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20. 나 장가 갑니다 본문

외로운 투쟁

20. 나 장가 갑니다

gincil 2014. 2. 7. 01:59

온종일 나는 한 묶음의 청첩장을 몸에 지닌 채 나의 결혼식에 시간을 내어 줄 사람들을 찾아서 길을 헤매야 했다.

「나 장가 갑니다.」

금방 수줍어져 버리는 마음을 가지고서도 상대 앞에서 힘을 내 청첩장을 내어 밀었다. 그럴 때마다 상대방은 나이든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장가 간다는 말에 축하한다면서 손을 잡아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오후가 되면 조심을 해도 극성스런 사람들의 행동과 함께 술이 취하게 된다.

나머지 청첩장 돌리는 일은 다음 날로 미루면 되었지만 딱한 생각이 다음 날 생기게 되는 것은 시간이 나의 사정따위에 머물러 주지 않고 지나버린다는 것이었다.

3일 간을 뛰어다니며 돌린 청첩장 수도 헤아려 보면 70여장 밖에 되지 않았다.

드디어 내일로 장가 가는 날이 다가왔다.

내 사정은 이제 새 신랑의 모양을 가꾸는 일들로 서둘러야 되게 된 것이다. 목욕도 하고 이발도 해야 했다.

결혼식 시간이 임박하자 걱정이 쌓이기 시작한다. 큰 예식장에 하객이 없으면 허전할 것이라고 생각해 보니 창피한 마음까지 생기게 되었다. 아무리 머리를 짜도 별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이제는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초조한 마음이 고통으로 변하여 어떻게 해도 당할 일이라면 시간이 좀 빨리 가기 만을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 한낮이 되었다. 하루 전의 시간인데도 서울에 살던 동지들이 10여명 나의 장가 간다는 소문을 듣고 결혼식을 보려고 내려왔다. 또 고향에서 남매와 사촌들이 형님 집을 찾아왔다.

1973년 5월 13일 정오의 제일예식장 3층 특실에는 400여석의 좌석은 생각할 수 없었던 기적이 일어났다. 축하객으로 좌석이 차버리고 통로마저 메워졌다.

신부측에서도 사람들이 많이 왔지만 청첩장을 받지 않고 나의 장가 간다는 소문을 듣고 참석해 준 사람들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식순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낭랑한 목소리가 축하객의 바쁜 발길을 붙들었다.

박수와 웃음이 계속 터져 나왔고 600여 명의 하객은 식장의 분위기에 매료되어 다른 집에 참석하려던 사람들까지 구경을 하는 일이 있어 식장의 입구까지 초만원 사례가 된다.

대중당 간사장의 축사는 「이 나라의 가장 뛰어난 젊은이의 결혼식에 참여해 준 내빈께」라는 서두로 시작되어 하객들의 마음을 사로 잡아주었고 새 양복으로 단장한 신랑의 모습은 사람들의 눈 앞에서 그 순간만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결혼식은 상당한 시간을 끌며 끝이 났다. 마지막으로 일가 친척 앞에서 예단을 드리는 것을 마치니 나와 신부는 신혼여행 길에 나서는 것뿐이었다.

신부의 직장이었던 은행에서 형편을 보아 제공해 준 승용차에 신랑의 들러리와 신부의 들러리가 같이 따라와서 시간을 메워 주었다.

우리를 태운 자동차는 신혼여행의 최종 목적지인 제주행의 비행기를 타게 될 시간까지 일행들을 싣고 양산 통도사와 해운대 등을 돌아주며 적당한 곳에서는 차를 멈추어 기념촬영을 하게 해주었다.

오후 6시가 가까워서야 비행기의 이륙지점인 수영비행장 앞에서 옆에 있던 사람들은 나와 신부만을 비행기에 타게 하고서는 돌아갔다.

금방 저녁노을이 지려는 여름철 하늘 위로 폭음을 내며 비행기가 떠오른다.

창문을 통해 비행기 안에서 밑으로 내려다 보면 바다와 섬들이 간간히 보였다. 나는 그때까지 내가 신랑이 된 것이 꼭 동화책의 이야기같이 실감이 가지 않았다. 옆 좌석에 앉은 신부의 얼굴을 쳐다보면 별 생각이 다 생긴다.

이 여자가 부도(婦道)를 알려고 한다면 고생깨나 하며 견뎌가야 할 것이라고 나의 처지를 생각했다. 내가 몹쓸 짓을 저지른 것 같은 미안한 마음이 떠올랐다.

또 다른 생각은 어릴 때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났다. 지금까지 살아 계셨더라면 오늘같은 나를 보고 얼마나 대견해하며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 서운한 여운을 남긴다.

비행기가 하늘에 뜬지 30분도 안 되었는데 비행기 안에 탄 여자 승무원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 나왔다. 조금 후에 목적지에 착륙하겠으니 승객들은 안전 벨트를 몸에 매라는 방송을 했다.

창 밑에 나타난 바다 위의 육지를 내려 보며 이제 제주까지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천리 길도 금방 닿고 보니 새로운 세상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다. 생각보다도 더 빨리 제주에 온 두 사람이 공항의 출구를 나오니 어두워지고 있는 주위에서 누가 아는 척을 했다.

공항의 출구 쪽에는 신부의 여고 시절 동창이었던 친구가 그 사람의 남편된다는 사람과 함께 우리 두 사람을 마중 나와 있었다. 여자들의 소개로 낯선 곳에서 만난 남자와 인사를 했다.

