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13. 냉정한 사회 본문

외로운 투쟁

13. 냉정한 사회

gincil 2014. 2. 7. 02:02

나의 입장은 딱하게만 변해 갔다.

이거 속은 것 아닌가 하는 의심도 생겼고 처음으로 세상에서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도 생겨났다.

막연하게 형님 내외분이 마음을 바꾸어 주길 기다려 보았으나 모든 기대는 부질없는 생각에 불과하였다. 나의 처지가 더욱 딱하게 된 것은 바로 그때부터였다.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마음이 두 사람을 대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에 대한 비관이 더 먼저 생겼다. 세상 사람들은 아무도 이런 나한테 위로되는 말 한 마디하는 사람이 없었다.

반복했던 지난날의 운명을 두고 생각만 해도 서러움이 생겨나고 있었다. 나의 마음은 그만 자신을 지키기에도 의욕을 잃었다.

그런 나한테 어느날 아침에 일이 또 생겼다. 금방 잠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있는 나를 두고 형님은 옆에 와서 생트집을 잡기 시작하였다.

들어서 참기 어려운 말들만을 골라서 윽박질러 댔다. 그래도 가만히 있으니깐 병신자식 꼴값한다고 말을 하며 발길로 얼굴을 차는 게 아닌가. 나는 너무나 상상 못한 행동에 기가 막혔다.

날아오는 발길과 주먹을 맞지 않으려고 피했다. 형님은 더욱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그러다가 부엌칼을 들고 들어와 죽여 버리겠다고 휘둘렀다. 나는 칼끝을 피하여 우선 방 밖으로 나갔다.

더욱 심하게 나의 몸 쪽으로 칼을 휘두르며 따라 나왔다. 형수는 이런 일을 보고도 말리질 않았다. 나는 다급한 김에 신도 못신고 골목길로 뛰어나갔다.

형님은 이번 참에 나를 그 집에서 내어 보낼 양인지 끝까지 죽이겠다면서 칼을 든 채 따라왔다. 간신히 먼 길까지 뛰어가서 형님을 떼어 놓고 내 몰골을 보니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맨발로 뛰다가 돌부리에 채인 발끝이 퉁퉁 부어 있었고 찢어진 발가락 사이에는 피가 흘렀다. 점점 긴장이 풀리니깐 통증이 머리끝까지 전해져 왔다.

급한 김에 맨발로 인근에 살고 있는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나를 동정하기에는 힘이 없는 누이도 나의 몰골과 이야기를 듣고는 왜 그런고 하면서 한탄하며 눈물만을 흘렸다.

나는 국민학생인 누나의 아들한테 형님 없거든 집에 가서 신발과 옷가지를 가져오게 하였다. 누나 집에서 차려준 아침을 몇 술 뜨고 가방에다 간단하게 짐을 챙겨 넣었다.

가야 할 목적지도 없는데 나의 신세는 떠나야 했다. 이런 행동을 보면서도 누나는 한숨만 지을 뿐 어떤 말도 못끄집어 낸다.

다시금 가슴 속에는 서러움과 비관이 쌓이기 시작했다. 양 볼에는 눈물이 흘렀고 이번 기회에 죽어 버릴까 하는 극한 생각까지 떠올랐다. 힘이 빠진 발길을 의식적으로 옮겼다.

이럴 때 내가 찾아가야 할 곳은 세상에서 한 군데도 머리 속에 떠오르지 않았다. 당장 느끼게 된 것은 마음 속에서 생기는 풀 길도 없는 분노뿐이었다. 부산을 떠나야 한다는 단순한 생각만이 떠오를 뿐이었다.

나는 기차가 있는 역 쪽으로 걸었다. 어디로 떠나는 행렬인지 역 앞에 오니 광장에는 차를 타려는 줄이 길게 늘어 서 있다. 매표소 쪽으로 걸으며 생각한다. 어느 쪽 차표를 구할 것인가. 당장 행선지부터 정해야 했다.

