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진실과 이상 본문

☆ 진실의 근원

진실과 이상

gincil 2013. 4. 24. 12:06

부처님이 이 세상을 완전한 법계라고 표현했듯이 
이 세상은 완전한 인과와 진리의 표현체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인간이 지은 모든 일과 이루어지는 현상과 결과가 모두 들어있다.

따라서 있는 일에 근거하여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에 따라 살아간다면 
삶이 헛되지 않고 자연의 흐름과 조화되어 아무 문제없이 살 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세상에 존재하는 일들은 모두 인과법에 의해 나타나고 있으며
그 이치는 수학의 공식과 같아서 세상의 일은 공식에 의해 나타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따라서 세상을 보는 이들은 이러한 자연의 법칙이 너무나 엄중하여 목숨과 같이 지키지만
세상을 보지 못하는 이들은 그 엄중함을 모르니 이를 경시하고 개의치 않는다.

인과법을 알고 나면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가 명확하기 때문에
인정이나 감정에 얽매지 않고 옳고 그름에 의존하게 된다.

그래서 진리를 깨닫기 전에는 법을 지키기는 너무 어렵지만
진리를 깨닫고 나면 법을 어기기가 너무 힘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 속에 존재하는 인과법에 의한 공식을 빼거나 무시해버리면 
현실 속에 나타나기 어려운 몽상적인 이상이 된다. 
오늘날 교육이나 학문의 근본적 문제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실이란 현실 속에 존재하거나 존재할 수 있는 일이며
이상이란 인간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며,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것이니 
오늘날 현실을 무시한 이상에 대한 집착이 많은 문제의 원인이 되고 있다. 

요즘 매체들이나 일부 교육자들은 자라나는 어린 세대의 꿈을 존중해야 한다고 
갖가지 비현실적이고 몽상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 결과 오늘날 교육내용 속에는 현실 속에서 이룰 수 있는 창의적인 내용이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치에 맞지 않은 비현실적인 일이나 인간이 추구하기에는 위험한 일들도 많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성실한 삶을 멀리하고 자극적인 것만 추구하며
실천성이 약해지는 원인에는 이러한 잘못된 교육내용 탓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잘 구분하여 가르침으로써
자라나는 세대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정신은 기르되
몽상적이고 탐욕적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진리의 빛이 흐려져 종교가 힘을 잃은 오늘날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고 진리를 찾고자 하는 가장 중요한 부문이 학문분야이다.

최근 학문은 실용성을 띠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지만
아직 기조에는 많은 이상성과 자연의 공식과 어긋난 비논리성이 많다.
특히 사회과학 분야에 이러한 경향이 매우 강하다.

학문이 제 구실을 하려면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는 현실 철학이 되어야 한다. 
사실과 그 속에 있는 법칙을 정확히 알아야  세상일을 정확히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일반적인 기대와는 달리
대부분의 사회과학들은 사실보다는 이상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학자들은 눈이 열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는 성자들과는 달리
중생의 시각에서 얻어들은 지식을 자기논리에 따라 정리하기 때문에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의 생각과 이상을 추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음의 빛이 있는 곳에서 진리를 가르치는 것과 
중생의 생각과 논리대로 지식을 정리하고 재구성하고 있는 학문과의 차이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학이다.
유학의 뿌리는 공자에게 두고 있는데
공자는 주역을 묶은 끈이 세 번이나 끊어질 정도로 역을 공부했다는 말이 있다.
이말은 그가 세상을 깨우쳐서 있는 일을 보고 말씀하신 분이 아니라 
많은 지식을 공부하여 이를 이상적으로 재구성한 학자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에 비해 다른 모든 성자들은 열린 시각에서 본 사실과 이치를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가르침은 아름다운 논리와 이상 속에 있다.
이상 속에 있으니 사람들이 듣고 보기에 좋아 많은 사람들이 추종하는데 
실제 현실 속에 실천할 길이 막연한 것이다.

