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완성의 길에 대하여 본문

깨달음의 길

완성의 길에 대하여

삶의 진실 gincil 2013.04.21 22:28

사람의 바램 중 가장 큰 것이 깨달음

즉 완성에의 욕구인 듯하다.

 

인간이 지닌 고뇌와 한계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지혜를 얻는 것!

 

이것은 누구나 이루고 싶어하는 꿈이며

생각만 해도 황홀한 일이다.

 

아마 이러한 꿈을 꾸는 사람들은

마음이 가장 큰 사람들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매우 욕심이 많은 사람들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깨달음은 욕심으로 갈 수 있는 경지가 아니라

인간으로 가야 할 가장 올바른 길을 걸어야

이를 수 있는 인간열매라는 것이다.

 

이 경지는 그 마음이 깨끗하여 욕망을 탐내지 않고

이웃의 고통을 내 몸처럼 안타까워 하는 선근과

하늘이 무너져도 양심과 정의를 꺽지 않는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오늘날 깨달음의 길을 가는 사람의 유형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는 듯 하다.

 

하나는 잘못된 세상의 아픔을 견딜 수 없어

이를 밝히고자 하는 양심과 자비심이 큰 사람이며

또 한 부류는 어릴 적부터 이상한 영적현상을 체험하여

그 길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진리의 빛이 흐려진 오늘날에는

영적 현상이 나타나면

깨달음에 이르는 자질이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거꾸로 생각하는 것이다.

 

정신이 강하고 맑은 사람에게는 영적현상이 나타나지 않는다.

깨달음이란 가장 옳고 바르게 살아간

사람에게 나타나는 인간열매이므로

정신이 강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순수하고 건전한 사람만이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요체인 것이다.

 

오늘날 깨달음에 대한 관심과 욕망의 고조에 따라

여러 가지 명상에 관한 기법들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참선과 단전호흡은 이미 대중화된 단계이며

명상에 관심이 깊은 사람들은

인도의 각종 명상기법들까지 도입해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법들은 수행의 요체가 아니다.

삶의 핵심은 생생한 현실 속에 있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인간의 수행도

올바른 삶의 실천을 통해서 오는 것이지

명상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결론은 부처님이 이천년 전에 분명히 밝히신 것이지만

오도된 관념들과 깨달음을 쉽게 얻고자 하는 욕망들에 의해

정법이 계속 흐려져 왔던 것이다.

 

이것이 말법시대의 대표적인 징표이다.

 

나도 한때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거의 모든 명상법을 수행해 보았다.

 

그러나 이제 깨달음으로 가는 참다운 길을 알았기에

여기에 그 진실을 밝히고자 하니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정법을 깨달아

자신의 삶을 밝음으로 이끌기 바란다.

 

내가 한창 仙道를 수행할 때에는

일반인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엄청나고 기이한 여러 가지 증상을 체험하였다.

 

기를 느끼고 기가 온몸을 도는 소주천을 하였으며

머리가 열리는 대주천의 체험 속에서

하늘끝까지 치솟는 불길 속에 깊은 열락에 빠져들기도 했으며

단이 구슬처럼 머리 속에 맺혔다.

 

그러나 깊은 선정에 들어 수많은 시간을

열린 정수리로 천기를 받으며 수행을 했지만

그러한 기운이 내 마음의 업과 찌끼를 정화시켜 주지는 못했다.

 

그리고 구슬 같은 단으로 성태하여

정수리로 출태를 하여 신선이 되고자 했지만

그것 또한 나의 양심상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단과 합일하여 출태 될 나의 영혼이

여전히 과거의 나와 다름없는 중생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출태한다 한들 그것은 또 하나의 중생을 만들어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단지 선도경전에 씌어진 대로

완성될 것이라는 환상만 믿고

무작정 수행에 몸을 맡기면서

수많은 시간을 하릴없이 앉아 있었다.

