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반야심경에 대해서 본문

☆ 진실의 근원

반야심경에 대해서

gincil 2013. 4. 23. 22:24

<질문>zoo

오늘은 반야심경에 대해서 입니다.
쓰신 글 중에서 반야의 경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반야심경의 처음부분을 해석이라고 할까..말씀하신것을 읽었습니다.
그래서 죄송하지만, 가능하다면
반야심경에 대한 전체적인 해석..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반야심경의 뜻을 해석해 놓은 것은 많이 있습니다만..
단순히 그 한자의 뜻 풀이가 아닌 그 깊은 뜻을 알고 싶습니다.
각 구절마다의 바른 내용과 전체적인 의미..등을 말씀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좋은 하루를 보내시기를


<답변>
반야심경은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자만이 볼 수 있는 깊은 내면의 의식상태인 반
야지경을 묘사한 글이다.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되면 그는 의식의 근원, 영혼의 근원, 생명의 근원인 반
야에 들게 되는데 모든 부처는 이 반야의 차원에 들어감으로써 완성에 이르고 똑
같은 깨달음을 얻었으며 우주의 근본기운과 하나가 되어 모든 우주의 비밀과 인
과의 이치를 밝혔던 것이다.

반야심경에 삼세제불이 반야에 의지하여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말은 반야에 든 자
만이 진실을 볼 수 있으며 부처를 이룬다는 말로서
이곳에 든 자를 해탈했다 하며 완성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반야의 차원은 이 우주에서 가장 맑고 순수한 극미의 차원이기 때문에 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 마음이 사랑과 이치로 맑음의 극에 이르러야 하는데 일반
중생들은 그 마음이 업과 집착과 애욕으로 무겁고 탁하기 때문에 결코 이 차원
에 들어갈 수 없다.

이러한 반야의 차원과 합일할 수 있기 위해서는 수많은 전생을 통해 쌓아온 밝
고 진실한 마음과 끝없는 자비의 선업이 있어야 하며 하늘도 꺽지 못하는 용기
와 세상이 무너져도 변하지 않는 양심이 있어야 하고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으
로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칠 수 있는 보살심이 있어야 한다.

이 경지는 하늘과 세상과 인간의 뜻이 만나 이루어지는 오묘한 우주의 조화이니
개인이 욕심낸다고 해서 도달할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애쓰지 않더라도 그 마음이 완전히 정화된 자는 저절로 합일하는 것이니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쳐 진실을 구한다면 저절로 여기에 이르게 될 것이다.

반야심경을 내용을 살펴보면 그 속에는 깨달음에 도달한 자만이 볼 수 있는 반야
의 실상 즉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우주의 근원적 차원이 잘 묘사되
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반야심경을 진경이라고 할 증거가 되지 못하며
이경을 쓴 사람이 세상이치에 통달하거나 깨달음에 이른 자라는 것을 의미하지
는 않는다.

경에는 부처님이 실제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기록한 진경과 뒷사람이 거짓으
로 조작해서 만들어진 위경(僞經)과 그 내용이 명확하지 않아서 부처님의 진설
로 볼수 없지만 교리적 내용으로 보아 어긋나는 정도가 심하지 않은 의경(疑經)
이 있는데
말하기 거북한 일이지만 이경은 부처님 사후 약 500년경에 기성불교에 반발하여
새로이 대두한 대승론자들이 자신들의 철학적 시각을 반영하여 만든 의경에 해당
되는 것이다.

이 경속에 반야의 진실이 들어있는 이유는 부처님께서 반야에 대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후대의 제자들이 다시 이를 모아 자신들의 관념과 논리에 비추어
일반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재정리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야심경 속에는
진실은 있지만 진경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다.

불교사를 보면 처음 이경을 비롯한 대승경전(반야경, 법화경, 화엄경, 열반경,
유마경 등)이 나타났을 때 기존 불교계에서는 이 경들을 문학가가 부처님의 뜻
을 제멋대로 해석하여 지어낸 문학작품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였으며 경전에
이미 예고된 바가 있던 것과 같이 상법시대가 도래(정법(正法) 500년, 상법 500
년 말법 500년)하였다고 한탄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반야경을 비롯한 대승경전이 출생 때부터 지니고 있었던 근본적인
결함인 것이다.