박 선생이라는 상대는 자기까지 네 사람인 일행을 택시에 태워 어디엔가로 안내해 갔다. 차 속에서 여자들이 너무 정답게 이야기를 하니깐 남자들도 서먹서먹한 것이 사라진다.

택시가 선 곳에서 쳐다보니 눈 앞에는 용궁횟집이라는 간판이 눈에 띄었다. 박 선생은 우리 일행을 그곳으로 안내해 놓고 네 사람이 실컷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을 자꾸 주문했다. 나는 초면에 너무 신세가 되는 것같은 부담감이 생겼지만 남자끼리 권하는 술잔이 비워지면서 거북스런 마음도 사라져 갔다.

좌석의 분위기가 신혼여행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오고 갔다. 두 사람은 제주에서 지낼 시간을 위해 약간의 도움되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또 오늘 밤 우리 둘이 지나게 될 밤을 걱정하면서 요즘은 신혼 철이 되어서 그런지 제주시내에 하나 뿐인 KAL호텔은 방 구하기가 힘이 든다고 말들을 했다. 우리는 그때까지 숙소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식사가 끝나자 두 사람은 제주에 처음 온 우리한테 숙소를 정할 수 있도록 그 사람들이 아는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또 다음 날의 스케줄인 신혼여행에 대한 요령까지 일러주고는 작별을 했다.

두 사람만 들게 된 방 안은 신혼의 첫날밤을 맞게 해 준 것이다. 신부가 여간 싹싹하게 보이는 탓만도 아니었지만 결혼을 하였다는 하나의 이유 때문인지 나의 마음 속에는 오래 사귄 동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처음 느낀 감정은 「결혼식을 올린 남자와 여자 사이가 이렇게 되는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새롭게 떠올랐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대접을 받아보는 기분이 들었다. 신부와 나는 다음날의 여행계획을 생각했다.

박 선생 내외가 가르쳐 준 이야기를 생각하며 방 안에 있는 전화로 교환 보는 사람한테 부탁을 하여 택시회사에 예약도 하였다. 8,000원에 하루동안 택시를 대절하기로 하고 아침 일찍 숙소 앞에 차를 보내오기로 약속이 된 것이다.

두 사람은 할 일이 없어졌다. 그때서야 긴장이 풀어졌다. 잠자리에 들었던 두 사람은 곤한 의식 속에서 전화벨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니 날이 샌 아침이었다.

숙소의 현관에는 예약한 택시가 도착해 있었다. 두 사람은 아침도 거른 채 바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렀다. 신부는 얼굴의 화장을 손질했고 나는 옷을 갈아 입고 표정으로 신부를 독촉했다.

두 사람이 가방을 들고 현관으로 나오니 숙박 업소의 종업원이 우릴 알아보고 택시의 기사를 소개시킨다. 아직 어려 보이는 대절차의 기사는 능숙하게 짐을 받아들고 택시 쪽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자동차는 서서히 제주시내를 빠져 나가기 시작한다. 시내의 택시가 그곳 사람들의 교통수단이 된 것보다 신혼부부의 대절에 이용되어 온 모양인지 운전기사는 능숙하게 차를 몰면서 저녁 숙박지를 묻는다.

박 선생 내외가 어저께 알려 준 성산포의 일출호텔에 숙박을 정하겠다고 일러주었더니 운전기사가 여행 코스의 스케줄을 설명하면서 제주에 대한 지리를 우리가 모르니까 자동차의 기사가 여러 곳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처음 달리면서 멈추어 준 곳은 제주시의 변두리인 길 옆에 있던 500년 되었다는 소나무 밑이었다.

우리가 지니고 있던 카메라를 받아 든 운전기사는 전문 사진사처럼 우리를 보고 포즈를 취하게 한 후 셔터를 눌러준다.

제주의 전설적 유적지인 삼성혈을 거치면서 차는 5·16도로에 들어 한라산을 가로지른 길을 따라 서서히 움직인다. 금방 녹음이 우거진 한라산의 정경이 눈에 들어왔다.

택시의 기사는 예정코스에서 볼 만한 곳이면 차를 세워 주었고 어떤 관광 안내원 못지 않게 내력을 설명하면서도 말이 막히지 않았다.

점심 때가 되어서 자동차는 서귀포 시내로 들어갔다. 나는 길가의 식당간판을 보고 차를 멈추게 하여 세 사람이 같이 식사를 시켰다. 신부와 나는 아침 겸 점심을 먹는 것이었다.

밥알들은 까끌까끌 하고 목에 걸렸다. 작은 식당의 밥맛은 음식들이 입에 맞지 않았다.

대절차는 다시 우리 두 사람을 태우고 세 군데의 폭포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아무리 천천히 구경을 하여도 시간은 오후 세 시가 못되었다.

자동차의 기사가 말을 물어왔다. 제주가 처음인 생소한 우리더러 이제부터 어떻게 하겠느냐는 것이다. 호텔까지의 코스가 끝난 것이다.

택시가 우리 두 사람을 현관 앞에 내리게 하자 그곳에 있던 종업원들이 뛰어나와 짐을 받았다. 나는 두 사람을 태워왔던 기사한테 대절비를 지불하고 차를 돌아가게 하였다.

프론트의 종업원이 어떤 방이 있느냐고 묻는 나를 두고 객실에 대한 선전을 하며 어떤 방을 정할 것인지 눈치를 본다.