 

오랜시간이 흘러 나는 이래서는 안된다는 자성과 함께

선도와 나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많은 선도경전에는 제시된 수행과정을 거치면

마침내 완성에 이른다고 되어 있었지만

완성에 이르면 나타나게 될

밝은 세상과 그에 관한 이치가 없었으며

다만 도와 합일한다거나 옥황상제에게 이른다는 등

환상적인 이야기로 끝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실제의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관념이며 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완성이 목적이 아니라 고통스러운 이웃을 구하고

세상을 밝게 만드는 진리가 목적인 나로서는

생생한 삶을 소비하면서 단순한 신선만을 목적으로 하는 신선도를

더 이상 걸어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선도수련에서 일어나

새로운 깨달음의 길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다음 나는 각종 명상기법에 매달렸다.

이미 고요함을 얻은 나로서는 모든 명상기법을 수행하면

그대로 그 요체가 나타났다.

 

소리에 집중하면 명치 속에 있는 나의 마음의 실체를 느끼며

그 속에 합일할 수가 있었고 몸의 내관하면

몸의 각 부분의 신비가 나타났으며

양미간을 집중하면 유체이탈이 일어나

내 육신 위로 떠다니는 내 영혼을 볼 수 있었으며

정지라는 기법을 하면 모든 현실에서 탈각된 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관념의 문제일 뿐 현실 속의 실체는 아니었고

그것이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지혜를 주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내가 혼탁한 세상에서 벗어나 내면의 자유를 얻었다 한들

그것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무 가치가 없는 것이며

단순한 나의 관념적 만족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 결과 명상은 오히려 나를 현실에서 유리시켜 관념 속에 사는

비현실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있었다.

여기서도 한계를 느낀 나는 이마저 버리고

오늘날 불교에서 최고의 수행법이라고 여기는

참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참선으로 집중력이 생기고 선정이 깊어져

가슴속에서 자아의 빛이 보일 때

나는 이러한 현상의 근원에 대한 화두(의문)을 잡았다.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화두가 깊어질수록 갖고 있는 의문은 점차 하나씩 풀려져 갔고

최종적으로 인식의 근원인

나의 의식의 주체 속으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화두만 잡으면 곧 바로 마음의 실체가 물건처럼 드러났으며

신실(가슴)속에 의식의 빛이 맑게 비쳐 

의식과 가슴과 머리가 하나로 이어지며

정수리로 상쾌한 기운이 들어왔다.

 

어떤 때는 하루종일 열락에 젖어 텅빈 허공 속에 들어 있었고

그 속에 몸이 사라지고 마음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지는 허공 속에서 홀로 잠겨있곤 했다.

 

최종적인 화두로 "" 화두를 잡았던 어느 날,

모든 것을 지우고 또 지우고 계속 ! ! ! 하고 파고 들어가자

갑자기 인당이 확 밝아져오면서 세상이 하나로 다가오고 있었다.

 

온몸이 비에 씻기운 것처럼 깨끗해지고 허공이 뚜렷이 관하여지며

모든 시방법계가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 속에서 일어나

세상을 꾸미는 것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걸어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자

나는 기쁨에 들떠 오도송을 불렀다.

 

나는 이 체험이 영원한 완성의 경지로

나를 인도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은 깊고 달콤했으나 그것 또한 일시적인 현상일 뿐

영원한 해답은 아니었다.

 

내 마음은 계속 열리지 않았고 어지러운 현실 속에서

다시 나는 과거의 나로 돌아가야 했던 것이다.

 

선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명경과 같이 맑은 마음속에

모든 일들이 거울처럼 비쳐왔지만

다시 세상 속에 나가 활동할 때면 갖가지 끈적끈적한 인연 속에서

나의 집착과 욕망은 울렁거리고

의식은 다시 흐릿한 상태로 되돌아 갔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체험들을 통하여

스스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나

내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욕망과 집착의 업은 사라지지 않았고

현재와 나와 과거의 나가 다르다는 평가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은 무심히 흘러

나는 그 상태에서 3년이란 세월을

홀로 애태우며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홀로 앉아있는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지면서

부처님의 일화와 말씀이 사실일 것이라는 깨달음이 들기 시작했다.

