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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텅 빈 상태를 체험해야 본문

☆ 진실의 근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텅 빈 상태를 체험해야

gincil 2018. 8. 7. 12:09

이곳에서는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서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어떤 개인 사이트에서 모든 사람들이 가져오는 갖가지 질문에 대해서, 회원도 아닌 사람들에게까지 일일이 답변해주는 게시판을 본 적이 있는가? 나는 그대의 질문에 최선을 다해 답을 하려고 노력해왔고 다른 회원들도 각자 다 깨친 바에 따라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그대는 자신이 알고자 하는 세상의 의문에 대한 답을 얻으면서, 그러한 상대의 노력에 대해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고마워하기는커녕 오히려 비난하고 있다. 고마움을 모르는 그런 사람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그대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대가 이곳에서 알게 된 지식을 가지고 다른 곳에 가서 그들이 생각 속에서 만든 관념적인 이론에 대해 질문해보면, 상대가 꼼짝을 못 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그런 곳의 지식들은 대부분 깨닫지 못한 자가 생각과 환상으로 만든 지식이며, 이곳의 지식은 수천 년 만에 정각을 얻으신 분이 밝힌 사실과 이치 속에 증거가 있는 깨달음의 지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근이 있는 자가 이곳에서 1년을 정성을 다해 열심히 배우고 깨친다면, 반드시 자기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텅 빈 상태가 온다. 세상의 실상과 이치를 깨달음으로써 자연과 다른 인위적 지식과 헛된 관념이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자신 속에 거짓과 환상이 사라지고 자연만 남으니 자신 속에 아무 것도 없는 든 게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다면 그대는 절대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한다. 그것은 자신 속에 있는 아상과 헛된 관념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중생을 일러 눈앞의 일도 바로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이라고 하셨다.


어찌 그대가 눈뜬장님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눈뜬장님이 자기 생각 속에서 세상을 보려하면 절대 볼 수가 없다.


그대가 끝까지 기존 지식 속에서 진리를 판단하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끝까지 기존 눈뜬장님의 시각 속에서 살겠다는 이야기와 같다. 그동안 지녀온 아상과 헛된 지식을 벗어나야만 참된 실상을 깨달음의 지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그대는, 기존 회원들이 아상과 교만에 가득차서 다 아는 것처럼 질문이 없느냐고 따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대의 행동은 눈뜬장님이, 눈을 떠서 아무 의문과 생각없이 잘 걸어다니는 사람들에게 왜 당신은 세상이 잘 보이느냐고, 궁금한 것이 그리 없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눈앞의 일이 보이는 사람들은 모든 일이 명확하니 궁금한 것도, 생각할 것도 없고 오직 실천하는 것만 남는다. 그런데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 자신의 어둠을 모른 채, 질문을 안 하는 것이 위선이라고 대들고 있으니 얼마나 주제넘은 일인가?


 


기존에 온 많은 사람들도 처음에는 열심히 질문을 하다가 점점 의문이 사라져 나중에는 조용해지는 것이 이곳에 온 모든 사람들의 공통된 모습이다. 여기는 누구의 질문도 막지 않는다. 그대에게도 충분히 질문할 기회가 있다. 그러니 남이 질문하지 않는다고 남에게 뭐라하지 말고 그대가 궁금해 하는 것을 물으면 된다.


 


그리고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생각하고 더욱 지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이다. 이곳에는 생각이 많은 것을 지적이라 하지 않으며 오히려 업이 많은 것으로 본다. 그대가 아직 질문이 많은 것은 실상에 대한 지식이 짧게 때문이며 아상을 버리지 못하고 헛된 지식에 갇혀 자기 생각으로 세상을 보려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업이 두터워 생각이 많은 자는 똑같은 현상을 보고도, 남들이 이치를 깨우쳐 행동으로 옮기는 데도 자기 혼자만 생각 속에 머물며 환상을 쫒다가 실질을 놓치는 법이다.


