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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투쟁

12. 고참 하사

gincil 2014. 2. 7. 02:02

나는 하사로 진급이 되었다.

나와 같은 연도(年度)에 입대하였던 사병들은 제대를 하여 부대를 떠났다. 그럴 때마다 정들었던 그들을 보내는 것이 마음 속에서 외로움을 만들었다.

낯익은 얼굴들이 떠난 후면 낯선 보충병이 오고 같은 숫자의 부대원들을 보면서 나는 새로 오는 전우와 부대에 남았다.

세월은 나를 성숙한 군인으로 키워주고 있었다.

또 몇 년이 지나자 나는 고참하사가 되었다. 같은 계급장을 붙인 하사들이 나를 보면 하사님이라고 불렀으니 고참인 셈이다. 그리고 해를 넘기니 하사들은 중사로 진급한다. 나도 중사가 되겠지 하고 기다렸다.

몇 년 후배가 중사진급을 하였다. 나는 그 원인을 궁금히 여겼다. 진급 기회만 오면 해당자들은 진급을 위해 손을 쓰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런 사실을 알았을 때 군대행정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천진하기만 했던 내 마음에 실소가 생겼다.

중사들이 하사 앞에서 쩔쩔매는 행동을 보는 신병들의 눈은 신기했지만 나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았다. 나한테는 분노가 생겨났다.

근무성적표는 양호한데 그리고 '통솔력이 매우 뛰어남' 이란 지휘관의 고과(考課) 점수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런 생각들을 할 때마다 나는 자신만이 느끼는 서글픔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나 자신을 두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먼저 생각한 것이 중이 절을 떠난다는 속담을 생각하며 제대를 하는 것이 상책이라 여겨보았지만 아무리 생각하여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이런 답답한 마음을 하소연할 곳도, 풀 길도 없는 내 마음은 더욱 심란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처신할 방도를 찾아 머리를 쥐어짰다. 그러다 지난날들을 생각했다. 굶주리다 지쳐 허기에 쓰러진 옛날의 일들이 떠올라 왔다.

부대 안에서만은 불가능한 것이 별 없었던 나는 정말 나의 앞에 있는 어려운 문제를 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 궁금했다.

나는 당장 나 자신에게 지워진 운명에 도전할 결심을 했다. 그동안 몇 년 동안의 군대의 편한 생활에서 나 자신에 대한 장래를 잊어버리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노동력을 가진 어른이 된 사실을 스스로 깨달았다. 군대는 나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지 않더라도 나는 이제 그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럴 즈음 나에게는 휴가 특명이 내렸다. 나는 휴가 기간 동안 군용 열차가 닿는 곳이면 어디든지 마지막 무임승차가 될 기회를 충분히 이용하기로 마음을 정하였다. 제대 후의 일들을 생각하며 나는 여기 저기를 찾아다녔다.

휴가의 부대 복귀날짜를 이틀 앞두고 새벽녘에 나는 군용 열차로 용산역에 닿았다. 특별히 찾아가야 할 목적지나 할 일이 없는 나는 시간을 허비하기 위해 남산공원까지 걸어갔다.

희미한 전등불이 꺼지고 햇살이 밝게 비추니 시간은 한낮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남대문시장으로 찾아 가서 싸구려 식당에서 값이 싼 음식으로 아침 요기를 하고 이태원 쪽을 향해 걸었다.

걸음을 멈춘 곳은 육군본부 정문 앞이었다. 일선에서만 근무해 온 한 사병이 4성 장군이 있는 건물의 입구에서 위압감을 느끼게 된 것은 위병소 앞에서였다.

정문에는 헌병들이 눈을 부라리며 경계 근무를 하고 있는가 하면 영관 장교들이 일선부대의 사병들마냥 정문을 드나들고 있었다.

망설여지는 발걸음을 옮겼다. 정문의 헌병이 증명서 제시를 요구한다. 나는 휴가증을 정문 헌병한테 보관을 시키고 본관 건물 앞으로 걸어갔다.