 

선정삼매 속에 들어있는 무아지경은 진정한 반야의 체험이 아니었고

진정한 무를 체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알았다

 

부처님이 요가수행의 헛됨을 한탄하며 보리수 나무아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앉아

깨달음을 얻으신 후 하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자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고행을 했으며

두 요가스승보다 앞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지만

내 마음을 해탈하여 절대적인 평안에 이르지는 못했다.

 

저자거리에 나가 세상의 번잡한 일들과

바람결에 들려오는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다시 내 마음 속에 가라앉아 있던 집착과 애욕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깨달음을 얻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었다.

 

깨달음은 고행이나 기도, 선정에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에 의한 공덕의 실천에 의해

업을 태우고 선근이 쌓여서 오는 것이다.

 

나의 깨달음도 지금 생에서 행한 수행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공덕에 의해 비로소 이생에서 깨달은 것이다."

 

이와 같이 명상은 자기의 마음을 찾아보는 기법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그것이 마음을 농사지어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진리의 요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신 수행의 요체는

깨달음이란 명상이나 고행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쌓은 올바른 공덕에 의해 마음이 점차 밝아져

그 결실로 오는 것이니

 

완성의 길은 세상을 위해 바른 이치를 행하여

중생을 축복하는 것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앉아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농사꾼이 농사를 짓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것과 같이

허황한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니

진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 속에 있어야 하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참선의 끝에서도 허망하게 일어서야 했던 것이다.

 

그렇게 헤매던 어느 날 나는 우연히 길에서 어느 성자를 만났다.

 

그는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했다.

그의 앞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했다.

 

그는 요즘의 언어와 논리구조와는 전혀 다른 순박한 어법으로

이야기했으며 모든 것을 세상의 사례를 예로 들어 설명했다.

 

그의 실상을 보는 분명한 지식과 이치 앞에

나는 한마디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상상해왔던 성자와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의 이마 정중앙에

전설 속의 지혜의 눈이 튀어나와 있다는 사실이었다.

백호광은 지름이 2.5cm 정도이며 중간이 5mm 정도 튀어나온

맑은 기운의 결정체였던 것이다.

 

그분의 실상을 보는 눈앞에서

나의 추상적인 깨달음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했다.

그는 증거를 가지고 나를 핍박했고 나는 그저 고개를 떨구고

수긍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도 말하지 못했던 진리의 의미에 대해

간단하고 명확하게 밝혀 주셨다.

진리는 존재하는 사실이며

존재하지 않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셨다.

 

세상은 완전한 인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존재하는 사실에 의지해 살 때

우리의 삶은 참되고 거짓이 없으며

바라는 바 결과를 얻게 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는 최종 목적지가 바로 해탈이며

이는 오직 바른 이치와 양심과 정의로서 열심히 세상을 살아

자신 속에 깃든 욕망과 사심을 털어 버릴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이라 했다.

 

나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과 한치의 다름이 없음을 느꼈으며

나의 마음의 의문은 모두 사라지고 눈은 밝게 비치기 시작했다.

 

그분과의 만남에서

나는 세상의 모든 의미를 알았고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

그래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명상에서의 졸업을 선언했던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더 이상 구할 것도 없었고

오직 내가 해야 할 일은

세상을 위해 행동하는 일 뿐이었던 것이다.

 

요즘 많은 종파에서 삶 속에서 농사짓지 않고

명상기법만 잘 사용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진리에 어긋난 참담한 주장을 하고 있는데

세상의 모든 일은

노력하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현재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많은 자들이

근본부터 문제가 있는 이러한 명상기법에 집착하며

이로부터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러한 일들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여기에서도 그 깨달음의 진실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 명상을 수행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명상수행만으로 숙업을 지우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주장으로 

명상은 현재의 자기마음을 바라볼 수 있는 단순한 기술에 불과하다.

