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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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근원

기수련관련 문의

gincil 2013. 8. 30. 14:45

요즘 나타나는 많은 무도들은 자기들 말로는 전통으로부터 계승받은 것이라 하지만 내가 알고 있기로는 대부분 그 맥이 단절된 관계로 전통과는 무관하고 수행도중 하늘로부터 전승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 즉 명상도중 신으로부터 받은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최고의 단계에 이르면 영무를 추게 되는데 이것은 곧 신이 몸에 내려와 신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내말이 의심스러우면 그러한 수행법들을 잘 살펴보면 그속에 영이 중시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도 처음에는 유형적인 기가 시작되지만 나중에는 신기로 변형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이를 잘 통제하지 못하면 매우 위험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무술동작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동작들이기 때문에 그 움직임 속에는 신이 들어오기 쉽게 되어 있다. 요즘은 신이 이슬처럼 많이 번져있는 시대라 신기가 든 자가 쓴 책이나 그림만 보아도 신에 감염될 수 있는데 신이 준 동작을 따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다. 따라서 단순한 외공이라 기가 작용하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질문이 나온 김에 여기서 기에 대한 본질적인 의문을 가져보자.

사람들은 어떠한 의도에서 기수행을 하게 되는가?

두가지 목적이 있다 하겠다.

하나는 건강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깨달음을 위한 것이다.

만약 건강만을 위한 것이라면 사기에 감염될 염려가 없고 비용도 싼 여러 가지 운동법을 행하는 것이 좋다. 달리기도 좋고 건강센타에서 체력훈련을 하는 것이 매우 안전하고 효과적인 것이다.


다음 도를 깨치기 위한 것이라면 과연 기가 도를 깨치는데 도움이 되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도를 깨친다는 것은 세상을 이루는 이치를 깨닫고 인간완성의 경지인 영원한 평안과 자유를 얻어 세상을 구하는 큰 일을 행하는 것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러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반야에 들어야 한다. 반야란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전이지대로서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경지이기 때문에 이곳에 들기 위해서는 마음 속에 있는 모든 업이 사라져야 한다. 조금의 티끌이 남아 있어도 모든 것이 사라진 반야지경과 하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반야에 합일하면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경지에 들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것과 통하게 되기 때문에 반야심경에도 제불보살들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수련을 하여 유형적인 기를 아무리 돌린다고 한들 마음의 업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유형적인 기운보다 더욱 미세하고 높은 차원의 것이기 때문이다. 종이 주인을 부릴 수 없듯이 거친 기운이 미세한 마음을 정화할 수 없는 것이다. 


업이란 것은 전생과 과거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마음 속에 들어온 것이니 오직 바른 깨우침과 행동으로서만이 지울 수 있지 기를 통하거나 어떠한 명상비법으로서도 결코 지울 수 없다. 즉 업을 정화하는 것은 삶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남의 것을 도둑질하는 업이 있는 자는 현실에서 스스로 개심하여 탐심을 극복하여 도둑질을 하지 않게 될 때 비로소 도둑질하는 업을 극복한 것이 되며 의지가 나약하고 추진력이 약한  업은 문제를 느끼고 현실을 극복하는 경험을 가질 때 극복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훌륭한 삶을 산 좋은 인연을 만나 배우는 것이 필요하며 진리를 만나 깨우치고 실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날은 이와 같은 성자들이 말한 진리의 인과법이 사라지고 신을 믿으면 신이 대속하여 구원을 해준다거나 세상이 공이니 모든 것을 버리면 된다는 말법이 성행하고 있으니 자신의 영혼을 구원하기가 매우 힘이 든 말세가 되었다.


따라서 이러한 말법에 빠져 혼자 앉아 명상으로 깨달음을 얻고 세상을 소유하려고 한들 결코 이루지 못한다. 가만히 앉아있을 때는 세상이 보이고 모든 것을 다할 것 같아도 일어나 세상에 나가면 세상을 보는 지혜가 없고 난관을 이겨낼 의지와 용기가 없어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것이 수행계의 현실인 것이다.


