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유식파의 출현과 선정 중시 현상 본문

☆ 진실의 근원

유식파의 출현과 선정 중시 현상

gincil 2013. 4. 24. 11:57

㉧ 유식파(요가짜라)의 출현과 선정 중시 현상

용수에 의해 이론적 기반을 다진 대승불교는
다양한 관점에 따라 새로운 경전이 생겨나면서
관념적인 교리체계를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그중 가장 강력한 교파는 요가선정의 체험에서 오는 마음의 작용을 중시하는 유식파인데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공 대신에 마음을 이 세상의 실체로 봅니다.

왜냐하면 요가선정의 과정에서 의식의 주체로 느껴지는
텅빈 마음의 세계를 경험하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에 깔려있는 것은 공이 아니라 마음으로 본 것이지요.

그래서 유식학파를 요가짜라라고 하는데 '요가를 실천한다'라는 뜻입니다.

이들은 마음이 깨달음을 낳는 원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여
업과 깨달음과 불성의 관계를 밝히는 여래장연기설과
마음의 인식능력을 분석하는 유식(唯識)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이 사상은 용수가 죽고 난후(AD 250년) 태어난
마이트레에야(Maitreya, 彌勒, 270~350)에서 비롯되어
아상가(Asanga, 無著, 310~390)에 의해 체계화되었으며
그의 동생인 바수반두(世親)에 의하여 확립되었습니다.

무착은 북인도 간다라 지방의 푸루샤푸라 출신인데
처음에는 소승불교로 출가했다가 나중에 대승불교로 전향하여
미륵의 가르침을 받고 유식학을 체계화했습니다.

그리고 세친(世親, 바수반두)은 무착의 동생인데
부파불교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사론』을 쓴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는 처음 설일체유부로 출가하였다가 다시 경량부를 배웠는데,
경량부의 입장에서 유부를 비판하려고,
처음 유부를 배웠던 곳으로 몰래 들어가 공부하고 있었습니다.

이에 그의 스승 오입(悟入)존자는 세친의 뜻을 간파하고
세친에게 화가 따를 것을 염려하여 돌아갈 것을 종용했습니다.

그래서 본거지인 아요다로 돌아온 세친은 『대비바사론』의 강론과 함께
이를 6백게송으로 요약하여 구리판에 적어 코끼리에 싣고 다니면서
“누가 이 게송을 대적하겠는가”라고 외치고 다녔는데
아무도 대적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오입존자는 그 이론에 의심을 품고
세친에게 주석을 달아 해명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때 작성된 것이 바로 그 유명한  『구사론』인데,
구사론은 부파불교의 모든 이론을 종합한 총서로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나오는 이론들은 순수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기 보다는
수미산을 중심으로 삼천대천세계가 펼쳐지고 18 지옥계를 나열하는 등
힌두적 우주관을 반영하고 있으니 부파불교의 변질성을 잘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부파불교의 결정판인 『구사론』의 저자이면서도
형인 무착의 권유로 부파불교를 버리고 유식파로 개종했으니
바로 여기에 세친의 정체성과 부파불교의 비생명성이 나타납니다.

『구사론』은 불교이론사에서 보면 부파불교의 총서로 인정받고 있지만
형의 권유로 한 순간에 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것이
진리로서의 생명력이 사라져 버린 하나의 이론서에 불과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바로 대보살이라 일컫어지는 논사들의 실제 모습인 것이며
부파불교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구사론』의 정체인 것입니다.