먼 도시의 이름들이 급하게 머리에 떠올라 온다.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대전까지의 보통급행표 한 장을 구입하였다. 길게 늘어진 줄을 따라 들어갔다. 역전에는 떠나는 사람과 보내는 사람들의 눈길이 있었다.

기차는 제시간에 맞추어 기적을 울린다. 창가에 자리를 잡은 나는 스쳐가는 들녘을 바라보는 것으로 모든 것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짓궂은 운명이여, 그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사나이여! 지금 너는 어디로 가고 있느냐? 부질없는 걱정으로 오늘을 보내지 마라. 내일이면 또 밝은 태양은 떠오르니라, 하는 생각이 자신을 타이른다.

그때 옆 좌석에 앉은 사람이 나한테 말을 건네 왔다. 50이 될까 하는 시골 여인이었다. 건너 쪽에 앉은 사람들이 모두 말이 없는 나를 심심찮게 쳐다본다.

「총각은 어디 사우? 어디 가우? 얼굴이 부자상이여.」

하고 50대의 여인은 내가 대답을 안 하는데도 자꾸 물어왔다. 여인은 또 삶은 계란 한 개를 건네주며 나한테 먹으라고 권한다. 세상에는 이렇게 좋은 사람들도 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형님 내외분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겨울철의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 기차는 대전역에 도착하였다. 난방이 들어 있던 훈훈한 객차 안을 빠져 나와 차가운 기운이 가득찬 낯선 도시의 역 광장에 서고 보니 생소한 도시가 나에게는 더욱 냉정해 보였다.

나는 동서남북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무엇인가를 찾았다. 어느 쪽으로 발길을 옮길까. 행선지가 당장 떠오르지 않는다. 먼 곳에서 시외버스가 기차에서 내린 손님을 부르느라고 어떤 젊은이가 고함을 질러댄다.

역전 한쪽에는 가까운 유적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속리산, 공주, 부여, 망설이던 나는 마음 속에서 공주에서 오늘 저녁을 쉬며 생각들을 정리하기로 하고 우선의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서 공주행 버스를 타게 된 것이다.

어두운 밤길을 버스는 불빛을 비추며 울퉁불퉁한 자갈길을 힘차게 달린다. 한참 지루함을 느끼게 한 후 공주의 한 정류장에서 버스가 멈추었다.

차에서 내려보니 생각보다 초라한 공주 시가지가 눈으로 들어왔다. 우선 가까운 여관의 간판을 찾았다.

볼 품 없는 여관 방은 연탄 불 덕택인지 구들목만 따스한 온기를 느낄 수가 있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피로를 쫓아 버린다. 잠이 오려고 하지 않는다. 오만 가지 생각들을 다한 끝에 내린 결론은 우선 인근의 절을 찾아가 보자는 뿐이었다.

부모 덕 없는 사람은 형제 덕도 없다고 박복한 운명을 지니고 세상의 시비나 치르느니 차라리 중이나 되어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기억을 버리고 싶었다.

동화책에서 읽은 어떤 주인공의 팔자가 나와 같았다고 느꼈다. 날이 새면 또 어느 쪽 절을 찾아가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들이 자정이 다 될 때까지 나의 머리 속에서 사라지지가 않았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에는 아침 햇살이 창문을 밝게 비추고 있었고 여관에는 별 손님이 없는지 조용했다. 우물가를 찾아 차가운 냉수로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 여관을 바쁘게 나왔다. 당장 느낄 수 있는 것은 어제 점심부터 거른 배속에서 허기를 느끼고 있었다.

나의 눈동자가 열심히 근방의 식당을 찾았다. 아침나절이라 손님이 없든 탓인지 장터 근방에 있는 식당에는 별 준비된 음식이 없었다. 손님이 단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 집에서 뜨거운 국물에 밥을 좀 말아 달라고 부탁을 해 국밥 한 그릇을 억지로 시켜서 먹었다.

식당 주모가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는 주모한테 먼저 말을 걸었다.