나도 수행을 통하여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기도, 단전호흡, 선정, 화두, 각종 명상법 등 거의 모든 수행법을 해보았으며 모든 수행마다 궁극의 경지에 도달했다. 머리가 열리고 황홀한 빛 속에 머물며 온몸이 열리고 몸의 각 부분마다 변화가 일어나고 안개가 끼고 감로가 흐르고 마음의 빛을 보고 단이 맺혀 명치와 인당 속에 굵게 박혔다. 무자화두를 깨고 공 속에 머물러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지락 속에 머물러 있어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 사이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었다. 단전호흡의 최고의 경지는 양신 출태하여 전지전능한 경지에 오르는 것이지만 내가 양신으로 출태하여 천만변화를 일으킨다한들 내 마음에 평안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보는 눈을 얻지않는 한 그것은 중생에 불과하며 양신출태한 중생이 할 일은 세상을 망치는 것 밖에는 다른 것이 있을 수 없었다. 즉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얻지 못하는 한 단이나 양신이나 모두 마음을 가리는 하나의 집착이며 업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모든 집착과 업을 벗어나기 위해 단마저 버렸던 것이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걸림이 있으면 결코 완전한 맑음을 이루지 못하며 반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동안 수행에 관한 많은 글을 쓴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 수행을 하신 것과 같은 이유이다. 부처님도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 고행도 했고 비상비비천의 경지 등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분에게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그분은 궁극적인 완성과 세상을 구할 수 있는 진리를 찾기 위해 수행한 것이지 개인적 지락이나 초능력을 얻으려고 수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시 보리수 나무 아래 앉아 시골처녀가 주는 우유 한잔을 얻어 마시고 명상에 들어 완전한 정각과 해탈을 얻어 영원한 평안과 삼세를 관통하는 깨달음을 얻었던 것이다.


그때 그분이 하신 말씀은 "나의 깨달음은 고행과 명상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거쳐 쌓은 공덕이 세상을 덮을만 하기에 이생에 와서 그 공덕으로 비로소 인연이 완성되어 정각에 이르렀다"고 하셨던 것이다. 나도 이와 같이 수행법 속에 길이 있는 것이 아니며  삶 속에 도의 본질이 있음을 알았기에 후인들을 위해 경계의 의미에서 나의 수행기를 올린 것이다. 


오늘날 완전히 맑은 마음을 이루기 위해서 세상을 공이라 여기고 모든 것이 본래 없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불교의 핵심요체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결론은 부처님이 내린 것이 아니라 힌두교의 마야(환)사상의 영향을 받은 후대의 공불교 저자들이 만든 이데올르기로서 진실이 아니다. 업과 이 세상은 사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인데 이를 관념에 빠져 공이라고 의념한들 결코 업이 사라지고 마음의 정화를 이룰 수 없다. 왜냐하면 생각만 가지고서는 생생한 삶을 통해 자신 속으로 들어온 구체적인 업의 충동을 지워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공이 아니라 실제인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자기를 보존하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업 또한 자기를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 사라지는 일은 절대 없으며 인연을 만나면 반드시 되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업을 씻어버리는 것이 수행의 요체인 것이다.

실제인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실의 삶을 통해 깨우침과 체험이 있어야만 한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속에서 자신 속에 들어온 업은 아무리 생각으로 모든 것을 다 지웠다고 해도 마음 속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어서 환경과 인연을 만나면 다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인연을 만나 마음에 큰 깨우침이 있고 실천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보는 지혜를 얻어 옳고 그름을 구분함으로써 한과 집착에 빠지지 않는 바른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며 좋은 원인으로 좋은 자기를 만들어 좋은 세상과 인간완성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업의 충동을 극복하여 자신의 의지대로 운명을 만들 수 있게 되고 삶의 문제가 사라져 지혜와 용기가 커지고 평안과 해탈이 다가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진리를 배우고 깨치고 실천하는 올바른 삶 이외에 다른 수행법이 없는 것이다. 이것을 부처님은 말씀하신 팔정도의 요체인 것이다.


