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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명상

gincil 2013. 4. 21. 22:29

오늘날 세기말적 징후를 타고 인류의 미래가 암담하면 할수록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 찾아보려는 인간의 바램이 동양적 지혜인 명상에 대해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다.

 

인간이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핵심요소이며, 우주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 중 가장 신비한 존재로서 자기를 찾고 우주의 신비를 규명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의지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인간의 의지가 자기자신을 반성하고 되돌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만든 최대의 발명품이 바로 명상인데 이것은 인도 특유의 지혜라기 보다는 인류공통의 보편적인 생활양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예로서 인도의 요가, 중국의 선도, 중근동지방의 묵상, 한국의 풍류도 등이 있고

그 세부적인 기법으로는 소리나 주시, 집중, 주문, 믿음, 인체의 신비 등을 통해 들어가는 방법 등이 있다.

 

지금 서구문명은 과학적 탐구의 발달로 물질적 풍요는 이루었으나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절대적 가치와 인간의 의미에 대한 외면으로 진실한 인간의 행복과는 반대되는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러한 서구문명의 한계는, 우주의 모든 원인을 분석하겠다고 획일적인 과학의 잣대로 모든 것을 재단하고 자르고 분해한 결과, 우주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과 의식의 문제마저 객관적 물건으로 취급하는 우를 범함으로써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는 인간의 생명 이해에 역부족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살아있는 주체성이기 때문에 이를 물리화학적인 분석으로 자르거나 분해를 해서는 그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다.

 

인간의 생명과 정신의 실체는 항상 살아 움직이는 실체로서 파악할 수 있는 것으로서 마음이 진실한 자만이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으며 마음이 어두운 자는 아무리 마음을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다.

 

진리를 보고자 하는 자는 마음이 진실해야 하는 것이 바로 진리의 세계 속에 숨은 비밀인 것이다.

 

그러므로 삶의 의미 자체를 중시하지 않고 단순한 객관적 지식으로 생명과 우주의 신비를 이해하려는 서양식 방법으로서는 도저히 생명의 본질에 대해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지금 물질적 차원에서는 동양이 서양에 뒤져 있을지 몰라도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정신의 차원에서는 동양의 지혜가 앞서 있는 만큼 이 분야를 더욱 발전시켜 현대문명의 해결책을 우리가 먼저 제시한다면,

 

딜레마에 처한 현대인류문명의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사회의 빛이 될 새로운 국가모델을 제시하는데 크게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이다.

 

참선

 

참선이란 이러한 명상이 최고도로 발달하여 단순한 생활수단이 아닌 인간의 신비와 지혜를 밝히는 기법으로 까지 발전한 것으로 그 원리는 인간을 우주의 일부분으로 보아 인간의 근본을 파고 들어가면 우주의 근본이 나타난다는 원리로 되어 있다.

 

생명은 무엇이고 어디서 생겨났으며 어디로 가는 것이며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참선은 바로 여기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하는 시도인 것이다.

 

오늘날 불교계는 불경의 가르침을 위주로 하는 교종과 참선으로 마음공부를 선종으로 나뉜다.

 

선종은 화두(생명의 실체에 대한 근원적 의문)를 붙잡고 정신을 통일해 가는 간화선과 생활과 선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묵조선으로 크게 나누어지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화두를 잡고 정신통일을 해나가는 간화선이 주가 되고 있다.

 

이것은 잡념을 가라앉히고 화두로 마음을 통일시키면 자신의 의식의 근원이 나오고 그 의식의 근원을 계속 추적해 나가면 의식의 덩어리가 객관적 실체로 뚜렷히 느껴지며,

 

이 의식덩어리를 더욱 정화시키고 티끌을 모두 제거해 순수한 마음(반야지경)속으로 들어가면 생명의 근원과 우주의 비밀이 모두 드러난다는 논리로 되어있다.

 

그러나 참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진정한 요체인지, 하나의 주장에 불과한 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이란 팔정도로 수생에 걸쳐 공덕을 쌓아야만 비로소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신 적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 불교계에서는 수많은 선사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과연 그것이 부처님이 깨달았던 완전한 해탈과 지혜와 같은 것일까?

 

아마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니라 얼핏 마음자리를 본 것에 불과한 것일 것이다.