「이곳에서 가 볼만한 절이 어디 있습니까?」

나의 말을 들은 주모는 자기대로 생각하다가 '갑사' 지요 하며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절 이름을 가르쳐 준다.

두 사람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고 길어졌다. 주모는 재미있게 말을 받아 주면서 갑사 가는 길은 버스를 타면 된다고 일러 주고 또 곧 떠나는 버스 편까지 일러준다.

국밥 값을 주고 주모가 일러준 정류장으로 버스를 타기 위해 걸었다.

들은 말처럼 갑사행 버스가 시동을 걸어 놓은 채 금방 떠날 차비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 올라 차장인 듯한 아가씨로부터 갑사까지의 차표를 끊었다. 시간에 잘 맞추어 온 탓인지 얼마 후 차는 출발하였다.

금방이겠지 싶은 마음과는 달리 터덜거리며 꼬부랑 길을 버스는 한 시간이 넘게 달린다. 얼마 후 숲이 우거진 산비탈에서 버스는 멈추었다.

다 왔다는 차장의 말에 차에서 내리니, 갑사까지는 제법 걸어서 올라가야 한다고 버스를 타고 온 사람들이 또 말을 했다.

혼자서 산을 거슬러 올라갔다.

눈 앞에 <계룡산 갑사>라는 절의 현판이 들어온다. 담담한 마음 속에 내가 여기까지 온 사실에 대해 의문과 쓸쓸함을 느꼈다. 발길을 옮길 때마다 절의 웅장한 자태가 시야에 들어왔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걸친 나의 초라한 모습이 거울에 비친 것처럼 눈 앞에 선하게 보였다.

이제는 나에게도 세상의 시비는 끝나는구나 생각하면서 절의 경내로 발길을 옮겨 갔다.

우선 어디부터 찾아가야 하는지 이것 저것 생각하는 동안 발길은 대웅전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인자한 부처상의 모습이 나의 눈에 보였다. 부처상이 무엇이라고 말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네 팔자를 몰라 이제 오느냐고 나무라는 것만 같다.

가방을 문 앞에 놓아둔 채 불상 앞으로 걸어 들어갔다. 2천원을 제단 앞에 놓고 절을 했다. 늦게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불상을 보며 나의 마음 속으로 말을 했다.

법당을 막 돌아서서 나오려는데 그 절의 스님이 걸어온다. 나는 마침 잘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스님은 습관인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절을 한다.

나는 그에게 승려가 되는 길을 묻고자 벼르다가 그의 표정과 행동 때문에 주지 스님 계신 곳으로 좀 안내해 달라고 하려던 생각과는 달리 엉뚱한 말로 표현을 바꾸었다.

「이곳에 조용한 암자는 어느 곳에 있는지요?」

꼭 휴양 온 사람처럼 말을 꺼낸 것이다.

승려는 더욱 굽실거리며 구름이 걸려 있는 산 정상을 가리키면서 저 곳에 올라가면 '등원암'이라는 암자가 있다고 가르쳐 준다. 친절하게도 승려는 등원암으로 가는 산길 입구까지 안내를 해 주다가 더 못 바래다 드려서 미안하다고 인사까지 했다.

나는 혼자 산을 오르며 등원암이란 암자가 나를 반겨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생각과 함께 가파른 비탈길을 숨을 헐떡이며 기어 올라 갔다.

단풍이 들고 있는 계룡산은 나의 눈에도 명산이구나 싶은 마음이 생겨났다.

갑사를 빠져나와 산을 오르고 있는 자신이 우습다. 당장 중이 될 팔자마저도 못되는가 싶어 더욱 애꿎은 웃음이 나오려고 한다.

모든 것은 전생에 있었던 인연인가 생각하면서 두 시간이나 걸려 가파른 정상까지 올라갔다. 승려가 일러주던 쪽의 산정상에서 등원암을 찾을 수가 있었다.

