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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을 위해 태어난 자 본문

☆ 자연의 가르침

깨달음을 위해 태어난 자

gincil 2014. 2. 7. 02:23

고타마 붓다는 부처가 되기 전 깨달음을 위하여 왕자의 자리를 버려야 했다.


그는 대궐을 나와 사방을 찾아 헤매었지만 어디서도 깨달음의 길을 알고 있는 스승을 만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타마는 자신 속에서 그 길을 찾아야 했다. 당시 고타마가 내린 결정은 고행이었으며 이 고행은 6년 동안이나 계속 되었다.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할 일은 과연 고행 속에 깨달음의 길이 있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타마는 이 고행을 통하여 자신이 모르고 있던 문제를 풀 수가 있었다. 그리고 끝내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통해 해탈에 이르게 되었으니 그가 그토록 갈망하던 깨달음의 세계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6년간의 고행으로 지칠 대로 지치고 여윌 대로 여윈 몸을 이끌고 산에서 내려와 보리수 밑에 앉아 명상을 할 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깨달음을 완성했다는 사실을 그는 알지 못했고 또 깨달음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조차 분명히 알고 있지 않았다. 그가 보리수 밑에 앉아서 명상을 하다가 세상 일에 대해서 눈을 뜬 것은 그의 의식 속에서 그 시각에 해탈이 있었다는 증거이며, 이 해탈은 고행을 통해서 있게 된 일들로 인하여 자신의 의식에 붙어 있던 업이 떨어져 나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며, 이런 현상은 자신과의 싸움에서 얻게 된 불로 자신을 붙잡고 있던 업을 태우게 된 것에서 생긴 것이다.


여기서 밝힐 수 있는 것은 보리수 밑에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고 보리수 밑에 앉아 있을 때 그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고타마의 깨달음은 보리수 밑에서 명상에 잠겨 있을 당시 고행을 할 때 타버렸던 업의 근원이 의식으로부터 떨어진 것이고 그때부터 고타마의 의식은 번뇌와 망상, 증오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으니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혜안을 갖게 된 것이다.


고타마에게 이런 일이 있게 된 것은 그가 깨달음을 위해서 태어난 자였으며, 이런 일이 당시의 한 순간에 있었던 일들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억겁의 생을 통한 자신 속에 있었던 일을 가지고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으며,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그에게만 그 깨달음이 있을 수 있었던 일이었다.


그는 자신이 깨달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매우 기뻤다. 마음은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했고 있는 일을 보면 있는 일들이 깨달음을 통해서 다른 일을 알아보게 했다. 그는 비로소 법계의 일들이 세상 속의 인연을 통하여 나타나고 존재하며 이로 인하여 모든 것들이 만들어지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이다. 그러자 그의 곁에서는 새로운 일들이 생기게 되었다. 그때부터 그를 알던 사람들이 그를 버리기 시작했고, 누구도 쉽게 그를 찾아오지 않았고 또 아는 자를 만나면 과거의 인연들이 단절되고 있었다.


고타마는 그런 일로 인하여 넓은 세상을 두고 혼자서 끝없이 사람들을 찾아다녔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은 사람들을 찾아가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를 피했고 만나지 않았다. 그는 그런 일을 보고도 자신이 왜 버림을 받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 그래서 그는 한때 자신의 깨달음을 세상에서 밝혀야 할 것인지, 그냥 살다가 돌아가야 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그는 그런 일로 얼마 동안 세상에 진리를 밝히려 하던 그의 노력에 절망을 느껴야 했다. 그러던 그가 다시 인간 세계를 깨우치기 위해 일어서게 된 동기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그 자신이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다가야에서 깨달음의 완성을 보았지만 그 인근의 어디서도 깨달음에 대한 일들을 두고 알릴 수 있는 인연을 얻지 못한 채, 상당한 시간이 지나서야 <사라나드>라는 곳에 이르러 몇 명의 비구를 붙잡고 자신 속에 있던 일들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의 삶을 통해 인간의 세계에 깨달음을 전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았다. 그는 그 깨달음으로 인해 45년간이나 세상을 떠돌아 다녀야 했으니 이 일은 오직 인간 세계의 삶을 구하기 위한 일이었다. 그는 이러한 일로 인하여 많은 가르침들을 남겼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자신의 생각에 의존한 것이 아니었으며 있는 일을 보고 있는 일을 밝힌 것들이다.


우리는 여기서 왜 그가 그토록 위대한 삶을 살았으면서도 그 시대의 사회로부터 대접을 받을 수 없었는지에 대해 의심을 해 본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 없었던 인간들의 시각으로서는 그가 말하는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알아볼 수가 없었으며, 거짓을 버릴 수 없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은 생애를 사람들을 찾아다니는 일로 방황해야 했던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그의 위대한 생과 가르침을 보게 된다.


그의 가르침은 사랑과 진실이었으며 누구도 이 가르침을 보면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떻게 인간의 의지로 그렇게 살 수 있었는가에 대한 대답은 깨달음이었으며 그의 깨달음은 참 인간의 삶을 우리 앞에서 보여준 것이다. 인간의 세계가 삶의 평화와 행복을 저버린 채 살고 있는 현실은 가르침의 부재에서 온 것이며,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지만 그처럼 큰 깨달음을 보여준 이는 없었다.


오늘날 불교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생긴 것들이라고는 하지만, 우리는 어디에서도 이제 그분의 진정한 가르침을 대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진리 속에 있는 일들을 잊어버렸고, 그 결과 세상은 또 다시 어두운 일들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세계가 사랑과 진실을 모르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고타마의 삶은 참 스승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고타마는 깨달음을 얻고 45년간이나 인간 사회에서 온갖 시련을 겪으면서도 오히려 한시도 인간을 깨우치려던 일을 외면하지 않았으니 이 가르침은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큰 가르침이었다. 그리고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알렸으니 이 또한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큰 가르침인 것이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보고 깨달아야 할 일은 세상의 일이며, 모든 일이 있는 일을 통하여 나타나고 변화하니 그분이 이런 있는 일을 보고 세상을 법계라고 말씀한 것은 바로 세상에 모든 길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만일 우리 사회가 좋은 사람을 원하고 좋은 세상을 원한다면 먼저 우리가 사랑과 진실에 대해서 배우고 그 세계에 대해서 눈을 떠야 할 것이다.


깨달음이란 있는 것에 대해 눈을 뜨는 것이다. 우리가 쉽게 이 깨달음에 대해서 눈을 뜨지 못하는 것은 누구나 자신들이 지어놓은 업이 크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업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끝없는 사랑을 가져야 하며, 진실에 대해서 눈을 뜨는 일이다.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된 것은 이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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