 

진정한 깨달음이 있는 곳에서는 마치 밝은 빛이 어둠을 밝히듯 세상은 좋아지게 되어 있다.

 

좋은 원인은 좋은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 것이 우주의 영원한 인과의 법칙인 것이다.

 

현재 우리의 현실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욕망과 어둠에 가득 차 있으며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양심과 밝음이 없고 사회에는 질서와 정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것은 우리나라에 진정한 깨달음이 없었다는 증거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럼 필자의 경험을 예로 들면서 참선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참선은 편안한 자세(결과부좌 또는 반가부좌)로 앉아 양손을 가볍게 쥐고 무릅에 얹거나 배꼽 아래에 겹쳐 모으든지 하고 눈을 지그시 반쯤 감으며 양어깨에 긴장을 풀고 혀를 지그시 입천장에 붙이며 숨은 코로만 쉬는데 숨을 깊이 들여 마셔 하단전까지 이르도록 천천히 마시고 내뱉어야 한다.

 

이때 호와 흡의 길이는 자연스럽게 하되 점차 길고 가늘게 해나가면 된다.

 

처음 일반인이 이것을 시작하면 잡념이 많고 집중력이 약하기 때문에 숨이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게 되는데

 

그럴수록 참선의 오묘한 힘과 생명의 신비를 굳게 믿고 주의를 집중하면 반드시 숨길이 잡힌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몸 속에는 우주에서 가장 고귀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어 이것만 해득하면 모든 우주의 신비를 풀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깊이 믿는 것이다.

 

이러한 확신 아래 세상의 고통을 해결하겠다는 자비심을 가지고 숨길을 따라 고요히 나의 생명과 마음의 움직임을 지켜나가며 자신의 근원을 추적해 나가면 몸과 마음이 서로 일치되고 생명력이 화통해지며 몸이 화기로워지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선정이 깊어지면 상식적인 생명현상을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현상이 나타나게 되는데 이때 수행자는 쾌감, 평안함, 환상, 빛 등 엄청난 변화를 겪게 된다.

 

여기에 필자가 과거에 적어놓았던 수행일기에서 몇 가지 주요한 증상들을 발췌해 선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한다.

 

(중략) ....

호흡으로 집중력이 생기고 가슴속에서 자아의 빛이 보일 때 나는 이러한 현상을 일으키고 있는 것들에 대한 화두(의문)을 잡았다. "과연 이것들이 무엇인고?" 화두가 깊어지고 선정이 깊어질수록 갖고 있는 의문은 하나씩 풀려져 갔고 최종적으로 인식의 근원인 나의 의식의 주체로 파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중략) ....

화두가 익으니 이제 화두만 잡으면 곧 바로 마음이 드러나고 신실(가슴)속의 의식의 빛이 바로 드러난다. 의식과 가슴의 마음이 하나로 이어지고 강렬한 기운의 흐름이 일어나며 머리로 상쾌한 기운이 들어온다.

 

(중략) ....

하루 종일 열락에 젖어 텅빈 허공 속에 들어있었다. 그 속에 몸이 사라지고 마음도 사라지고 모든 것이 사라진다. 남는 것은 텅빈 허공 속에서 흘러가는 세상뿐 .......

 

(중략) ....

요사이는 하루 종일 자 화두를 잡는다. 버스 속에서 자 화두를 잡자 곧 깊은 명상으로 젖어 들었다. 모든 것을 지우고 또 지우고 계속 ! ! ! 하고 파고 들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인당이 확 밝아져 오면서 세상이 하나로 다가왔다. 온몸이 비에 씻기운 것처럼 깨끗해진 느낌이다. 온갖 마음들이 허공 속에 헛되이 오가고 있었다.

 

허공이 뚜렷이 관하여지고 모든 시방법계가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 속에서 일어나 세상을 꾸미고 있었다.

 

세상이 꾸미는 인연법이 점차 또렷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걸어 움직이는 현실 속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은 처음이다.

 

나는 기쁨에 들떠 오도송을 불렀다.

 

(중략) ....

나는 이 체험이 영원한 완성의 경지로 나를 인도해 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깊고 달콤하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에 불과할 뿐 오래가지 않는다. 아직 내 마음은 열리지 않고 과거와 다름이 없다. 체험 이전의 나와 체험 이후의 나는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것이다. 아무리 명상이 깊어진다고 한들 마음의 눈이 열리지 않으면 무슨 소용인가?