육군 본부 본관 건물 앞에서 어디로 가야 할 것인지 얼떨떨했다. 마침 그때 여군 사병 1명이 옆으로 지나간다. 당황하면서 나는 급히 여군 사병의 뒤를 따르면서 그를 불러 세웠다. 나의 목소리에 지나치던 여군이 발걸음을 멈추며 뒤로 돌아보았다.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하사 계급장을 단 여군이었다. 상대는 당당하게도 나의 아래 위를 훑어본다. 그러니까 더욱 나의 마음에 당혹감이 생긴다. 온몸과 말소리가 그냥 떨렸다.

여군은 참모총장실을 찾는 나의 아래 위를 이상한 눈으로 보며 본관 건물의 2층을 가리키면서 출입구와 복도의 위치를 알려 주었다.

나는 걸어가는 여군의 뒤를 넋 나간 사람처럼 쳐다보다가 시선을 되돌려 조금 전 여군이 일러준 대로 본관 건물의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의 복도는 꽤나 넓은 편이었다. 나는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복도의 중간쯤에서 참모총장실이라는 팻말을 보았다. 그 순간 긴장감과 당황감이 온몸을 위축되게 했다.

기대와 망설임이 한참이나 내 행동을 붙잡았다. 어떤 길이든 새로운 것을 찾기를 원하는 나를 생각하다 노크를 하기 시작하였다. 노크소리에 안에서 문이 열렸다.

과연 오늘 4성 장군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내가 복도에서 발을 옮겨 놓은 곳은 비서실이었으며 총장실은 또 하나의 문을 지나야 했다.

깨끗한 차림을 한 중령과 사병 두 사람이 나의 거동을 살폈다. 나는 군인답게 '필승'하며 경례를 했다. 그런 후 차분하게 중령을 보며 말을 끄집어 내었다.

총장님을 만나려고 찾아온 동기부터 이야기했다. 용건이 나의 개인 신상 이야기임을 알아챈 중령은 전화기를 들더니 교환대에다가 육군본부 주임상사를 호출하는 것이다.

얼마 후 나이든 상사 한 사람이 뛰어왔다. 나의 이야기가 무엇인가 알아보고 될 수 있으면 선처를 하라고 내가 있는 데서 지시를 한다.

나에게서는 이 순간이 나의 생애에 있어 중요한 순간임을 느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길이 있다는 어릴 때 들은 속담이 머리에 떠올랐다.

나는 육군본부의 총장실 부속실장과 주임상사 앞에서 그들이 납득하게끔 또박또박 말을 시작했다.

나는 고아출신이며 무의탁 병사라는 것과 군은 나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직장이며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거처라고 말했다.

내가 이런 말을 늘어 놓자 그들은 영문을 몰라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나 스스로도 억제할 수 없는 병이 있다고 일러 주었다. 누가 큰소리만 치면 총을 쏘고 싶어 진다는 말도 꾸며댔다. 그리고 대남 방송이 괴롭다고 했다.

나는 나의 활기 찬 젊음을 군대에 바친 나의 뜻이 명예롭게 군대에서 물러나야겠다고 엄살을 떨었다. 나의 이야기를 듣고 두 사람은 측은해 하였다.

나는 마지막으로 나의 말 못하는 이런 사실들을 자신과 국가를 위해 더 숨겨 둘 수가 없어 군의 최고 책임자이신 총장님께 상의하고자 한다고 찾아온 동기를 그럴 듯하게 말했다.

부속실장과 주임상사는 나의 소속부대와 계급성명을 메모했다. 부대에 복귀 즉시 전역상신을 서면으로 올려 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내 신분이 장기복무 지원자인데 쉽게 되겠느냐고 암시를 주었다.

육군본부에서는 나의 상급부대에 연락을 하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서 있는 앞에서 그곳 사람들은 육군 교환대로 군단과 사단을 불러 댄 것이다.

