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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사랑과 집착과 깨달음

gincil 2013. 4. 21. 22:30

생명의 진실에 대해 알지 못하고 깨달음의 실체에 대해 경험하지 못한 이들은 전해져 내려오는 잘못된 관념에 빠져 세상에 대한 사랑과 진실에 대한 관심까지도 집착이라고 버리라고 한다.

 

그들은 불성은 순원무잡하여 본디 아무 것도 없기에 깨달음과 진리,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까지 유위법이라 하여 버리라고 한다.

그러나 무위법과 유위법을 구별하는 것 자체가 사량심이며 분별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부처님은 무위법과 유위법을 구별한 적이 없었으며 이러한 개념은 불교가 생명력을 상실하고 관념화되던 부파불교시절에 불교철학자들에게서 나온 개념들이었다.

 

무위법과 유위법의 구별은 실상의 세계에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생명의 실상은 사랑과 진리로 오롯이 존재하는 것일 뿐 그 이외에는 오직 이를 설명하는 말만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 있을 뿐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완전한 인과의 뜻 속에 있으며 깨달음과 불성 또한 인과의 이치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무위의 경지는 깨달은 자들만이 아는 경지이니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한 일반인들이 논할 바가 못되며 깨닫지 못한 자가 알지도 못하는 무위의 경지를 마치 아는 양 주장하는 것은 망상이며 착각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은 존재하는 실상 속에 깃들어 있는 인과의 이치에 대해 설명하셨을 뿐 어려운 문자는 쓰지 않으셨다. 그래서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으면서도 "나는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신 이유는 세상에 나타나있는 현상을 사실 그대로 나타냈을 뿐 그 속에 자신의 사견과 생각을 한마디도 개입시키지 않았다는 뜻인 것이다.

 

진실을 보게 되면 환상과 생각이 사라지고 모든 관념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것을 가장 쉬운 언어로 묘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진실을 말하는 데는 어려운 문자나 수식이 아무 필요가 없게 되며 생활 속의 일상적인 언어만 있으면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불교가 현재와 같이 생명력이 사라지고 관념적이 된 이유에는 삶에 거의 도움이 되지 못하는 관념과 논리에 빠져 우주와 생명의 성품인 사랑과 이치를 외면한데서 비롯한다.

 

요즘 많은 불교사원이나 관련서적, 인터넷 사이트를 가보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관념들을 엮어서 결론 없는 이야기를 나열하고 있는 것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이러한 글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 해도 돌아서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 이유는 이러한 글들이 생생한 생명의 실상을 보지 못하고 전해들은 이야기를 관념 속에서 논리화시켜 환상을 지은 것이기 때문이다.

 

진실나눔터에서 쓴 어떤 사람의 글 중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인간의 삶이란 간단치가 않은 것 같아요.. 많은 것들이 해결되어 마음의 자유를 얻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그 자만의 자락으로 더 큰 번뇌와 고통이 다가오거든요.. 문제는 그 문을 찾는 방법인데요... 세상의 현상과 인연에서 관심을 끊고 자기 내부로 깊숙히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생각과 이성은 마음과 밀접하게 관련되는데요... 마음이 활동하는 상태에서의 생각은 거짓인 경우가 많습니다.. 마음은 집착을 먹고 살거든요... 그것이 악한 것이든 선한 것이든지요.. 님이 자신의 세상과 믿음과 존재를 모두 버리는 용기를 내시어... 문을 찾게 되시길..."

이 글은 집착을 버리면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는 식으로 전개되어 있으나 그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 속에는 아무런 실체도 없이 전해들은 관념들을 엮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그 속에는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마음을 닦는 것인지? 마음의 자유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해야 어두운 세상에서 참과 거짓을 가려 밝음을 찾을 수 있는지? 인간이 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나 수많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 가야 하는지? 삶이 무엇인지? 깨달음이 무엇인지? 에 대한 아무런 대답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오늘날 구도의 길을 가는 많은 사람들이 빠진 함정이다.

이와 같이 요즘 조금 안다고 하는 이들은 전해져 내려오는 잘못된 논리와 관념에 빠져 진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진리를 말하면 틀린다고 자신 있게 말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면서 모든 구별을 초월해 살아야 한다고 감히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지나치게 되면 자기착각에 빠져 법을 보지 못하면서도 무위법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면서 함부로 이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고 법을 모독하는 광적 현상을 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짓을 함부로 하는 것은 마음의 자유를 얻은 증거가 아니라 불성에 이를 수 있는 선근과 양심을 완전히 상실해 버리고 악과 어둠의 화신이 되었다는 증거일 뿐인 것이다.

 

그 동안 소위 깨달았다고 하는 많은 선지식들이 나타나 수많은 기행과 선문답을 남겼지만 그들이 세상을 밝히는 이치와 뜻을 거의 남기고 못하고 사라진 것은 어두운 세상에 태어나 자신의 역할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정한 깨달음과 진리의 실체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가 남길 수 있었던 것은 평생 보고 들었던 깨달음에 대한 관념과 수행에 관한 이야기들 뿐이었던 것이다.

 

이들을 옹호하는 자들은 해탈에는 마음의 자유를 얻는 해탈과 지혜를 얻는 해탈의 경지가 있는데 선 지식들은 심해탈은 얻었으나 혜해탈은 얻지 못했기에 깨달음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으나 법을 펴지는 못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이 맑아지면 그 거울에는 세상의 이치가 저절로 비치는 것이어서 해탈과 해탈은 절대 구별될 수 없는 것이니 심해탈과 혜해탈을 구별하는 것은 세상이치가 비치지 않는 깨지 않은 마음을 변명 하기 위한 강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진정한 해탈을 하게 되면 세상의 뜻을 보게 되고 예수와 석가와 같이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길에 대해 분명한 가르침을 펴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깨달음과 진리의 실체는 어둠을 맴도는 안개와 같이 실상 밖에서 맴돌며 세상의 눈을 흐려왔다. 그리하여 깨달음과 진리는 사람들마다 자신들의 관념 속에 그린 그림이 되어 십인 십색의 환상을 짓고 있었고 그 그림은 각자의 감정과 환경에 따라 제멋대로 변하여 세상을 더욱 혼동 속으로 몰아 넣었던 것이다.

 

진리는 수학의 공식과 같이 명확한 것이다. 깨달음의 실체를 알게 되면 마치 눈앞에 자연을 보듯 세상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치와 진실을 명확히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완전하고 신성한 우주의식(불성)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이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 위하고 축복하는 가운데 완전해지도록 뜻이 지어져 있다.

 

이 불성의 본질은 무가 아니라 존재함이며 살아 생동함이며 완전함이며 사랑이며 밝음이기 때문에 세상을 위한 인간의 사랑과 관심은 우주의 근본성품이자 존재의미로서 절대집착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땅으로 넘어진 사람은 땅으로 일어서야 한다.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태어난 인간은 삶을 통하여 자신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사람이 삶을 통하여 자신을 닦지 않고서 무엇으로 자신의 애욕과 습을 태우고 자신을 완성시킬 수 있단 말인가?

 

따라서 명상으로 욕망을 버리고 마음으로 구별과 집착을 버릴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땀을 흘리지 않고서 생각만 가지고 풍년농사를 이룰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이 허망한 일인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모르고 관념에 빠져 사랑과 진실을 찾는 것조차 집착이며 유위법이라 주장한다면 그 자는 공에 빠진 자로서 무위법이란 단어에 갖혀 그야말로 토끼뿔, 거북이털만 찾는 어리석은 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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