 

선정 속에 들어가 있을 때는 명경과 같이 맑은 마음속에 모든 것이 거울처럼 비쳐오지만 다시 세상 속에 활동할 때면 갖가지 끈적끈적한 인연 속에서 나의 집착과 욕망은 울렁거리고 의식은 다시 흐릿한 상태로 되돌아 간다.

 

나는 스스로 최고의 경지에 이르는 체험을 했다고 자부심을 가졌으나

 

내 자신을 돌아보면 아직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잡은 욕망과 집착은 사라지지 않고 있으며 과거의 나와 다르다고 평가할 수 있는 나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러는 가운데 세월은 무심히 흘러 나는 그 상태에서 3년이란 세월을 홀로 애태우고 있었다. 점차 나는 홀로 앉아있는 시간이 허망하게 느껴지고 부처님의 일화가 사실일 것이라는 판단이 점차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선정삼매 속에 들어가는 반야의 무아지경은 진정한 반야의 체험이 아니었고 진정한 를 체험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던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부처님의 말씀이 사실임을 깨달았다.

 

부처님이 요가수행의 헛됨을 한탄하며 보리수 나무아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앉아서 하신 말씀을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자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고행을 했으며 두 요가스승을 만나 그들보다 앞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지만 나는 내 마음을 해탈하여 절대적인 평안에 이를 수가 없었다. 저자거리에 나가 세상의 번잡한 일들과 바람결에 들려오는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다시 내 마음 속에 가라앉아 있던 집착과 애욕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깨달음을 얻은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었다.

 

깨달음은 고행이나 기도, 선정에 의해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에 의한 공덕의 실천에 의해 업을 태워서 오는 것이다.

 

나의 깨달음도 지금 생에서 행한 수행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공덕에 의해 비로소 이생에서 결과를 이루어 마침내 깨달음에 이르러게 된 것이다."

 

선정은 자기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반성의 시간에 불과한 것이지 결코 그것은 삶을 건강하게 살아가는 진리의 요체가 아니었던 것이다. 앉아서 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마치 농사꾼이 농사를 짓지 않고 알곡을 거두려는 것과 같이 허황된 꿈이었던 것이다. 진리는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삶 속에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참선의 끝에서 허망하게 일어서야 했다. 참된 진리와 깨달음은 현실 속에 있다는 결실 하나를 잡고서....

 

단전호흡

 

이러한 명상체험은 요가나 단전호흡의 경우에도 유사한데 그 유사성과 차이점을 살펴보면 명상에 대한 이해를 더 깊이 할 수 있다. 단전호흡은 호흡에 인위적으로 집중하여 기를 발생시키고자 노력하는 것을 말한다. 먼저 정좌를 하고 앉아 자세를 안정시킨 후 호흡을 고른다. 단전호흡의 요체는 숨을 배꼽아래 하단전에 까지 이르게 하여 호흡하는 것이다.

 

호흡법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들숨과 날숨의 길이를 같은 길이로 자연스럽게 하여 천천히 내쉬는 법이 좋다.

 

그리하여 숨에 대한 집중력이 강화되고 호흡이 깊어지면 생명력이 변하여 기로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기는 처음에는 자력과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나중에는 전류와 같이 찌르르하게 나타나며 점차 수증기와 같은 열기를 가지고 몸을 돌기 시작한다.

 

이것이 강해지면 마치 때가 끼인 수도관을 압력이 센 물로 씻어내듯 몸의 찌끼를 기의 강한 흐름으로 씻어내게 되어 몸이 원활해지고 어린아이 같은 생명력이 넘쳐나게 된다. 그리하여 기가 왕성하게 되어 온몸을 개통하게 되는데 이러한 경지를 小周天이라고 한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호흡자는 세상의 모든 것에서 기를 느끼게 되며 이를 스스로 운영하여 돌릴 수 있게 된다.

 

그러한 기 중에는 天氣地氣生氣死氣가 대표적인데 그 기운의 느낌과 영향은 서로 다 다르다.

 

따라서 호흡을 할 때 이러한 기운을 느끼게 되면 깊은 주의가 요망된다.

