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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과 안락사

gincil 2013. 4. 20. 21:50

한순간도 자신을 놓아서는 안된다.

 

삶은 끝없이 돌고 돌면서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 속에서 더 나은 자기를 짓는 귀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이 세상만이 이 우주의 중심이며 더 나은 자신을 지을 수 있는 복밭이라는 말이다.

 

천상에 있는 신들조차도 더 나은 자신을 얻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행위와 변화를 통해서만 자신의 완성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현실만이 실제의 세계요. 그 이외의 세계(영혼계, 천상계)는 결과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영혼과 천상의 세계는 현실의 삶의 결과로 나타난 열매와 같은 것이다.

 

열매와 같은 결과물은 다시 세상에 심어 키워야만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지 그 자체로는 씨앗의 상태 그대로 머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신을 새로 지을 수 있도록 부여받은 이 귀한 삶을 한 순간이라도 허비해서는 안된다.

 

인간은 자신과 같은 완성에 이르라는 하늘의 뜻을 받아 이 땅에 태어난 고귀한 신성의 씨앗인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뜻을 모르고 요즘 사람들은 욕망과 쾌락에 자신의 삶의 목적을 두어 욕망이 좌절되면 자신의 삶의 의미가 사라진 것으로 생각하여 너무나 쉽게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경향이 있다.

 

자살에 있어서 잘못된 문제는 삶의 진정한 목적을 모른 채 자기 마음대로 인생의 목적을 정하고 그것이 충족되지 않았다고 삶의 의미가 사라진 듯이 비관하여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일이다.

 

이들은 인간의 삶이 얼마나 고귀하며 무한한 가능성과 가치가 있는지 모른 채 나의 생명은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할 권리가 있다는 무지한 주장을 한다.

 

하지만 완전하게 이루어지는 우주의 법칙은 작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행하는 일들을 그냥 방관하지 않고 자연의 완전한 이법으로 한치의 어김없이 심판하는 것이다.

 

자살은 완전한 신성에까지 이를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하는 귀한 생명의 길을 완전히 포기하게 되는 어리석음과 교만의 극치인 것이다.

 

자살은 삶의 가능성을 중도에 모두 단절해 버리지만 그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죽은 후에 받게 되는 영혼의 업보인 것이다.

 

삶을 만족스럽게 마친 자의 영혼이 받게 되는 후생은 평안하고 깨끗하지만 자살하는 자의 후생은 자신의 약한 의지와 잘못된 삶의 자세가 영혼 속에 남아 어두운 생명의 씨를 가지고 계속 나쁜 불행한 후생을 맞게 된다.

 

자살을 통해 삶을 마감한 자는 그 한과 집착에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고 이승을 떠돌며 계속 지옥의 고통에 헤매게 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이룬 것이 하늘에서도 계속되는 것이기에 현실에서 맺힌 한은 저승에서 계속 품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살현상은 인간소외와 무의미가 횡행하는 진실이 사라져 버린 사회일수록 더욱 더 많아진다.

 

생명의 진실 중 가장 중요한 일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아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진실을 알 때만이 올바른 삶의 길이 정립된다.

 

이 세상은 신성한 신의 뜻에 의해 완전하게 조화되어 있으며 완전한 우주의 이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우주 속에 있는 모든 생명력은 바로 신이 지어놓은 완전성 아래 지은 대로 결과를 받는 엄중한 이법에 따라 신의 뜻을 실천해 나가고 있는 것이 다.

 

현대문명은 이러한 생명의 근본을 모르고 마음대로 욕망을 향해 치닫고 있으니 현재의 문명이 인간의 가치에 별 도움이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이 건강하고 움직일 수 있는 때 삶의 의미와 진실을 빨리 깨우쳐 하나라도 더 나은 자신을 짓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죽을힘이 있으면 그 힘으로 죽은 순간까지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으니 죽음의 의미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기로 하자. 사람의 인생은 더 좋은 자기를 짓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니 더 이상 좋은 자기를 지을 가능성이 없고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망치게 되었을 때 즉 식물인간이 되거나 생기가 다하여 육신이 말을 듣지 않고 불치의 병으로 더 이상 사람구실을 못할 때 더 이상 자기의 목숨을 유지하려고 삶에 집착할 필요는 없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커다란 공포를 갖고 있으나 죽음은 우리들이 두려워하는 것과는 달리 그리 고통스러운 과정이 아니며 작은 신체의 변화이며 꿈과 같은 심리적인 체험에 불과하다.

 

실제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는 과정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영혼이 육체를 떠나고 난 후에는 영혼은 모든 육체적 고통에서 벗어나며 의식주 걱정을 않아도 된다.

 

그러므로 몸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게 되어 이생에서의 인연이 다한 경우에는 생에 대한 더 이상의 집착을 버리면 편하게 육체를 떠나 저 세상으로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병으로 고통스러워하면서 똥을 벽에 바르며 끈질긴 생명을 이어가는 노인들은 생명에 대한 강한 집착이 그의 목숨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앓으면서 임종을 맞이한 노인이 눈을 감지 못하다가 객지에 나가있던 외동 아들이 돌아오면 눈을 감게 되는 경우를 우리는 많이 보고 들었다.

 

그러한 일은 바로 인간의 마음이 육체를 잡고 있다는 좋은 증거인 것이다. 생명의 인연이 다했을 때 굳이 병든 자신의 육신을 붙잡고 있는 것은 일종의 집착으로 그리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무조건 살아야만 한다는 의무를 부여한 것은 세상 어디에도 찾을 수 없으며 그러한 이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누가 존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종교적인 관념으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것에 불과하다. 하늘은 인간에게 더 나은 삶을 지으라고 인생이란 기회를 부여한 것이지 비인간적인 고통 속에서 자신의 삶을 망치면서까지 생을 의무적으로 유지하라고 강요하지는 않는 것이다.

 

여기에서 안락사의 의미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생명은 오래 사는 것이 자랑이며 복이 아니라 얼마나 인간답게 살았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이 참된 가치가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육체의 고통에 오래 시달리면 그의 정신마저 망가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한 생명이 더 이상 생존가능성이 없고 육체적 고통과 추한 삶으로 그 영혼이 망가지는 과정 속에 있다면 안락사는 인간의 영혼을 보존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가족이 동의하고 사회적으로 용인된다는 조건하에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다.

 

노파심에서 한마디 더 한다면 자살은 안락사와 완전히 다른 의미이다. 자살은 삶의 참된 의미와 목적을 모르고 욕망에 한이 되어 죽는 것이기 때문에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한을 맺히게 하고 자신의 영혼조차 망치는 것인 반면 에 안락사는 자신의 영혼을 보전하고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을 편하게 하여 죽음과 생명의 세계를 모두 보존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진실을 안다면 삶과 죽음이란 형식에 얽매여 현실의 귀한 삶을 허비할 염려가 없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살아서는 삶을 소중히 여겨 한순간이라도 나쁜 것에 마음을 팔지 말고 진실을 찾아 좋은 삶을 짓도록 노력하며 죽음에 대해서는 생명에 집착하여 추한 삶에 얽매지 말고 두려움 없이 당당하게 맞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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