나는 육군본부의 건물을 빠져 나와 가벼운 걸음으로 한강 쪽을 향해 걸었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는 내일 일은 또 내일 생각하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오늘은 행복해야지 하는 생각이었다.

부대에 복귀하고 휴가가 끝난 다음날 행정반 서무계 계원더러 전역상신 용지 한 장을 가지고 오게 했다. 그래서 아무도 몰래 전역상신을 자필로 작성했고 중대 행정반에 문서의 발송을 의뢰했다.

중대 서무계 행정원이 나를 찾아와서 이런 서류를 올릴 수가 없다고 말했다. 나는 상급부대에 발송만 하면 된다고 말해도 병사인 중대 행정원은 믿지를 않았다.

사단 사령부 인사처에 전화로 확인해 보라고 하였더니 그때서야 서무계 계원은 당장 사단인사처 전역계에 전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사람들은 나의 면전에서는 아무 말이 없었지만 내가 없는 곳에서는 나의 행동을 두고 군대를 모르는 짓거리라고 비웃었다.

이런 날들 속에서도 나는 내가 제대하게 될 것을 생각하면서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자 지금까지 군대 생활을 통한 안일한 일들을 기억하면서 한 달을 넘겼다.

궁금하고 초조한 시간을 보내던 나는 참지를 못하고 부대에서 하루동안 외출을 얻어서 서울로 찾아갔다.

한 달만에 다시 만나게 된 육군본부의 부속실장과 주임상사는 나에게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었다. 나는 바로 그 문제가 궁금하여서 찾아왔다고 얘기했다.

두 사람은 하사의 전역은 1군 사령부에서 명령이 내려 간다고 하면서 지시를 했는데 하면서 1군 사령부 전역계를 전화로 불렀다. 언제라는 날짜는 말하지 않으면서도 특명이 났다고 전갈이 왔다.

나는 궁금증 때문에 원주행 군용 열차를 타고 1군 사령부로 찾아갔다.

군 사령부는 넓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었다. 담당 계원을 찾아가니 계원은 사병이었지만 나같은 하사따위는 별 것 아닌 것처럼 대했다.

나는 나의 소속부대를 대면서 언제부로 난 특명인가 날짜를 물었다. 사병은 금방 나의 이름을 기억해 내고는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 2.3일 후면 부대에 특명이 도착한다는 것이다. 빨리 돌아 가는 대로 출발 준비를 서두르라고 귀띔을 해준다.

나는 급히 소속부대가 있는 지역으로 가는 차를 탔다. 그 날 저녁 늦게 부대로 돌아온 나는 다정했던 사람들에게 제대특명을 받았다고 전했다. 이상한 것은 아무도 나의 말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다음날 나에 대한 소문은 대대 안에 퍼졌고 나의 행동에 대한 조소가 장병들의 입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런 날이 3일이 지나서야 사단 사령부에서 특명이 아닌 전통이 내려왔다. 제대 특명이었다.

다음날 부대 안에는 비상이 걸렸다. 나는 떠나야 할 사람이니 좀 일찍 떠나겠다고 지휘관들 앞에서 말을 하였더니 아무도 내 얘기를 거절하지 않았다.

대대장이 비상출동을 하면서 손을 잡아 주었다. 시간이 있었으면 회식이라도 해주고 보낼 텐데 하며, 사회에 나가면 열심히 해서 성공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나는 간단한 개인 사물을 가방에 챙겨 넣고 부대원들이 출동해 버린 텅 빈 대대를 빠져 나와 연대본부로 갔다. 평소부터 나와 친분이 두터웠던 연대부관은 일반 관례보다 앞서 부대를 떠나려는 나를 위해 소지해야 할 문서와 특명을 전해 주었다. 그리고 직접 연대장실로 안내하며 마지막 부대 생활을 마치는 전역신고를 시켜주었다.

연대장은 나의 전역을 아쉬워하면서도 병사로서는 아까운 인물이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사회에 나가면 큰 사람이 되라고 격려해 주는 것이 아닌가.

