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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정의를 찾는 행동 본문

외로운 투쟁

23. 정의를 찾는 행동

gincil 2014. 2. 7. 01:51

나는 불의와 싸울 하나의 사회단체를 만들기 위하여 먼저 취지문과 정관을 만들어야 했다. 또 이번일만은 부산에서 시작해서 그 세력을 북상시켜야 되겠다고 생각하면서 그 조건에 따르는 것을 찾기도 했다.

입회원서를 만들어 주위에서 만나는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면서 사회를 구하자고 설득을 해 나갔다. 이러한 행동은 일주일도 안 되어서 40여명이나 발기위원이 되어 호응해주는 사람들이 생겼다.

나는 초안이 다 된 취지문과 정관을 인쇄소에다가 맡겨서 수천 부나 찍어오게 하였다. 비로소 협의회를 발족시키기 위해 입회원서를 내어 준 사람들을 소집했다.

비좁은 사무실에는 35명의 발기위원이 참석한 가운데 행동을 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추진해 왔던 일인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의 집행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발기위원으로 참석했던 불교 웅변인 협의회장 정갑덕 동지의 제청에 의하여 그 날 저녁 만장일치로 나는 그 회의 회장으로 뽑혔다. 나의 제청에 의하여 부서별 책임자가 회원사이에서 인준이 얻어졌다.

참석자들은 업무와 행동을 토론하게 되었고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에는 굳은 결의까지 생기기 시작하였다. 젊은 사람들이 조국의 사회문제를 위해 앞장 서겠다는 행동은 당연한 것으로 알았고 정의를 보급하는 것이 보람된 일인 것으로 알았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느끼게 된 것은 젊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양심을 구하는 행동이 얼마나 힘겨운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얼굴로 찾아 왔다. 나는 그 사람한테 취지문과 정관 일부를 내어 주었다. 또 내가 하고자 하는 일도 설명해 주었다. 그 사람들은 나를 두고 겉으로는 잘 해보라고 했지만 예감이 이상했다.

결국 나의 희망은 출발도 못해보고 주위의 냉대와 절망에 처한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사회단체 등록을 서둘고 보니 주위에서는 생각조차 못해본 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행정에 밝은 사무국장인 정갑덕 동지더러 관계부처에 등록서류를 접수시켜 법적지위를 갖추게 하라고 나는 성화를 부려 보았지만 며칠 뒤 어떻게 된 일인지 전해오는 소식은 등록절차가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소리뿐이었다.

나는 비로소 어떤 젊은 양심도 조국과 사회를 위해 양심을 바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예감했다. 그때부터 나에게는 또 시련이 생기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이랄까. 불운은 연속해서 일어났다.

배를 가진 자들이 우리 하치장에 모래를 실어다 주지 못하겠다는 통보였다. 계약이 되어서 우리 하치장에 모래를 싣고 왔던 배가 하치장에 대기를 하다가 외부의 압력에 의해서 돌아가야 하는 일이 생겨났다.

나는 영문을 몰라 이곳 저곳을 뛰어다니며 애를 태웠다. 도대체 주위에서 생기는 일들이 납득이 안 갔다.

또 어떤 동지의 신변에 위험한 일이 생겼다. 자꾸 불행한 일이 보이기 시작하니 한 사람 두 사람 겁을 먹고 나를 만나는 것을 피했다.

나는 그때서야 외로움을 느끼기 시작하였다. 며칠이 못가 결국 나 혼자 남아 사무실을 지키게 되었다. 수천 장이나 인쇄가 되어 있는 취지문과 정관을 훑어보며 이상한 마음을 느꼈다.

도대체 세상을 알 수 없어 고개를 흔들었다. 도적을 잡겠다고 나섰다가 매를 맞은 격이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나는 취지문의 내용을 훑어보았다.

<오늘날 우리는 역사적 전환기에 임하여 격동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의 영광과 희망을 찾아서 투쟁하고 있다.

혁명, 경제, 개혁, 유신체제 등을 절규하는 것도 모두 격동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조국과 민족의 영광과 발전을 슬기롭게 이룩하려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사회는 나날이 변하고 있는 것은 확실하고도 엄연한 사실이다. 이것을 어떤 자는 위대한 성과라 하며 또 어떤 자는 실패라고 단정한다.

