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세상을 운영하는 이치 본문

세상을 구하는 길

세상을 운영하는 이치

gincil 2013. 4. 21. 22:41

오늘날 식자들은 오리무중에 빠진 진리를 알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 진리는 모든 학문의 핵심이기에 그 실체를 안다면 학문 전체를 다 아는 것이라 할 정도로 그 비중은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애타는 노력의 일환으로 학자들은 진리를 절대적 진리와 상대적 진리로 나누어 진리의 실체를 파악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진리는 진리일 뿐,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인 것이지, 진리 자체가 상대적이거나 절대적인 것으로 나누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러한 구분은 진리를 삶의 실체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단순한 학문적인 관심으로 연구하려고 하는 학자들의 현학적 욕심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상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인간은 누구나 목적의식을 갖고 있으며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인생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절대적 권위를 갖춘 진리는 필요 없으며 때와 장소에 따른 상황적인 가치기준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면 인간은 깊은 숙고를 거쳐 스스로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진리 자체의 권위를 떠나서도 스스로 책임과 의무를 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리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각 개인의 운명이 걸린 결단의 순간에 자신의 결정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준거 기준이 있느냐 하는 문제인 것이다. 상대적 진리론과 같이 절대적 기준을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인위적으로 상정한 생각만 가지고서는 결정적인 판단의 순간에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즉 외부적인 상황에 따라 가변적으로 움직이는 상대적 진리론은 결국 진리부재와 같은 상황에 처하도록 만들어 결국 진리부정과 이어지게 되고 진리의 역할과 구실을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것이다.

 

진리란 현실 속에 존재하면서 현상계를 실질적으로 관장하고 있는 원리로서 인간의 사고와 인식수준을 넘어서 실재하고 있는 거대한 우주적 흐름인 것이다.

 

이것은 사실 속에 존재하는 이치이며 생생한 삶을 기초하는 진실로서 이것 이외에 생각으로 지어낸 모든 것들은 실재하지 않는 환상이고 거짓이며 비진리인 것이다.

 

진리를 확인할 수 없는 인간들의 좁은 시각에서 볼 때 진리의 존재여부에 대한 판단은 결국 믿음과 선업에 대한 인연으로 귀착될 수밖에 없지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성자라고 인정하는 석가와 예수께서는 온 세상에 가득 차 있는 거대한 이법이 존재함을 보시고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서까지 진리의 존재와 의미를 분명히 밝히셨던 것이다.

 

이러한 진리는 성자들이 나기 이전부터, 아니 이 우주가 생겨나기 이전부터 이 우주의 근원인 완전한 신성(불성)속에 내재하고 있는 속성으로서, 그 속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진리는 인간의 삶의 바탕이자 지주로서 가장 결정적인 요소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인간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며 인간이 보던 안보던 성자들이 보셨던 그 진리는 지금도 엄연하게 이 세상을 관장하면서 삶에 엄정한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을 설하시고 난 뒤에 한마디도 말하지 않았다고 하신 이유는, 그 많은 당신의 말씀이 자연 속에 있는 모든 현상 속에 가득차 있는 진리를 이야기하신 것이지 자신이 지어내어 한 말은 한마디도 없다고 하는 의미인 것이다.

 

이와 같이 온 세상에는 진리가 가득 차있고 인간에게는 하늘이 무너져도 믿고 의지할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며 그것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상 속에서 자신의 삶을 지키는 빛으로서 개인의 사소한 이익에도 불구하고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가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면 우리들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것이며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이유를 갖다 붙이더라도 지켜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세상에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기 불가능하며 또 절대적 진리의 현실적 적용이 너무 다양해 무엇을 어떻게 해라는 것인지 헷갈린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절대적 진리론은 세상에 너무나 엄격한 도덕적 원리를 주장함으로써 비인간적이라는 비판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를 잘못 파악하고 하는 주장이기 때문에 합당한 비판이 못 된다.

절대적 진리를 주장하는 자가 무리한 원칙론자나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인간이 가야 할 절대적 진리에 기준해서 현실 속에서 무리 없이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는 것이 지혜 있는 진리론자인 것이지 세상을 축복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는데 무리하게 세상을 힘들게 하는 무리한 방법을 선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진리가 혼동을 빛는 이유는 진실의 모습과 이치를 분명히 모르기 때문에 세상일을 획일적인 기준으로 적용하다 보니 현실과의 괴리가 나타나는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크게 보면 세상은 완전한 이치의 세계로 되어 있어 세상 모든 곳에서 동일한 원리가 똑같이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세상 속에 나타나고 있는 일은 인간의 몸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기에 세상의 이치를 알려면 사람의 몸을 보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구 사회과학의 유기체설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본디 세상을 하나의 생명체로 보아온 동양의 범아일여의 사고방식에 본래부터 있어온 세계관인 것이다.