 


이곳에서는 생각과 논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정각을 얻으신 분이 보신, 사실 속에 존재하는 진리를 밝힐 뿐이다. 이곳에서 밝히는 실상과 이치에 대해서 그대가 받아들이고 받아들이지 않고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그대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오직 존재하는 실상과 이치를 밝힐 뿐이며, 진리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은 이해를 하고 받아들여 좋은 자신을 짓게 될 것이며 진리의 인연이 없는 자는 온갖 생각과 환상 속에 머물다 이곳을 비난하며 떠나게 될 것이다.


 


윤회를 하는데 왜 꼭 기억을 잊어야 하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기 위해서는 윤회가 있어야 하고 윤회가 완벽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과거의 자기를 잊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자기를 가지고 어떻게 새로운 자기를 지을 수가 있겠는가? 백합 뿌리가 자기를 썩혀서 과거의 자기를 완전히 잊어버려야만 새로운 싹으로 피어날 수 있다. 과거의 구근을 계속 유지하고 싶어서 과거의 알뿌리 상태로 머문다면, 그는 절대 새로운 싹으로 나지 못하고 곯은 채로 영원히 죽게 될 것이다. 이 말에 깨닫는 자도 있고 깨닫지 못한 자도 있다. 그것은 자신이 지닌 선근의 차이에 기인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다시 태어난다면, 그 사람은 두 개의 기억을 가지고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손자가 할아버지의 기억을 같이 가지고 살아간다면, 그 집안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서 조물주가 세운 완전한 뜻은, 사람이 죽어 근원의 세계를 통과하게 될 때 과거의 기억은 모두 잃고 진기만 지닌 채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해놓은 것이다.


 


여기에 영혼에 대해서 한번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영혼은 진기에 의식이 붙어 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반야라는 근본 차원을 거쳐 나오면서 진기속에 붙은 의식이 사라지며 과거의 기억을 모두 잊게 되는데, 이때 의식 속에 있던 모든 기질과 성품은 진기속으로 흡수되고 의식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진기 상태의 영혼이 부모라는 바탕을 만나 다시 환경 속에서 의식을 꽃 피우게 되면, 과거의 기질과 성품을 기초로 새로운 의식을 가진 자기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그러면 티베트의 림포체처럼 두 개의 의식을 가진 사람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는가? 그들은 큰 한을 가진 존재가 어린 아이의 몸속에 숨어들어가 그 아이의 영혼을 지배하여 마치 환생한 듯이 자신을 꾸미는 것이다. 그것은 의식을 가진 윤회가 아니라, 떠도는 한이 불쌍한 아이의 의식을 지배한 불행한 영적 감염 현상의 일종인 것이다.


 


조물주와 창조의 문제를 이야기했다.


어떤 현상에 뜻이 닿으면 그 현상을 바로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고, 법계에 뜻이 닿으면 법계를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며 세상의 근원에 뜻이 닿으면 조물주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조물주의 상태는 진기 100% 상태이다. 진기 100% 상태는 이 우주에서 가장 정화된 완전한 기운으로 순수 의식을 지니고 있다. 모든 것은 순수해지면 무한한 힘과 가능성이 나타난다. 인간의 의식도 그와 마찬가지로 진실해질수록 그 맑음이 커지고 힘이 강해진다. 그래서 천상에 오를 수 있는 진기 90% 이상이 되면 원력이 생기는 것이다. 조물주의 경우, 진기 100%의 상태이기 때문에 그 원력은 무궁무진하며 전지전능하다.