나는 요금이 제일 싼 현관 위쪽에 있던 한실로 방을 지정하였다. 객실 담당 여자종업원이 금방 짐을 옮겼다. 두 사람은 그런 안내원을 따라 이층 방으로 올라갔다.

나는 호텔의 방안에 들어가자 불안한 일들이 생각났다. 당장 수중에 지닌 현금이 얼마나 우리들의 시간을 지탱할 수 있게 할 것인지 하는 우려였다.

나는 신부더러 수중에 얼마나 돈이 남았느냐고 물었다. 만 원 정도가 남았다고 귀띔을 해왔다. 여분이 없던 돈 중에서 밀감 밭에 들려 선물이랍시고 구한 밀감 상자들이 두 사람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어 놓았다.

계산을 맞추어 보는 나의 머리에는 낭패감이 생긴다. 지불해야 할 호텔의 방 값, 오늘과 내일을 지내야 할 두 사람의 식비 및 또 제주시내까지 나갈 교통요금이 자꾸만 머리에 부담이 되었다.

나는 이런 것을 계산하지 않고 섬으로 신혼여행을 온 것이 여간 당혹스럽지 않은 것이다. 해가 지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부와 나는 작은 포구인 성산포의 바닷가 쪽으로 걸었다. 한 곳도 아스팔트가 되어 있지 않은 시골 길은 망태기 같은 걸 걸머진 여자들이 지나는 것 외에는 볼 것이 없었다.

한참 걸었다고 생각하니 물가에는 창고 하나가 나타났다. 더 갈 곳이 없어 길이 막힌 곳에까지 가서 되돌아서야 했다. 비릿한 생선 내음새가 콧가에 묻어왔다.

나는 오던 때보다도 더 느린 걸음걸이로 시골의 동리 쪽으로 눈을 돌리며 발을 움직였다. 결혼식 날 선물로 받은 시계의 바늘이 오후 6시를 가리킨다. 나는 좁은 촌 거리의 이 골목 저 골목을 살폈다.

곱게 화장을 하고 맵시를 낸 신부와 나를 길가에 있던 사람들이 곁눈질로 쳐다본다. 나는 한참을 쏘다녀도 내가 찾고 싶어하는 집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설마 사람 사는 동리에 그런 집이 없으랴 하는 마음에 몇 번이나 낯선 길을 돌아다니면서도 사람들을 보면 물어 보지도 못한다.

한참이나 헤맨 끝에 한쪽 길가에 「중화반점」이라는 칠이 벗겨진 간판이 눈에 보였다. 나는 신부의 손을 끌며 함께 그곳으로 들어갔다.

작은 동리에 있던 식당의 내부시설은 형편없었다. 사방에는 때자국이 줄줄 흘렀다. 볼품없는 탁자를 두고 신부와 나는 마주 앉았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요리사 겸 주인인 듯 싶은 남자가 두 사람이 앉은 탁자 앞으로 와서 엽차 잔에 물을 따르며 무엇을 시키겠느냐고 주문을 받았다.

나는 주방과 홀 사이에 먼지가 엉망으로 묻어 있는 천 위에 씌어 있는 메뉴들을 살폈다. 한식과 중국음식의 이름들이 너저분하게 많이 적혀 있었다.

손님이라곤 아무도 없는 것을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신부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면서도 주문을 받으려는 사람더러 메뉴대로 다 되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상대는 대답을 했다.

신부 몫으로는 육개장을, 내 몫으로는 그보다 200원이 싼 짜장면 곱배기를 시켰다.

신부는 깜짝 놀라며 왜 같이 육개장을 시키지 않느냐고 당황하면서 물었지만 나는 또 변명할 말이 없어서 평소에 밀가루음식을 좋아한다고 엉뚱한 거짓말을 꾸며 보았다.

음식은 두 사람을 한참 기다리게 한 후 나왔다. 도시의 음식과는 맛에서 차이가 났다. 그런데도 하루동안 두 끼 째 먹는 시골 짜장면이 나한테는 오히려 별미처럼 느껴졌다.

신부도 좀 시장하였던지 육개장을 남기지 않고 그릇을 비웠다. 나는 식사가 끝난 후에야 약간 안정감이 생겼다. 이제 오늘 걱정을 덜어버린 셈이 되었다.

식당을 나온 두 사람은 제주도의 저녁 노을을 보며 호텔로 돌아왔다. 호텔 앞 잔디밭에는 신혼여행을 온 사람들과 관광여행을 하려고 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잔디 위에 앉아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이들도 있었다.

우리도 호텔 앞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주위의 경관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목장의 말들이 멍에가 매이지 않은 채 평화롭게 풀을 뜯는 것이 시야에 나타났다. 주위에는 이제 시간에 쫓긴 어둠이 덮혀 왔다. 한 사람 두 사람 나와 있던 사람들이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먼저 일어나 앉아 있는 신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호텔의 객실 쪽으로 걸었다. 우리는 별 말이 없었다. 그런데도 행동과 의사가 잘 통하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새벽에 깨우지 않았는데도 같은 시간에 일어났다. 아직 주위가 어두웠다. 얼굴을 닦고 몸에 옷을 걸쳤다. 그리고는 호텔 현관을 나왔다.

호텔 바로 옆인 일출봉의 가파른 길에는 벌써부터 사람들의 행렬이 이어져 있었다. 호텔 내의 안내 책자에는 일출봉을 한라산의 축소란 말로 소개했다.