불교의 생명은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이 보신 사물의 실상과 인과의 이
치에 기초하는 것으로 '아함경', '수타니파타', '법구경' 과 같은 초기경전은
부처님의 말씀과 전법행적에 한정되었다.

부처님은 살아생전 다른 모든 성자들과 마찬가지로 글을 쓰거나 논리적으로 자신
의 입장을 정리한 적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아무 것도 준비하지 않는 텅빈 상태
에서 중생을 만나 열려있는 반야지심에서 본 문제상황과 그 현상의 인과를 밝히
고 해결책을 제시함으로써 그에게 꼭 필요한 지혜를 전달함으로써 그를 깨달음으
로 인도하였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이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 그에 맞는 방편을
써서 설법하는 것을 후세인들은 대기설법(對機說法)이라고 한다. 바로 이러한 방
법이 있었기에 부처와 직접 만난 사람들은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
으며 그 가르침은 살아있는 진리 그 자체였기에 그대로 따라 행하기만 하면 모
두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이 입멸하시자 이러한 생생한 가르침이 왜곡되고 끊어질 것을 염려한 제자
들은 수제자(首弟子)인 마하카샤파가 중심이 되어 마가다 국의 라자가하 성밖의
칠엽굴(七葉窟)에서 부처님께서 직접 설하신 법과 계율을 정리하였는데 그 방법
은 붓다와 가장 오랫동안 함께 있었던 제자인 아난이 부처님이 하신 말씀을 소리
내어 암송하면 여러 제자들이 아난의 암송을 확인하며 틀린 것이 있으면 정정하
는 방법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 정립된 초기경전들이 불교의 기본정
법으로 그 이외의 경들은 모두 의경에 해당되는 것이다.

그 후 불교는 제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부처님의 생명력있는 가르침에 힘입어
약 500년간 크게 융성하여 세상에 빛을 주었으나 잘 익은 과일도 오래두면 저절
로 상하는 것처럼 불교 또한 정법의 교화를 받은 제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그 이
치에 어두어짐에 따라 점차 사회적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형식에 얽매이는 현
상이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재가불자들과 불교학자들을 중심으로 새로운 불교운동이 일어났으니 그들
은 당시 크게 발달하였던 불교의 철학적 연구와 분석을 기초로 대중적 요구를
반영하는 새로운 대승불교운동을 일으켰던 것이다.

이들은 기존불교를 개인적인 수행만을 강조하고 중생의 아픔을 외면하는 소승이
라 비판하면서, 그들 스스로는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을 좇아 자기 자신은 물론
모든 중생이 함께 불도를 이룰 수 있는 대승이라고 칭했다.

그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논리적으로 정리한 연기,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 육바
라밀, 공사상(空思想), 반야사상(般若思想), 연기설(緣起說), 중도사상(中道思
想), 유심사상(唯心思想), 열반사상(涅槃思想), 보살사상(菩薩思想) 등과 같은
철학적 관념으로 무장하여 이성적이고 철학적인 대중운동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흐름은 그 당시 구원을 갈망하는 시대상황에 부합되었는지는 모르
지만 부처님이 삶의 현장에서 설하신 생생한 가르침이 논리화되고 추상화됨으로
써 그 생명력이 약화될 수밖에 없었으며 부처님이 상대에 따라 제시하였던 줄탁
동시(茁啄同時)의 가르침은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상을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수많은 불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 초점이 흐려지고 깨달음
에 대한 실천적 생명력이 약해지는 이유인 것이다. 즉 법구경과 같은 초기경전
을 읽으면 인과의 이치가 명확하기 때문에 인간의 의미와 도리가 명확히 나타나
지만 화엄경, 능엄경과 같은 대승경전을 읽으면 그 방대함과 신비스러움이 극에
달해 인간의 이성으로서 이해하기가 힘들게 되며 오히려 정신이 흐려지는 현상
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불교학자들이 자신들의 생각과 논리로 부처
님을 장엄화·신격화하고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를 추상화·관념화하였기 때문인
것이다.