암자의 법당을 찾아 들어가서 불상 앞에 절을 하면서 마음 속으로 빌었다. 저의 앞날을 인도해 주옵소서.

나는 당분간 이 곳에서 휴양을 하기로 했다. 좀더 자신의 신상 문제를 냉정하게 한 번 더 생각해 보고 어떤 길이든 확실하게 정하고 싶었다.

암자의 주지 스님을 찾았더니 한 사람의 중이 나를 맞는다. 너무 외진 곳이어서 그런지 그곳 사람들은 초면인데도 좋은 인상으로 무척 반긴다. 첫 대면 인사를 나누었다.

당분간 이 절에서 휴양을 하고 싶다고 나의 심중에 있던 말을 끄집어 내며, 될 것인가 물어 보았다.

암자의 중은 한 달에 쌀 25되를 받겠다고 먼저 의식주 문제를 말한다. 나는 즉석에서 2개월간 있겠다며 쌀 한가마 값을 돈으로 내어 놓았다. 그로써 당분간 나는 그 암자의 식구가 되었다.

500년 전에 세워졌다는 그 암자는 신도완 쪽을 향해 서 있었으며 그 암자에는 전설이 서려 있었다. 옛날의 절 이름이 압정사였다고 한다. 그곳에서만 십 년이 넘게 일을 해온 김 노인이란 동학교도인 절간 인부가 친절하게 귀띔을 했다.

오랜 세월이 흘러 오면서 300년 전부터 등원암이란 암자로 이름을 바꾸었고 당시 암자의 현판을 쓴 사람의 이름이 나의 이름과 같은 사람이란다. 오늘까지 이어온 절의 내력을 듣고 나니 신기한 마음마저 생겨났다.

여름철에도 서리가 내릴 때가 있다는 산 위는 세찬 바람이 계속 불었다. 나는 나를 위해 치워준 빈 방에 어둡기 전에 군불을 지폈고 칠흑같이 어두워진 밤을 촛불 한 자루로 방안을 밝히면서 오래간만에 모든 것을 잊어 버리고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며칠 동안은 같은 생활이 편안하다고 느꼈는데 시간이 경과하면서 사람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을 느낀다.

주말이면 간간히 등산객이 산의 능선을 따라 지나가는 것이 보일 뿐 어쩌다 먼 곳에서 명산에 기도를 하러 왔다는 사람들이 절에 들릴 적이면 무척이나 반가웠다.

금방 변하는 것은 욕망도 희망도 산 생활이 빼앗아 가버린다. 먹고 자고 그리고 향수를 느끼며 하루를 보냈다. 아무 것도 변하는 것이 없는 하루를 넘기면 어제 생각했던 기대에 미소를 지었다.

단조로운 생활과 싸워 보는 외에 나에게는 산을 헤매는 버릇이 생겼다. 가파른 산의 능선을 넘으면 계룡산 골짝마다 간간히 초라한 토담집이 한 채씩 나왔다.

평범한 도시 사람이 이해하기 힘드는 일이 이런 곳에서는 아직도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신자도 없는 유사종교의 교주라는 사람이 보이는가 하면 기인이 되겠다고 산신께 기도만 하는 사람, 신통력을 받겠다고 토담집에서 기거한지 10년이 되었다는 자칭 도인도 있었다.

나는 마음이 내키는 날이면 이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어울리면서 꽁꽁 언 계룡산의 겨울을 외롭지 않게 견뎌내려고 애썼다.

대전과 서울에서 왔다는 불공 손님을 만나는 날은 세상 이야기가 듣고 싶어 여자이건 남자이건 손님 옆에서 떠나고 싶지가 않았다.

어느덧 절 생활을 한 지 50여일이나 지났다. 섣달 그믐날을 얼마 앞둔 날 나는 어떤 그리움같은 것을 느꼈다. 마지막 결정을 짓기 전에 한 번 산을 내려가 보고 싶은 충동이 생긴 것이다.