우리는 길을 따라 정상까지 올라 갔다.

사방이 밝아왔고 동쪽 바다가 붉게 타올랐다. 둥근 해가 바다 속에서 서서히 올라왔다. 정상에 오른 다른 사람들의 시선도 바다와 해뜨는 곳에 모이고 있었다.

해는 점점 하늘로 떠올랐고 붉게 끓어오르는 것 같은 동쪽의 바다는 본래의 모습대로 다시 푸른 빛을 되찾기 시작했다. 정상을 두고 바가지처럼 움푹 파진 분화구 같은 곳에는 누구의 손길에 의해선지 자연 그대로인지 모르겠으나 푸른 잔디가 잘 조화되어 있었고 산양의 무리가 이곳 저곳에서 풀을 뜯는 것이 보였다.

우리는 볼 것을 다 본 후에는 올라올 때 힘들었던 가파른 길을 다시 내려와야 했다.

나는 신부한테 아침이나 먹일 참으로 두 사람이 호텔 안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띄엄띄엄 자리에 앉아 식사들을 하고 있는 모습들이 눈에 띄었다. 탁자 위에 놓여 있는 메뉴표를 조심스럽게 들여다 보았다.

매운탕 1,000원, 조기구이 2,000원, 메뉴의 가격표시가 나에게 금방 충격을 주었다. 나는 얼른 메뉴표를 제자리에 놓고 신부더러 일어나게 한 후 식당에서 도망치듯 당황하며 객실로 돌아갔다.

결국 아침도 먹지 못한 채 비싼 호텔의 음식 값만 확인하고 말았다. 형편이 이쯤 되니 신혼여행이고 뭐고 다 싫어졌다.

호텔 현관에는 자주 빈 택시가 들어왔다. 나는 그럴 때 현관으로 뛰어갔다. 제주까지 두 사람 얼마 받겠느냐고 택시 운전기사와 흥정을 하였다.

합승을 한다는 조건으로 한 사람당 1,000원씩 2,000원에 제주 시내까지 신부와 함께 짐을 챙겨서 차에다 몸을 실었다. 운전기사는 작은 차인 택시(브리사)에 다섯 사람이나 짐짝처럼 합승을 시킨 후 심하게 속력을 내어 달렸다.

지금 두 사람의 수중에는 차 삯을 제하면 2,500원의 돈 밖에 남은 것이 없다. 신혼여행이 이렇게 힘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나는 신부를 데리고 무사히 부산까지 돌아가는 생각으로 머리 속이 가득 찼다. 달리는 차 속에서 다른 합승 손님이 운전수더러 좀 천천히 달리라고 주의를 주어도 나의 입에서는 한마디 말도 튀어나오지 않는다.

차는 상상보다 빨리 제주 시내에 닿았다. 우리는 시내의 KAL제주사무소 앞에서 내렸다.

근방의 식당에서 설렁탕 두 그릇을 시켜 먹고 나니 마음은 빨리 제주를 떠나고 싶었다.

신부가 먼저 내 마음을 아는지 KAL제주사무소 안으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한테 그곳 사무소 직원과 주고 받은 이야기를 했다. 2시 비행기로는 표의 교환이 불가능하다고 말을 한다.

나는 우리가 소지한 저녁 비행기표를 잠시 후인 12시 비행기의 표와 교환하게 하였다. 오전 11시 30분에 비행장까지 사무소의 버스가 운행을 한다 하니 지체할 시간이라야 20여분간이 남아 있었다. 두 사람은 사무소의 대기실에서 기다렸다.

그동안 신부는 그저께 만난 친구한테로 떠난다고 전화를 했다. 20분은 금방 지나갔다. 공항행 버스는 시동이 걸린 채 사람들을 기다렸다.

공항에 나오니 우리를 제주에서 처음 마중해 주었던 신부의 친구 내외가 또 우리를 전송해 줄려고 그곳까지 나와 있었다. 나는 두 사람의 그런 행동이 여간 고마운 것이 아니었다.

우리한테는 오래 붙들고 이야기를 나눌 시간도 없었다. 안내방송이 승객의 탑승을 자꾸 독촉해 왔기 때문이었다. 나는 신부의 친구 남편과 악수를 나누고 비행기로 올라갔다. 시간이 된 때문이었는지 금방 비행기가 하늘로 뜨기 시작한다.

발 밑에 섬들과 바다가 나왔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바다는 행복한 풍경으로 보였다. 조그마한 섬들이 밑에서 나타나고 지나간다. 그때 하늘에 구름이 모이고 있었다.

비행기가 구름 속으로 들어가니 흔들리기 시작한다. 자꾸만 불길한 생각에 비행기가 추락하는 것이나 아닌가 불안했다. 기상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그 시간 이후 4일간 육지와 제주간 비행기가 뜨지 않았다) 그러다가 육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비행기는 요동을 멈추고 잠잠한 상태로 항로를 잡았다. 얼마 후, 우리가 탄 비행기가 수영공항에 착륙하면서 답답하고 불안하던 조금 전의 감정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이제 신부를 어디로 데리고 가서 재우느냐는 새로운 고민이 또 머리 속을 채우기 시작했다. 아무리 머리를 갸웃거려 생각을 하여도 신통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나는 옆에 있는 신부에게 궁한 질문을 하였다. 퇴직금 받은 것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신부는 딱 잡아뗀다. 나는 그때야 나 자신이 이렇게 주변없는 비굴한 사내인가 느껴져서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다.