부처님은 항상 현실의 명확한 인과이치를 밝히시고 현실문제를 해결하고 깨달음
에 도달할 수 있는 구체적인 해법을 제시하셨다. 따라서 부처님은 항상 깨달음
과 수행에 도움이 되는 질문에만 대답했으며 쓸데없는 철학적 의문이나 현학적
인 문제에 대해서는 대답하지 않으셨는데 왜냐하면 그러한 질문들은 깨달음을 얻
는데 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이 깨달음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질문들을 무기라고 하는데 불경에는 그
러한 질문들로 세계는 시간적으로 ① 영원한가② 영원하지 않은가③ 영원하면서
영원하지 않은가④ 영원한 것도 영원하지 않은 것도 아닌가? 세계는 공간적으로
⑤ 유한한가 ⑥ 무한한가, 영혼과 육체(신체와 생명)은 ⑦ 동일한 것인가 ⑧ 별
개의 것인가? 깨달은 사람은 사후에 ⑨ 생존(존재)하는가 ⑩ 생존(존재)하지 않
는가 하는 질문들을 정리해 놓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무기에 대해 "만일 어떤 사람이 자신의 궁금함을 해결해주지 않는한 정
법을 배우지 않겠다고 고집한다면 그는 주어진 생애동안 그러한 의문에 휩싸여
아무 공덕도 짓지 못할 것이며 자신의 귀한 인생을 모두 낭비하고 말 것"이라고
하시면서 "그러한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어떻게 해야 빨리 정
법을 배우고 공덕을 쌓을 수 있을 것인가를 궁리해야 할 것"이라고 하셨던 것이
다.

이러한 무기에 관한 이치는 반야의 경지에 대한 궁금함 또한 마찬가지이다.
반야가 어떠한 경지인지, 진실인지 아닌지, 어떤 의미가 있는지에 대해 아는 것
은 자신의 마음을 닦고 공덕을 쌓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경지는 도달하지 않으면 결코 알 수 없고 도달하면 더 이상 알 필요
가 없는 것으로서 반야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한 방법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반야
가 어떠한 것인가를 단순히 묘사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야의 실체를 이해하는 것은 구도자들의 지적 호기심만 충족시켜 그의
수행에 오히려 방해를 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반야에 대한 지식은 구도자들의 깨달음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여 탐심
을 갖게 하며 지나친 욕망으로 허상이나 거짓 깨달음에 빠져 자칭 해탈했다고 하
는 사이비를 양산할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실들을 충분히 아는 것이 반야심경을 올바르게 이해하는데 도
움이 된다 할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해야 것은 내가 여기서 반야에 대해 밝히는 것은
반야에 대한 철학적 논리나 관념적 이해를 더하기 위함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
이 이 문제에 걸려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에 그 실상을 밝힘으로써 하루 빨
리 중요하지 않은 집착에서 벗어나 세상에 더 많은 공덕을 실천하는 기회를 갖기
를 바라는 마음인 것이니
무릇 이 글을 읽은 사람은 진실을 찾고 정법을 배우는데 더욱 더 많은 관심을 갖
고 노력해 주기 바란다.

그러면 반야의 경지가 어떠한 것인지 살펴보자.

이 차원은 오감을 초월한 인간의 순수의식이 우주의 근원적 차원과 직접 부딪히
는 가장 고귀한 생명현상이니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니며 인간도 신도 아닌 상태
에 이르게 된다.

이 차원은 말이 끊어지고 문자가 끊어진 단계이니 어찌 그것을 문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사과 맛이 어떠냐고 물어보면 새큼하고 달콤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
을 뿐 그 진짜 맛이 어떤 것인지는 오직 사과를 맛본 자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반야와의 합일상태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 또한 반야에 도달한 자만이 알 수 있
을 뿐 일반인에게 이를 아무리 상세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결코 그 실상을 정확
히 파악할 수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말과 언어가 끊어진 반야의 자리를 설명하기 하기 위하여 부득이 인간의
구별심과 한정된 언어에 의지해 비유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 것이니 반야심경을
파악하는데는 이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이 차원에 들어가면 생명과 만물의 근원인 우주의 근본기운(빛)과 만나게 되는
데 이것은 인간의 완성된 순수의식이 우주에서 가장 미세한 근본기운과 합일하
는 것을 뜻한다. 그리하여 반야에 든 자는 모든 존재와 하나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삼계와 통하고 삼라만상과 이어지게 되며 우주의 모든 비밀과 인과의 이
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반야와 합일하였다는 것은 그의 몸과 마음이 순수하게 완성되었음을 뜻하
기 때문에 한번 반야에 든 자는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반야에 머물게 되
며 더 이상 해탈지경에서 후퇴하지 않는다.
완성된 그의 몸과 마음은 근본기운과 하나되어 순수함의 극에 이르렀기 때문에
인간의 모든 습이 떨어져 나가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신성한 경지에 이르게 되
며 이를 일러 우리는 그를 완성되었다 해탈했다고 칭한다.