그들은 깨달음의 경지를 얻어 열린 눈으로 변치않은 실상의 진리를 밝힌 것이 아니라
뛰어난 머리로 논지를 모으고 분류하여 기존이론의 모순을 해결하는
새로운 논리를 만들어 낸 것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논리와 관점에 따라 그들의 입장은 수시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은 우주의 기본원리인 인과의 법칙과
인간의 올바른 행위와 선업을 중시하여 바른 마음과 선업을 쌓을 때
그 삶이 좋아지고 그 선근이 후생에 남아 여래의 종자가 된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 후기 불교에서는 아트만을 부정하고 무아를 주장함으로써
부처님이 말씀하신 업의 원리와 윤회의 주체인
생명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모순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노력이 아비달마 형성의 기반이 되며
불교가 심리적, 철학적 논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 관념을 추구하는 희론이 될 가능성도 큰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고정적 실체로서 윤회하는 아트만을 부정하는 논리로
초기경전에서는 아의  실체가 오온(五蘊, 색수상행식)의 모임에 불과하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오온은 연기하므로 무상하고 결국 공에 불과하기에
아는 궁극적인 실체가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오온이 모인 개아가 영원한 나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지
나의 실체가 없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부처님은 중생들이 쓸데없는 욕망과 집착에 의해
너무 나라는 것에 집착하고 영원할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살기에
그러한 집착심을 깨기 위해 현실의 나는 불변의 실체가 아니니
너무 집착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부처님의 말씀에 의하면  무아(無我)라고 하기보다는
비아(非我)가 되어야 보다 원뜻에 충실해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열심히 수행하여 다음 생에 부처가 될 수 있다고 수기를 준 것은
자신의 업보를 안고 가는 윤회주체가 있다는 말을 증거하는 것이니
업과 윤회는 불교의 중심원리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분명한 윤회의 주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기와 후기의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일부말씀을 근거로
무아와 무상을 불교의 중심교리로 삼고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덕과 윤회의 주체로서의 아의 존재와
제법무아라는 정의 사이에 나타나는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불교는 수천년간 고민의 수렁에 빠졌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부파불교의 복잡한 이론이 나타났으며
최종적으로 유식학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유식학에서는 번뇌와 의식의 뿌리를 규명하려는 노력으로
부파불교에서부터 나타난 말나식 연구를 바탕으로
윤회의 주체이자 현상계의 원인인 아뢰야식을 상정하여
업과 윤회와 깨달음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럼 유식론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식학의 체계는 무착이 확립했는데
그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순중론(順中論)>, <육문교수습정론송(六門敎授習定論)> 등이 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섭대승론(攝大乘論)>으로,
여기서는 대승불교의 특성을 10항목으로 나누어 체계적으로 논하고 있습니다.

이 논서는 중생심으로부터 해탈에 이르는 깨달음의 발달단계를 나타내고 있는데

소지의분(所知依分)에서는 해탈의 바탕인 아뢰야식에 대해 논하고 있고,
소지상분(所知相分)에서는 유식론의 원리인 삼성설을 논하고 있습니다.

유식파들은 인간의 의식을 분석하면서
우리 몸은 여섯 가지의 감각기관[六根 안이비설신의]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색성향미촉법의 여섯가지 경계[六境]를 인식하게 되는데 이를 합처 십이처(十二處)라 하며
이 세상 모든 것을 의미한다고 하여  '일체'(一切)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소승불교 시대에서는 현실적인 인식이 이루어지는 6식설만을 가지고
인간의 정신계와 사실적인 현상을 설명했지만

대승불교 시대에 들어서는 철학적 관념성이 중시되면서
궁극적인 실체로서 항상 변화하지 않고 상존하고 있는 제8 아뢰야식을 상정하여
우주의 실체와 깨달음을 규명하는데 활용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수행과정 속에서 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불변의 의식체가 있음을 생각하고
이를 우주의 실체인 아뢰야식으로 정의한 것입니다.

그리고 제6식인 의식 보다는 깊고 제8식인 아뢰야식 보다는 얕은 매개체로서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  na)을 상정하여 나의 주체로 보는데
이 말나식이 요즘말로 자아의식으로서
말라식이 나라는 구분을 지어 중생들이 세세생생 윤회한다고 봅니다.

그들은 새로운 명칭으로 주장되는 아뢰야식과 말나식이
석존이 설하신 심의식설에 위배되는 것이 아님을 밝히기 위하여,

초기불교시대부터  설해진 심(心)·의(意)·식(識)에 대비하여
아뢰야식을 심, 말나식을 의, 육식을 식에 각각 배당시켜
정교한 팔식(八識)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럼 아뢰야식에 대해 좀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현대 심리학에서 무의식 또는 잠재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아뢰야식에 해당하는데
아뢰야라는 말은 저장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의식 속에 이루어지는 모든 인식과 행동의 결과가
아뢰야식 속에 하나의 씨앗으로 저장이 된다고 하여
아뢰야식을 한자로 장식(藏識)이라고 표현합니다

이러한 심층에 있는 아뢰야식도 식의 일종이기 때문에
인식대상을 가지는데 그 대상은 다음 세 가지입니다.

첫째 업 종자(種子)입니다.
아뢰야식은 안에 저장되어 있는 행위의 결과인 업을 대상으로 지키고 있기에
업 종자들을 그대로 유지하여 이어나가게 됩니다.