수영에서 가까운 처가가 있는 동래에 먼저 들렸더니 장모와 장인이 무척이나 우릴 반겨주었다.

급히 차려온 음식상을 받으면서 결혼하고 처음으로 배부르게 포식을 하고 형님 집으로 인사를 갔다. 그 집 사람들은 그 날만은 우리 내외를 불편없이 맞아 주었다.

나는 다음날로 고향에 있는 부모님 선산을 신부와 함께 찾아가기로 계획을 잡고 있었다.

그 날밤 나는 답답하고 애가 쓰이는 일 때문에 형님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축의금이 얼마나 들어왔느냐고 말을 했더니 형은 약 20만원 정도 들어왔더라 며 궁색한 변명을 하면서도 어딘지 돈을 쓴 곳은 안 가르쳐 주면서 다 썼다며 표정이 달라졌다. 이젠 마지막 걸었던 기대마저도 사라진다.

평소 형의 행동을 아는 나로서는 이런 일로 다투어 보았자 이득이 없는 일이었다. 세상의 인심이 이렇게도 야박한가 느껴진다. 그래도 부조 한 푼 못한 형이 축의금만은 챙겨 돌려줄 줄 알았는데 이제 그런 생각마저도 깨어지고 말았다.

사정이 이러한 상황에 처하면 오히려 마음이 단단해진다는 말이 실감이 났다. 아무도 동정해 주지 않는 세상에서 혼자 울어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워진 운명은 한탄할 곳조차 없었다.

가련한 자신을 두고 내일을 기다리면서 애가 타는 마음으로 잠을 자지 못했다. 그리고 다음날 신부를 데리고 오래간만에 고향을 찾아갔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어린 나를 버려두고 세상을 떠나간 두 분 부모님의 무덤 앞에 가서 신부와 나는 절을 했다.

신부가 장만해 간 옷가지를 무덤 가에서 불로 태우고 준비해 간 술로 무덤 위의 잔디에다 뿌리니 금방 콧등이 찡하며 눈가에 눈물이 맺힌다.

' 어머니, 아버지 제가 장가를 들었습니다. 신부도 제 옆에 있습니다.'

마음 속에서는 자꾸 이런 말들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한 마디도 입 밖으로 내뱉지를 못했다.

고향 땅에 살던 누나나 친척들은 나에게 그 순간만은 무척 반가운 얼굴로 장가든 나를 맞이 해주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지낼 것이냐는 말은 한 사람도 묻지 않았다. 모두가 눈치만 남아있던 사람들이라 아픈 말은 피하는 모양이었다.

우리는 밤을 새우고 부산으로 돌아왔다. 걱정하던 일들이 점점 다급해왔다. 속으로는 안달이 생긴다.

결혼식 날 축의금만 내가 잘 챙겼으면 삭월세 방 하나는 구할 수 있었는데 하는 생각에 형이 야속했지만 이젠 다 지난 일이었다. 이럴 때는 나 자신이 얄미워졌다.

어쩔 수없이 신부를 친정에 한 3일만 가 있으라고 말을 해서 보내 놓고 자신은 미친듯이 시내를 쏘다녔다. 비위가 좋지 않은 나는 어느 사람을 보고도 돈 이야기를 끄집어내지 못했다.

하루가 지났다. 운명의 신은 나를 그냥 외면하지 않았다. 우연하게도 행운이 생긴 것이다. 돈 20만원이 내 수중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는 그 날 저녁, 동래 처가로 달려갔다.

아내는 나의 일을 생각하며 안타깝게 기다리다가 찾아간 나의 얼굴을 보게 되니 무척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그 날 저녁 우리는 처가에서 하룻밤을 같이 지내고 방을 구하러 다녔다.

당장 생각 같아서는 형과는 좀 멀리 떨어져 살고 싶었다. 처는 동래의 처가 가까운 곳에 방을 구해 보자고 아쉬운 제의를 했지만 나는 서면 근방에서 방을 구하려고 했다.

온종일 서면 일대의 가까운 동리를 훑어도 20만원으로 적당한 방이 없었다. 마침 그때 누님 동리인 민씨 집에서 방이 한 칸 났다고 해서 보증금 20만원에 월세 5천원으로 부엌이 갖추어져 있지 않은 방 한 칸을 구해 우리의 신혼살림을 꾸렸다.

아내가 가져온 물건들을 방안에 정돈해 놓고 보니 두 사람이 겨우 누울 수 있을 만한 공간이 남았다.

끼니 때가 되니 아내가 정성들여 지은 푸짐한 상이 들여왔다. 나는 음식상을 보고 처음으로 장가든 보람을 느꼈지만 혼자 살기에도 힘겨운 자신이었는데 또 한 사람 더 짐을 짊어지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 사람의 생활을 위해 자신을 수월하게만 선택을 할 수가 없었다. 수입이 있는 일이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찾아다녔다.

고생으로 살아온 나였기에 어려운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단련이 필요치 않았다. 한 푼 두 푼 돈이 생기면 아내에게 맡겨 보관시켰다.

그러던 어느날이었다. 몸이 좀 피곤한 것 같아 집에 들어가 쉬고 싶은 마음에 한낮에 집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아내가 동리 아이들과 함께 방안에 앉아 있었다.

