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이별을 위하여 본문

올바른 삶

이별을 위하여

gincil 2013. 4. 20. 21:48

인생은 인연에 따라 모였다가 인연이 다하면 헤어지는 과정 속에 남는 것이다.

그 속에 큰 인연도 있고 작은 인연도 있다. 사람들은 큰 인연은 자신의 전부라 생각하고 작은 인연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소홀히 대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큰 것이라고 영원히 내 것이 되고 작은 것이라고 남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떠한 것도 영원한 내 것은 없기 때문에 사람은 항상 떠날 준비를 하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삶을 살아가는 올바른 모습이다.

 

우리는 항상 죽음 앞에 노출되어 있으며 죽음은 한 순간에 나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어느 한 순간 모든 것을 벗어 던지고 홀로 떠날 때 우리는 자유와 평안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 못하는 이유는 그만큼 욕망에 찌들었으며 자연의 본질에서 벗어난 위선과 가식을 뒤집어쓰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 본연의 모습은 성경에 있는 말처럼 들에 핀 백합처럼 하늘을 날아다니는 새처럼 그렇게 집착 없이 부지런하게 살며 맑고 평안하게 사는 것이다. 열심히 살면 부족함이 없고 거짓이 없으면 마음이 평안하다.

 

삶 중에서 이보다 더 좋은 삶은 없으며 더 이상 인간이 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세상 속에 만연하고 있는 탐욕의 늪에 빠져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 맑으면 세상과 하나되는 사랑을 가지고 세상을 이치대로 바라보는 밝은 지혜가 생긴다.

 

그러면 그대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세상사람들이 욕심을 내지 않으면 무색무취한 가운데 무슨 재미로 살 것이며 문명이 어떻게 발전할 것인가 하고? 여기에 질문을 좋아하는 자와 사실을 중시하는 자의 차이가 있다. 삶은 사실로 나타난 것이지 형이상학적 의문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삶 속에서 진리를 찾는 그대에게 하는 것이지 세상 전체가 욕망을 버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가정적 논리에 답변을 하기 위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대가 그런 의문을 갖던, 갖지 않던 간에 세상에는 탐욕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욕망을 가진 사람들은 항상 흘러 넘칠 것이다. 그대가 가져야 할 의문은 세상에서 욕망이 사라지는 있을 수 없는 일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그대가 갖고 있는 욕망과 고통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실제의 문제인 것이다.

 

그대는 욕심이 없으면 어떻게 인간이 거친 세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며,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역할을 해나갈 수 있겠느냐고 질문하겠지만 여기서 내가 말하는 욕심이란 것은 이치에 맞지 않고 가져서는 안될 탐심을 말하는 것이지 자신의 삶을 건강하게 만들고 세상을 좋게 만들고자 하는 소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진리의 길에서 오해의 소지가 많은 것이 자신을 버리라는 말인데 삶은 자신을 버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사는 것이다. 따라서 진실한 길은 올바른 이치를 행하며 적극적으로 사는 삶을 오히려 권장하는 것이지 염세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의 길은 너와 나와 세상이 모두 완전해지는 길을 의미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에서 자기를 버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자기의 사심과 탐심을 버리라는 말이지 자신이 키워야 할 양심과 바른 이치에 따른 건강한 삶을 버리라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심과 탐심을 버리면 노력한 것만으로도 족할 수 있고 세상과 하나되는 지혜와 사랑을 지닐 수 있다.

 

끝없이 도는 생명의 순환과정 속에서 주체가 되어 홀로 남는 것은 결국 자기자신밖에 없으며 이 과정을 그는 자기의 영혼에 의지하여 홀로 돌아야 함으로 자신의 영혼의 씨앗을 맑고 굳건하게 길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영원히 도는 생명의 길에서 오직 밝은 진리의 삶만이 영혼을 신성에 이르게 하며 자신과 세상을 함께 완성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웃과 세상을 내 몸과 같이 생각하는 자비스런 마음이다.

