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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과연 하느님의 영인가?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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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은 과연 하느님의 영인가?

gincil 2016. 6. 8. 14:01

오늘날 한국은 성령천국이다. 성령의 불이 일어 우리나라 교회는 세계적으로 유래없는 급속한 성장을 하고 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현상을 하느님이 유대인 대신 한국인을 선민으로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아전인수적 해석을 한다.


그러나 성령현상이 반드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많은 사회적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현상으로 방언과 예언, 치유와 같은 현상이 일상화되자 현실의 삶의 무게를 감당할 수 없어 하나님께 의지했던 사람들은 더욱 더 정상적인 생활을 버리고 이적에 매달리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러한 현상은 기독교에서 보면 좋을지 몰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불합리성의 증가로 사회의 건강성을 해치게 된다. 그리하여 외국 교계에서는 한국의 급속한 성령부흥 운동을 우려에 섞인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교회의 급속한 성장에는 신자의 희생이 따른다. 오늘날 많은 신흥부흥교회의 급속한 증가로 많은 가정이 광신적 신앙 때문에 무너지고 있다. 가정에 충실하던 주부들이 종교를 믿고나서 교회에 가서 사는 관계로 정상적인 가정생활이 파탄나고 신흥종교의 기이한 성령현상을 만난 사람들은 세속적 가치가 무의미해져 자기의 전 재산을 아낌없이 기부함으로써 교회의 부는 증가하지만 신자의 삶의 기반이 붕괴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에서 성령은 가장 높으신 하느님의 영이기 때문에 모든 일을 주체적으로 행하시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요즘 부흥가들은 마치 무당이 귀신부리듯 자기들이 필요할 때는 언제나 성령을 호출하여 마음대로 부린다. 그리하여 성서보다 부흥가의 말이 우선시되고 그의 종교적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 성령이 남용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렇게 된다면 성령부흥 운동은 하느님의 목적을 위한 신성한 노력이 아니라 개인의 영광을 위해 사회의 혼란과 미신을 부추기는 영적 탈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성령현상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성령체험이라는 영적 각성이 있어야만 형식적 기독교인에서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변모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오랫동안 신앙을 가져온 많은 사람들이 고민을 한다. 내가 왜 성령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가? 나에게 다가오신 성령이 진정한 하느님의 영인가? 왜 내가 하는 방언을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가?


그러나 이러한 고민을 하기 전에 먼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요즘 세상에 나타나고 있는 성령이 진정한 하느님이 영인가 하는 것이다. 만약 지금 나타나고 있는 성령이 진정한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면 이러한 고민 자체가 의미없는 일인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만은 유일하게 하느님의 영이 직접 이 세상에 나타나 구원의 역사를 하신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그 분신인 예수님이 모든 것을 주재하시고 그 은사를 성령으로 나타내신다고 본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이 반드시 타당하지 않은 것이, 현실적으로 우리 주변에 나타나는 성령현상들이 하느님의 징표라 하기에는 너무 미심쩍은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첫째 성령을 받고 방언을 하는 사람들 중에는 허약하고 사회적으로 문제가 많고 이율배반적으로 살아가는 존경스럽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과연 이런 자들에게 온 성령이 진정한 하느님의 영일까?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다.


둘째 우리주변의 성령현상들이 하느님의 영의 역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사소하고 지엽적인 형태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들은 다른 종교에서 일어나는 심령현상들과 매우 유사하다. 심지어는 무당들이 벌이고 있는 심령현상과도 매우 유사한 것이다.


이 우주를 창조한 진정한 하느님의 성령이라면 그 뜻과 힘이 실로 높고 크야 한다. 모세와 같이 홍해를 가르는 초능력을 지니거나 이 세상을 밝히는 진리를 나타내거나 인간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는 예언을 하거나 모든 병을 고치는 절대적인 치유능력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나타나는 성령현상은 신의 은사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다. 사사로운 개인의 소원을 들어주고, 단체로 엑스타시에 빠지고, 요행으로 병을 고치고, 알지 못하는 말로 방언하는 것이 대부분으로 다른 종교에서 나타나는 영적 현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셋째, 성령이 임재하면 구원의 증거라 하는데 그것 또한 확신할 수 없다. 기독교인들은 삼위일체인 하나님과 그 분신인 예수님, 그리고 그 영인 성령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만약 하느님을 믿고 성령을 영접하면 구원이 약속된다면 왜 예수님은 광신적으로 구약의 여호와를 믿으며 활발한 성령현상 속에서 항상 신과 대화하며 살아갔던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고 외쳤겠는가? 그 이유는 진정한 구원은 하나님을 맹신하며 재물을 바치고 성령의 영접하는 것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셨듯이 “주여! 주여! 하며 나를 믿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도 유대신인 여호와의 성령을 받는 것이 반드시 구원과 직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자기 민족만은 선민으로 선택해 반드시 구원해준다는 환상적인 약속만  믿고 의지하며 오로지 여호와만을 광신적으로 섬겼다. 그리고 좋은 세상과 좋은 인간을 만드는 좋은 원인을 짓지 않은 채 속으로는 온갖 위선적인 죄악을 저질렀다. 그 결과 유대사회는 정의가 없고 무지한 세상이 되었고 인간들은 비양심적이고 사악한 인간말종들이 가득차 결국 바라바대신 예수를 죽이라고 목소리를 높혔던 것이다.