이것은 비판하는 자들의 세계관, 민주주의에 대한 해석여하에 따르는 견해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여기에 관여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 묵과해서는 안 될 중요하고도 시급히 해결하여야 할 중대사가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제거이다.

격동하고 있는 오늘날 언제 어디서든지 폭풍이 몰아치고 강토를 진동하는 분화가 화산에서 폭발할지도 모르는 이 절박한 시기에 사회의 부조리가 사회의 구석 구석까지 침투해서 깊이 뿌리 박고 있는 오늘의 현실은 민족의 장래에 불길한 암영을 던져주고 있다.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이와 같은 사회의 부조리가 깊숙한 폐부에까지 뿌리 박고 있다는 이 엄청난 사실은 민족의 앞날에 치명적인 결정타를 가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사회의 부조리는 민족의 영광과 발전에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광된 조국의 역사에 자랑과 자부심을 갖고 있는 민족의 한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사회의 부조리를 깨끗이 우리 사회에서 청소할 것을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사회의 부조리는 너무나 깊이 뿌리 박혀 있다. 따라서 이것을 일소한다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도 아니고 국가의 행정력을 동원해서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것도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사회의 부조리 일소에는 국가의 권력으로도 될 수 없고 말로만 호언장담 해서도 될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유일한 방법이란 새로운 차원에서 새로운 각오로써 국민적 정풍운동을 전개하는 길 밖에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대 국민운동은 너무나 거창한 과업이며 용이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의중을 깊이 살펴서 우리의 역량에 합당한 범주를 설정하며 젊은이다운 열정과 깨끗한 심정에서 뜻있는 청년들의 뜻을 모아서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를 결성코자 하는 바입니다. 1975년 월 일.

정관 내용 제1장 총칙 제1조(명칭) 본 회는 사회부조리 추방 청년협의회라 칭한다. 제2조(목적) 본 회는 각 분야의 부정 부패 및 사회 부조리를 제거하기 위한 과감한 사회운동 전개를 그 목적으로 한다. 제3조(사업) 본 회는 목적달성을 위한 다음과 같은 사업을 한다. 1. 공명한 사회 건설을 위한 캠페인 운동 2.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 건설을 위한 배가운동 3 사회 부조리 부문의 경고 폭로 고발운동. 4 제4조(소재) 본 회의 중앙회를 부산에 두고 필요에 따라 서울 특별시 지부 및 각 도청 소재지에 지부를 둔다.>

정관을 읽어 내려가는 나의 눈동자에 글자가 희미해진다. 눈물이 고인 것이다.

나는 짓궂기 만한 자신의 운명 앞에서 정말 나 자신은 가치있는 행복을 위해 어느 곳에서도 일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가져본다.

눈치껏 살려고 하는 주위 사람들의 처세를 보면서도 무슨 운명의 사나이라고 손해 보는 일만 골라 서두는지 자신도 알 길이 없었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똑같이 어둠을 보는데 나 혼자 애타하는 행동은 무슨 빌어먹을 팔자란 말인가.

아내에게 걱정을 안겨주고 자식의 여윈 얼굴을 보는 것이 사나이의 양심이란 말인가. 세상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었지만 내 자신에 대해서도 한탄이 생겨난다.

장사길이 막혀 빈둥빈둥 놀게 된 나를 보고 아내는 안타까운 표정이었다. 나도 내 앞에 닥친 예사롭지 않은 일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사실은 어떻게 해결할 방법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뛰어도 나에게 물건을 팔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동안 개척해 놓았던 단골도 물건이 떨어지니 끊어지고 말았다.

나의 행동 하나만 믿고 일도 없는 일터에 나온 일꾼들이 내용을 모르니까 순진하게 뱃사람들만 두고 욕을 했다. 나는 누구를 원망하는 마음마저도 포기했다.

한 달이 지나가고 또 한 달이 지나가도 좋은 일은 생기지 않았다.