아내도 나와의 생활을 위해 동리의 국민학생들을 모아놓고 과외공부를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것을 보게 된 나의 마음은 금방 찡하고 새로운 감정이 느껴진다. 쉬고 싶었던 마음을 바꾸어서 밖으로 나왔다.

신혼생활이 길어지면서 불안하기만 하던 생활은 두 사람의 노력 속에서 조금씩 나아져 갔다. 한편으로 정국은 점점 불안이 감돌았고 민족을 구하겠다던 유신의 선전은 사람들의 정당한 말에도 자갈을 물렸다.

정당법을 내세워 정당의 간판을 내리게 했고 감시와 탄압으로 인재들의 뜻을 짓밟았다.

내가 사랑했던 대중당도 자금의 압박과 가중되는 정권의 박해에서 견디지 못해 결국은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양심을 가지고 있어도 그 양심을 쓸 곳이 없었다. 이젠 정의를 가진 자가 매를 맞아야 하는 시대가 닥치고 있었던 것이다. 쥐를 잡으려 하지 않는 고양이만이 출세할 수 있는 세상을 보며 나는 허무함을 느꼈다.

그런 세상에 성질이 급한 사람들이 자기네의 애정을 믿고 정당을 만든다고 나섰다. 답답한 것을 느끼는 사람들의 관심이 이곳에 쏠렸다.

나의 가슴 속에도 사회에 대한 애정이 마음에 불붙기 시작하였다. 어떻게 된 일인지 사람들은 정치를 찾으려는 사람보고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했다.

알지 못할 마음만이 뜻이 있는 사람들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정당한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가는 곳마다 경계의 눈총을 받았다.

나는 이 어려울 때 내 양심으로 신당에 참여할 것인가를 며칠이나 골똘히 생각해 보았다. 일본 식민치하에서 독립운동하기보다도 더 어려운 제 나라 안에서의 정치운동을 생각하면 처의 얼굴이 나를 괴롭혔다.

나는 며칠이나 한 여자와 조국을 생각하다가 결국에는 통일당이란 간판을 내건 신당의 부산 조직책임자였던 박재우씨를 통해 민주통일당에다가 부산의 제1 선거구인 중구 영도의 조직책 신청서를 신청한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하며 조금이라도 더 가정에 보탬이 되고자 이곳 저곳 뛰어다닌다.

그런 후 1개월이 지났을 때 나의 조직신청서가 조직위원회를 통과하여 결정이 났다는 소문이 인편에 전해왔다.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박재우씨로부터 한 번 만나자는 연락도 받게 되었다.

그 시기 나의 사정은 몇 푼의 돈을 벌겠다는 개인 사정이 있어서 몸을 뺄 수가 없었다. 마음은 이 나라의 정치를 구하기 위해 서울행 열차를 타고 싶은데 현실은 나의 행동을 하루 이틀 미루게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 신문에 실린 개헌 청원운동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 당장 나는 어떤 충동에 사로 잡혔다. 밤새도록 밤잠을 버리고 생각해 본다.

믿고 싶은 사회를 위해 청원해서 될 일이라면 국민이 좋아할 수 있는 법을 독재자로부터 해방시켜야 한다는 의식이 가슴 속에서 뜨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마음이 더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버려둔 채 당일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서울에 올라온 나는 새로 생긴 빌딩들을 쳐다보며 오래간만에 중심가를 쏘다녔다.

제일 먼저 신당인 통일당 당사로 찾아 들어갔다. 뜻밖에도 이경식 동지를 그곳에서 만났다. 이경식 동지는 그 당에 나오던 젊은 청년지사들을 나한테 소개시키기도 했다. 인사를 나누고 보니 모두 뜻이 통한다.

그들은 부산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길 내게 물어왔다. 또 어떤 자는 날보고 부산시 개헌 청원운동 지부장 자리를 맡아서 같이 투쟁하자고 성급하게 조른다.

나는 이런 말을 들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나 통일당의 사무국으로 들어갔다. 낯선 사람들이 나의 얼굴을 쳐다본다.

나는 당의 사무총장 앞으로 걸어갔다. (당시 통일당의 사무총장은 전 경북 대학교 문리과 대학 학장이었던 하기락씨였다)

내 소개를 하며 인사를 했다. 하 총장의 얼굴이 나의 이름을 확인하자 쫓기는 사람처럼 서먹서먹해 한다. 당장 알 수 있었던 일이지만 어떤 사람의 방해 때문에 완결되어 결정된 사실이 보류로 변해 있었다. 사실을 확인한 나의 심중은 편할 수가 없었다.

내가 통일당을 나오려고 하니 조금 전에 이야길 나누던 통일당의 젊은 간부 당원들이 나를 인근에 있는 다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들은 내게 그들과 함께 같은 일을 할 수 있기를 원했지만 나는 지금 당장 어떤 결심도 이곳에서 말하고 싶지가 않았다. 내 행동 때문인지 좌석의 분위기가 당장 어색해진다.

나는 무거워지는 마음 때문에 가볼 곳이 있다는 핑계를 내세워 좌석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다방을 나선 나의 마음 한 구석은 쓸쓸했다. 한 마디로 통일당에 걸어본 장래의 기대가 무너진다.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걷고 있었다. 어디로 가본다. 한참이나 쏘다닌 끝에 낙원동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아직도 어려운 조건들을 견디며 시골 경로당보다도 초라한 당 사무실을 지키면서도 어려운 행동을 포기하지 않는 통사당의 김 철 위원장께 인사나 하고 별 볼일 없으면 서울을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들어선 낙원동의 통일사회당 사무실은 너무나 한산하고 쓸쓸했다.