둘째는 신체기능입니다.
아뢰야식은 이 신체기능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기에
무의식 영역에 있으면서도 항상 신체의 현상들을 바라보고 있어
신체는 조화를 유지하며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자연계입니다.
비록 자연계가 무의식적으로 자존하고 있지만
아뢰야식은 이곳도 인식대상으로 하고 있어서
자연계와 인식의 주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아뢰야식은 우리들이 잠잘 때나
죽어서 유혼이 되어 돌아다닐 때, 어머니의 뱃속에 들어 있을 때에도
업과 육체와 세상을 지켜보면서 그 활동을 계속하므로
윤회의 바탕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 원인으로는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아애(我愛) 등 근본번뇌를 일으키게 되고
이들이 아뢰야식 속에 업의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제7 말나식이 이것을 '나와 내것’이라고 착각함으로써
번뇌의 근본인 탐(貪)·진(瞋)·치(癡)가 시작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뢰야식이 하나의 주체로 분리되는 것은
자아의식인 말나식이 대상인 아뢰야식을 나라고 구분짓기 때문인데

아뢰야식 속에 저장된 업종자는 힘을 가지고 계속 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에
말라식은 끊임없이 자기를 인식하게 된다고 합니다.

만약 이러한 나의 구분작용이 중단되려면 업종자가 다 사라져야 하는데
업은 결코 쉽게 사라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선정을 통하여 이 모든 업종자가 환임을 깨닫게 되면
아뢰야식은 불성으로 돌아가며 아상인 말라식은 저절로 소멸된다고 합니다.

이러한 말라식(칠식)과 아뢰야식(팔식, 근본식)의 관계는
파도와  물에 비유됩니다.

파도가 물을 떠나서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칠식은 그 생기(生起)의 원인인 아뢰야식에 의지하지만

파도가 잠잠해지면 파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맑은 물만 남듯이
모든 번뇌와 자아의식이 사라지고 불성만 남아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요가 수행을 해야 하는데
오직 선정에 의해서만 번뇌가 지혜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그 동안 많은 이론이 있었지만 유식학파의 핵심 주제는 '전식득지(轉識得智)’입니다.
즉 식을 전환시켜 지혜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불’이라고 하는데 중생의 마음을 부처님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이며
아뢰야식에 얼룩진 업종자를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그래서 ‘전식득지’가 유식학의 요체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아뢰야식 속에 들어있는 업종자를 모두 지우게 되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있는 그대로가 훤히 보인다 하여 ‘대원경지(大圓鏡智)’라고 하는데,
크고 원만한 거울과 같아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환히 비춘다고 뜻입니다.

그래서 유식학파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뢰야식은 선과 악업의 종자로 가득차 있으나
수행만 잘 하면 순식간에 대원경지로 전환될 수 있으니
모든 중생들은 부처가 될 불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실상과 다른 커다란 관념상의 오류가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 선정을 통해 이 세상이 무명과 환의 소산이라는 것을 깨닫는다고 해서
업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업은 환상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통하여 체험한 사실들이
자신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가만히 앉아 생각만으로 지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치열한 실천 속에서  업과 삿됨을 극복하여
마음의 굴복을 얻어 낼 때만이 지울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선정의 최고단계인 비상비비상처에 까지 올랐으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해탈을 얻지 못했던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삶 속에서 인과의 실천을 통해 업을 지우려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선정으로 지우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고 나서 하신 말씀이
선정과 고행만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으니
팔정도로 실상과 진리를 보는 눈을 깨치고 바른 마음을 얻어
좋은 원인을 지어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 다음 유식학의 기본이론인 삼성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유식학은 현상계는 세 가지 속성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으로 평소 우리들의 밝지 못한 견해 등으로 말미암아
실체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착각하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일상 속에서 우리가 무엇을 인식할 때에
이성적으로 정확하게 판단하여 사실 그대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편견과 선입견 같은 허망된 분별심에 의해
고통과  불행을 일으키는 환을 만들어내는 것을 말합니다.

두 번째는 현상계의 모든 것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조건과 환경이 인연되어 나타난다는 [의타기성(依他起性)]입니다.

셋째는 이러한 두 성질을 모두 떠나서
우주의 바탕에서 순수한 모습으로 항상 여여하게 존재하고 있는
실체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중관학은 연기(緣起)하므로 무자성(無自性)이며 공(空)하다고 주장하는데 반해
유식학에서는 선정을 통해 상호의존성(의타기성)과  분별망집(변계소집성)의 허상을 벗어날 때
본래의 원만한 불성(원성실성)을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유식론에서는 이와 같이 변계소집을 일으키는 주체[能遍計]로
제6식인 의식과 제7식인 말라식을 들고 있습니다.

제6식인 의식은 오온을 대상으로 실아(實我)로 착각하고
제7식인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대상으로 실아로 착각한다고 합니다.