답답하던 가슴이 타고 녹아 적개심으로 변했다. 세상 돌아가는 꼴이 가소롭고 웃기는 일들뿐이었다.

나는 다시 서울로 떠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모순과 싸워야 하는 것이 나의 사명임을 느끼면서 이판사판이란 생각을 했다.

그런 어느날 장사를 쉰 지 3개월이 지난 후의 일이다. 어느 선주가 모래를 실어다 줄까 하고 장난같은 말을 했다.

그 날부터 나는 자식과 아내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다시 장사판을 벌였다.

한 번 호되게 당하고 난 뒤라 그런지 다른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우리는 열심히 일을 시작했다. 전번보다도 더 많은 단골이 잡히기 시작했다. 주위로부터 차츰차츰 성실성과 신용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나는 행동을 통해 나보다 나이가 더 먹은 일꾼들을 이끌고 나갔다. 서로의 사이에 생기는 정을 떼기 위해 온종일 필요이상의 대화를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처음 만날 때와는 달리 일꾼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행동을 신뢰하게 되었고 나는 완벽할 정도의 장사꾼으로 변해갔다. 나에게는 불과 몇 개월만에 다시 생활에 여유가 생겼다.

아내의 권고 때문에 은행에다가 부금을 하나 부었다. 그리고 나서 몇 달이 못되어 내가 장사를 하는 땅의 지주회사가 그 땅을 분할해서라도 팔겠다는 통고를 하여 왔다.

나는 당장 엄두가 나지 않아 또 고민이 되었다. 이런 일을 아내와 상의하였더니 새로운 돌파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지주회사에 사정을 하여서 잔금 기간을 충분하게 여분을 얻어서 150여평을 계약을 하였다. 내가 계약한 땅은 입구 쪽이었으며 그곳에는 마침 국유지가 200여평이나 붙어 있어서 나의 장사에는 지장을 받지 않았다.

남의 빚돈으로 땅의 등기가 우리 앞으로 넘어왔다. 또 그 땅을 잡히고 부금을 타서 개인 빚도 청산을 하였다. 나의 마음 속에는 다른 마음을 가질 여유가 없어졌다.

빚으로 생긴 재산을 지키기 위하여 남보다 일찍 일어나 더 열심히 뛰고 돈이 벌리면 은행에다 적금을 붓고 필요할 때 그 적금을 또 이용하는 것을 되풀이했다. 이렇게 하니까 가진 게 없어도 재산 증식이 가능했다.

1977년 여름에는 은행의 적금 대부로 제법 넓은 정원이 달린 내 집 마련에 성공도 하였다. 나는 한 사람의 상인으로 성공해 가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상인의 생활은 나에게 많은 만족을 줄 수가 있었다. 내가 이렇게 착실하게 장사꾼이 되었을 때도 나와 친하던 동지들은 긴급조치에 의해 옥중을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나에게 생긴 은행 빚 때문에 이젠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나의 집에서는 또 하나의 아이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이번만은 불어난 식구를 두고 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다.

가정은 화목했고 남들은 우릴 보고 성공했다고 경이에 찬 눈으로 칭찬을 했다. 나의 생애에 있어 가장 경제적으로 성공한 한 해였다.

나는 가난에 짓눌리는 형제들도 도와 주었다. 손위 누님의 남편인 자형은 나의 밑에다 일자리를 만들어 주었고, 형제들을 돕기 위해 많이 생각도 했다.

시골에 사는 가난한 누님한테도 논을 좀 사 주었다. 고향 땅에는 내가 성공했다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정말 바쁘게 돌아가는 나날이었다.

겨울이 가고 봄을 맞이하였다. 나는 영도다리 입구에다가 나의 개인 사무실을 차렸다.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사업상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고 또 다른 일 때문에 만나러 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이런 하루하루 달라지는 자신을 보면서도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운명적인지 또 고민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조국과 동포들을 위해 일할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고민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오늘까지 양심과 정의감 때문에 당한 많은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국을 구해야 한다는 애정만은 언제나 가슴 한 구석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하루하루 달라지고 있는 각박한 인심이나 상식을 멀리하는 사회의 현실성을 보면 더욱 충동이 생긴다.