나의 얼굴을 아는 어느 당원이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의 마음이 금방 비통해 질려고 한다. 이 땅에서 많이 존재할 수 있는 비극이라 여겼다. 일개 정당의 사정은 너무나 비참했다.

사람마다 여윈 얼굴에 눈망울만 반짝거렸다. 김 철 위원장은 뜻밖에 나의 방문을 두고 함박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어떻게 들었는지 나의 결혼식 이야기부터 끄집어 내며 당시 결혼식에 참석하지 못해 섭섭하다고 말을 했다. 그곳의 간부되는 당직자들이 나를 중심으로 에워싼다.

위원장실의 소파가 몸을 기대니 삐걱거린다. 찡하는 마음에 이곳 사정이 당장 머리에 떠오른다. 이야길 주고 받는 동안 대화만은 누구나 호기가 넘치고 있었다.

나를 아는 그들은 제법 달라진 내 얼굴을 확인하고 마누라가 해준 밥이 좋긴 좋은 모양이라고 농들을 한다. 나도 웃음이 나왔다.

입 하나일 때도 머리가 무거웠는데 입 두 개가 되니 이젠 어깨까지 무겁다고 말을 하니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한바탕 웃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차에 누가 나의 손을 잡으며 차나 한 잔 하자고 끈다. 김 철 위원장도 그렇게 하라고 권한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러 사람과는 작별의 악수를 나누었다. 나를 다방까지 안내해 간 사람은 이동열 동지와 민주회복 서울특별시 대변인을 맡았던 백 철 동지였다.

나는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두 사람으로부터 서울에서 일어나고 있는 근간의 이갸기들을 들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또 소식이 궁금하던 월파 서 민호 선생께서 수송국민학교 건너편에서 통일 연구인협회 사무실을 내어놓고 많은 사람들과 접촉하고 있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서울에 올라온 김에 한 군데 더 들릴 곳이 생긴 것이다.

서울에서 지내게 된 하루는 나에게 있어 매우 분주했다. 다방을 나온 세 사람은 뿔뿔이 헤어졌다.

별 생각도 하지 않고 나의 발길은 청진동 쪽으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을 붙들고 수송국민학교가 어디냐고 물었다. 청진동쪽 사람들은 금방 수송국민학교를 가리켜 주었다.

나는 내가 있는 주위에서 얼마 안 되는 거리에 큰 간판이 걸린 통일 연구인협회 사무실을 찾아낼 수가 있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고, 분위기부터 위엄이 있어 보였다. 낯선 사람이 나를 붙들고 어떻게 찾아 왔느냐고 용건을 묻는다. 나는 회장님께 인사나 드리려고 왔다고 내 소개를 하였다.

그때 나의 얼굴을 알아본 그 사무실 안에 있던 장재철 동지가 정색을 하며 반긴다. 언제 서울에 올라왔느냐고 채근이다. 나는 새벽에 서울에 왔다고 사정을 이야기를 했다.

주위의 시선들이 나의 얼굴 위로 쏠린다. 장재철 동지는 나를 소파가 있는 쪽에 앉으라고 권하고 손님이 와 있으니 잠깐 기다리라고 귀띔을 했다. 사무실 안에는 선생을 만나러 온 사람들이 더러 눈에 띈다.

얼마쯤 지나니 회장실의 문이 열리며 사람들이 나왔다. 장재철 동지가 회장실에 들어갔다 나오더니 나를 회장실로 안내한다.

72세인 선생은 건강해 보였다. 나는 선생께 인사를 올렸다. 선생은 나를 자리에 앉게 한 후 차를 시켜오게 했다.

신혼생활이 어떠냐고 근간의 나에 대한 안부를 묻는다. 꼭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인데 미국에 있었기 때문이었다고 변명을 했다.

나는 선생이 바쁠 것 같아서 잠시 있다가 차만 마시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회장실을 나오니 장재철 동지가 몇몇 그곳에 나왔던 사람 중에서 대학교수와 정치인이라는 사람들을 소개해서 인사를 나누었다.

나는 또 그곳에서 우연히 지난 대통령선거 때 야당 쪽 후보였던 김 대중씨의 비서관인 권노갑씨를 만났다.

그 사람은 커피나 한 잔 하자며 다방으로 나를 데리고 갔다. 일전에 부산에 갔다가 나의 집을 찾다가 못찾고 그냥 올라오게 되었다는 말까지 하며 초면인데도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요즈음 통일 연구인협회 조직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기 소개를 했다. 언제 나타났는지 서범용 동지가 다방 안으로 들어오며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며칠이나 서울에서 묵을 것인가 하고 물었다. 나는 오늘 밤차로 내려갈 참이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요즈음 세상에 대한 이야길 끄집어 내었다. 권노갑씨는 통협이 전국 도지부가 거의 결성되었는데 부산직할시가 아직 결성되지 않았으니 지부장 한 사람 물색해 주든지 그렇지 않으면 나보고 지부를 좀 맡아 달라고 부탁을 했다.

나는 그 사람들의 부탁을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하다가 통일 연구인협회의 원서와 간행물을 한 보따리나 주는 대로 가져 가겠다고 말했다.

