당장 그곳에 가보고 사기 당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계획적인 것이 눈에 보였다. 나는 영감님을 놓치지 않고 계속 다그쳤다.

나의 성질을 아는 영감님은 부산 땅에서 이삼한을 사기꾼 조직정도가 감히 손을 정면으로 대고 싸울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쩔쩔 매었다.

뒷날은 금융기관의 소장이라는 자를 좀 혼을 내어 주어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점포 소재지로 찾아 갔더니 일주일 전에 사표까지 내고 급히 퇴직금까지 챙겨서 도망친 후였다.

나는 다시 억장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람들의 양심을 두고 환멸을 느끼기 시작했다.

믿어주는 자를 배반해야 하는 딱한 행동을 재주처럼 여기는 사람들보다 이러한 것을 두고 언제까지나 방치해 버릴 것인가 하는 사회의 양심에 분노가 치솟았다. 나는 비로소 이런 일이 흥분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하나하나 사람들의 이야길 들으면서 정리를 했다.

3,000만원이나 되는 부도 난 어음 뒷면에는 수협 다대지소 소장의 배서날인이 되어 있었다. 지능만 가지고 몇 개월에 10억 정도는 챙겼구나 생각을 하면서도 마음은 씁쓸했다.

돈은 10 원도 변상을 하지 않으면서도 어떻게나 일당들이 수습을 잘 하는지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멍멍하게 김이 빠져 갔다.

나는 발행자의 뒷조사를 했다. 발행자는 여러 번 사기전과가 있었으며 전에도 이런 일을 한 부정수표 전과자로 그의 앞으로 된 재산은 없었다. 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전과자의 수단치면 놀라웠다. 아니, 양심이 중히 여겨지지 않는 이 땅의 이야기였다.

수협의 소장이라는 자 역시 돈 씀씀이로 소문이 나 있었고 뒤에는 여자가 몇이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두 사람의 연극이었을까 나는 의심이 생겼다. 이야기 뒤에는 서울에 두목이 있다고 들렸지만 더 추적할 수가 없었다. 더 알아도 아무런 해결책이 나에게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 일이 나 개인한테도 문제가 있었지만 사회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여러 날이나 시간을 두고 생각했다. 이런 일을 법률에 호소하면 될까. 법이 사회정의를 대변하느냐가 의심이 생겼다.

이런 이야길 하면 나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다음 세대 사람들이 생각할지 모르지만 민사사건 수사개입, 불개입의 원칙은 지능범이 저지른 일을 그가 붙잡혀서 고백하기 전에는 정의를 아는 수사관인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것이다.

고소장에다가 내력을 다 써서 납득이 가게 하려면 며칠 써야 할 것이고, 그렇다고 그 효과조차도 분명치 않았고 이런 사회에서 항상 높은 분들의 훈계가 비방하기 없기로 되었는데 사실대로 내가 먼저 판정을 해가지고 이 자들이 사기꾼이요 하고 써 낼 수도 없었다.

또 발행자가 조직을 가진 전과범이요 하고 말할 수도 없는 것이다.

한 놈은 여자를 셋씩이나 먹여 살리기 위해 수표용지, 어음용지 꺼내어 주고 점포에 드나드는 고객들 돈 네다바이한 자요 하고 고함을 칠 수도 없는 것이다. 생각해 보니 더 기가 막힌다.

우선 정의를 살리겠다는 사명을 가진 곳이 있어야 찾아가서 이야길 해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하면서도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기에는 내 양심이 허락을 안 했다.

방송국과 모 신문사의 사회부에다가 전화를 걸었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으니 취재해 보면 재미난 것이 드러날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저쪽에서는 알았다고 한다.

나는 그 날 내내 뒷날까지 이틀간이나 뉴스 시간마다 라디오와 텔레비젼 앞에서 귀를 기울여도 결코 그 사건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았다. 신문도 마찬가지였다.

