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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

좌파의 논거인 갈등론에 대해

gincil 2013. 4. 21. 08:48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좌파이론으로 갈등론이 있다. 마르크스에서 비롯된 갈등론은 오늘날 모든 측면에서 자유자본주의와 충돌하면서 많은 사회문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쟁점은 갈등론이 사회문제를 해결함에 있어 건설적 대안을 제시하기 보다는 오히려 사회갈등의 불씨가 된다는데 있다.

 

지금은 진리가 사라진 시대라 길을 찾지 못하고 있지만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라면 그 속에는 이치가 있고 문제를 해결하는 길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길을 찾지 못한다면 혼란 속에서 국력을 낭비할 수밖에 없고 결국 경쟁에서 뒤떨어져 비참한 현실에 처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갈등론의 실체에 대해 살펴보고 사회문제를 해결할 길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로 한다.

 

갈등론은 고대의 에덴동산, 요순시대, 아틀랜시스와 같은 지상낙원 전설에서부터 내포되어 있을 정도로 인류의 보편적 이상인 평등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인류의 염원은 플라톤의 《국가론》, 토마스 모어의 《유토피아》, T.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등에 이상국가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근대초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과 같은 비폭력적인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회개혁운동으로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마르크스는 이러한 순수한 사회개혁운동이 사회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여 기존의 공산주의를공상적 공산주의라 비하하고 자신의 공산주의는 실천성이 있는과학적 공산주의라고 하였다. 이것이 20세기초 공산주의 혁명에 불을 지폈고 그 이념이 자본주의 속에 들어와 오늘날 갈등주의로 사회운동의 사상적 기조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의 핵심 요체인 공동분배의 허구성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은 평등주의 이상에 의해 모든 재화는 공동으로 생산하여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속에 없는 일로서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의 주체는 개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일은 각자가 지은 만큼 받는 것이 원칙이며 부와 가난 또한 각자가 능력과 노력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가 인위적으로 개인의 삶의 결과를 조정하는 것은 자연질서에 반한 행위로서 반드시 그에 따른 화를 받게 된다. 물론 현실의 불평등을 해소하자는 취지는 좋다. 하지만 모든 일은 전체적인 이치로 보아야지 한쪽 면만 보면 결국 전체를 망치게 된다.

 

평등이 좋다고 해서 각자가 노력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무조건 똑같이 나누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가장 공정한 것은 일한만큼 나누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러한 원칙이 사회를 지키지 않는다면 열심히 일할 사람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일할 사람이 없다면 사회에 부가 쌓이지 않아 풍요로운 사회도 존재할 수 없다.

 

사회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사회의 저변에 기본적으로 뿌리내려야 할 가장 기본적인 준칙은 일한대로 받고 일 안하면 굶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준칙은 매우 단순한 것 같아도 경제를 운영하는데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원리이다.

 

이 원칙이 모든 사회 구성원의 마음 속에 분명히 자리잡을 때 모든 사람이 요행수를 바라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정직하고 풍요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이성적이어서 자신이 일한만큼 성과가 보장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될 때 자신의 능력과 정성을 다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게 되고 국가 경제는 최고의 성과를 올리게 되는 것이다.

 