장재철 동지가 오늘 오후 6시에 중대발표가 있다는데 무슨 발표인지 알 수가 없다며 한복을 입은 중년 남자와 이야길 한다. 한복 차림의 중년은 얼마 후 나에게 자기 소개를 먼저 했다. 그 사람의 직업은 교회목사였다.

신문에서 많이 본 이름이다. 좌석을 같이 하였던 사람들은 모두 나라에 대한 걱정을 가지고 있었다. 6시가 가까운 시간이 되었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조심스럽게 켰다. 우리는 귀를 기울였다.

정부는 긴급조치 1호를 발동한 것이다. 우리 일행은 긴급조치 1호의 내용에 놀라고 말았다.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했다. 여기 저기서 한숨이 튀어 나오는가 하면 절망적인 말들이 튀어 나왔다.

나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가워지고 있는 것을 느꼈다. 저녁이나 같이하고 가라는 그곳 사람들의 호의를 사양하고 아직 차 시간이 많이 남았는데도 역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사람들과 길에서 부딪히면서 언제 왔는지 서울역 앞이었다. 매표소에서 부산행 표 한 장을 구입하고 인근의 음식점으로 들어갔다.

열차시간을 맞추며 혼자서 소주 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소주 한 병을 다 마시니 차 시간이 되었다. 감정 때문인지 술이 취하지 않는 것같다. 정신없이 열차표의 지정된 좌석 번호를 찾아가 앉았다.

자꾸 갑갑하고 답답한 감정을 느꼈다. 열차 안에서 물건을 파는 사람을 불러 소주 한 병을 샀다. 안주도 없이 소주병을 목구멍에 부었다. 술이 목구멍으로 자꾸 흘러 들어갔다.

비로소 몽롱한 의식으로 지독한 알콜의 독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기댄 채 밤새도록 일어난 일들을 모른 채 술에 곯아 떨어진 것이다.

누구인가 나를 흔들었다. 눈을 뜨니 기차 안은 비어 있었다. 나는 급히 짐을 챙겨 역의 출구 쪽으로 허둥대며 뛰어갔다.

혹시나 하고 걱정을 하고 있던 아내가 나의 귀가를 보고 무척이나 다행한 표정을 지었다. 연일 신문에는 긴급조치 위반으로 체포된 사람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더러는 기억되는 얼굴들도 있었다.

그들은 왜 감옥으로 가야 하는가? 그들이 당한 현실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열기를 잃어버린 겨울은 더 춥고 지루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내 자신이 무사하게 지낸다는 사실에 수치감 같은 걸 느꼈다. 인간의 가장 큰 욕구가 무엇인가? 사람마다 생각은 틀리겠지만 국가를 위해 그 장래를 생각해 본다면 서로의 생각하는 차이가 그렇게 차이 질 수만은 없다고 느껴졌다.

유신은 누구를 위해 생겨난 것이며 긴급조치 법은 누구를 위해 생긴 것인가? 나의 마음 속에는 두려움도 수치심도 점점 사라져 갔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결혼을 한 사실에 대해 후회를 했다.

나는 어려운 자신의 문제 외에 두 갈래 기로에서 생각해 본다. 사랑을 따르자니 스승이 울고, 스승을 따르자니 사랑이 운다 하는 유행가의 귀절이 어쩌면 나를 두고 생긴 말 같기만 했다.

어느덧 복잡한 세상에서 아내라는 여자의 덕분에 일 년이나 넘게 행복했다고 생각했다. 유신을 하겠다고 겁을 주던 처음 있던 일도 부딪치니 2년이나 견뎠다.

험난한 세상도 살다보니 면역이 생긴 건가. 겁을 먹던 유신보다 세상이 험악해지니 젊은 마음 속의 애국심이 가슴을 내어 밀기 시작했다.

세상을 보는 애정 속에 아내의 얼굴이 잊어진다. 이런 것이 나의 운명일까? 남들은 쉬쉬하는데 나는 떠들려고 하는 것이다.

양심, 그 양심을 가진 자를 사람들은 어리석다고 핀잔을 준다. 그런데도 더 큰 운명에 부딪치기 위해 우리의 가난한 생활에서 나는 엉뚱한 일을 서슴지 않았다. 또 새로운 활동을 위해 자금마련을 시작한 것이다.

돈은 쉽게 구해지지가 않았다. 사람들은 나의 정당한 말부터 외면을 하는 편이니 누가 나보고 나라 위해 일해보라고 돈을 빌려 주겠는가.

결국 나는 급한 김에 전세방이나 하나 구하려고 불려가던 그 급한 희망의 줄을 끊어버렸다. 마누라보고 그 돈을 찾아 오라니까 겁먹은 얼굴이 된 마누라가 별 말도 없이 우리가 일 년 동안 굶주리고 애써 모은 돈 전부를 찾아왔다.

세상 인심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건만 나는 모든 내 자신의 문제를 잊어버리고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나만에 의지한 채 계획도, 가진 것도 없이 서울로 올라가야 한다는 결심만 하고 있었다.

- 계속 -

'외로운 투쟁' 카테고리의 다른 글

18. 「유신」이라는 혁명  (0) 2014.02.07
19. 화려한 혼담  (0) 2014.02.07
21. 고독한 양심  (0) 2014.02.07
22. 빵을 구하기 위해서  (0) 2014.02.07
23. 정의를 찾는 행동  (0) 2014.02.07
Comments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