마지 못해 직접 아침 9시경에 방송국에 찾아갔다. 그러나 나는 세상에 대한 충격과 실망만을 느껴야 했다. 기자들은 사건을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내가 사기꾼들의 다음 음모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 사건만은 너무 엉터리가 많으니 취재를 해서 세상에 알려줄 것을 요구해 보았지만 기자들은 매우 불쾌한 인상까지 보여 주었다. 세상이 왜 이 지경이 되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언론의 사명이 무엇인가며 따지자 그때서야 경찰서로 가보자며 더욱 불쾌한 얼굴로 나를 두고 말을 하였다. 세상이 나를 웃겼다.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주위는 나의 생각과는 너무나 많이 달라진 것이었다. 그래도 내 마음 한 쪽에서는 어떤 기대감을 가지고 기자가 일러준 경찰서의 한 부서로 약속된 시간에 찾아갔다. 방송국의 기자도 그 시간에 경찰서로 들어왔다.

그는 나를 보고 아예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은 채 경찰서의 경제담당 형사를 보고 내가 방송국에 찾아와서 따지더라고 항의 비슷하게 말했다.

경찰관이 나를 확인하고서 인사를 한다. 이 선생, 나를 알지 않소. 이리 찾아오면 되지 방송국에는 무엇하러 갔소? 하면서 상세하게 고소장이나 한 장 써서 내라고 했다.

그때 부산에서 발행되던 모 일간 신문사의 기자가 말을 붙인다. 당신이 우리 회사에 전화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을 하였다.

그는 나를 두고 모욕적인 말로 무안을 준다. 돈놀이하는 사람이냐고. 나는 사기꾼보다도 이제는 기자라는 사람들의 행동이 불쾌했다.

또 그는 서슴없이 함부로 말을 한다. 한 번 혼을 내어 줄려고 했는데 만나 보고 참는다는 말까지 했다.

나는 당장 기자의 말을 받아

「여보, 나는 사회를 밝히기 위해 15년간이나 투쟁했던 사람이요.」

하니, 나이가 나보다 어려 보이는 기자는 나는 25년간 나라를 위해 일했다는 것이다.

나는 도대체 내가 이런 자들과 말대꾸를 한다는 사실에 수치감을 느꼈다. 나는 그곳을 어른 나와 버렸다.

혼자 길을 걸었다. 사회의 장래가 걱정으로 변해갔다. 용서할 수 없는 놈들하고 이가 갈렸다. 주위에는 아무 곳에도 믿을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니 걷고 있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날이 갈수록 양심이 견딜 수 없는 고문을 당했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팻말을 길거리에서 보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사실은 사실대로 말해주어야 착한 자도 살아갈 수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마음 속에는 앞으로 더 살아가야 할 장래가 걱정이 되고 있었다. 억울한 사람은 있는데 억울한 사람의 친구는 없다.

한 마디로 이 땅에 정의가 죽은 것이다.

이 슬픈 사실을 사람들은 확인하지 않고 살아갈 뿐이다.

봄이 되니 또 충격적인 사실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 하동(河東)땅에 살고 있는 우리 남매 중에 제일 큰 누님께서 한 번 다녀가라고 연락이 왔다. 또 다음날이 되니 빨리 올라오라고 전화통에서 성화를 댔다.

나는 누님의 사정이 급함을 알고 급히 고향인 하동으로 올라갔다. 오래간만에 나를 만난 누님이 살았다는 듯한 숨을 내어 쉰다. 나는 누님이 내게 올라오기를 독촉한 사정 이야기를 들었다. 시골 구석에서도 기막힌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책임감 없는 몇 사람이 구획 정리위원인가 하는 꼭두각시가 되어 입지 조건이 도저히 합당하지도 않은 곳인데도 불구하고 경지작업을 한답시고 무지한 사람들을 울리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처음부터가 웃기는 일이었다. 세 동강 난 논을 두 동강을 만든다고 50여만원 가까이 부담금을 물란다. 무엇이 그렇게 많은 돈을 내야 하느냐고 물으니 모두 다 동의한 일이라는 대답이 나왔다.