만약 그러지 못한다면 열심히 일할 사람이 줄어들어 결국 사회 전체가 못살게 되는 것이다. 개인이 모여 국가가 되고 개인의 부가 모여 국부가 된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잘 사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사회 속에 노력한대로 받는다는 원칙을 분명히 세워 나라가 이치에 따라 움직이게 하고 개인의 주체적 능력과 자율성을 증진시켜 각 개인의 능력이 최고도로 발휘하도록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장애자나 일할 능력이 없는 자에 대해서는 경제가 움직이는 현장에서 개입할 것이 아니라 나중에 국가에서 복지정책으로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경제가 효율적으로 운영되어 국부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그 재원을 가지고 더욱 안정적인 부조정책을 실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원리를 무시하고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으로 무조건 힘으로 현재의 구도를 깨뜨리고 강제적으로 배분하려 하면 결국 모든 사람이 못살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기득권층이 가진 권력과 재물을 부당한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타파하는 혁명을 하여 다수 프롤레타리아가 이를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가 자신의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남의 것을 욕심내 자기 배만 불리려는 무지한 이기심과 욕심에서 비롯된 것이니 자연의 이치와 양심에 어긋난 것이다. 사람이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자질이 약하고 노력이 적어 나타나는 결과이다. 따라서 가난에 처한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과거에 어떠한 잘못된 원인을 지었는지 돌아 보아야 한다. 이 세상에 인과의 이치에 의해 비롯되지 않는 것이 없다. 가난한 자는 가난한 원인이 있는 것이고 부자는 부자가 되는 원인을 짓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 일 속에 있는 인과법을 보게 될 때 비로소 세상 일에 눈을 뜨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가난한 자는 자신의 가난을 감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며 노력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지 그렇지 않고 가난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 구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세상이 이치에 의해 움직이는 진리의 세상임을 부정하여 혼돈의 말세로 만들려는 어둠의 세력의 음모인 것이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주장한 공산주의식 분배이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본 진실이 아니라 생각 속에 사는 중생이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다수의 대중을 선동하기 위해 만든 이데올르기에 불과한 것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세상의 진실과 인과법의 엄중함을 모르고 이상을 사회과학의 특징으로 인식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사회운동으로 사회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과법에 의해 짜여진 자연의 질서와 이치를 무시하고 비현실적 이상에 빠져 무리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한다면 엄정한 인과의 법칙은 이치와 사회질서의 붕괴를 통해 그에 상응한 커다란 재앙을 가져온다.

 

그 예는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하자 지도자들은 그들이 꿈꾸어 온대로 인민들에게 인간다운 조건의 보장과 부의 평등분배를 약속하였다. 이러한 아름다운 이념에 도취된 주인이 된 무산계급들은 냉엄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든 개인이 혼신의 노력이 바쳐야 한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무조건 받기만을 원했다.

 

게으른 주인이 되어 버린 약아빠진 인민들이 형식적으로 일하는 시늉만 하고 모든 고상한 삶은 다 누리기를 바래자 그곳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사라져 모든 사람이 평범한 소인이 되어버렸으며 국가의 부는 줄어들어 전체 인민들의 밥거리도 제공하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린 것이다.

 

더구나 모든 부의 분배를 국가에서 좌우하다 보니 관료주의와 부정부패가 팽배하여 뇌물과 독재가 판치는 저질스런 국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20세기 말 공산주의는 붕괴되었고 사실적 이치를 무시한 마르크스의 평등주의 이상은 관념적 허구로 증명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의 기본원리에 대한 무시는 서구 복지국가에서도 심각한 문제점으로 나타났다. 서구 국가들은 무덤에서 요람까지라는 복지국가의 이상과 국민들의 표를 얻기 위해 국가의 경제적 여력과 경제원리에 맞지 않게 지나친 분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그것이 국민들을 화합시키고 국가경제를 성장시키는데 기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점차 성장에 사용될 재원이 줄어들어 경제는 위축되고 지나친 세금증가는 근로의욕을 떨어뜨려 결국 국가 전체를 부실화시키고 사회복지도 줄어드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영국과 북구의 복지국가들은 다시 경쟁시스템을 도입하고 있으며 핀란드도 좌파 정당인 사회민주당(SDP)이 앞장서 2006 1 1일부터 부유세를 폐지하여 자본의 해외 유출을 막아 투자를 촉진하고 경쟁 심리를 유도하여 경제성장을 촉진시키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 있어도 국민들에게 공짜가 있다는 생각을 하도록 해서는 안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개인의 영혼을 망치고 사회를 파멸시키는 치명적인 병인 것이다.