알 수 없는 정이 마음 속에 충동질을 했다. 어머니의 얼굴이 웬지 머리 속에 떠올랐다. 그런 일이 자꾸 산을 내려가게 생각을 갖게 한다. 나는 그런 어느날 새벽, 부산을 한번 다녀 오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 날 따라 밤새도록 짐승들의 울음소리가 절의 주변에서 들렸다. 새벽녘에는 절의 마당 앞 길목에서 큰 부엉이 두 마리가 격렬하게 싸우고 있었다. 사람이 바로 지척에 가도 짐승들은 길을 막고 피하지를 않았다. 내가 짐승들의 털을 잡자 비로소 부엉이는 허공을 향해 날아갔다.

나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와 아침나절에 대전역까지 와서 부산행 기차에 올랐다. 공연한 짓을 했다는 후회도 생겼고 다음 역에서 내려버릴까 하는 마음도 가져보며 딱 한 번 어리석고 못난 혈육들의 얼굴이나 확인하고 정말 중이 되어버릴 결심으로 마음을 붙잡았다.

기차가 종착역에 도착하고 나는 망설이면서 누나 집으로 찾아 갔다.

두 달 가까운 시일이 지나고 다시 보게 된 서로의 얼굴 속에서 누나는 떠나오던 때의 나의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어 혹시 무슨 일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생각하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멀쩡한 나를 보자 반가워하는 표정보다도 염려하는 눈치였다. 내가 산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고 이번에 산에 들어가면 출가를 하겠다고 말을 하니 누나는 울기 시작한다.

누나의 눈물을 본 탓인지 냉정하려고 애쓰는 마음도 찡하며 나의 눈에서도 눈물이 맺힌다.

누나가 먼저 눈물을 닦았고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내가 떠난 다음, 형님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더라 면서 제발 마음을 한 번 바꾸어 보라고 타이른다. 그러면서 이틀 뒤인 어머니 제사만은 지내고 떠나든가 말든가 하라고 권하였다.

아무리 괴로운 날과 설움의 날이 많았을망정 이 넓은 세상에서 하나뿐인 형제를 원망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동안 누나가 나의 이야기를 형님한테 한 모양인지 제삿날 그는 나를 보고 싱겁게 웃는다.

오늘만은 참기로 결심하였는데도 지난 일을 생각하면 점점 순간들이 거북하게만 느껴졌다. 자정을 알리는 싸이렌 소리가 울리고 나서 제사상이 차려졌다.

나는 음식이나 좀 먹고 가라는 형님의 말을 들으면서도 통금이 된 시간인데도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누나의 말 때문에 나는 산으로 떠나지 못했다.

설날을 누나 집에서 보내고 새로운 결심을 시작했다. 출가하는 것은 언제라도 마음 먹으면 되는 것, 어떤 욕망 때문인지 다시 한 번 도시에 머물고 싶었다.

나 자신의 노력 하나만에 나를 걸고 도박을 벌리기 위해 서둘러 계룡산으로 들어가서 짐을 챙겨 가지고 다시 부산으로 돌아왔다.

형제들과 접촉을 줄이기 위해 영도가 아닌 대청동 산비탈에다가 다다미 한 장짜리 방 하나를 구하여 살았다.

일이 생기면 무슨 일이든지 망설이지 않았다. 10원짜리 하나가 귀한 것 같아 먹을 때보다 굶고 버틸 때가 더 많이 생겼다.

이런 환경 속에서 나는 조금씩 마음 속에 안정감을 쌓아가고 있었다. 또 한 해가 많은 문제들을 추억 속에 묻히게 하면서 흘러갔다.

그런 어느날 나는 어두운 밤을 맞았다. 전등불을 꺼버린 작은 방안에서 잠이든 때였다.

나의 귓가에 이상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확인을 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점점 똑똑하게 들리는 소리는 '너의 용기와 양심을 동포에게 바치라' 는 그런 소리였다.