그 동네 구장이라는 사람은 돈만 내면 모를 심기 전까지 다 해준다는 것이었다. 나는 당국을 믿고 건설회사를 믿고 그곳 꼭두각시 노름을 하는 구장 말을 믿었다.

그러나 정의가 부족한 곳에서 믿음이란 언제나 낭패를 몰아왔다.

공사가 끝나고 나니 50cm의 논두렁이 2m로 변한 것 외에는 우리 소유의 땅 주위에는 파괴뿐이었다.

멀쩡한 수로를 새로 만든다고 깊게 파서 용수로마저 끊어버렸다. 남의 토지 위에서 파괴행위를 한 것으로 인해 우리에게는 엄청난 일거리가 생겼다.

어처구니 없는 일을 당해 항변할 곳이 없는 사람이 되어 참고 있자니 이젠 서서히 수작이 드러난다. 파괴된 논두렁은 개인더러 자기부담으로 하란다.

토지의 12%는 유지들을 위해 그럴듯한 명목으로 빼앗아 버린다. 1,025평이라고 받은 논은 실제 750평 뿐이다. 싸움싸움하여 항의를 하니 온갖 욕설을 하며 군청 직원은 측량기사와 상의하여 나머지 모자라는 토지 부분을 떼어주긴 했지만 이것도 잠시 입을 막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젠 경지 작업을 하기 전보다 논의 지형이 더 나빠졌다. 세 동강은 여전히 세 동강이었다. 오히려 불도저가 파괴시킨 논두렁을 다시 만드는데 공사비다 60여만 원이나 더 들게 된 것이다.

또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우리를 도와준다고 국고 보조가 우리 앞으로 약 200만 원 정도 나왔다는 것이었다. 우둔한 나의 머리에도 떠오르는 생각은 몇 놈 돈푼께나 만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또 며칠이 지나고는 가한지를 해준 논에다가 말뚝을 박았다. 우리에게는 약900평만 가지라는 말이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번에도 또 당하고 보니 하자에 책임질 놈은 세상에 하나도 없었다. 항변을 하면 도리어 협박을 했다. 계산을 해보니 기가 막혔다.

1158평에서 258평은 강제로 빼앗길 형편이고 부담금과 논두렁 만든다고 들인 작업비만 근 110만원 정도다 또 당국에서 농민 도와준다고 보태 주었다는 200여만을 합치면 310여만원이 된다 하더라도 돌려 받은 900평이 얼마나 땅 값이 나갈지 몰라도 땅 위로 불도저가 4시간 지나간 대가가 땅 1/2을 날린 형편이 되었다. 생각하면 어처구니가 없고 세상을 보면 딱하기만 하였다.

이런 일이 국가가 국민을 돕는 사업일까? 화가 치밀어 올라왔다.

이렇게 해도 무사하기만 한 세상이 한심하기만 했다. 억울해도 항변할 곳이 없는 세상이고 또 당할까봐 입을 다물어야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말할 수 없이 아팠다.

책임을 자질 줄 모르는 사람들, 정의를 박해하고 양심을 미워하는 사람들, 이 땅에 그런 자들이 살기에 우리는 희망을 빼앗기고 말았다.

나는 모든 사실을 알고 나서 정의를 찾아 헤매었다. 하동군수를 찾아갔고 또 도의 농정국장을 찾아가 보았다. 결국 나는 없는 살림에 차비만 날린 결과 외에는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다.

억울한 자가 억울하다고 말을 하면 양심을 잃어버린 자들은 도리어 불순하다는 눈치다.