 

이것이 인간다움의 근본이며 인간에게 이것이 없으면 인간으로서의 자격이 없다. 모든 삶의 의미는 여기에서 비롯되며 인간완성의 길도 이로부터 시작된다.

 

이별의 고통도 마음속에 사랑과 이치대로 살아가는 밝은 마음이 있을 때 쉽게 벗어날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세상에서 대부분의 이별의 고통은 소유욕과 집착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정 상대를 사랑한다면 인연이 닿지 않는 상대의 행복을 빌어줄 수가 있어야 한다. 인간은 세상을 축복하는 것이 삶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모든 인연은 덧없는 세월 속에 곧 왔다가 사라진다. 영원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나 그 하나 하나의 인연은 매우 소중하게 여겨야 삶이 풍성해진다. 그러므로 작은 인연 하나라도 정성을 다하여 소중하게 대해야 하며 서로를 축복하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들은 항상 이별 속에 있기에 이별의 지혜를 통해 더욱 성숙한 나를 맞아야 한다.

 

그러므로 때에 따라서는 큰 인연도 가벼이 떠나 보낼 수 있어야 하고 작은 것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한다. 더구나 이 일은 요즘 사람들이 좋고 나쁜 것, 크고 작은 것을 착각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정과 애착 속에 얽혀 있는 자기 가족과 친척을 자기의 전부로 생각할 만큼 큰 인연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끝없이 흐르고 있는 생명과 진리의 길에서 볼 때 이것이 가장 중요한 것은 아니다. 혈연의 인연은 육신을 이어주지만 밝은 진리의 인연은 그 사람의 정신을 밝혀 영원한 미래를 결정해준다. 진리의 길에서 볼 때 중요한 것은 옳고 그름인 것이지 정이나 애착이 아니다.

 

진리의 길에서는 상대를 축복하고 세상을 좋게 하는 것만 있을 뿐이지 더 좋고 더 친하다는 감정은 사사로운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한 제자가 처자식에게 인사한 후 뒤따라 간다고 하자 "농부가 손에 쟁기를 들고 뒤를 돌아본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세상을 밝게 만드는 일이 개인적인 정에 대한 집착보다 인간의 삶에 있어서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다. 따라서 가지지 못하는 것과는 수없이 이별해야 한다. 그런데 사람은 저 나름대로의 업이 있어서 어떤 대상에 대해 특별히 강한 집착을 느끼는 경우가 있다.

 

더구나 그것이 남녀간의 일일 경우에는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운명감 마저 느낀다.

 

그런데 문제는 남녀간의 사랑이 애착과 소유욕에 기인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경우보다 헤어지는 경우가 더 많으며 이때 인간으로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아픔에 사로잡힌다는 것이다.

 

그 별리의 슬픔은 집착한 만큼이나 크게 다가오며 도저히 논리나 이성으로는 정리하거나 해결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아프더라도 나에게 주어진 귀한 삶을 가치있게 만들어할 의무가 나에게 주어져 있는 만큼 계속 슬픔에 젖어 헛되이 인생을 낭비할 수 없는 일이다.

 

비록 인간에게 있어서 이별의 상처는 늘 함께 하는 것이라지만 그것은 삶을 너무 힘들게 하고 성가시게 하므로 빨리 치유해야 할 필요가 있다. 삶을 갉아먹는 이별의 상처는 빨리 나아야 하고 이룰 수 없는 인연은 잊어야 하는 것이다.

 

이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감정을 떠나, 있는 것을 사실 그대로 바라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일반적으로 이별의 아픔은 영원히 극복할 수 없을 것 같아도 실상 그것은 개인적인 것에 불과하며 감정적인 업에 기인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감각주의 문명하에서 남녀간의 사랑을 지상제일주의로 삼고 있지만 그 실체를 알고 보면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라기 보다는 애욕에 의한 집착에 가까운 것이 많다.

 

세상에는 본디 내 것이란 없다. 세상에서 가장 내 것이라 여기는 가족간의 일도 덧없는 세월 속에 금새 인연을 다하고 마는데 하물며 청춘의 사랑이며 부귀와 영화 같은 세속의 인연을 말해 무엇하랴?