 

갈등주의자들은 현실이 힘있는 지배층에 의해 강제로 이루어진 불평등한 갈등구조로 억압받는 하층민들이 힘을 길러 상부 지배층을 뒤엎고 현실을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갈등주의자들은 자연히 현실 부정적이 되고 폭력적이 되는 경향이 있었다. 과연 사회가 불합리하며 이치가 없는 것일까?

 

그러나 열린 눈을 얻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신 성자들은 세상이 완벽하게 짜여있는 법계이며 모든 것이 완전한 원인과 결과에 의한 완전한 이치로 이루어진다고 하셨다.

 

과연 어느 것이 맞은 말인가? 상대성 논리가 우세를 점하고 있는 일반세상에서는 진리가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니 현실적으로 힘이 있는 학자들의 말이 옳아 보이겠지만 분명한 진리의 존재와 이치에 대해 밝히고 있는 이곳에서는 자기 생각 속에서 말하고 있는 학자들의 주장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열린 시각을 가진 성자들의 말씀에 비해 비교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다.

 

갈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불합리하고 이치가 없다고 하지만 상부 지배층을 뒤엎기 위해 하부 피지배층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하는 그들의 주장은 그 자체가 세상의 조화와 법칙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전략전술에 따르면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소수의 힘을 조직화하고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전술적으로 잘 활용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주장은 그들이 언급하고 있는 세상의 부조화나 비이치성과는 달리 세상이 사실의 바탕 위에서 이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이치가 없으며 힘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져 있는 불평등한 문제덩어리라는 갈등론의 주장은 그 자체가 논리적 모순으로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또 갈등론은 사회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추구하는 개인과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들 구성요소들은 서로 통합적이지 않고 항상 갈등 관계에 있다고 한다.

 

그러나 성자들은 이 세상이 하나의 그물로 연결된 완벽한 법계라 한다. 각 부문은 상호관계를 통하여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지고 이치를 통해 사회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처럼 움직이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체의 어느 한 부위에 암이 생기면 전체가 죽게 되듯이 사회도 어느 한 부문이 조화를 이루지 아니하고 지속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면 반드시 전체가 함께 죽게 되는 공동운명체인 것이다.

 

따라서 세상은 기본적으로 조화체이며 각 부문이 유기적으로 모여 전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일시적으로 부분에 문제가 생겨도 곧 정상화되어 전체가 하나의 생명체로 작동한다. 따라서 부분과 전체 사이에는 영원한 갈등은 없으며 갈등을 해소하면 다시 이치에 의해 전체가 조화롭게 굴러간다는 점에서 사회 각 부분간의 관계를 본질적인 갈등관계로 보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견해이다.

 

오늘날 사회 각 부문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인간의 탐욕과 잘못이 부르는 일시적 문제이지 본질적인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사회 어디서나 존재하는 인간의 한계로 인한 일시적인 문제점을 가지고 세상의 기본적인 이치와 조화성마저 부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진리가 사라진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의 이치가 설마 자기에게는 화를 미치지 않겠지 하는 요행심을 가지고 이기심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세상의 질서와 약속을 어기는 악업을 함부로 지었다. 그러자 그들이 원한대로 세상의 질서는 흐트러지고 인과의 진리는 흐려져 그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지만 그 결과 문란해져버린 질서와 무너진 정의와 양심은 결국 세상을 오탁악세의 말세로 만들어 인류 전체를 파멸시키는 과보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이 무너지고 나면 다시 이치대로 움직이는 새로운 세상이 나타나 인간세상도 완전한 순환의 흐름을 돌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은 인과의 이치가 없고 무질서하여 온통 모순투성이인 것 같지만 큰 시각에서 보면 부처님 손바닥 안의 손오공같이 완전한 이치 속에 돌고 있을 뿐이다.

 

또 갈등주의자들은 세상은 지배층에 의해 강제로 만들어진 불평등한 갈등구조로 힘으로 사회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은 모든 사회현상을 처리하는데 있어서 자유(기능)주의자와 갈등주의자간에 근본적인 충돌요인이 되고 있다.

