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대승불교와 중관파의 형성 본문
㉦ 대승불교와 중관파의 형성
부처님 사후 500년이 지난 기원 전후부터
기존 부파불교의 현학성과 귀족주의에 반발하면서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이때 부파불교는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복잡하고 난해한 법(法)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철학적인 종교가 되어갔고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엘리트적 지위를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함을 누리면서
추상적인 논란만 일삼고 있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의 구원을 위한 불교가 되자고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존 승려의 편협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소승'으로 공격하고
스스로를 '대승'이라 이름하면서 경전을 편찬하고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켜 나가게 됩니다.
그들은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를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나가르주나(용수)는 중관사상을 마련하여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를 마련하게 됩니다.
대승불교의 기원에 대해서는
찬불을 위한 불전문학(佛傳文學)에서 발전했다는 설과
일반신자들의 불탑신앙이 발달했다는 설 등이 있으나
부파불교 중 대중부의 교리가 발전하여 나타났다는 설이 우세합니다.
부파불교 중에서 대중부의 교리는 매우 자유분방하고 개혁적이어서
논리전개가 과거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얽매이지 않았고
매우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변형시켜 나갔습니다.
이러한 교리 전개는 당시의 진취적인 이론과 현실을 반영한 형태로 나타나고
그러한 과정에서 당연히 사회적 배경인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대중부의 교리를 살펴보면
거의 대승불교의 교리와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승의 기본교리인 불타론(佛陀論), 보살론(菩薩論),
심성본정설(心性本淨說) 등도 대중부에서 유래하는 것입니다.
즉 대승불교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숨어있다 나타난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가르침을 연구하고 정리하는 과정에서
사변적 논리가 발달해 나타난 부파불교의 철학적 연구결과였던 것입니다.
즉, 불교의 흐름은 초기에는 '불타의 말씀'이 그대로 진리로 받들어졌으나
부파불교 단계에서는 인도인의 사유로 논리화되고 체계화되었으며
대승불교에서 새로운 신앙과 교리로 재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우리들이 생각하듯이 인도에서
기존 소승불교를 뒤엎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개혁운동이었을 뿐이며
인도 불교의 역사는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을 견지하고
세부적인 내용을 계속 연구해간 부파불교의 역사였습니다.
대승은 약 A. D. 2 세기경에 흥기한 이후
중국의 구법승 현장이 인도에 체류하던 7세기 때에도
기존 부파 불교인들과 갖가지 상이한 교리적 입장에 따른
대립·쟁론을 벌렸는데
현장이 쓴 글에도“모두 소승을 배우고
대승은 믿지 않는다”라고 기술하고 있는 것은
당시 인도에서 대승의 소수파적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은 13세기경 인도 불교가 본토에서
자취를 감추게 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중국 등지의 북방으로 전래된 후에야
대승불교는 고도의 철학적 사유로 말미암아 크게 흥기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중국에서는 기성교단의 전통과
영향력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었으며
대승불교의 철학적 논리과 수행 중시 사항이
중국의 사유적이며 도가적인 수행 기풍과
그 맥을 같이 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철학적으로 전개하여
완벽한 이론 체계와 관념체계를 갖추어가며 경을 만들어나갔습니다.
그래서 AD 1세기경에 대승경전인 반야계통의 경전이 나타났으며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3세기 경에는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공에 관한 철학적 논리가 부여되면서
대승불교가 완전히 틀을 갖추게 됩니다.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하여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밝히고 있으며,
공(空)사상에 입각해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비판 배척하게 됩니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의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합니다.
이에 대해 수행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을 중시한 수행자들은
중관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우주의 실체는 공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유식설을 주장하게 되는데
이렇게 하여 대승불교는 중관파와 유식파의 논쟁을 통해
고도의 관념적 사유를 전개하게 됩니다.
깨달음의 실상을 밝힌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사유에서
우주의 본질이 공이냐 아니면 마음이냐를 따지고 든 것이지요.
그럼 중관파에 대해 먼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관파의 시조는 나가르주나(용수) 로
그는 그 당시 시대적 흐름 속에 나타난 대승 사상을
철학적으로 꽃피운 대승의 대표적 논사입니다.
그는 남인도 안드라 왕조의 데칸고원에서 탄생하여
젊었을 때에는 브라만 출신으로 방탕을 일삼다가
후에 뉘우침이 있어 불교를 배운 사람으로써
힌두사상 뿐 아니라 그 당시의 여러 사상에도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는 처음 유부에 출가하였으나 후에 대승의 교리를 체득한 후,
중싸타바하나왕조의 보호아래 공 사상을 펼치다
나가르쥬나콘다에서 입멸하였습니다.
저서로는 [중론(Madhyamakakarika,中論)], [대지도론(大智度論)],
[대품반야(大品般若)], [십주 비바사론(十住 毘婆沙論)]이 있는데,
특히 [중론] 은 중관학파를 형성하여 6세기 이후에 크게 흥기하게 됩니다.