 

소주천에 이어 몸의 기운이 외부의 우주와 개통되어 하나로 이어지게 되는데 이러한 경지를 大周天이라 하며 이 단계를 넘어서면 점차 몸 속에는 단이 맺혀 구슬 같은 것이 생긴다.

 

이러한 과정에서도 명상이 깊어지고 일반적인 생명현상을 넘어서는 갖가지 생명의 신비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체험을 예로 들고자 한다.

 

(중략) ....

땀이나기 시작했다. 호흡을 하고 나면 운동을 한듯이 온몸이 땀에 흠뻑 젖는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호흡이라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중략) ....

기이한 일이 시작되었다. 꼬리뼈 부근에서 개미가 기어오르는 듯한 미세한 흐름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의식이 강화되어 물질적인 형태로 나타난 듯한 느낌이다. 인간이 단순한 동물적 존재가 아닌 어떤 의미를 띤 고귀한 존재라는데 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의 심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동양의 지혜가 단순히 관념이 아니며 생명의 실체를 통찰하고 있음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진다.

 

(중략) ....

기의 흐름이 점차 강화되며 처음 개미가 기어가는 듯이 느껴지던 기감이 이제는 마치 주전자의 김처럼 쑤수숙 치솟아 오르며 등의 가운데까지 올라가기 시작한다.

 

(중략) ....

기운이 하단전이 모일 때면 하단전이 마치 풍선을 불 듯 부풀어 오른다. 하단전에 기의 방인 단실이 형성된 것 같다.

 

(중략) ....

뒷통수(옥침)의 가벼운 통증과 함께 치솟아 오른 기운이 정수리로 들어갔다. 머리가 시원해지며 달콤한 타액이 목구멍으로 흘러 들어갔다. 기운이 임독양맥을 연결하며 흐른다는 소주천이 이루어진 듯하다. 본격적인 호흡을 시작한지 1년만의 일이다. 온몸에 힘이 넘쳐 하루 종일 뛰어도 피곤한 줄 모른다.

 

(중략) ....

머리에서 커다란 혹을 세개나 발견했다. 당황한 나는 단전호흡을 오랫동안 했다는 이를 찾아가 그 현상을 문의했다. 그는 그것은 혹이 아니라 기가 상승하여 형성된 기의 맑은 덩어리로 도가에서 말하는 삼신산이 바로 그것이니 곧 좋은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부처님과 같이 머리가 부풀어 오르니 기분은 좋았다.

 

과학적 사고로 접근했던 단전호흡이 구체적인 현상으로 변화를 드러내자 나는 선도에 관한 서적을 처음 구입해 보았다.

 

(중략) ....

오늘도 세상을 위해 아무일도 할 수 없는 나를 안타까워하며 세상을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게 해달라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을 하며 습관적으로 책상에 앉아 가벼히 명상과 호흡으로 공부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꼬리뼈에서 아주 상쾌하고 맑고 강한 기운이 충맥(몸 가운데 맥)을 타고 정수리로 치솟아 올랐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 나는 그 기운의 흐름을 주시하며 기가 치솟아 오른 정수리에 눈을 감고 집중했다.

 

그 순간 전혀 상상조차 하지 않았던 너무나 엄청난 뜻밖의 현상이 벌어졌다.

 

갑자기 정수리가 펑 하고 열리면서 머리위로 하늘끝에서부터 엄청난 불기둥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 불기둥은 하늘 끝까지 곧게 뻗쳐 있었고 아름다운 광채가 빛기둥 주변으로 넘실대고 있었다.

 

나의 몸은 엄청난 환희와 쾌감 속에서 한동안 사라지고 있었다. 그러한 체험은 1시간 정도 계속 되었다.

 

나의 몸은 엄청난 열기 속에 진동하고 있었고 모든 신체가 사라져 버린 듯한 가벼운 상태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러면서 그 동안 통증을 느끼던 부위가 열이 나면서 시원히 풀리고 있었다. 어찌 인간의 몸 속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나로서도 도저히 상상할 수 없고 믿어지지 않았다.

 

인간이 알지 못하는 신비한 현상이 우주와 인간 속에 얼마나 많이 내재되어 있는지 경이로움에 더욱 조바심이 났다.

 

(중략) ....