 

인간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업장은

어두운 삶을 통하여 지은 것인 만큼

밝은 삶으로 그것을 극복하지 않는 한 극복할 방법이 없다.

 

사람은 명상에 들어 모든 자극을 끊고 고요히 앉아

자기 마음을 들여다 보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욕망의 흐름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이는 현상이 나타난다.

 

수행자들은 이러한 마음의 고요 속에 비치는 신비를

마치 모든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생각하여 견성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갖고 있는

작은 신비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해탈지심을 얻은 것은 아니다.

 

중생의 마음도 이와 같이 조용히 가라앉으면

엄청난 효험을 발휘하는데

마음이 해탈한 성자의 완성된 마음이 나타난다면

그 위력은 우주를 감싸 안을 만큼 엄청난 것이다.

 

해탈지심은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여여하게 나타나는 것이며

사실로서 지혜로서 분명히 현실 속에 나타나는 것이다.

 

대부분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시 보림행을 한다거나

토굴에 앉아 면벽 10년을 한다고 하면서 일생을 산속에서 살다

세상과 인연없이 사라지는 분들이 많은데

이것은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며

혼자 마음의 빛을 본 것에 불과한 것이다.

 

깨달음의 실체는 나혼자만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치를 밝혀 세상을 축복하는 지혜에 있는 것이며

세상에 대한 자비와 보살행에 있는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이 있으면

그 깨달음에 대한 증거가 세상에 나타나야 한다.

빛이 있는 곳에 어둠은 걷혀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이렇게 어두운 이유는

아직 밝은 진리가 이 땅에 빛으로 나타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수많이 나타난 깨달음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이다.

 

마음을 닦기 위해서는 생생한 현실에 부딪혀

직접 눈물을 흘리고 진실로 뉘우쳐

자기를 아상과 탐심을 모두 극복함으로써만이 가능한 것이다.

 

농사는 앉아서 짓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 씨를 뿌리고 땀을 흘리고 작물을 살펴

벌레가 끼나 병이 드나 수해가 드나를 살피는 지혜와 노력이 있어야

풍년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명상은 진리의 농사를 짓는 데 있어서 본업이 아니라

작은 준비작업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 재세시 안거를 통해 좌선을 지도하신 것은

평소에는 열심히 팔정도를 행하여

세상과 자신 속에 인과의 공덕을 짓게 하고

 

장마가 와서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때 딴생각을 하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그 동안 닦은 자신의 마음을 찾아보게 하신 것이다.

 

진리를 찾아가는데 가장 중요한 것은

처음 세상을 구하겠다고 초발심을 낸

인간의 순수한 양심과 자비심인 것이다.

진리를 구하는데 있어 끝까지 이 마음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수행이 이상해지거나 제대로 되지 않을 때

항상 이 길이 세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가 하는 초발심에서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없이 욕심을 내어 도를 구하게 된다면

대부분 중도에 귀신이 들던가

아니면 기혈이 뒤엉키게 되는 화를 당하게 된다.

 

깨달음은 궁극적으로 내가 세상과 하나이므로

세상을 자비로운 마음속에서 축복해주고자 하는데 있는 것이니

깨달음을 얻기 전이나 깨달음을 얻고 나서나 해야 할 일은

세상을 위해 좋은 인연을 쌓고 공덕을 짓는 일 밖에 없다.

 

이렇게 분명한 일을 사람들은 세상을 위해

복을 지을 생각을 하지 않고

깨달음에 욕심을 내어

갖가지 이상한 길을 찾아가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치를 알게 되면

사람들은 깨달음의 길과 세상을 바르게 살아가는 길이

둘이 아님을 분명히 알게 된다.

 

지금의 현실은 너무 혼탁하다.