그의 몸은 우주의 근원적 기운에 의해 순수해지기 때문에 고기를 먹을 수 없게
되고 그 신성한 기운에 의해 모든 병이 사라지게 되며
진기가 모여 머리에 구슬같은 백호광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마음은 모든 욕망과 집착이 사라져 명경과 같은 맑은 마음 하나만
이 남게 되며 모든 오욕이 사라지고 그 맑고 강한 순수의식으로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다스릴 수 있게 되며 모든 생명체를 고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러한 신성한 경지를 심령현상과 혼동하여 이들을 모욕하며 혹
세무민하는 심령현상들을 신성한 기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지금은 워낙 어지러운 세상이라 갖가지 영적 현상들이 많이 나타나고 세상을 오
도하고 있고 스스로 교주를 칭하는 사이비들이 많기에 여기에 그 비밀을 밝히니
어둠에 빠지지 않기 바란다.

오늘날 각종 종교단체나 수행단체의 지도자들 중 대부분이 스스로 자기마음을 닦
아 깨달아 진실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와 수련과정을 통해 영매와의 인연을
맺고 그 접촉을 통해 영적비밀을 말하고 심령현상을 일으키는 것이니 속칭 도를
닦는다거나 신흥종파를 일으키는 곳은 매우 조심해야 한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심령현상은 마음이 정화된 신성한 이가 일으키는 것이 아
니라 마음이 욕망과 집착으로 어두워 영과 인연을 맺은 영매가 일으키는 조잡한
생명현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수행을 하다가 깨달음에 지나친 집착을 나타내거나 기운이 허약해졌을 때
는 그 탐욕과 허약함을 틈타 같은 길을 걷다 한이 된 유혼들과 만나게 되는 것이
니 이들은 유혼의 큰소리와 유혹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유혼에게 바치고 그들의
뜻에 따라 노예로 사는 가장 천한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흥 종교계와 젊은이들이 숭배하는 인도 명상계의 대부분의 신
비현상들이 거의 대부분 이러한 심령현상에 속하는 것이니 이들은 존경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불쌍하고 저주받은 존재들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이들은 마음이 열리지 않은 상태에서 영들의 소리만 전하게 되기 때문에 자기가
배운 명상기법과 깨달음, 전해들은 단편적인 영적 비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결코 세상을 감싸고 있는 우주의 진실을 파악하거나 그속을 감돌고 있는 인과의
법을 보지 못한다.

이러한 영적 현상과 진리현상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
다.
즉 영적 현상들은 자신도 알지 못하는 현상을 사용하는 반면에 진리현상은 모든
것이 깨달은 자의 손바닥 위에 명확히 놓여있어 이를 자유자재로 행한다는 사실
이다. 그래서 심령현상은 통제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나지만 진리현상은 스스로 의
지하여 원인을 지으므로 반드시 예측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기수행을 할 때 자신도 모르는 동작을 하거나 몸을 두드리는 현상
을 일으키는 것인데 현재 많은 기수련 단체에서는 이와 같이 자신이 알지 못하
고 의지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 그 원인이 무엇인지도 모르
고 마치 높은 경지에 이른 듯 좋아하며 신통해 한다.