오랫동안 공부를 하느라고 지니고 있었던 허리와 어깨의 만성통증이 씻은듯이 사라지고 시력이 0.3에서 0.8로 회복되어 안경을 벗었다. 그리고 온몸이 구멍이 난듯 양손과 양발, 머리에서 기운이 바람처럼 계속 공기와 교류하고 있다. , , , 나무 등 무엇을 느끼고자 하면 그것의 기운이 느껴진다. 내 몸이 우주와 하나되는 단계인 대주천에 이른 듯 하다.

 

(중략) ....

하단전에 맺힌 단이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마치 태아처럼 기운을 흡수하며 단전을 태반으로 삼아 커가는 것을 느낀다. 배꼽주위에서 기운이 우회전하며 빙글빙글 돌고 있다. 이따금씩 진동이 커져가며 온몸을 원처럼 휘감으며 돈다.

 

(중략) ....

상단전과 하단전의 이어짐 속에서 중단전에 깊은 연못이 생기고 분화구처럼 끓기 시작한다. 온몸에서 화기가 일어나며 몸을 감미롭게 하고 용천의 지기와 산근의 조기와 정수리의 천기가 하나로 중단전에서 합친다. 중단전에서 단의 강한 태동이 느껴진다. 대주천이 완전히 일어나 우주와 하나로 통한다.

 

(중략) ....

눈사이의 산근을 통해 현관이 열리며 둥근 빛이 마음속으로 열렸다. 엄청난 오르가즘 속에 30분 정도 머물었다. 마치 큰 구멍이 이마에서부터 명치까지 뚫어져 있는 상태이다.

 

(중략) ....

단이 이제 정수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주기적으로 정수리가 열리고 우주의 기운과 몸의 기운을 유통시킨다. 그 의미가 주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 아직 나는 모른다.

 

(중략) ....

깊고 깊은 열락의 시간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 세상의 고통은 여전히 있고 내가 할 일이 많은데 이렇게 앉아서 혼자 기분이 좋다고 해결되는 일이 무엇이 있는가? 이렇게 시간은 자꾸 가는데 ...

 

(중략) ....

가만히 생각하면 여태껏 나는 남의 공부만을 했다. 모조건 앉아 내단을 지켜보아도 깨달음은 다가오지 않고 육체의 쾌락만 온다. 내가 수행을 하는 이유는 몸의 유익을 구함이 아니라 세상을 고통을 덜어주고 밝힐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함인데 홀로 선정의 황홀경에 젖어있는 나의 길은 시간낭비 이외에 아무 가치가 없다.

 

단전호흡은 練精化氣練氣化神練神化虛練虛合道의 단계를 거치는데 練精化氣의 단계에서는 기를 다스리고 練氣化神의 단계에선 의식을 다스리며 練神化虛의 단계에서는 포태하여 을 만든 후 여기에 의식을 실어 불생불멸지체인 신선체를 이루고 練虛合道의 단계에서는 우주의 도와 하나가 되는 과정을 밟는다.

 

그러나 지금 이 과정에서 단을 맺고 밖으로 출태시킨다고 하더라도 나의 의식이 과거의 나와 조금도 다름이 없다면 신선이 되고 영생불사를 증득한다 한 들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지금과 같이 번뇌하고 욕망을 벗어나지 못한 내가 신선이 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미혹한 중생에 불과한 것이니 그러한 초능력은 오히려 세상에 해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단을 완성시켜 신선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번뇌와 망상에 허덕거리는 나의 정신을 완성시키고 세상에 진정 도움되는 능력을 갖추는 일인 것이다.

 

요가수행

 

요가에는 인간의 몸과 마음과 감성과 에너지를 이용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그 주요한 것으로 인체의 근원적인 생명력을 이용하는 쿤달리니(Khundalini) 요가(Yoga), 헌신과 숭배를 위주로 하는 Bhakti 요가, 주문(Mantra) 요가, 그리고 인체의 조화와 생체 에너지(prana)를 조절하는 Raja Yoga, 호흡을 우주적 호흡과 조화를 이루어 마음의 안정과 육체의 완성을 이루는 Hatha Yoga 등이 있다.

 

여기서는 요가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생명에너지 발현법인 쿤달리니 요가의 예를 들어 설명하기로 한다. 콘달리니 요가에서는 단전호흡에서 말하는 수많은 기운 중 꼬리뼈 부근에서 발산되는 근원적 생명에너지를 각성시켜 사용한다. 이 에너지는 각성되기 어려우나 한번 개발되기만 하면 반드시 인간의 모든 잠재 능력을 개발시키고야 마는 엄청난 에너지원이다.

