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무위자연의 함정 본문

☆ 진실의 근원

무위자연의 함정

gincil 2013. 4. 23. 22:24

<질문> 익명

진리는 보여지는 그 모든 것.....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 진리일 것이냐
인간의 눈에 비치는 피사체가 진리일 것이냐
무릇 인간의 거울은 조작의 힘 강하니 눈과 마음은 서로를 기만하는 구나

진리에 이르는 길은 오로지 현학적인 감상에서 벗어나는 것
분명한 것은 무엇이고 불분명한 것은 무엇일꼬
구하고 또 구하면
그것으로 인해 진리를 한껏 마음에 품고 흡족하게 될 것인가

자연의 숭고한 이치는 이타의 조종에 의하지 않는 것,
인간은 끝없이 진리를 찾기 위해 죄를 지을뿐이다
무엇을 구하고 무엇을 찾을 것인가

<답변>

님은 노장의 가르침에 근거해 의견을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노장의 가르침을 분명히 주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공자와 노자의 차이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노자와 공자를 같은 성자의 반열에 놓고 보나
실제에 있어서 공자는 학자일 뿐
고대 중국에 있어서 깨달음에 이른 성자는 오직 노자 한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우주의 실상을 정확히 깨달은 노자의 참다운 진리에 근거해
공자의 인위적인 학문적 견해를 반박한 것이었습니다.
그 반박의 요지는
유학이 자연속에 흐르고 있는 우주의 진실을 분명히 알지 못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너무나 인위적이고 비자연적인 것을 추구하고 있다는 것이었습
니다.

실제에 있어서 유학은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이상에 치우쳐
남에게 강요는 하기 좋으나 스스로는 실천하지 못하는 규범을 강요함으로써
권력자의 통치수단으로 활용되고
형식을 중시하는 많은 위선자를 양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분명히 알고나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바나 자연이 흘러가는 것이나 같은 것이지만
이러한 깊은 관계성을 통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공자는 인간의 생각과 사회적인 관념에 맞추어 인위적인 이상향을 설정하였던 것입니다.

이 두가지 가르침의 차이는 바로 영과 육, 생과 사, 인간과 자연, 전체와 개체와
의 상호관계를 꿰뚫어보는 깨달음에 기초하느냐 아니면 단순한 인간의 지식에 근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즉 깨달음의 눈을 가진 이는 우주 자체와 하나가 되기 때문에
현상과 접하여 사물의 이치가 스스로 나타나게 되지만
학자의 경우는 마음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배운 지식의 범위를 넘어설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예수와 석가와 같은 성자들은 영과 육의 상호관계와 이치에 대해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공자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영과 육의 상호관계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거부했던 것입니다.

* 논어 선진편 : 계로가 귀신 섬기는 일을 묻자, 공자께서 살아 있는 사람도 제대로 섬기질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기리요 하시었다. 감히 죽음에 대하여 묻습니다. 하니 공자께서 아직 삶도 잘 모르느데 어찌 죽음에 대해 알겠는가.
* 논어 술이편 : "공자께서는 괴이한 일,폭력,난동, 그리고 귀신에 관해서는 말씀을 않으셨다

이러한 차이를 알지 못하고
지금은 원뜻이 거의 희미해져 있는 노장사상에 의지하여
무조건 말하거나 단정지어서는 안된다고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노장사상에서 말하지 말고 단정짓지 말라고 하는 것은
중생들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을 아는 듯이 말함으로써
악업을 짓지 말라는 것이지
만물속에 흐르고 있는 진리마저 부정한 것이 아니며
성자들과 같이 삼세의 일을 모두 깨달은 분들이
진리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분명히 볼 수 있는 것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분명히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자들은 자신이 본 진리를 세상사람들에게 전했으며
세상사람들은 성자들의 가르침에 근거해
많은 선업을 쌓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노자의 가르침에 대해 희미하게나마 알 수 있는 것도
그분이 몇구절이나마 가르침을 남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지금 세상의 병폐는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인간의 관념과 얕은 논리에 근거하여
함부로 짓고 나누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병폐는 분명하게 알지 못한 채
불변의 이법인 인과의 이치를 부정하고
판단과 행동을 미룬 채 무조건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무위자연사상은 오늘날 동양사회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서양사회보다 어두워지게 한 주요한 원인중의 하나였습니다.

서양은 잘하나 잘못하나 계속 문제를 찾으며 원인을 지음으로써
계속 변화를 이룬 반면에
동양은 선업을 지을려고 적극 노력하지 않은 채
문제가 생기면 이를 운명과 자연에 미루는 경향을 보임으로써
스스로 질곡속으로 빠져들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차라리 구분짓고 사는 것보다 더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짓지 않은 것은 결코 스스로 생겨나지 않은 것이 불변의 이치로
좋은 원인을 지을려고 노력하지 않는 사회가 좋아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말세에 태어난 사람들은 많은 업을 지니고 태어나기 때문에
홀로 내버려 둔다면 동물에 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런 사람들을 자연 그대로 내버려두라는 말은
탐욕과 이기심에 가득한 욕망에 의지해 살도록 내버려 두라는
무책임한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이곳은 빛과 진실이 사라진 곳에서
혼동과 무의미를 벗어나
태양처럼 빛나고 있는 불변의 진실을 찾고자 하는 곳입니다.

이제 상대적인 지식을 벗어나 절대적인 진리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하여 인류문명이 헤메어온 어둠의 질곡을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불멸한 절대적 진리를 아는 것이 소중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도 그릇된 행위는 선악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하면서
진리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덕을 쌓고 선을 실행할 수 있는 기초가 된다고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과연 불변의 진리에 기초한 흔들리지 않은 지식인지
아니면 근거없는 지식들을 자기 생각으로 옳다고 인정한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진실한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이 알고있는 지식이
절대적 근거가 없으며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이며 주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진리에 대해 정말 인간이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은 진실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성자들이 우주의 실상에 대해 많은 가르침을 주신 이유는
절대적 진실을 바르게 알면 스스로 잘못을 범하지 않게 되며
인간다운 삶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선과 악, 친해야 할 것과 친하지 않아야 할 것,
정법(正法)과 사법(邪法), 연기법(緣起法)과 외도의 법(非緣起法)등을 옳고 바르게 사실대로 아는 것을 正知라고 했습니다.

선함을 찾아 열심히 사는 것이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진실입니다.
사람들이 선하게 살아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완전한 인과의 이치에 의해 자신을 완성에 이르게 하고
세상을 축복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완전한 우주의 이치를 모르기 때문에
설마 그러랴 하고 생각하고 자신의 쓸데없는 욕망을 위하여
함부로 악을 저지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완전한 진리를 찾고 배워
흔들리지 않는 삶의 진실을 얻음으로써
한계에 부딪힌 현대문명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고
이 세상을 인간이 살 수 있는 진정한 지상낙원으로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우리들의 삶에 있어서 소중한 진실에 대해
서로 축복하는 마음으로 계속 진지한 논의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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