 

이별의 슬픔을 겪을 때면 내 사랑만이 유별한 것 같아도 그것도 알고 보면 세상사람의 수만큼 많은 일이며 나의 업에 기인한 독특한 착각일 뿐이다.

 

남녀간의 일은 거대한 생명의 흐름 위에 은물결처럼 수없이 반짝이다 사라져 가는 것이며 오직 영원한 것은 이 세상을 관통하여 흐르는 밝은 진리와 생명의 길밖에 없다.

 

이별하는 이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으면 세상 아무 것이 없어도 행복할 것 같아도 사랑이란 환상처럼 그렇게 완전하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토록 그대를 안타깝게 했던 사랑하는 이의 아름다운 모습도 머지않아 곧 시들며 사랑의 달콤함도 거친 현실 속에서 일상적인 욕구로 변질되고 만다.

 

한 사회와 국가와 문명과 인류도 생멸을 거듭하는데 어찌 인간세상의 인연이 영원하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이별이 다가오면 그것에 끄달려 울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성숙시키는 절호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평소에 사람은 아무리 자신의 마음을 닦으려 해도 업이 마음속에 숨어있어 절대 자신의 업을 볼 수 없고 지울 수도 없다.

 

바로 이와 같이 자신의 영혼을 아프게 하는 이별의 시련에 부딪힐 때 자신의 숙업과 적나라하게 대결할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이것을 슬기롭게 극복한다면 커다란 깨달음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사랑으로 인해 진정으로 아파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기의 영혼을 다해 진실되게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자신의 내면을 볼 수 있고 닦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행가 가사에도 아픔만큼 성숙해진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하지만 이 말은 모든 경우에 적용될 수 있는 말은 아니다. 이별의 상처가 아플 때 어떤 사람은 상대에 대한 집착을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승화시키나 어떤 사람은 상대를 원망하고 세상을 저주하는 쪽으로 나간다.

 

이처럼 차이가 나는 것은 각자의 타고난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해야 될 인생의 결정적 시기에 절실히 필요한 것이 인생의 지침이 될 좋은 가르침이다.

 

이러한 가르침이 없는 경우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업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나가게 되어 주어진 운명의 굴레를 돌게 되는 것이다.

 

성경에 보면 사람은 날 때부터 고자인 자가 있고 사람에 의해 고자된 자도 있으며 천국을 위해 스스로 고자된 자도 있다고 했다.

 

내가 본 어느 깨달은 분도 애욕과 집착을 벗고 반야에 들자, 모든 미움과 원망이 사라지고 세상을 측은해 보이는 연민만이 가득했으며, 남녀간의 일을 보면 흥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가 어지러워진다고 했다.

 

우리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여기고 지상최고의 가치라고 여기는 남녀간의 사랑은 깨달은 이의 시각에서 볼 때 결국 넘어야 할 인간적인 업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을 놓쳤을 때 자신의 모든 인생이 끝났다는 듯이 아픔에 자지러질 것이 아니라 남녀간의 사랑이 삶 전체에서 정말 중요한 가치가 아님을 깨달아 자신의 집착과 애욕을 가벼이 하고 세상을 더 큰 눈으로 바라보는 지혜를 얻어야 한다.

 

삶의 본질은 올바른 가르침과 행을 통하여 자신의 업을 가벼이 하고 맑고 밝은 마음을 키워 인간완성을 거두는데 있다.

 

그러므로 이별을 맞은 이들은 이것을 기회로 특정 상대에 대한 개인적 집착과 애욕의 업을 극복하고 눈을 크게 들어 세상과 인생을 생각하는 열린 마음이 되기를 간곡히 당부한다.

'올바른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짓기  (0) 2013.04.20
운명과 미래  (0) 2013.04.20
사랑에도 길이 있더라  (0) 2013.04.20
참된 자는 살기 힘든가  (0) 2013.04.20
세월과 완성  (0) 2013.04.20
Comments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