용수 탄생 당시 인도 불교계는 기존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아비달마 승단들이 20여 종의 교파로 난립되어 있었고
한편에서는 이에 불만을 품은 혁신적인 불교도들이
대승경전의 편찬과 대승불교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또 불교외적으로는 전통적인 육파철학(① 산키아(Smkhya)학파
② 요가(Yoga)학파 ③ 니야야(Nyya)학파 ④ 바이세시카(Vaisesika)학파
⑤ 미만사(Mims)학파 ⑥ 베단타(Vedant)학파)이 하나 둘 정비되어가면서
대중적인 힌두교가 서서히 인도사회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상계의 혼돈 속에서 공 사상의 대가인 용수가 탄생하여
그 당시 사상적인 흐름인 현실과 이상을 구분한 이원적 사유방식으로
불교를 재해석하게 된 것입니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란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이라고 합니다.
자성이란 것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이며,
항상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는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 <비존재>,
<존재이면서 비존재인 것>, <존재도 아니고 비존재도 모두 아닌 것>이라는
네가지 인간의 사유범위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라 하면서
이 네가지 사유의 모순을 지적하여 사유를 벗어난 진여를 찾는 것이
중관체계의 변증법이라고 주장합니다.
즉 연기법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영원불멸한 실체는
말로 표현하기 불가능하므로 '무엇이 아니다' 라는 식의
부정적인 표현으로서만 간접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현상과 실체를 구분하는 힌두적인 이원적 사유방식을 도입한 것입니다.
그래서 용수는 부처님이 실체에 대해 하나의 법을 밝힌 것과는 달리
“세속적인 덮힌 진리와 최고의 진리에 기초하여 붓다는 법을 설했다”고
주장하면서 이원론적인 논리전개를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우주의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말합니다.
이에 비해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적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이론에 비유한다면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말합니다.
그래서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의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인 것이며 꿈과 환영에 불과하니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가슴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그 꿈은 아침 햇살 속의 이슬과 같은 것이니
더 이상 꿈 속에는 한 조각의 진리나 사실이 없으며
영원히 자유로운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용수는 이와 같이 <중론>에서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관을
연기설과 같은 위치에 놓음으로 공관을 이론적으로 해명하고
대승불교의 역사적 위상을 확립시켰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변질시킴으로써
불교는 사실에 관한 현실적인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되게 됩니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생생한 거울이었는데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텅빈 허공으로 변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때부터 인간완성의 모범적인 경지인 부처님의 해탈지경 대신에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텅빈 허공이
깨달음의 실체로서 자리잡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 우주가 공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는데
후대의 수행자들은 선정 수행시 의식의 주체를 바라보고 있는
텅빈 의식의 존재를 체험하고 이것을 만유를 포함하고 있는
우주의 바탕으로 오해한 것입니다.
이것이 후에 아뢰야식으로 발전하고 유식론의 근거가 되기도 하는데
이처럼 대승의 기초가 되고 있는 공사상과 유식론은
후대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체험을 불교 속으로 가져와
부처님 법을 변형시킨 말법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연기하면서 변한다고 하여
고정된 실체가 없는 공이라 하였으나
이것이 바로 관념의 극치요
사실을 부정하는 말법의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판단할 때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현재라든가 우리 생애라든가 인류생존시라든가 우주존재시라든가
하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눈앞의 현실을 판단해야 하는 실제상황을 가지고
우주적 시각으로 모든 것이 공하다고 한다면
이보다 세상을 속이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태초의 시간까지 고려해 사물을 판단한다면
변하지 않은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며
그런 기준에서 말을 한다면
아무 판단도 아무 일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기준이 없는 관념적인 말이
바로 나가르주나가 정립한 공사상의 정체입니다.
용수는 이 세상은 무지한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실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오온을 필두로 하는 제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그 환상을 벗어나면 본래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지도 않은
제법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보게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환과 같으며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차별관념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처럼 불제자의 입에서 생생한 부처님의 깨달음의 실체를 부정하고
해탈 마저 하나의 분별심이며 착각에 불과하다는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이것이 올바른 법의 실상을 밝힌 말이며 불제자의 말이라 하겠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이러한 논리가 불교의 차원높은 사상으로 인정받고 있으니
그만큼 요즘의 불교가 부처님의 원 가르침에서
많이 벗어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나가르주나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대승불교는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이며 삶을 구성하는 실체적 요소로 간주되었던
모든 다르마(法)를 부정하고 모든 것이 공하다는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기존 불교계를 지배해오던 부파불교의 승단인 소승불교와
서로 양립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법을 이어받은 설일체유부에서는
이러한 중관학파를 ‘도무론자(都無論者 : 모든 것이 무라고 부정하는 자)’라고 하였고,
경량부는 세친의 〈구사론〉이나 그에 대한 경량부 주석서를 통해
‘일체의 법체가 모두 없다’고 하는 사람들을
‘일체가 없다는 집착’에 빠져 있다고 하여 이단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그리고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리랑카 상좌부에서도
중관학파를 대공부(大空部)라 하여
이단으로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이러한 현상을 단순하게 생각하거나 쉽게 넘겨버려서는 안됩니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한 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점이 많다는 것을 명백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니
우리가 중관사상을 판단하는데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더 나아가 같은 대승불교의 유식학파에서조차
중관학파를 ‘있지 않음’에 집착하고 있는 극단론자로
공격·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불교 교리사에 있어 유명한 중관과 유식의
공과 유에 대한 교리 논쟁이 바로 그것입니다.