 

인간의 몸은 눈, , , 손발, 뼈와 내장, 생식기와 머리가 각각 자기역할을 하며 몸을 구성하고 있다.

눈과 입과 같은 감각기관은 좋은 것을 무조건 탐하려 하고 위장은 모든 것을 흡수하려 하며 손과 발은 끝없는 수고를 되풀이하고 생식기는 이성을 원하며 머리는 전체를 조화시키려고 한다.

하나 하나를 보면 매우 편협된 역할을 하는 것 같아도 이 모든 것이 조화롭게 모임으로써 정상적인 사람의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를 보지 못하는 자는 각 부분만 생각하여 생식기는 천하고 머리는 고상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전체를 보게 되면 이 모든 것이 모두 자아의 완성을 향해 지향하고 있으며 모든 것에는 각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체가 완전한 조화를 이루는데는 몸의 각 부분이 자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하며 전체와 조화되는 균형 있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것을 어기고 어느 한 부분이 지나치게 되면(입이 너무 많이 먹거나 생식기가 너무 성을 밝히게 되면) 그 부분은 병이 나게 되어 몸 전체가 생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세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유형의 사람들이 있다.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 장사를 하는 사람, 예술을 하는 사람, 공직에 있는 사람, 정치를 하는 사람 등, 이 모든 사람들이 신체의 각 부분에 해당하는 역할을 담당하며 각 분야에서 사회의 완전한 모습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삶의 모습도 전체를 보지 못하고 한쪽에서만 보면 또 다른 한쪽을 부정하게 된다. 부가 제일이라고 유흥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명예를 원하는 정치인을 이해하지 못하고 일만 하는 사람은 쾌락을 즐기는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사회에는 여러 가지 욕망에 대한 수요가 있어서 그것을 충족시켜 줄 때만이 사회가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은 일만 하며 살아갈 수 없으며 힘든 격무 뒤에는 쾌락과 휴식으로 스트레스를 풀어야 더 건강한 삶을 영위해 나갈 수 있기에 사무실과 공장도 필요하지만 경기장과 유흥장도 필요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여러 가지 욕망을 전체적으로 조화시켜주는 사회정신이 있어야 그 욕망을 즐김이 사회전체의 건강에 긍적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마치 인간의 몸에 정신이 있어 몸의 각 부분이 요구하는 욕망을 조절하는 것처럼 한 사회에도 지도정신이 있어 분출하는 각 개인의 욕망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며 만약 이것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사회는 혼돈에 빠져 곧 붕괴하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 물질문명이 혼란 속에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회의 중심가치와 지도력을 상실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은 모든 욕망과 부분들이 각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해서 단순히 그 자체가 전부거나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이 단순한 육체적 생존만을 목적으로 하여 살고 있지 않듯이 이 세상도 단순히 존재유지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완성을 지향하고 살고 있으며, 이 세상은 완전한 신성을 이 땅에 실현하여 지상극락의 완전한 뜻을 지상에 펼치기 위해 계속 움직이며 원인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뜻이 숨어있다는 것을 모르고 각자가 자신이 세상의 전부라고 자기 주장만 한다면 결국 자신의 업을 받게 되고 전체는 붕괴되고 마는 것이다.

즉 위장이 제멋대로 탐식하면 그 몸은 성인병으로 죽음을 맞게 되고 생식기를 함부로 사용하면 세상의 비난과 불치병에 걸려 인생을 망치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의 각 부분은 건강한 몸과 인격을 갖추어 자아완성을 이루는데 기여해야 하며, 각 개인은 사회전체의 행복과 밝은 세상을 향해 기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체적으로 잘 조화될 수 있을 때 그 몸과 사회는 건강하고 밝은 삶을 누릴 수 있게 되는데 이때 중심적 역할을 하는 것이 인체에 있어서는 양심과 이성이며, 사회에 있어서는 지도정신(정의와 이치)인 것이다.

인간의 정신과 사회의 지도정신은 각 부분의 역할이 전체와 조화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담당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 각 부분이 자기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해주고 역할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이것을 모르고 순진한 이상론에 빠져 모든 것을 한꺼번에 획일적인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되며 세상을 같은 모습으로 만들려고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상황에 처한 다양한 인간군상들이 존재한다.