변계소집의 대상은 이러한 착각에 의해 실재하는 것으로 오인한 것이므로
현상계의 모든 것은 사아(似我, 잘못된 아)와 사법(似法, 잘못된 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분별망집으로 생겨난 오온, 십이처같은 모든 객체[所遍計]들은
인연으로 생겨난 존재들이기 때문에 의타기성이라고 합니다.

삼성 중에서 의타기성에 대한 이해는 매우 중요합니다.
변계소집성과 원성실성이 바로 의타기성을 매개로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모든 것이 서로 의지하여 나타나는 의타기성임을 깨닫게 될 때
변계소집성은 체와 상이 없는 무상한 환이 되고 잡염의 의타기성도 저절로 소멸되어
그 바탕에 여여히 존재하는 청정상(원성실성)을 만나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를 하늘에 비유하면 맑은 하늘이 원성실성이며
하늘에 번뇌의 구름이 걸려 있을 때 그 구름을 변계소집성이라 하며,
번뇌의 구름에 오염되어 흐려져 있는 하늘을 의타기성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번뇌의 구름이 소멸될 때 흐린 의타기성도 저절로 사라지며
맑은 하늘인 원성실성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원성실성(圓成實性, parinispanna-svabhava)은 이미 완전하게 성취되어 있는
참다운 법의 성품(진여 眞如)을 말하는데, 아득한 옛적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진여를 바로 원성실성이라고 하는데,
모든 법에 두루하고[圓] 체성이 상주불변하여 항상 변함없이 성취되어 있으며[成],
모든 법의 진실한 체성이어서 허망하지 않다[實]는 뜻입니다.

그래서 유식론은 이 현상계의 바탕에 여여히 존재하는
완전한 진여를 찾는 것을 깨달음의 요체로 보는데
오직 선정을 통해서만  이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즉 선정을 통하여 이 세상이 허망한 환이며 의타기성에 의한 변계소집임을 깨달으면
본래부터 여여하게 존재하고 있는 원성실성을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식학파들은 그들이 환으로 간주하는 습이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실제 자신이 수많은 생을 거쳐 스스로 지은 것이라는 사실과

해탈지경이 본래부터 존재하는 진여를 홀연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정화하는 행을 통하여 완전하게 성취하는 것임을 알지 못했습니다.

부처님은 자신 속에 들어있는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바른 가르침을 배우고 행을 익혀 닦아 나가야 한다고 했지만

유식파들은 힌두교의 관념을 받아들여 업은 하나의 환에 지나지 않으므로
선정을 통해서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는 자각을 가짐으로써
일시에 타파하고 불성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부처님 법과 유식파의 이론 사이에 차이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에게는 부처가 될 여래 종자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타고난 종자는 하나의 씨앗에 불과하므로
그 열매를 맺어야 본래의 성품을 완전하게 갖추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존재의 공통적인 순환원리입니다.

모든 열매는 그 성품을 씨앗 속에 간직하고
비바람과 모된 추위와 거친 태양을 이겨내고서야
비로소 본래의 속성을 가진 완전한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가꾸지 않은 씨앗이 열매의 성품을 내재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을 가꿀 생각을 하지 않고 씨앗을 갈라 본래 성품을 찾으려 한다면
결코 열매의 맛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그 실체도 찾을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해탈지경도 이러합니다. 해탈은 가꾸어 성취하는 것이지
본래부터 이루어져 있는 것을 보물찾기하듯 찾아내는 것이 아닙니다.

말법은 이러한 올바른 이치를 부정하고
바른 원인을 쌓지 않아도 홀연히 깨달을 수 있다고는 최상승법이라고 유혹하기에
어리석은 중생들은 정법보다 말법에 더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말법은 해탈에 이르는 법의 실상과 이치를 모르고
듣기는 좋으나 이치가 없는 소리만 하기 때문에
삶을 망치고 세상을 어둡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잘못된 관념에 빠져 있기에
오늘날의 말법에 빠진 불교도와 힌두교도들은
삶을 헛되다 하여 좋은 원인을 짓기를 경시하고
속세를 떠나 선정만을 수행하는 무익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법의 병폐인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음과 업과 해탈의 실상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좋을 듯 합니다.

모든 것은 실상을 정확히 알면 모든 오해와 거짓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도 실재의 사실을 밝힘으로써 모든 희론과 논쟁으로부터 벗어나
영원한 진리의 길을 가신 것입니다.

유식론의 주장과 같이 이 세상은 마음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마음의 인식과는 별도로 실재하는 세계가 분명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실상에 대한 설명과 이치를 밝히는데 평생을 보냈고
유부에서도 5위 75법과 연기론을 실유실법(實有實法)이라 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인식한다는 것은 인식의 주체가 있어야 하고
그 대상인 실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마음이 작용해 사물을 인식한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이 존재하지 않으면 인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당연한 이치를 무시하고
주체가 인식하지 못하면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으며
우주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는 주장은
현실을 무시한 추상적 관념론이며 지나친 독단인 것입니다.