유식학파들은 중관학파에 대해
‘그들은 일체가 이름뿐인 것이 진실이고 바른 관찰이라고 하지만
오직 이름일 뿐이라면 어디 진실이 있겠는가? 하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최고의 허무론자들로 차라리 아견(我見)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같은 ‘악취공자’보다 낫다' 고 중관을 질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유식학파는 중관의 공사상을 수용하면서도
모든 것이 공한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의식이 있으며
그 의식이 모든 존재를 결정한다고
공을 의식으로 환원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중관학파가 허무론자로 오해되었던 것처럼
유식은 또한‘주관적 관념론자’로 비판받게 됩니다.
이처럼 유무의 극단설을 비판·부정하여
연기 중도를 선양하려 했던 중관학파가
도리어 무 또는 공만을 주장하는 극단론으로 취급받아 역공당했다는 사실은
논리로서 우주의 실체를 규명하려 했던 사변론의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이처럼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실체가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거의 관념의 차이가 사라지게 됩니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사고방식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나중에는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의 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다시 힌두교화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힌두교파에서는 불교가 힌두교와 유사한 교리를 가진
지파의 일종으로 무리없이 수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힌두의 최고철학가 상캬(S khya)의 不二論(Advaita)철학을 살펴보면
현실을 인정하되 그 실체는 공하다고 보는
대승 불교의 이중적 사고방식과 동일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절대자 브라흐만은 속성이 없고 지고지순한 의식인데
인간들은 어리석게도 브라흐만을 세계를 창조하고 주재하는
인격적인 신으로 본다고 합니다.
따라서 절대 존재, 지고한, 순수한 의식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으며
말과 관념을 넘어선 세계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부정적인 표현만을 통하여 그 근처까지만 접근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존재로서의 순수의식, 지고한 존재를 '높은 브라흐만'이라 하고
반면 속인들이 생각하듯 현상세계를 창조하는 낮은 창조신을
'낮은 브라흐만'이라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진리를 궁극적 진리와 세속적 진리를 구별했습니다.
즉 인간의 말과 생각으로 접근할 수 없는 궁극적 진리의 세계와
인간 세계에서 통하고 표현되는 세속적 진리의 세계로 구분한 것입니다.
이러한 이중적 사고 방식은 용수의 영향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의 실체는 영원불멸한 브라만으로 이루어져 있고
단순한 껍질인 이 세상은 무지와 환으로 이루어진 고해로 보는 것이
인도 브라만적 사유의 기본 전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말하는 신, 업, 윤회, 자아, 창조 등은
궁극적 진리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세속적 진리로 봅니다.
따라서 낮은 차원의 브라흐만을 믿고 기도하고 착한 일을 한 사람들은
천상에 나기는 하나 결국은 자아가 여전히 있기에
업에 따라 윤회를 다시 윤회해야 하므로
진정한 해탈의 길이 아니라고 비판하고
진정한 진리인 브라흐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현상세계와 업과 윤회가 모두 환상이라는 것을 깨달아야만
자아도 없어지고 업도 없고 윤회도 없어지는
진정한 해탈을 얻는다고 합니다.
따라서 선한 행위와 신에 대한 기도만으로는 해탈에 이르지 못하며
신에 의해 나타난 최고의 지식인 베다의 공부와 선정을 통해서
신의 실체를 만나야만 해탈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힌두교의 우주관과 수행법은
사실과 실천행을 중시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는 달리
초월적인 존재에 대한 믿음과 선정을 중요시하여
현실과 유리되는 경향을 보이게 되고
이것이 불교에 영향을 주어 다시 불교의 수행법이
부처님이 부정한 공과 선정에 몰두하는 것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중관학파의 말대로 세상이 고통이고 환상이며 나의 실체가 없다면
그러한 사고방식과 인생관을 가진 사람은
삶을 소중히 여기고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현 대승불교에서는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모든 집착이 헛된 욕망임을 알았을 때
집착을 버리고 사심없이 바르게 살 수있다고 하지만
어차피 환상인 세상에서 옳고 그름마저 의미가 없고
해탈마저 분별심에 불과하다면
선악을 가리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자신을 불태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정말 중관학파의 주장이 사실이고 이 세상이 헛되다면
사람들이 자기 멋대로 산다고 해도
양심이 거리낄 일이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공이며
실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부처님의 사실에 관한 이치가 사라지고
관념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은 중관사상이 유행하면서
세상은 어둡고 무기력해지고
사람들의 삶은 운명적이고 체념적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눈앞에 보이는 사실과 이치를 무시하고
관념적 논리에 빠져 환상을 가까이한 대가인 것입니다.
'☆ 진실의 근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교의 형성과 불교의 소멸 (0) | 2013.04.24 |
---|---|
유식파의 출현과 선정 중시 현상 (0) | 2013.04.24 |
열반적정 (0) | 2013.04.24 |
제법무아 (0) | 2013.04.24 |
제행무상 (0) | 2013.04.24 |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