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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실체

무명의 기원

gincil 2013. 4. 18. 15:55

무명이란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과 고통의 근원으로 말 그대로 밝지 못한 그 무엇을 의미한다. 이를 경전에서는 "맑은 마음이란 번뇌가 없는 진여의 마음이요, 오염된 마음이란 번뇌가 있는 무명의 마음이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처음 부처님께서 무명에 대해 말씀하신 것은 거창한 철학적 개념으로서 무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영원불멸하게 존재하는 밝은 진실을 보지 못하고 어리석은 마음에서 진리를 거슬러 불행과 고통을 자초하는 행동을 저지르는 것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무명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해 물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생각이나 사유는 실질적 깨달음이나 자기구원에 중요한 것이 아니니 더 이상 생각에 얽메이지 말고 팔정도를 부지런히 행하여 빨리 완성(해탈)에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들이 무명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유는 세상의 어둠과 불행의 원인을 정확히 규명하기만 한다면 그 해악에서 쉽게 벗어날 수 있고 삶의 목적인 인간완성(깨달음, 해탈)에도 쉽게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바램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무명에 대한 철학적 논의는 대승경전에서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여 중국 당나라 불교계에 이르러서 주요한 철학적 화두로 대두되었는데 그 논의의 요지는 불성은 본디 완전하고 순원무잡한 우주의 근본인데 무명이 어둠의 씨앗이라면 도대체 무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 하는 것이었다.

무명을 인정하게 되면 무명을 낳은 불성의 완전함과 순수함을 부인해야 하고 무명이 불성에서 나오지 않았다고 하면 우주에 불성과 대립되는 또 하나의 거대한 어둠의 근원을 상정해야 하는 모순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에 있어서 악의 근원에 대한 문제와 맥을 같이하고 있는 데, '유일한 절대자이신 하나님은 지고지선하고 완전하신데 왜 세상을 이렇게 무질서하고 악하게 만들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고 있는가'라는 의문과 통하는 것이다.

유사이래 많은 사람들이 이에 대한 논의를 했지만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나타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서 무명의 근원에 대한 진실을 밝히고자 하니 인연있는 자에게 전해지기 바란다.

무명의 근원에 대한 해답은 추상적 사유와 논리의 전개에 의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주가 존재하고 생명의 세계가 나타나는 우주의 실상에서 나오는 것이라야 사실과 다름이 없게 된다.

 

따라서 무명의 실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이 세상에 생명체가 나타나 성장해 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무명은 의식이 없는 생명체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의식이 있는 존재 즉 자유 의지가 있는 인간에게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혼돈과 개벽을 끝없이 돌고 있는 우주의 순환 속에 혼돈의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이 세상에는 다시 생명이 번창하는 순수무염의 지상낙원이 전개되는데 그 과정을 살펴보면 개벽의 시간에 세상에는 화산폭발과 대지진, 대해일과 폭풍이 일어나 엄청난 기운이 생겨나고 이 기운이 지상에 가득 차 압력이 대지를 짓누르게 되면 땅의 폭발력이 진정되면서 대지는 점차 안정을 되찾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무수한 기운들이 끝없이 감돌며 상호 부딪히게 되고 세찬 교류과정 속에 의식을 띤 기운들이 나타나 생명의 씨앗을 품게 되는데 이러한 영기들이 땅의 기운과 만나면서 생명현상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마치 나무가 오랜 세월 동안 여러 기운과 스치고 많을 일을 겪고 나면 의식을 띠게 되어 대재앙을 만날 때 소리를 내어 운다던가 가지를 꺽으면 해꾸지를 하는 생명현상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이러한 현상들은 지구가 살아있는 별로서 조물주가 지어 놓은 완전한 뜻에 의해 나타난 혹성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생명이 나타나는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우주의 근원에 있는 신성한 의식의 세계가 나타나 세상의 질서에 관여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세상 속에는 우주의 흐름에 종속적인 식물과 독립적인 동물이 나타나게 되는데 의식을 띠지 않는 식물의 단계에서는 자연의 흐름과 완전히 하나되어 움직이기 때문에 무명이 개입될 여지가 없지만 자율성이 강해지는 인간의 단계에서는 신과 같은 형태의 자유성과 창조성을 보이면서 자연의 흐름에서 벗어난 독립적인 행동을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인간은 신과 같은 완전함에 이르고자 끝없이 노력하게 되는데, 완전성에 이르는 순간까지 인간은 매우 불완전한 상태이기 때문에 이때 행하는 많은 행위가 올바른 이치에서 벗어나 오류를 범할 가능성을 갖게 되고 이를 일러 무명으로 인해 어둠을 범한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수동적 미 성숙성을 벗어나 능동적 완전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진실 - 세상이 진리로 되어 있고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인간은 완성에 이르기 위해 살아가는 신성의 현현이라는 사실- 을 모르고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불행을 자초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바로 무명의 진정한 실체인 것이다.