그럼 실재가 무엇이며 마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실재란 우리들이 지금 보고 듣고 느끼고 만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유식론자들은 그것도 나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말은 틀렸습니다.
그것은 마음 안 뿐만 아니라 마음 밖에도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느끼고 상대도 느끼고 제3의 도구로도 측정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외부에 실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눈앞에 명확히 존재하고 움직이고 있는 사실을
공하다 하고 실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니
유식학을 지나친 관념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마음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겠습니다.

마음은 생명의 주체이자 윤회의 주체인 생명의 핵이
인연을 만나 의식이 피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생명의 핵은 생명의 기운에 의식이 붙어있는 형태로 되어 있는데
죽어서는 영혼이 되어 떠돌다가 다시 사람의 몸에 뿌리를 내려
인간으로 태어나 살면서 마음의 농사를 짓게 되고
다시 자신의 열매이자 다음 생의 씨앗인 영혼을 열매맺어 돌게 되는 것입니다.

그 형태는 마치 하나의 씨앗이 땅에 자신의 뿌리를 내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고 순환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때 땅에 뿌리내린 싹을 보고 그대의 근본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싹은 자신의 근본은 땅이라고 하겠지만
실상을 아는 사람은 땅이 아니라 과거의 씨앗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사람도 그러합니다.
사람에게 당신의 근본이 누구냐고 물으면 자신의 근본은 부모라고 말하지만

생명의 실상을 보는 사람은 인간의 근본이 육체의 근원인 부모가 아니라
그 사람의 생명의 씨앗인 과거의 영혼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즉 인간에게 있어 영혼은 씨앗이며 부모는 땅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를 정확히 이해해야 생명현상을 바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신 속에 자리잡은 생명의 핵은 마음을 통하여 삶을 체험하며
자신의 잘 잘못과 밝음과 어두움을 자신의 핵 속에 간직하게 됩니다.

현대 심리학은 여기까지는 논리적으로 유추해 들어가서
강한 경험은 인간의 의식 속에 오래 동안 기억되며 무의식에까지 침투된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자연의 이치에서 볼 때 원인이 아무 결과없이
그대로 사라지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작은 것은 작은 대로 큰 것은 큰 대로 인간의 내면 속에 저장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이치를 배우고 좋은 원인을 지은 것은 모두
자신의 영혼 속에 남아 영혼의 씨알을 풍성하게 만들어

다음 생에 나서도 사실을 바르게 보고 좋은 마음으로 세상을 축복하게 되어
업을 지우고 인간완성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히 이어지는 생명의 씨앗을 좋게 만들기 위해

모든 부처님은 좋은 원인을 짓고 나쁜 원인은 짓지 않으며
그 마음을 깨끗이 하는 것을 공통된 가르침으로 남겼던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은 어디 있을까요?

그것은 자동차에 전기가 어디 있는가 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동차의 전기는 보이지 않지만
스위치를 켜면 흐르기 시작하고 자동차는 작동하게 됩니다.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생명의 핵이 몸 속에 깃들어 있다가 인연을 만나면
마음이 일어나면서 사실을 인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마음은 생명의 핵이 인연을 만나 피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마음이 경험한 모든 체험들은 생명의 핵 속에 저장되어 세세생생 남아 작용하게 되는데
이처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모든 업은 과거에 자신이 삶을 통해 스스로 지은 것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생을 통해 자신 속에 쌓인 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지은 자신의 잘못과 어둠을 극복할 수 있는 바른 견해와 밝은 마음을 얻고
좋은 원인을 쌓아 자신의 생명의 핵을 좋게 만드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듯이
삶을 통해 지은 것은 삶을 통해 극복하는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인과의 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마음과 깨달음의 실상을 무시하고 세상은 환이니
선정으로 아무 것도 없다는 것만 깨치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은
실상을 무시하는 말법에 불과한 것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말이 진리라고 한다면 그들의 말은 비진리인 것이며
부처님의 가르침이 정법이라면 그들의 주장은 말법인 것입니다.

그래서 후기의 불교는 부처님의 실상에 근거한 영원한 진리인 인과법을 부정함으로써
말법이 되어 버렸으며 불교를 믿는 나라는 이치를 벗어나는 행태가 만연하게 되었으므로
어둡고 불행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말법이 삶을 망치고 세상을 망치는 현상이니
우리가 진리를 찾고 정법을 만나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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