 


모든 것은 움직임 속에 있으니 진기 100%의 조물주의 순수의식도 영원히 고요함 속에 머물 수가 없다. 정지되어 있는 것은 부패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물주 또한 자신 속에 완전한 세상의 모습을 떠올리며 움직임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순수의식에 법계의 완전한 모습과 뜻과 이치가 비치면 자신의 무소불능한 원력으로 자신 속에 비친 완전한 모습의 세상을 창조하고 자신을 그 속에 묻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씨앗이 자신을 바쳐 싹을 나게 하고 그 속에 자신을 묻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지은대로 받는 완전한 인과법 속에 세상이 이루어지도록 하여, 하늘의 뜻과 이치에 따라 사실에 맞게 잘 자란 것은 완성에 이르게 하고, 잘못 지은 것은 소멸하도록 하여 이 세상을 완전한 법계로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가장 잘 지은 존재는 인간의 몸과 의식을 얻어 마침내 인간 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게 되고 더욱 공덕행으로 자신을 정화하면 마침내 진기 100%의 경지인 조물주의 차원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정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고자 한다면 바로 이 세상을 축복하고 섬겨야 한다. 왜냐하면 바로 이 세상이 조물주가 자신을 바쳐 만든 자신의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물주와 이 세상은 닭과 달걀처럼 서로 끝없이 도는 것이다. 법은 세상을 낳고 세상은 법을 낳고 그 과정에 조물주라는 진기 100%의 존재가 나타나 그 과정에 개입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서 언제 무에서 창조 된다고 한 적이 있는가? 다른 곳에서 무에서 모든 것이 창조된다고 말할 때, 이곳에서는 언제나 있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이 나온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동안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이 무엇을 보았는가?


 


인과의 법칙상 절대 무에서는 영원히 아무 것도 나올 수 없다. 무엇이 있어야만 그로부터 무엇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초기불교의 유법이며 실상법이다. 기존 대승불교의 공사상에서는 본래 이 우주는 절대무인 공인데, 착각으로 환을 일으켜 이 우주가 실재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이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그것은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한 말이 잘못된 것이지 어찌 있는 것으로부터 있는 것이 난다고 말하는 이곳에서 그런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는가?




그대가 305page에서 예시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전지전능한 창조의 비밀이 숨어 있다는 말은, 창조주라는 의식체가 있어서 그것이 이 우주에 없는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낸다는 의식의 힘을 설명한 것이지, 아무것도 없는 데서 이 우주가 창조된다는 뜻이 아니다. 전체적인 글을 이해했다면 이곳에서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유가 나온다는 식의 해석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식으로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한다면, 시간 손해이니 이곳의 글을 읽지 않는 것이 좋겠다.


 


지금 불교에서 우주의 근원을 공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부처님이 반야의 경지에 대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신 것을 가지고 그것을 힌두교의 마야(환) 사상과 연결시켜 이 세상의 실체를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해탈한 자의 의식은 너무나 순수하여 아무것도 없는 상태처럼 보인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서는 오직 부처님의 해탈만이 무위법이며 불루의 경지라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탈의 경지는 너무나 순수하여 아무 것도 없는 듯이 보이는 것이지 없는 것이 아니며 우주에서 가장 정화된 100%의 진기인 것이다.


 


부처님이 증득한 반야의 경지는 사람의 영혼이 과거의 의식을 모두 잊어버리고 진기만 남은 근본의 차원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곳은 현상계와 사후 의식계를 이어주는 근본 차원으로 모든 의식이 사라지는 곳이니 아무것도 인식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진기마저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것이 씨앗이 되어 다시 새 생명으로 나게 된다. 그러나 깨달은 자는 의식 속에 모든 때가 사라져서 순수해지니, 바로 이 반야의 차원에 순수의식을 가지고 들어갈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실상 속에 돌고 있는 윤회를 이해하지 못하고, 대승불교에서는 사람이 깨달으면 아무것도 없는 공으로 돌아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다