나는 누가 나에게 지금 이런 소리를 하는가 알아보기 위해 주위를 살폈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는 것이다. 나는 더 크게 눈을 뜨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나의 눈에는 어두운 방안의 그림자만 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잠이 깨어버린 귓가에 계속 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참으로 나는 딱한 마음이 생기기도 하였다.

나하나 뻗대기도 힘든 세상에 나의 양심과 용기를 또 바치라니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알지 못할 일들이 일어났다. 나의 마음에 흥분이 생기는가 하면 가슴 속이 더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잠이 오지 않는 것이다.

자꾸만 엉뚱한 생각들이 일어나는가 하면 나 자신의 가치관에 대한 생각이 생겼다.

이런 일이 며칠이나 계속되었다. 나는 비로소 더 자신을 부인하지 못하고 젊은 나의 애정을 바칠 곳을 찾기 시작하였다.

나의 마음 속에는 처음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행복하게 보이던 사람들의 겉 얼굴보다 그들의 내면을 생각했다. 또 불행한 사회의 원인들이 나의 머리 속에 떠올랐다.

나는 점점 나 자신을 잊어버리고 남의 불행을 구하는 일이 가장 큰 행복이라는 뜻과 사명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나의 가슴 속에서는 동포여 하는 외침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나는 나의 가슴 속에 이런 일을 숨긴 채 빵을 구하기 위해 거리로 뛰어 다녔다. 그런데 그 비밀이 가슴 속에 담아 두기에 거북할 만큼 급진적으로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밤마다 담요를 뒤집어 쓰고 외치기 시작했다. 기필코 나의 용기와 양심을 동포에게 바칠 결심을 하였다. 그런 나의 마음은 언제나 누구에게 인가 꼭 사기를 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누가 패가망신을 했다는 이야기나 누가 금방 부자가 되었다는 소문이 퍼져도 사람들은 놀라지를 않았다.

국민들은 정치를 중요시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장차 세상은 어떻게 변해 갈 것인가? 조급한 생각들이 나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였지만 나는 나의 할 일에 대해 엄두조차도 가져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순간 어두운 방안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신을 찾으며 간구의 말을 끄집어 내었다.

「신이여 저의 국민들을 구해주소서!」

나의 마음은 그 순간 점점 아찔해 갔다.

나는 그 날부터 시간이 나면 열심히 독서에 몰두했다. 어려운 것을 스스로 이긴 위인들의 자서전 같은 걸 읽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나는 확실한 결심을 했다. 동포들의 빵과 자유를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고 나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면서도 만약 내가 무슨 말을 끄집어 낸다면 나를 보고 사람들은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았다.

어처구니 없던 나의 형편, 딱하기 만한 이 사회의 장래가 나의 가슴 속에서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어쩐다 어쩐다 하면서도 주위에서 알아 주지 않으니 말을 끄집어 내기가 무서웠다.

사랑을 알면서 사랑을 지킬 줄 모르는 사람들을 두고 무슨 말을 할까 하는 자포자기 적인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더욱 어지러웠다.

대청동에서 방을 구해 열심히 일한 보람이 1년만에 나타났다. 수중에는 약간의 돈이 모였다.

그때 영도의 누나가 생활이 쪼들리는지 혼자 지내는 내가 안타까워 그러는지 남매간에 같이 한 집에 있자고 한다.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대청동에서 다시 영도의 누나 집 작은 방으로 하숙을 옮겼다. 국민학생인 생질들과 같은 방을 쓰면서도 과거보다 나아진 내 자신을 느낄 수가 있었다.

철이 든 때문일까. 가슴 속에서는 사명감이 담긴 불길이 계속 타올라 피를 끓게 하였다.

나는 견딜 수가 없었다. 무엇이든 이념을 가진 행동의 길을 떠나야 할 것 같았다. 우선 서울에 한 번 다녀오면 무슨 일이건 알게 될 것 같은 마음이 생겼다. 약간의 돈을 수중에 지닌 채 차비가 가장 싼 서울행 야간 보통급행 열차를 탔다.