 

하지만 문제는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이지 갈등이 본질적으로 먼저 있는 것이 아니며 인간의 이성과 이치로 치유되는 것이지 힘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문제 해결과정을 얼핏 보면 갈등과 힘이 문제를 해결하는 원인인 것 같아도 그 근본을 들여다보면 항상 최종적으로 이치에 의해 갈래가 타지게 된다. 그래야만 뒤끝이 없고 모두가 만족하는 완전한 해결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어찌 보면 갈등과 폭력은 문제해결의 중간 단계로서 없어도 될 요소인 것이다.

 

그래서 갈등주의자들은 임금에 대해서도 기업가들이 노동자들의 임금을 착취한다고 보아 노동자들이 힘을 조직화하여 기업가들이 착취한 몫을 빼앗아 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19세기 초기의 자본주의 역사 속에서 나오는 악덕기업의 경우를 예를 들면서 기업가를 악마로 묘사하고 이를 자본주의 자체의 본질적인 문제인 것처럼 과장하여 노동자들을 선동하려 한다.

 

즉 산업혁명시대에 기업가들이 자유로운 계약이라는 명목으로 12살 소년에게 일을 시키면서 밥은 한끼만 주고 노동시간은 하루 18시간, 급여는 하루 먹을 빵하고 우유 살만큼만 주고 다치거나 죽으면 자기가 책임지는 식으로 노동자들을 착취했다고 선전하여 자본주의 자체가 존재해서는 안될 악마적 체제인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 당시 언론에 보도된 것과 같은 악질 사례가 있었겠지만 보도가 되는 것은 항상 비정상적인 경우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경우 계약에 의해 당시 여건에 맞는 임금을 받았을 것이며 다른 측면에서 보면 먹고살기 힘든 당시 상황에서 일자리를 제공한 공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당시 자본가의 역할은 국가적으로 풍요를 가져다 주었으며 그러한 나라들이 오늘날 선진국의 명예를 얻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노동자들의 불만을 조직화하기 위해 만들었던 이데올르기에 사로잡혀 자본주의 자체를 혐오하고 기업가들을 근로자를 착취하는 악마로 보는 것은 올바른 생각이 아닌 것이다.

 

사실을 정확히 볼 줄 알아야 한다. 얼핏 보기에 사람은 겉으로 다 똑같은 것 같아도 그 자질은 천차만별이다. 성자에 이르는 사람에서부터 짐승과 같은 사람까지 그 근기와 자질은 하늘과 땅 차이인 것이다.

 

수많은 사람들 중에 사업에 성공하는 사람들은 남다른 판단력과 강한 의지와 실천력이 있다. 성공한 기업가는 수많은 기업가들 중 그 자질이 검증된 자들로서 이들은 일을 맡기면 실패할 확률 보다는 성공할 확률이 매우 높다. 그래서 성공한 한 사람의 기업가는 수백만의 일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지만 수백만의 일꾼들은 스스로 먹고 살 것도 마련하기 힘든 것이 현실 속에 있는 진실인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의 꽃이며 핵심인 기업가를 절대 무시하거나 경멸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오늘날 기업가들은 이윤창출을 위해 기술을 개발하고 판매처를 발굴하며 적정한 투자와 인력 고용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려고 한다. 즉 이윤창출에는 자본, 지대, 기술, 노동력 등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기 때문에 오늘날 기업가 중 싼 임금으로 노동자의 임금을 착취하여 이윤을 올리려는 기업가는 거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실업이 만연하고 있는 우리나라 형편에서는 기업가들이 노동자를 착취하는 것을 문제 삼을 것이 아니라 기업가들이 조금이라도 더 투자를 해서 한명이라도 더 고용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한 상황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려운 여건 하에서 사업을 일으켜 고용을 늘리고 있는 기업가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해야지 그들이 근로자의 임금을 착취한다는 시각을 가지고 힘으로 기업가들과 갈등을 일으켜 경쟁력을 약화시키는 일을 해서는 결코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는 살벌한 무한경쟁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없고 결국 일자리도 잃게 되는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오늘날의 노동의 문제점은 노조귀족이라는 말이 있듯이 대기업의 노동자들이 강력한 노조를 구성하여 사회의 평균보다 높은 임금과 이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외부로부터 채용을 방해하고 회사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회사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하는 경우인 것이다.