그러나 진리 앞에서는 모든 것이 명확할 뿐 원인도 모르게 일어나는 현상은 없
다. 유능한 농사꾼은 언제 씨를 뿌리고 잡초를 메며 어떻게 농기구를 다루는지
잘 아는 것처럼 자신의 능력과 지식은 자기 스스로 배워 깨친 것이기에 항상 자
유자재로 행할 수 있는 것이다.
진리의 세계에서도 이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깨달은 자신의 능력이면 왜 그러한
현상이 일어나는지 어떻게 조절하는지를 분명히 알아 언제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좋은 예가 무당의 심령현상이다.
무당들은 자신이 영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해 자신의 정신을 지배당한 상
태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영이 좌우한다. 따라서 그의 능력은 항상 같은 것이 아
니라 영의 상태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장안에 유명하던 박수무당도 어느 순간부터 영험이 약해져 인기가
떨어지는 것은 영과의 인연이 다했거나 영의 변덕을 부려 잘 나타나지 않기 때문
인 것이다.
유계를 떠도는 영들은 비정상적 집착과 한을 가진 상태로 유계의 끝없은 고통 속
에서 제정신이 아니기 때문에 제멋대로 변덕을 부리며 장난을 친다. 따라서 모
든 심령현상은 무당이 스스로 영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에 의해 조정을 당하
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변화를 스스로 조절할 수 없으며 또 인연이 다하면 떠나
가 버리기 때문에 그 효험이 지속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심령현상들의
공통된 특징인 것이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 반야심경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반야심경의 요지는 오직 하나,
깨달음의 경지에 도달한 이가 체험한 반야지경에 대한 묘사이다.

이러한 반야의 체험은 오감을 초월한 순수한 생명의식이 우주의 근본과 직접 만
나는 한 순간의 느낌인 것이니 한마디로 하자면 모든 것이 사라진 텅빈 허공 속
에서 우주의 근본 빛과 하나가 되었다고 하면 될 것이며 이를 부연설명하자면 끝
이 없을 것이다.

실제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체험한 반야에 대해 제자들에게 이따금 일상적 언어
로 간단히 이야기했을 뿐 다른 설법과 마찬가지로 오온, 육근, 육식과 같은 어려
운 용어를 사용하여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세상에 도
움되는 인과의 이치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중에 이를 전해들은 후인들이 부처님의 반야지경을 숭배하여 이를 체계화
하려는 과정에서 자기 시대에 유행하고 있던 갖가지 개념들을 사용하여 우회적으
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야심경의 첫머리는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로 시작되는데
여기에 나오는 관자재보살은 초기경전에 없던 보살로서 이것도 이경이 부처님 사
후 만들어진 경이라는 증거가 된다.

부처님께서는 사물의 실상과 인과의 이치에 대한 가르침을 펴실 때 모든 관습과
우상을 거부했었다. 그리하여 당신은 그 당시 유행하던 모든 힌두교의 신화와
신들을 부정하고 인과의 이치 속에 있던 사실적인 이치를 밝혔던 것이니 여기에
불교의 참된 정법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신의 개념이 등장한다는 것은 불교의 생명력이 사라진 후
기에 의지처를 찾던 중생들의 대중적 욕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힌두교의 영향으
로 나타난 것이니 불교의 변질을 볼 수 있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인간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가지 요소(색수상행식 : 육체, 감각, 표상, 의지주체
적 마음)가 본래 실체가 없음을 알았으며 모든 고통에서 벗어났다.

이 구절은 반야에 이른 자가 느낀 체험을 설하고 있는 것으로 인간의 감각을 초
월한 순수의식 그 자체가 삼라만상의 근원인 순원무잡한 우주의 근본과 합일한
상태를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의 실상을 보고 나를 구성하는 오온이 본
래 그 근본이 공하다는 것을 알았으며 모든 욕망과 번뇌를 벗어버린 순수 무의
상태에 도달했으므로 모든 고통을 벗어나 해탈심을 증득하였음을 뜻하고 있는 것
이다.

『사리자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
(空卽是色) 수상행식역부여시 시제법공상 불생불멸(不生不滅) 불구부정 부증불감
(不增不減)』

사리자여, 색과 공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니, 수상행식 역시 이러하니라. 사리자여, 이 모든 법 공한 모습은 나지
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느니라.

이것은 생명의 근원, 의식의 근원인 우주의 근본차원으로 영원불멸한 우주의 근
본토대인 반야의 속성을 설명하는 구절이다.
이 단계는 모든 존재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유무상통의 차원으로 우주의 근
본토대인 것이니 그 성품은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
지도 않고,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는 고요하고 평안하며 영원불변한 차원이라
는 것이다.