그들은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할 이웃이기에 그들의 사연과 고통은 결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랑은 이들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인간의 가야 할 진리와 완성으로 나아가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미와 가치를 전혀 모르는 자에게 진리를 이야기할 수 없는 일이며 그들에게는 먼저 그들의 현실을 해결해주는 것이 사랑인 것이다.

 

성경말씀에도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라는 구절이 있듯이 세상을 키우는 바른 이치는 각자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고 이를 계기로 점점 그들을 더 성장시켜 완성의 길로 이끌어주는 것이다.

 

진리는 사실에 기초해 나타나는 이치이기 때문에 모든 일은 현실을 근본바탕으로 하여 조금씩 문제를 풀어나가면 사회는 조화되는 가운데 점차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이치이다.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은 과거의 수많은 원인들의 결과로 인해서 나타난 것이기 때문에 사실을 떠난 진리는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사실을 떠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지금 현실로 나타난 일들을 인정한 후 그 원인과 결과를 밝혀 그에 따른 새로운 원인을 지어내는 것이 가장 올바른 해법인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 나타나는 것이기에 원인만 정확히 알면 해답은 저절로 나타난다.

 

그리고 오래되고 고질적인 병근이 있는 문제를 푸는 것은 주변에 있는 환경이 모두 곪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한번의 해법을 제시한다 하여 치유될 수 없으므로 인내심을 갖고 문제를 하나 하나 차근차근 회복시켜 가는 정성어린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요즘 세상사람들이 사회병리의 표본이라고 생각하는 창녀촌이나 도박장의 문제를 생각해 볼 때도 똑 같이 적용할 수 있다.

 

도덕주의자들은 창녀촌이나 도박장을 악의 원천이라고 생각하여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사회적 욕망에 대한 대책이 되고 또 그로 인해 생계를 해결해 가고자 하는 많은 사람들의 호구지책도 된다.

 

도박장이나 경마장 같은 것이 실제 많은 사회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기는 하나 그것이 사회에 유용하게 쓰일 재원을 마련해 주며 스트레스에 쌓인 현대인의 커다란 위안의 장이 되고 있는 것도 사실인 것이다.

 

사회에 실재하고 있는 다양한 차원의 욕망을 무조건 부정해서는 안되며 합리적 절차를 거쳐 이를 해소시켜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존재하고 있는 현실은 엄연한 것으로서 이를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이럴 경우 욕구자체를 부정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일들이 정당한 과정을 거쳐 사회의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기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도록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욕망이 사회 속에서 정상적으로 해소될 수 있을 때 그 사회는 안정된 기반하에 질서가 유지되며 경제적으로 번성하게 되는 것이다.

 

삶은 본질은 각자가 자기의 삶을 주체적으로 경영해나가며 자기가 책임지는 것이 원칙으로 한다.

미국이 발전하는 이유는 각 개인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살리도록 하여 개인의 가능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위정가들은 자신이 세상을 모두 책임진다는 식이 되어 개인의 도덕적 판단에까지 끼어 들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현실로 존재하는 욕구와 문제는 그것을 부정할 것이 아니라 점차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다만 그것이 사회적으로 부당한 경우, 즉 남에게 해를 끼친다던가 또는 타인의 의사에도 불구하고 강제적으로 부녀자를 약탈하고 유린하는 경우에만 막고 보호하면 되는 것이다.

 

스스로 창녀란 직업을 택하여 쉽게 돈을 벌어 생활하려고 하다가 스스로 불행한 인생을 사는 것은 결국 자기의 업이며 자기가 책임져야 할 문제이지 주체성을 가진 인간의 행동을 강제적으로 관여하거나 제한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만 인간의 길이 무엇인지 자신이 행한 삶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한 충고는 가능한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일은 질서하에 놓여있는 것이며 진리는 모든 것을 이치대로 이루어지도록 해준다.

 

그러므로 이러한 진리에 따라 모든 것은 자기책임 아래 주체적으로 살아가도록 해야 할 것이며 그 결과는 스스로 받도록 하는 것이 세상을 지켜나가는 바른 이치이며 기본적인 운영원리인 것이다.

'세상을 구하는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라의 중심을 바로 세우는 일  (0) 2013.04.21
정의가 없는 사회  (0) 2013.04.21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0) 2013.04.21
농사짓기와 국민의식개혁  (0) 2013.04.21
세상을 보는 눈  (0) 2013.04.21
Comments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