사실 유대신의 정체에 대해서는 초기 기독교의 형성과정부터 말이 많았다. 초기 기독교의 전파는 유대민족을 위주로 이루어졌고 그들의 신인 여호와는 유대민족의 신이었기 때문에 구약에 나오는 여호와는 보편타당한 자비의 신이라기보다는 다른 민족은 벌을 주고 유대민족만 생각하는 매우 이기적이고 편파적인 잔인한 신으로 그 속에 진리는 없었고 무조건적인 믿음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래서 구약을 살펴보면 여호와가 대놓고 유대민족에게 내가 이웃도시를 파괴해 줄테니 가서 그들의 재산과 금화와 여자를 약탈하라, 그것을 가져다 유희하라, 장애자는 나를 섬길 자격이 없다는 식의 이기적 민족신으로서의 모습이 여러 곳에 나오고 있다.


(신명기 13;6~11)

네 동포,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친구가 다른 신들을 섬기자 하면 용서없이 돌로 쳐 죽이라


(신명기 20; 10~17)

만일 그들이 너희와 화평을 맺을 생각이 없어서 싸움을 걸거든, 너희는 그 성을 포위 공격하여라. 너희 신 여호와께서 그 성을 너희 손에 부치실 터이니, 거기에 있는 남자를 모두 칼로 쳐죽여라. 여자들과 아이들과 가축들과 그 밖에 그 성안에 있는 다른 모든 것은 전리품으로 차지하여도 된다. 너희 신 여호와께 유산으로 받은 이민족들의 성읍(이스라엘 근처)들에서는 숨쉬는 것을 하나도 살려두지 마라. 그러니, 헷족, 아모리족, 가나안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은 너희 신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대로 전멸시켜야 한다.


이처럼 구약성경에 나오는 유대의 여호와는 <죽이다>, <진멸하라>, <전멸시키라>, <노략하라>는 단어가 각각 수십 수백개씩 나올 정도로 잔혹하고 편협하며 극단적인 민족적 이기심을 보이는 저급한 지역신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기 기독교에서는 구약의 잔인한 하나님과 신약의 사랑의 하나님을 따로 보고 신약의 보편적이고 절대적 선인 하나님을 모셔야 된다고 하는 마르시오니즘이라는 흐름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만약 지금 나타나는 성령현상들이 이러한 유대민족의 편파적이고 지엽적인 지역신이라면 그러한 성령을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보장받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지역신이 지배하는 원시신앙에서는 신이 인간세상을 지배하려는 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일은 신을 잘 모시는 일이었다. 그래서 신의 뜻을 중간에서 매개하는 제사장의 역할이 매우 컸으며 이들이 신의 대리자가 되어 유대사회를 지배했다. 그래서 고대사회에는 정치와 종교가 결합한 신권정치시대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제사장들은 광신적인 유대신의 뜻을 등에 업고 전권을 행세했다. 그리하여 유대사회는 성직자들의 자의적이고 절대적인 권력행사로 인해 우상숭배와 미신, 위선과 죄악이 가득 찼으며 사회는 불신과 고통이 넘쳐났다.


그런 이유로 예수님이 가장 원망했던 것이 바로 유대교회의 성직자들이었다. 당시 유대사회의 성직자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실천하지 않고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위선과 탐욕을 행하여 유대사회를 어둡고 불행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탐욕을 보고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칭하면서 크게 진노하며 꾸짖었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주여, 주여! 하며 나를 부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7장 21절).


즉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라 개인의 진리와 도덕의 실천을 통해 그 영혼을 정화해야 한다는 것을 일깨운 것이다. 만약 신을 믿고 성령을 영접하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면 여호와를 광신적으로 잘 믿는 유대인들에게 분노하거나 꾸짖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제사장과 유대교인들은 위선과 죄악에 물든 자신들을 꾸짖는 예수님을 구약의 율법에 위반되며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고 여호와의 뜻을 자의적으로 행세한다는 이유로 누명을 씌워 십자가에 처형시켰던 것이다. 이처럼 여호와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이 의인을 돌아가시게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런 신들이 창조주 하나님일 수 없는 것이며 이러한 폭력적인 신의 영을 영접한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이다. 자칫 잘못하면 신의 이름으로 예수를 죽인 유대인들처럼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상에 큰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진리를 알지 못하고 구약의 광적인 우상을 섬기며 위대한 성자를 살해한 그들의 무지한 위선과 죄악은 유대민족의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고향 땅에서 추방되어 수천년을 유럽 전역을 떠도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죄는 지워지지 않는 주홍글씨와 같이 그들의 뇌리 속에 박혀있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신에 대한 우월한 선민의식으로 다른 민족을 배타적으로 대했으며 위선과 비양심과 의인을 살해한 죄악을 그대로 가지고 유럽사회에 떠돌았다. 그래서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인간의 피와 살을 파는 악명높은 유대인의 모습이 유럽사회 곳곳에서 나타났던 것이다. 이것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가는 유대인의 모습에 대한 유럽사회의 일반적인 시각이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마침내 유럽사회의 공분을 사 마침내 수백만명의 유대인 대학살이라는 인류의 비극이 나타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대학살에는 게르만주의라는 편파적 인종주의가 작용했지만 그 근본적인 원인은 유럽사회의 기본적인 질서와 인간의 윤리와 양심을 파괴하는 예수를 죽인 유대인의 극단적 이기심과 사악함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유대민족의 신인 여호와가 자기를 섬기는 유대인들의 구원을 결코 책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만약 여호와가 전지전능하여 자기를 믿는 신자들의 구원을 책임진다면 자기를 그토록 섬기는 유대민족에게 세계의 지도민족으로 사는 길을 일러주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이며 유랑민족이 되어 세상을 떠돌게 하지 않았을 것이며 수백만의 유대인이 학살되도록 방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구원은 무조건적으로 하나님과 성령을 받아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자와 민족만이 받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나타나는 성령현상이 진정한 하느님의 영이 아니라 지역적이고 편파적인 유대 민족신의 영적현상이라면 이러한 성령은 절대 인류의 구원을 보장해줄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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