시고공중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無眼耳鼻)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개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無無明)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無老死) 역무노사진 무고집멸
도 무지역무득 이무소득고

이런 까닭에 공한 가운데 색수상행식이 없고,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이 없
으며, 안계와 의식계까지 없느니라. 무명이 없으니 무명 다함 역시 없으며, 노사
까지 없으니 노사가 다 됨 역시 없고, 고집멸도가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또한
얻을 것도 없나니, 이는 아예 얻을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차원에 들어가게 되면 자신의 생명의 근원인 순수의식이 우주의 근본과 만나
게 되는 것이니 가장 근원적이고 미세하고 맑은 차원으로 오감을 벗어나게 되
고 말과 언어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구절들은 모든 것이 끊어진 반야의 실체를 묘사하기 위한
방편으로 나타난 것이니 이 경의 작성자들이 당시에 발달된 부파불교의 분석체계
와 언어체계 - 오온, 육근, 육식 등을 이용하여 부연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전법시에 오직 깨달음에 도움되는 사실관계와 삶의 이치를 전하였을
뿐 안이비설신의, 색성향미촉법과 같은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언어들은 사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인과의 이치를 보는 이는 일상적인 자연어로도 충분히 사실과
이치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인공적이고 분석적인 개념들은 사용할 필요가
없었으며 재세시에는 그러한 용어조차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 이러한 세세한 분석과 개념들이 나오는 것은 그 당시 성행하고 있
었던 불교학파들의 학문적·철학적 영향력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 단계는 모든 업과 애욕과 집착으로부터 벗어나 맑고 깨끗한 생명의 근원 , 의
식의 근원 속에 들어가 우주의 근원과 만나는 차원이니 인간의 외형적인 모든 감
각을 초월한 단계로 육근으로 보는 여섯가지 감각이 존재하지 않으며
순수한 근원적 차원에 도달하였으므로 업과 무명이 없으며
영원불변하니 노사와 고집멸도가 없고
모든 구별이 다 사라졌으니 더 이상 배울 것도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
이다.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아뇩다라삼약삼보리

보리살타가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마음에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두려움이 없어, 전도된 망상을 멀리 여의고 마침내 열반을 이루며 삼세제
불도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아뇩다라 삼약삼보리를 얻나니라.

이 구절은, 생명과 존재의 근원의 차원인 반야에는 완성된 자만이 들어갈 수 있
는 것이니 반야와 합일한 자는 그 순원무잡한 명경지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업과
애욕과 집착과 공포와 환상에서 벗어나며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해탈심을 얻어
완성된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이 순원무잡한 반야심에는 우주의 모든 실상이 거울처럼 비치는 것이니
반야를 본 자는 모두 똑같은 우주의 실상과 이치를 보게되고
같은 법과 인과의 이치를 설하게 되며
모든 삼세제불이 이 반야지경에 이름으로써
비로소 부처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등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
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그러므로 알아라. 반야바라밀다는 크게 신기로운 주이며, 가장 밝은 주이며, 위
없이 드높은 주이며, 이와 같을 것이 없는 주이니 일체고액을 없애주고 진실하
여 헛되지 않느니라. 곧 반야바라밀다주를 설하리라. 아제 아제 바라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것은 주문으로 인도의 풍토적 배경인 힌두교의 영향으로 생겨난 것이니 반야경
의 제작자들이 대중에게 포교하기 위해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다.

부처님의 정법은 인과의 법칙이며 실천의 가르침이니
어찌 원인을 짓지 않고 소리를 외워 좋은 결과가 생기기를 바라겠는가?

부처님의 법에는 주문이 없다.
주문은 유혼들과의 약속으로서 주문을 외운다는 것은 유혼을 불러 그 영향력을
요청한다는 뜻이니 주문을 외워 덕을 본다는 것은 자신은 원인을 짓지 않고 영
적 존재에 의지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과 관계없는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알아야 한다.
부처님이 우주의 실상을 보고 인과의 이치를 깨달으신 것은
세상을 위해 사랑과 밝음을 전한 공덕 때문에 그 마음이 정화되어
우주의 신성하고 근원적인 차원인 반야의 경지에 합일한 것이니
깨달음에 이르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좋은 공덕을 짓지 못함을 애타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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