내가 도청의 높은 사람을 찾아가서 최후로 한 말은「담당자들은 바보 천치인가? 부정과의 결탁인가? 국가지원 사업을 통해 국민의 불신을 조작하려는 반역행위인가?」 하는 것들이었는데, 나의 항변을 들은 상대방의 대답은 언제나 침묵 속의 조소였다.

억울하다 억울하다. 그러나 이 억울한 자를 도우려는 친구가 이 나라에는 분명히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런 일은 또 일어난다. 외쳐도 외쳐도 메아리조차 없는 외침이 되었다. 온 몸에 힘이 빠지고 지쳐감을 느꼈다.

용기와 양심따위는 최소한 이 시대에는 아무 가치가 없는 어리석은 자의 사치품인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허탈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가슴 속에서는 피가 식어버린 느낌이 들도록 싸늘한 기분을 일게 했다. 억지뿐인 사방을 둘러보면서 사람의 양심이 어디에 필요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말 못하는 사연들이 가슴에 쌓여서 답답했다. 나는 내 자신을 위해 이럴 때 필요한 말을 찾기 시작했다. 동화 속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눈 두 개 가진 원숭이가 외 눈 가진 원숭이 동네에 갔다가 병신 취급을 받았다는 이야기에 웃음이 나왔다. 세상이 재미 있어졌다.

하루 종일 우리 속에 갇힌 돼지를 생각하면 내가 불평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다. 파멸과 큰 일이 금방 닥칠 것만 같았다.

이때부터 주위 사람들이 하는 흉내를 내기 위해 돈을 좀 쓰니 술과 엉뚱한 생각들이 나의 모든 것을 잊어가게 했다.

일부러 자신을 타락시키기 위해 이런 생활을 되풀이하는 동안 나는 하루하루 주위가 희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점점 눈이 보이질 않는다. 이제 나는 세상을 다른 사람처럼 살게 되는가 생각했다. 눈은 더 희미해졌다.

그런데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나의 발길은 병원으로 찾아가게 됐다.

안과의 전문의사가 진찰을 하더니 큰일 날 뻔했다고 겁을 준다. 3일만 늦었어도 완전히 보이질 않았을 것이라며 조금이라도 술을 먹어서는 안 된다고 경고를 했다.

봉사가 되어서는 안되지 하는 마음 때문에 쉬지 않고 치료를 하였더니 시력은 회복되어 갔다.

술을 끊으니 멍청해지던 자신이 점점 생기를 되찾으며 소생해 간다.

나는 비로소 나의 삶 속에서 용기와 양심이 설 땅을 찾기 위해 상식이 사라진 거리를 헤맸다. 별의 별 궁리를 해도 무슨 수를 찾을 수가 없었다.

시골 도둑놈들의 음모를 사회에 고발하기 위해 진정서를 쓰기 시작하였다. 무고죄는 엄벌에 처한다고 매스컴에서 자주 떠들어 대니까 사실을 쓰는데도 손이 떨렸다.

얼마 후 높은 분한테서 회신이 왔다. 자주 주위에서 들은 이야길 생각하며 이제는 어떤 기대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술 때문에 욕을 당하고도 또 술을 들며 견딜 수 없는 순간들을 이기려고 노력했다.

최종적인 진정서의 회신을 받아보고 고함을 쳤다.

도둑놈들이 나라 망친다고 하는 생각뿐이다.

관이 개입한 곳에서는 언제나 주위에 좋지 못한 내음새가 났다. 진정서의 회신에는 계수 맞추기의 천재들이 법률 몇 개를 적어 보냈다.

기가 차고 가슴에 피가 응어리지는 기분 밖에 나지 않았다. 약속이 깨어져도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자들이고 보니 더 시비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싶었다.

나는 국회나 당국에 호소하기로 마음을 단단히 가졌다.

우선에 정의를 버리지 않은 사람을 찾아 나의 이런 일에 후원자를 구할 생각을 하였다. 그리고 내가 당하더라도 이 일을 묵과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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