> > >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존대말로 글을 쓰는 순간 솔직해지지 못하는 저를 알기에 ‘~습니다’가 아닌 ‘~다’의 형식으로 글을 씁니다. 반말은 아닙니다. > > 여기에 가입한지 11개월이 지났다. 처음에 나도 질문을 많이 했다. 질문을 많이 했더니 어떤 회원이 질문 많이 하지 말란다. 내가 자꾸 부딪혀야 깨지지 않느냐 했더니, 다른 회원들 공부에 방해된다고 하지 말란다... > > 또다른 회원은 내가 질문한 답이 대부분 여기 사이트에 다 나와 있으니 질문하지 말고 읽으란다. 내가 못 찾겠다 했더니 한참만에 찾아서 붙여넣어 줬다. 이런 저런 글을 나누다가 답을 찾아서 붙여넣어 준 것이 고맙지도 않냐는 말에 고맙다고 말하고 탈퇴했다. > > 이후 임현수님의 가끔의 전화와 꾸준한 카톡으로 인하여 3개월만에 다시 가입하게 되었다.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묵묵히 꾸준히 실천하시는 분 임현수님. 그분을 고맙게 생각한다. > > 이런 일을 겪고 나니 나도 질문을 안하게 됐다. 괜한 질문으로 논쟁하고 싶지 않고, 충고같지 않은 충고를 받기도 싫었다. ‘그런 것도 모르냐’ 라는 비난도 받고 싶지 않았다. 여기는 초보의 서투름이 인정되지 않는 분위기이다. 이등병의 서투름을 인정해주는 군대보다도 더 폐쇄적이라 생각된다. 그래서인가 점점 더 '그들만의 리그'가 되어가는 거 같다. 그런 분위기를 만드는 회원의 5~6년전 질문을 보면 오히려 더 서툴렀음을 당사자는 모르나보다. > > 남의 비난에는 후한 사람이 칭찬에는 무척 인색하다. 또한 그런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후하고 남에게는 인색한 거 같다. 남에게 후하고 자신에게는 인색해지면 어떨까? > > 여기 자유게시판에 ‘무엇이든 물어보세요’라고 파란색 글씨로 적혀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해서 물었는데, 무지하다고 비난하면 어쩌란 말인가? 무지하니 묻지 다 알면 왜 묻겠는가? 나는 무례함과 무지를 비난하기보다는 형식, 권위 앞에 당당해지려는 그 모습을 칭찬하고 싶다. 나는 자유게시판의 자유를 외치는 그 사람을 칭찬하고 싶다. 칭찬으로 인해 비난 앞에서 그가 무뎌지지 않기를 바란다. 나도 안 무뎌져야 하는데... > > > 저도 질문이 있습니다. > 세상은 완벽한 원인과 결과의 법칙으로 이루어 졌다고 하는데... > > 반야의 세계에서 기억을 다 잃고 윤회한다는데, 왜 기억을 잃습니까?(원인?) "하나의 밀알이 썩어야 새 생명이~~~ " 이 예로 답이 대체되질 않습니다 > 기억을 잃지 않고 윤회하면 인과법칙에 어긋납니까? 그냥 법칙이 그러합니까? > 습관, 성격, 품성등은 잃지 않고 되풀이 된다는데, 그것들은 기억의 영역이 아닙니까?(잠재의식의 기억? 무의식의 기억?) > 기억의 영역이 아니면 어떻게 되풀이 할 수 있습니까?... > > 창조신이 있습니까? 혹시 보셨습니까? 아님 느끼십니까? 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습니까? 창조신이 있어야지 세상을 설명할 수 있습니까? > 창조신이 있다면 우주안에 있습니까? 우주밖에 있습니까? > 우주를 창조했다면 무엇으로 창조했습니까? > > 무(無)에서 창조했다고요? 신이 만들어놓은 법칙 속에 신이 존재하는데, 그 신은 법칙을 벗어난 창조가 가능한가요? 무(無)에서 유가 생겨나는 법칙이 우주에 존재합니까? 그 무(無)는 절대무(無)가 아니라고요? 상상속의 질문이라고요? 혹시 상상속의 창조신은 아닙니까? > 창조신의 유무가 제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는 않지만, 궁금해서 여쭤봅니다. > > 답을 알려주시는 회원분께 감사드리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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