 

이를 동양에서는 순양지기라 하며 인도에서는 생명력의 원천인 쿤달리니 에너지라고 한다.

 

우리가 보는 수많은 요가행법 즉 고행, 물구나무서기, 갖가지 체조, 태양보기 등은 바로 이러한 쿤달리니 에너지를 발현시키기 위한 안갖힘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행에도 불구하고 이 에너지는 쉽게 나타나지 않아 인도의 많은 요가행자들이 고행을 하여 자신의 몸을 혹사키키고 돌멩이로 자신의 꼬리뼈를 치기도 하며 언덕에서 뛰어내려 심지어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다.

 

기의 발생이라는 측면에서는 단전호흡이 효과적이나 에너지의 효과면에서는 요가가 효과적이며 생명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는 측면에서는 의식에 집중하는 참선이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쿤달리니 에너지가 발현된 요기들은 그에너지로 점차 몸을 개발해 나가는데

이때 인체에 있는 여러 개의 부위들이 그 신비를 나타내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요가수행자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가질 수 없었던 여러 가지 능력을 지니기도 하고 영적 접촉을 가지기도 하는데 아래에서는 필자가 체험했던 요가현상을 예로 들어 이해를 돕고자 한다.

 

(중략) ....

회음과 꼬리뼈 사이에서 엄청난 에너지가 나타나 몸의 막힌 곳을 뚫고 있다. 그 에너지는 아주 날카롭고 강한 기운으로 느껴진다. 쿤다리니 에너지라고 하는 요가 에너지가 개발된 것 같다. 눈을 감고 그곳을 내관하면 에너지가 끝없이 솟아 오른다.

 

(중략) ....

가슴속에 있는 아나하타 차크라를 관하자 그곳에서 환한 빛과 평안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마음의 빛이 느껴진다.

 

(중략) ....

목의 차크라를 관하자 목에서 피가 쏟아 올랐다. 나는 큰 병이 걸린 줄 알고 크게 당황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동안 가슴에 맺혔던 혈의 덩어리가 풀리면서 나오는 현상이었다. 가슴 부근이 기혈이 통창해 매우 시원하다. 그리고 목청이 매우 당겨오고 목소리에 변형이 온다.

 

(중략) ....

양미간의 지혜의 눈인 아지나 차크라를 관하자 도저히 형용할 수 없는 기하학적 무늬(만다라)가 나타난다. 만약 미술계에 종사하는 자라면 여기에서 굉장한 걸작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중략) ....

양미간의 지혜의 눈인 아지나 차크라를 관하고 있는데 갑자기 나의 의식이 깊고 깊은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갑자기 영혼과 육체의 분리가 일어났다. 나의 영혼이 책상다리를 하고 있는 내 머리 위에서 나를 내려보고 있었다. 나의 영혼은 나의 의지대로 마음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너무 오랜 동안 밖에서 돌아다니다 갑자기 위험하다는 생각에 당황하자 다시 몸 속으로 들어왔다.

 

(중략) ....

완성의 자리라고 하는 정수리의 사하스하라 차크라를 관하자 하늘에서 매우 강렬한 빛이 들어오며 황홀경에 빠졌다. 그것은 마음자리인 아나하타 차크라를 관할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마음을 관할 때는 부드러운 평안을 얻었지만 정수리의 사하스하라 차크라를 관할 때는 인간세상에 존재할 수 없는 최고의 쾌감을 느낀다.

 

그러나 이것은 자주 열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하늘과 이어질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있을 때 열리게 된다.

 

요가의 체험도 브라만과 아트만과의 합일체험 이후 더 이상 진행이 없다. 나는 나일 뿐 다른 변화가 내 몸 속에서 진행되지 않고 찾을 수가 없다. 아무리 많은 체험을 계속한다고 하더라도 요가 최고의 단계인 천인합일, 범아일여의 경험을 얻은 지금 그러한 세부적인 현상들은 다 부질없는 일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면 다른 어떠한 잔재주도 모두 무의미한 일인 것이다.