이를 원각경 원각묘심장에서 잘 묘사하고 있는데 즉 '()의 가림으로 그릇되게 헛꽃을 보다가 환의 가림이 없어지면 헛꽃마저 이미 사라졌으니 다시 일어난다고는 말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환의 가림과 헛꽃이 서로 기다리지 않기 때문이며 또한 헛꽃이 허공에서 없어질 때 언제 다시 허공에서 헛꽃이 일어나느냐고 물을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하였던 것은 바로 무명이란 실체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지을 수밖에 없는 시행착오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신성(불성)을 갖추고 있으므로 이와 같이 무명에서 이치에 벗어난 잘못을 저지르는 순간 마음이 어둠을 느끼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본성적으로 깨달아 더욱 완전한 자율성과 창조성을 습득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서 행동과 반성이라는 자율적 성장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은 점차 완성된 차원에 도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 속에는 각자가 지은 바에 따라 완전한 결과를 받는 하늘의 뜻과 법칙이 작용하고 있어서 각자의 자유의지에 의해 선택한 행위에 따라 그에 상응한 댓가를 받도록 되어 있다.

 

따라서 잘못된 줄 알면서도 욕망에 끌려 계속 무명에 집착하게 되면 삶이 불안하고 고통스러워져 소멸하는 운명을 갖게 되고, 무명을 반성하여 바른 이치에 따른 밝은 삶을 실천하게 되면 더욱 완전한 지혜와 자유를 얻어 인간완성(신성, 불성)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를 공자님은 끝없는 성찰로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반성하여 정신을 고양시킨 결과 육십에 이르러 자연의 이치에 거슬리지 않는 이순에 이르렀고 칠십에 이르러 마음가는 대로 자유로이 행하되 걸림이 없는 불유구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사람들은 무명을 엄청난 악의 근원이며 악마의 화신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실제 무명이란 하늘의 뜻으로 나타난 인간이 신의 품성인 자유성으로 말미암아 짓게되는 오류를 의미하는 것으로 악의 원천과 연결되어 있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이 우주 속에는 오직 완전한 신성과 진리만이 존재할 뿐 그에 필적할 만한 악이란 없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어둠과 불행이란 인간 스스로 지은 잘못이 하늘이 정해놓은 이법에 의해 스스로 파멸하는 과정을 겪는 아픔인 것이다.

따라서 무명은 너무 두려워할 필요가 없으며 태어난 보람을 살려 세상을 축복하면서 자신의 가능성을 마음껏 발휘할 필요가 있다.

삶이란 행동하는 속에 있는 것이니 실천하는 과정에서 힘이 더 강해지는 것이며 잘못을 저지를 경우 이를 반성하고 극복하면 더욱 영혼이 맑고 크게 영그는 것이다.

이러한 엄연한 인과의 이치를 무시하고 무명을 가벼이 여겨 탐욕과 이기심으로 어둠의 길에 계속 집착하면 그 불행의 고리가 이어져 자신을 파멸시키고 어둠이 온 세상을 덮게 되어 오늘날과 같이 전 인류가 파국에 이르는 불행을 맞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들은 이러한 완전한 이치 속에 살아가고 있는 귀한 존재인 만큼 인간에게 주어진 두 가지 길, 즉 무명에 의한 파멸의 길과 진리에 의한 완성의 길 중 두말할 것도 없이 밝음()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빛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욕망의 덫에 걸려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무명과 이기심이 결합하여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세상은 욕망의 불길 속에 타오르고 있으며 진리에의 인연을 만난다는 것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늘이 겨자씨에 꼽일 정도로 희귀한 일이라고 하셨던 것이다.

그만큼 오늘날의 세상에서 진리를 만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동안 인간이 함부로 지은 거대한 악연으로 인해 다가온 인류문명의 위기를 벗어나기가 참으로 어려운 상황인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인류가 진정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물질적 풍요와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 인류의 미래를 구할 수 있는 진리의 가르침인 것이다.

그러면 인류역사가 인간 스스로 택한 무명으로 말미암아 항상 고통에 아파해 왔고 그 결과로 인하여 오늘날 인류가 소멸할 위험에 직면해 있는데, 이와 같은 결과가 예견됨에도 불구하고 하늘이 인간의 마음속에 무명을 심어 놓았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하늘의 근본이 정지된 완전성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완전성으로서 완전함이란 끝없는 자유성과 창조성의 발현을 필수요소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우주의 근원이 창조성이 없이 고요하고 깨끗하여 항상 맑은 적멸에만 머문다면 우주는 조용하고 정지된 상태만 계속될 것이며 존재한다는 아무런 의미나 가치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완전하다는 것은 단순한 정지상태의 완성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가운데 완전함을 나타내고 완성을 만들어 내고 있을 때 가장 완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니 이것이 완전성이 존재하는 가장 완벽한 존재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성(불성)은 문제가 생기더라도 다양하게 움직이며 자율적으로 행동하고 완전한 이법에 따라 완전한 결과를 나타내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완전한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무명이야말로 인간이 주체적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이며 우주의 핵인 정신이 존재하는 방식으로서 신의 완전성을 지향해 나가는 생명의 모티브인 것이다.

무명을 통한 진리의 선택과 자율성의 완성!

이것이 바로 무명의 나타난 의미로서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이며 삶의 본질적 모습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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