 

이처럼 갈등주의자의 사회적 시각이 비판적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현실을 보는 시각에 대해서도 입장이 크게 갈리게 된다.

 

갈등주의자들은 대다수 서민들이 소수의 독점 하에서 OECD 중 최장의 노동시간을 근무하며 성장한 만큼의 보답도 받지 못하고 일하면 일할수록 가난해지는 워킹푸어가 만연하며, 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구조적 빈곤이 확대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형편은 그렇게 상대를 못마땅하게 여기며 다툴 상황이 아니다. 우리나라는 서구제국과 같이 수백년의 역사를 거쳐 축적된 자본도 없고 선진화된 기술도 없다. 비싼 외채를 빌려와 모방기술로 대량생산 판매를 하여 겨우 먹고 살 정도가 된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일류기업 몇 개 이외에는 모두 부실하기 그지없다. 그러한 결과가 바로 IMF 외환위기인 것이다. 지금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나라 외채가 5000억 달러 가량된다고 한다. 국채까지 한다면 1조달러 가량 된다는 말도 들린다. 자칫 잘못하면 또 다시 외환위기를 겪게 될지 모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부동산은 비싸고 인건비가 높아 투자할 곳이 많지 않다.

 

그러니 돈있는 사람들은 투자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외국기업은 들어오지 않는다. 또한 노동조합의 입김은 다른 여느 선진국에 비해 더 강하다. 그래서 우리나라 기업가들은 한국에서 제조업을 하는 것보다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하면서 가능하면 빨리 공장을 팔고 투기나 하면서 쉽게 돈벌고 싶은데 공장이 팔리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사업체를 끌고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사업기반이 취약한데 노조들이 투쟁을 일삼으며 많은 일자리와 높은 보수를 요구할 수는 없다. 지금 우리나라가 실업이 많고 보수가 낮은 것은 우리나라의 경제규모가 작고 부실해서인 것이지 기업가들이 착취해서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갈등적 시각에서 서로를 미워할 때가 아니라 국민 모두 한마음으로 뭉쳐 위기를 극복해야 할 때인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는 기업가나 노동자 할 것없이 모두 허리띠를 졸라매어야 한다. 경제효율을 높이기 위해 모든 면에서 이치대로 이루어지도록 하여 경쟁력을 길러야 한다. 각종 규제를 풀고 지가를 낮추고 세금을 낮추고 이자율을 낮추고 임금을 낮추어야 한다. 그래야 경쟁력이 생기고 더 많은 기업이 생겨나 실업이 사라지고 보수가 높아질 수 있다.

 

최근 정부가 신규고용을 하는 업체에 대해서는 근로자 1인당 1,000만원씩 세금공제를 해주겠다고 한 것은 매우 바람직한 정책으로 보인다. 그러면 기업들은 고임금에 대한 부담이 줄어들어 더 많은 인원을 채용할 수 있고 고용이 확대되면 수요가 늘어 국가 전체적으로 호경기와 국부의 증가가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지은대로 받아야 한다는 세상의 이치는 변함이 없다. 이처럼 세상은 완전한 이치에 의해 나타나고 있는데 세상이 불합리하고 강제적으로 조작되어 있다고 무조건 힘으로 뒤집어야 한다고 선동하는 것은 세상의 진리성을 부정하고 미움을 퍼뜨려 세상을 망치려는 어둠의 세력의 전사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자들이 미운 마음에서 만든 갈등론적 시각에 사로잡혀 세상을 이치대로 보지 않고 투쟁적으로 보아 폭력적인 원인을 지으면 결국 자신과 세상을 모두 망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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