양심을 잊은 무서운 사람들의 행동을 받아 들여야 하는가 거부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을 하며 마음 속으로 부르짖었다.

양심을 구해야 한다는 절규였다. 가치있는 행동을 위해서는 세상을 통탄만 하고 앉아서 기다릴 수가 없는 것이다.

추석을 넘기면서 열기가 차오는 마음 속에는 점점 아내나 자식의 얼굴보다 조국의 장래가 더 안타까웠고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이런 형편을 두고 변명을 만들어 주고 싶지가 않아서 나의 결심을 몇 번이나 번복을 했다.

유신헌법 속에서 관제선거 양상이 될 선거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런 선거법만 믿고 국회의원이 되겠다고 나설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면서도, 또 동포들에게 현실 속에서 위험한 장래가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기 위해 행동을 개시해야 한다는 결심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달력이 금방금방 넘어갔다. 길거리의 담벼락에는 큰 종이에 인쇄된 경고문과 담화문들이 나붙기 시작하였다.

세월은 어느덧 10월을 알리고 있었고 나의 마음 속에서는 일을 시작함에 앞서 먼저 외로움을 느끼게 되었다.

힘 앞에 괴로움을 당할 양심을 생각하면 지금까지의 마음들이 또 뒤로 물러난다. 그래서 나를 또 질책했다.

망설임을 가지면 할 일은 끝난 것이라는 마지막 말로 나를 지켰다. 나는 비로소 나의 결심을 행동으로 옮겼다. 10여명의 사람들을 주위에 불러 모았다.

찾아온 사람들을 시켜서 선거구내 투표소 파악, 선거인 수 파악, 주민생활 상태 등을 분류해서 계획을 잡기 시작했다.

이런 일도 난관에 부딪치게 되었다. 사전 선거운동이란 말 때문에 나와 같은 신분은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보면서도 나설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급한 김에 서울에 편지를 띄웠다. 며칠 후 구좌석 형과 최희수 동지가 서울에서 같은 날 내려왔다. 두 사람은 극구 나의 행동을 만류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의 인심이 이럴 때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나를 위해 제일 좋은 방법이라고 타이른다.

나는 두 사람의 충고 속에서 진정한 우정을 느꼈다. 실은 나도 많이 망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또 조금만 권해도 나는 행동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런데 신의 뜻만은 그런 것을 원하지 않았다. 다시금 나의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구좌석 형이나 최희수 동지도 이런 날 보고 어쩔 수 없는지 조언을 하며 이제는 행동을 같이 했다.

모순과 싸우지 않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과 또 싸우기 위해 누군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소속 후보가 겪어야 하는 현행 선거법을 두고 구좌석 형과 최희수 동지는 나와 함께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했다. 새로운 세력을 만들 것인가. 그냥 이대로 무방비 상태에서 외롭게 싸울 것인가. 나는 두 가지의 이론을 놓고 의견을 구했다.

사람들의 말은 새로운 세력을 만들기에는 너무나 시간이 촉박해 있었다.

그런 어느날 구좌석 형이 신문에 난 1단짜리 기사를 눈 앞에 내어 민다. 기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의 신고서 제출에 따른 기사였다. 전화를 걸어서 중앙선거관리 위원회 정당과로부터 기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 연락 전화번호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기민당 창당준비 위원회에 전화를 내었다. 한 번 상경하여 만나보자는 그 쪽의 전화를 받고 구좌석 형을 기민당의 사정을 알아보고 오라고 대신 서울로 올려 보냈다. 이틀만에 구좌석 형이 서울을 다녀왔다.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상당한 위안이 되었다. 목사들이 있었고 신부도 있었고 때묻지 않은 청년 동지들이 호응을 하고 있으며 어느 시기에 가서는 재야의 양심 세력과 기존 정당 속의 양심 세력들이 합류할 것이라는 의견이었다.

나는 구좌석 형께서 전해 준 말만 믿고 무소속보다 단순히 편의와 활동이 나은 정당공천을 위해 지구당 창당에 따르는 요식행위를 서둘렀다.