기차는 출발부터 만원을 이룬다. 요금이 싼 만큼 힘이 많이 드는 여행이었다. 세 사람씩 앉는 좁은 의자에 운 좋게 앉아 졸다보니 밤이 바뀌고 새벽이 되면서 기차의 창밖에 보이는 무수한 불빛들이 서울에 왔음을 알려 주었다. 이른 아침에 역전 근방에서 싸구려로 파는 해장국 한 그릇을 시켜 먹었다.

밀리는 차와 새로 생기는 빌딩들을 쳐다 보니까 이방지대에 온 것 같은 느낌을 들게 한다. 이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사전에 계획된 여행도 아니요, 누구와 약속을 하고 올라온 서울 길도 아니었다. 나의 행동에는 엉뚱한 곳이 많았다.

나는 버스가 닿는 정류장 쪽으로 걸었다. 기억을 더듬어서 모래내행 버스를 탄 것은 순전히 몇 년 전에 만났던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추풍회의 오재영씨 소개로 알게 되었던 당시 그곳의 임시 대변인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던 구좌석이라는 청년을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언제인가 그가 가르쳐 준 번지도 생각나지 않는 주소를 찾아 북가좌동 일대를 두어 시간이나 헤맨 끝에 겨우 그의 거처를 찾기는 찾았으나 그 사람은 외출 중이었고 그의 부인인 듯한 여인이 약국에서 언제쯤이면 돌아올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나는 할 일없이 그곳에서 그냥 기다릴 수만 없어서 다시 시내 쪽으로 나왔다. 온종일 종로1가에서 3가까지 왔다 갔다 하면서 하루 해를 보냈다. 무수한 빌딩 숲속에서 높이 달린 간판을 쳐다보면서 하루를 보낸 것이다.

한 그릇의 짜장면으로 점심과 저녁을 겸해 때우고 나니 이제 내게 필요한 것은 싸구려 여인숙의 방뿐이었다. 희미한 전등불, 때묻은 이불, 퀴퀴한 냄새가 나는 서울의 여인숙이 숙박비가 비싸다고 여기면서도 금방 잠들지 못한 채 밤이 새기를 기다렸다.

이렇게 하루 저녁을 넘긴 나는, 이른 아침 어제 한 번 다녀온 모래내 길을 묻지 않고 찾아갔다.

먼 산에 떠오른 햇살이 세상을 점점 밝게 비춘다. 내가 구좌석씨의 집을 방문하자 그는 자기의 아내에게서 들은 어제 찾아왔던 방문자에 대해 궁금증을 느꼈는지 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의외인 듯 느끼면서도 방으로 들어오게 하였다.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더욱 친근감과 신뢰감이 두 사람한테서 생긴다. 그의 아내가 내 아침까지 차린 밥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자 나는 너무 일찍 그를 찾아 오게 된데 대하여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우리는 밥상을 물린 다음에 이야기를 하였다. 나는 나의 포부를 이야기 해 보았고 그는 나와 외출을 할 준비를 서둘렀다.

나는 그와 지낸 시간 속에서 그가 어려운 생활을 하면서도 신념이 강한 청년이라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종로 2가에서 버스를 내린 두 사람은 제법 이름이 알려진 정치인들을 만날 참이었다.

마침 그 시기에 종로에 있었던 사법서사 회관의 건물 안에 국민당 창당 발기위원회의 사무실이 있었다.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장준하씨를 구좌석 형이 소개해 주겠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국민당의 창당준비 위원회가 있는 건물의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려 할 때 그 엘리베이터를 타려는 장준하씨를 만났다.

구좌석 형이 아는 척을 하면서 인사를 하였다. 장준하씨는 그의 일행과 함께 바쁘게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금방 엘리베이터의 신호가 밑으로 내려감을 나타낸다.

나는 내가 만나고자 원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님을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래서 우리도 다음에 올라 온 승강기를 탔다. 두 번째로 찾아가게 된 곳이 서민호의원의 사무실이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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