지금 현실이 어두운 것은 사람들이 무지로 인하여

올바른 진리를 모르고

양심을 두려워하지 않고 함부로 악을 저지런 결과

악은 스스로 붕괴하고 만다는

인과의 결과를 받고 있는 상태인 것이다.

 

이러한 세상 속에서 살아나가기는 쉽지 않다.

 

사실을 정확히 파악하여 남에게 속지 않아야 하고

또 남을 속이지 아니하여

마음속에 한과 집착을 쌓지 않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업은 내속에만 있지 아니하고

상대방에 의해서도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밝은 지혜와 바른 공덕행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켜 완성에 이르게 되면

인간으로 우주의 근원과 이어지는 신성의 존재목적을

이생에서 성취하게 된다.

 

이러한 완성의 경지에 이른 성자들은 모든 욕망이 사라지고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반야에 머물게 되며

세상과 실상의 이치를 꿰뚫어 보는 지혜를 얻게 된다.

 

그리고 모든 우주의 실체가 그 마음과 이어지게 되므로

명상 속에 들어 그 세상의 일과 접하게 되면

그 실체가 명확히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때 나타나는 사실은 상상이 아니며

본래 하나였던 신성이 하나로 연결됨으로써

해탈한 신성 속에 우주의 실체가 그대로 비치는 것일 뿐인 것이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게 되면

그는 육체적으로도 정화되게 되어 탁한 육식을 먹을 수 없게 되며

만약 먹게 되면 많은 부작용이 나타나게 된다.

 

만약 현재 고기를 좋아하는 수행자들이 있다면

그만큼 그 몸과 마음이 탁하다고 보면 어김이 없다.

 

그리고 이마에는 정화된 기운이 맺혀 혹같이 둥근 사리가 나타나

전설 속에 내려온 지혜의 눈을 이마 정중앙에 지니게 되며

마를 제압하고 생명현상을 제어하는 원력을 지니게 된다.

 

깨달은 자는 세상 속에 나타나고 있는 모든 이치를 보기에

책속에 있는 남의 논리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현상의 일을 들어 비유로서 설명한다.

 

왜냐면 세상 속에 나타나는 일들이 진실이며

그러한 사실 속에 있는 이치가

우리들이 현실에서 체험하는 진리이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 없는 일은 허상이며

세상 속에 없는 이치는 모두 거짓인 것이다.

 

깨달음에 이른 자는

세상의 완전한 뜻과 이치속 에 존재하고 있음을 가르치며

하나로 이루어진 신성한 뜻의 세계를 보여 주고

이세상과 생명의 흐름이

신성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명확히 밝혀준다.

 

이러한 인간완성의 경지는 종교와는 무관한 것으로

모든 인간에게 열려져 있는 생명의 가능성이며

고귀한 성품인 것이다.

 

성자란 인간의 이상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나타나는 실제상의 일이며

모든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인 것이다.

 

이러한 일이 존재하기에

우리는 현실 속에서 진리를 믿고 따르고 행하는 것이다.

 

지금도 나는 내가 인류역사상 가장 복 받은 자라고 생각하면

매우 행복하다.

 

진리가 존재하는 것을 알았고 성자를 만날 수 있었으며

내가 그 진리를 실천하며 진리 속에 인생을 살아가는 보람을 느끼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으니

세상은 참으로 가치있고 의미 있으며 인생이란 정말 고귀한 것이다.

 

이 글을 보는 분들도 하루 빨리 진리와 인연을 맺어

밝은 눈과 평안한 마음을 얻기 바란다.

'깨달음의 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윤회와 무아  (0) 2013.04.21
사랑과 집착과 깨달음  (0) 2013.04.21
욕망을 버리라는 말  (0) 2013.04.21
반야의 실체  (0) 2013.04.21
명상  (0) 2013.04.21
완성의 길에 대하여  (0) 2013.04.21
0 Comments
댓글쓰기 폼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