 

나는 요가에서도 영원한 길을 얻지 못하고 또 다시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 일어나야 했다. 그 이후의 여정에 대해서는 차후 다른 기회에 논하기로 한다.

 

마무리

 

기존의 명상서적에 의하면 참선의 견성이나 단전호흡의 대주천, 요가의 사하스하라 차크라의 개화를 통하여 사람은 우주의 신성한 기운과 이어져 완성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되어 있으나

 

이것은 스스로를 신비로 치장하는 말일뿐 진정한 완성의 길이 아니다. 이러한 방법을 통해서는 수행자의 의식이 정화될 수 없으며 결코 인간의 근원적인 업과 번뇌는 떨어지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하늘의 기운보다 더욱 오묘한 것이어서 아무리 신성한 빛 속에 오래 머물러 있다고 하더라도 저절로 마음이 닦이거나 변화가 오는 일은 없다.

 

인간의 마음을 닦는 방법으로서는 자신을 구체적으로 회개하고 변화시키는 실천적 삶 이외에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부처가 명상을 통해서는 결코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고 선언한 말씀의 진의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명상은 오늘날 갖가지 미사여구와 환상으로 치장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관조하고 반성하는 한 수단에 불과할 뿐 결코 마음을 완성시킬 수 있는 정법이 아니다.

 

이것은 이미 이천년 전에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대명제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사람들이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참된 삶의 실천에 전념하지 못하고 갖가지 기이한 현상에 매혹되어 명상법에 집착하고 있는 것은 진리를 찾는 종교의 세계에도 도를 쉽게 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게재되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명상을 통하여 나타나는 기이한 현상들은 모든 접촉을 끊고 고요에 들어감으로써 욕망과 집착이 가라앉은 인간의 순수한 마음이 드러나 인간정신의 신비가 발현되는 현상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맑은 물이 괴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상태에서는 고요히 있을 때는 맑은 물에 세상이치가 모두 비치는 것 같다가도 세상의 인연이 다시 흔들어 버리면 마음은 흐려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된다.

 

모든 명상기법들은 바로 이러한 정체와 한계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참선은 자신의 생명과 의식의 근원을 끝없이 추구해 들어가 우주의 근원에 이르는 것을 본질로 하고 있으나 깨달음은 단순한 의식집중과 결심만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생생한 삶을 통하여 열심히 실천함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수행에 있어서 산에 홀로 앉아 명상으로 세월을 보낸다면 천년을 앉아 있어도 결코 마음이 정화되지 않는 것이니

 

오직 세상을 생각하는 사랑과 자비심으로 자신을 바쳐 진리를 실천하는 것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기와 호흡으로 이루어지는 요가와 단전호흡은 우주를 구성하고 있는 기운을 받아들여 이를 에너지로 삼아 자신을 완성시켜 도를 구하고자 하는 것인데 여기에서 활용하는 기운들은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유형적인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 의식의 질과는 무관하기 때문에 기를 아무리 순환시킨다고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서는 가장 순수하고 정묘한 기운인 인간의 마음을 닦아낼 수가 없다.

 

모든 존재하는 생명체는 생생한 삶 속에서 활발한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수양해 나가는 것이 생명의 본질이며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의 근본 뜻인 것이다.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생동하는 삶을 살지 않고 앉아서도 자기완성을 거둘 수가 있다면 힘차게 움직이는 삶의 질서가 붕괴되고 말 것이며 인과의 이치가 무너져 우주마저 붕괴되고 말 것이다.

 

진실한 진리의 길과 인간완성의 길은 삶 속에 있다. 자신을 완성시키고 세상을 구하는 참된 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자는 세상의 고통을 내 것으로 여기는 자비와 불굴의 용기가 있어야 한다.

 

세상의 고통과 어둠을 직접 몸으로 부딪혀서 스스로 사심과 욕망을 이겨낼 때만이 비로소 자기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을 위한 자비와 바른 삶의 실천을 통하여 끝없이 자신을 애태울 때 그 마음 속에는 순수한 사랑의 불이 일고, 그로 인해 자신의 사사로움과 욕망을 모두 불살라 버릴 수 있을 때 마침내 인간완성과 맑고 깨끗한 해탈심이 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참선을 비롯한 모든 명상법이 가야 할 바른 방향 이며 인간이 가야 할 참된 삶이며 진리의 핵심요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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