해당기관에 당일로 준비서류를 제출하고 지구당의 창당대회에 따른 날짜를 잡았다. 장소 사용은 사람을 시켜 영도에 있던 모 극장을 예약하게 하였고 인쇄소에다 의뢰하여 간행물과 벽보를 찍어오게 하였다.

 이런 나를 두고 당장 관할 경찰서 정보과에서 데리러 왔다. 나를 보는 그곳 책임자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괜히 나의 행동 때문에 자기 네들이 귀찮아졌다는 이야기다.

그 날 오후에 장소 사용을 위해 돈까지 지불하고 영수증까지 끊어준 극장측에서 전화가 왔다. 당일 날 장소 사용이 불가능하다는 통고였다. 날짜는 내일 모레이고 벽보는 장소가 어디라고 거리에 나붙었는데 곤란한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극장 지배인은 우리 때문에 사장이 곤란한 입장에 빠졌다는 것이다. 나는 또 경찰서로 찾아갔다. 정치 담당 책임자를 만났다.

극장측의 이야길 전하고 내가 무엇이 대단하다고 이런 일을 겪어야 되느냐고 슬슬 구슬렸다.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반복해가며 잠깐 조용하게 끝내겠다고 사정을 하였다.

그 날 오후 사무실로 돌아온 나한테 극장측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와 양해가 되었다고 사용하라는 것이다.

나는 주위의 동지들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청중동원과 창당대회 진행방법이었다. 우리는 워낙 급박하게 서둘고 있는 일들이라서 나는 모든 일에 대해 마음 속에 염려가 쌓이기도 했다.

대회 전날, 중앙당 창당준비 위원회에서는 젊은 청년지사 세 사람이 대회에 참석하기 위하여 나를 찾아왔다. 어떻게 소문이 퍼졌는지 나와 사이가 가까운 재야의 동지들이 5명이나 서울에서 나의 대회를 보기 위해 내려왔다.

타당인 민주통일당에서도 전 선전국장이며 당내 청년 당원들을 통솔하던 이경식 동지가 친구 자격으로 서울에서 나의 대회식에 참석을 하였다.

1978년 10월 27일 이른 아침이 되니 하늘은 구름이 끼이기 시작했다. 9시가 넘으면서 가랑비를 뿌렸다.

9시 30분 10여명의 외지 손님들에 싸여서 나는 극장으로 들어갔다.

10시의 대회식에 맞추어 준비는 다 되어 있었는데 텅 빈 극장 안은 싸늘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날씨 때문에 청중이 없다면 얼마나 쓸쓸할까 생각하며 빈 의자들이 눈동자 속으로 들어온다.

10시가 다 되었을 때 7,8명의 남자들이 극장으로 들어왔다. 이제부터 사람이 모이는가 싶어 얼굴을 돌려 바라보니 어디에서 낯익은 얼굴들이다. 텅 빈 극장 안으로 들어 온 한 무리의 사람들은 재미있어 하는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붙인다.

오늘 청중이 얼마나 올 것 같으냐는 질문이다. 정말 그때 그 말을 들으니 걱정이 되었다. 날씨도 이러하니 한 200명 정도 안 오겠는기요 하는 나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수긍인지 부인인지 고개를 끄덕거린다.

그때부터 극장 입구에는 한 사람 두 사람 줄을 지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얼마 있지 않아 좌석이 차고 통로가 메이고 공간이란 공간은 사람들의 열기가 꽉 찼으며 좁은 극장의 면적에 2,500여명의 청중은 극장 밖에서 극장 안으로 들어오려고 밀어 붙였다.

나도 상상 못했던 일이지만 당황한 쪽은 사찰을 위해 나온 기관원 쪽이었다. 누가 무전을 친 것인지 금방 경찰서의 기동타격소대가 출동을 해왔고 나의 행사를 위해 백차가 배치되는가 하면 경찰의 고급 간부가 주위에 나와서 교통질서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극장 안에서는 식순이 진행되었다. 사회자의 엄숙한 목소리가 수천의 군중을 침묵시키려 했다. 간단한 요식행위를 통해서 나는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극장에 모인 사람들은 나를 보며 박수를 쳤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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