인간이 산다는 것은 삶을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인 것이다. 식물이 햇볕을 받고 비바람과 천둥번개를 겪으며 현실의 생명활동을 통해 자신의 열매를 키워나가듯이 인간 또한 삶을 통해 겪게 된 모든 일들이 자신 속에 내재되어 영혼의 결실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진리의 인연을 만나 좋은 깨우침을 얻고 이를 실천하면 더 나은 자기를 만들고 좋은 영혼을 만들게 되는 것이며 잘못된 인연을 만나 불행에 빠져들면 그 잘못된 원인이 자신 속에 남아 자신의 영혼을 병들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을 외면하고 다른 방법으로 수행을 할 길이 없는 것이다. 즉 인간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지 수행을 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닌 것이다. 즉 생생한 삶이 곧 삶의 본질인 것이며 수행이나 명상은 그러한 과정 속에 나타난 기술적인 방법으로서 삶의 곁가지에 불과한 것이다.


올바른 삶으로 좋은 운명을 얻고 마음이 맑아지기 시작하면 세상이 보이고 지혜가 커지며 하는 일마다 성공하게 된다. 그리하여 세상의 지도자가 되는 근기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 좋은 마음과 지혜와 근기가 다음 생에도 이어져 계속 좋은 운명의 굴레를 돌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참된 진리의 인연을 만나면 인간세상의 행복이 아닌 인간완성을 꿈꾸게 되며 마지막으로 모든 속박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난 불사의 해탈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진리를 깨닫고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공덕행을 하다보면 삿된 욕망과 그릇된 업이 떨어져나가며 마음이 점차 맑아지고 세상의 이치가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마지막으로 남은 장애가 자신에 대한 갈애인 것이다. 이 마지막 갈애를 털어버리기 위해서는 작고 사소한 자기를  극복할 수 있는 큰 사랑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세상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과 오직 진리로 살아가는 밝음이 있어 자기를 세상을 위해 모두 바쳐버릴 때 오직 맑음 만이 남아 영원한 평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수행을 한다고 공에 빠진 자들이 마음 속의 업을 지우지 못하는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생각으로는 자신을 지웠는데 숙생의 삶을 통해 자기 속으로 들어온 사사로운 자기 위주의 집착이 근본적으로 박혀있으니 자기의 내면 속에서 근원적으로 치밀어오르는 갈애라는 업을 벗어날 길이 없는 것이며 세상을 위한 큰 마음이 없으니 사사로운 자기를 이길 방법이 없는 것이다.




>허 해구 선생님,

>좋은 말씀 늘 감사합니다.

>두가지 질문 드립니다.

>

>1. 전통무예 수련

> - 제가 예전에 한국 전통무예 수련인 기천문을 배운적이 있는데 가끔

>    몸이 피곤하면 내가신장 자세나 육합단공 자세등을 취합니다.

>    원리는 손목, 발목, 팔, 다리, 허리의 역근동작을 취하여 기혈

>    순환을 촉진시키는 자세입니다만 이러한 외공 수련도 하지 말아야 되는죠 ?

>    (의념하면서 호흡을 하거나 기를 돌리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음).    

>

>   ※ 참고로, 허 선생님께서 말씀하신데로 이제는 일체 단전호흡이나 

>       運氣는 안합니다 (저도 한때 단전호흡, 기수련, 마음수련 등에

>       심취하였으나 결론은 전혀 실생활에 도움이 안되는 겉도는 짓이라는

>       것을 알게됨).

>   

>2. 요가수련

> - 이 사이트 글에서 요가수련도 하지 말아야 된다고 본 기억이 나는데

>   앉아서 요가 명상이나 호흡수련은 하지 않는 대신 몸을 풀고 스트레칭하는 

>   아사나 동작은 안되는죠 ? 요가 동작들을 따라 해보면 확실히 기혈

>   순환이 잘되고 근육의 힘과 탄력성이 좋아짐을 느낍니다. 

>

>결론적으로 제가 알고 싶은것은 내공 수련은 안하는 대신 몸 위주의 외공

>수련은 하면 안되는지를 알고 싶습니다. 보다 정확한 가이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끝-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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