연대장과의 작별인사로 군인으로서 근무하던 부대에서의 모든 수속을 마치고 정들었던 얼굴들, 정들었던 기억들을 뒤로 하면서 서울행의 차편에 몸을 실었다.

이제 사회로 나가지만 나의 제대를 반겨줄 사람은 아무 곳에도 없었고 또 나를 필요로 하는 직장도 있을 턱이 없었다. 건장한 육체를 가진 나는 입대하던 때와는 달리 가슴 속은 담담한 마음뿐이었다.

자신의 노력과 투지만이 나의 밑천이며 기대의 전부였다.

나는 서울을 거치면서도 여행 시간을 위해 급행 열차의 승차권을 구입하지 않았다.

마지막 무임승차의 기회인 군용 열차를 이용하여 밤새도록 피곤해지는 몸과 마음을 빽빽이 들어 찬 객차 속의 병사들과 함께 밤을 새웠다. 열차는 새벽녘에 부산진역에 도착했다.

늦은 여름철이라 그런지 금방 먼 동이 틀 것 같다. 역전 주변은 아직 조용하였고 간간히 달리는 차량의 불빛과 빛을 잃어가는 하늘의 별들이 나의 시야에 들어 왔다.

한참이나 나의 행동은 생각을 하다가 버스가 오는 데도 타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여름 날의 새벽은 무척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어제 오후부터 아무 것도 먹지 않은 뱃속에 허기가 생기게 했다.

내가 무의식 중에 자석(磁石)에 끌린 것 같이 걸어 간 곳은 단 한 사람의 형제인 가난한 형의 집 앞이었다. 아직도 형의 생활은 비참한 형편에서 풀리지 않았다.

나는 그의 가족과 함께 아침을 먹으면서 내가 제대하였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

나는 며칠을 쉰 후 예비사단에서 제대수속을 완전하게 마치고 일거리를 찾아서 분주하게 뛰어 다녔다.

군대 생활 중에 생긴 돈을 쓰지 않고 모은 것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수중엔 상당한 돈이 있었다. 나는 그 돈을 이용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생각을 하면서도 적당한 일거리를 찾아내지 못했다.

어떻든 놀 수는 없었다. 닥치는 대로 수입이 생기는 일이면 하려 했고 보다 나은 일거리를 찾았다. 내 자신이 성숙한 이상 내 자신의 독립생활을 위해 형의 집에서 나갈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바로 이즈음의 어느날 아침이다. 형과 형수는 망설이는 나를 붙잡았다. 지금 자기들 처지가 딱하니 같이 기거하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나의 수중에 있는 돈은 믿을 만한 곳에 이자 돈으로 놓아 줄 것이니 그렇게 하자고 자꾸만 권한다.

언제나 정에 약한 나는 형제의 청을 뿌리치지 못하였다. 지난 날들은 생각도 못한 채 내 수중에 지닌 돈을 두 사람의 말만 듣고 맡겨 버린 것이다.

우리는 당장 살기에 불편하지 않은 집을 구해서 이사를 하였다.

처음 한 두 달은 형의 가족은 친절했고 우리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3개월이 넘어 가면서 형과 형수는 점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져 갔다. 처음 이자를 든든한 곳에 놓아 준다고 가져간 돈은 이자는 그만 두고라도 원전 이야기도 없었다.

때때로 형수가 무슨 일 때문인지 기분만 언짢으면 네 형제가 내 신세를 망쳤다고 도전적인 말을 걸어왔고 형은 내가 맡긴 돈이 옛날 먹여준 밥값도 안 된다고 생트집을 잡아 왔다.

자기들만 믿고 무일푼이 된 나를 이제는 집 안에서 몰아 내려고 애를 썼다.

나는 당장 딱하게 된 신세를 어디에 가서 하소연할 곳도 없었다. 가슴 속에서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이 눈앞이 캄캄해지고 있었다.

-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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