형제는 우애를 나누어야 되고 부모는 섬겨야 한다는 삼강오륜은 아주 좋은 말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러한 명제 속에 어떻게 해야 그 가르침을 실천할 수 있을 것인지 
길이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그 바탕인 현실과 
근본인 사람의 내면에 존재하고 있는 의식에 대해 깊은 성찰이 있어야 하는데
유학에는 여기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이 이상과 결론만 요구하니 
위선이 나오고 세상이 어두워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무조건적 이상주의는 강압적 권위주의를 만들고
밑에 있는 부하에게 현실적 조건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성과를 내라고 요구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지시를 받은 부하직원들은 좋은 결과를 만드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거짓과 허위보고와 비정상적 방법에 의존하게 되고 
그런 곳에는 자연스레 거짓이 커지게 되니까 거짓과 뇌물과 협잡이 가득한 세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유교가 성한 곳에서는 정치가 어둡고 탐관오리가 많아 민폐가 컸던 것이다.

이처럼 좋은 열매를 만들어야 된다'고 말하는 것은 작물을 키우는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떤 방법에 의해서 어떻게 하면 그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가' 하는 이치를 밝혀야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적절한 대응책을 마련하여 바람직한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교에 대해 많은 연구가 있고 동아시아 발전의 원동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이러한 학자들은 세상을 보는 눈이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을 쓴 것이니
더 이상의 논쟁은 사양하려 한다.

이러한 것을 살펴볼 때 오늘날 사회과학이나 철학들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진실과 법칙을 잘 알지 못하고 크게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어차피 그들은 세상을 보지 못해 자신의 주장이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생각과 희망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을 구성하는 진실과 공식에 대해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가 세상을 보는 눈이 있어 세상이 이루어지는 공식과 진실을 알게 된다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비현실적이고 이상적인 말을 함부로 하며 다른 사람 앞에 나설 수가 없다.
그것은 세상의 흐름과 어긋난 존재할 수 없는 일로서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는 비인간적이고 양심없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최근에 어느 좌파 사회학자가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을 봤다.
“좌파는 다르다는 것은, 좌파가 추구하는 이상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지 않다는 점부터입니다.
좌파의 평등주의는 자연을 따르는 것이기보다는 
우리 마음 속의 자연, 즉 우리의 이성대로 자연의 원칙을 다소 수정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좌파도 이 세상에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을 이 세상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그들은 세상의 진실과 인과법의 엄중함을 모르고
이상을 사회과학의 특징으로 인식하여 
새로운 이데올로기나 사회운동으로 사회를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일은 정해져 있다.
사실과 정해진 원칙과 인간의 길을 밝혀 
세상을 조화로운 질서로 이끌어 나가는 것이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의 길인 것이다.

만약 인과법에 의해 짜여진 자연의 질서와 이치를 무시하고 
비현실적 이상에 빠져 무리하고 급진적인 개혁을 시도한다면
엄정한 인과의 법칙은 사회질서의 붕괴를 통해 커다란 재난을 가져온다.

이상주의자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이상을 주장한 결과
그들이 인류사회에 저지른 죄업이 너무나 끔찍했음은 우리는 역사 속에서 잘 알 수 있다.

근세 들어 공산주의자들이 현실을 무시하고 이데올르기를 만들어 세상을 바꾸려 한 결과
인류는 전무후무한 비극을 낳았던 것이다.

그러면 공산주의의 핵심 요체인 부의 공동분배의 허구성에 대해 알아보자.

그들은 평등주의 이상에 의해 모든 재화는 공동으로 생산하여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속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니 진실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삶의 주체는 개인으로서
세상의 모든 일은 각자가 지은 만큼 받는 것이 원칙인 것이며
부와 가난 또한 각자가 능력과 노력에 의해 나타나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자연의 질서를 어기고 
사회 공동체가 전체적 입장에서 개인의 삶의 결과를 조정하는 것은
현실 속에 있을 수 없는 무리한 일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자들은 기득권층이 가진 권력과 재물을 부당한 것이라 생각하여
이를 타파하는 혁명을 하여 다수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일하지 않고 게으른 자가 자신의 가난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남의 것을 욕심내 자기 배만 불리려는 무지한 탐습에서 비롯된 것이니
자연의 이치와 양심에 어긋난 것이다.

사람이 가난한 것은 기본적으로 그 사람의 자질이 약하고 노력이 적어 나타나는 결과이니
가난한 자는 자신의 가난을 감내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며 
노력을 통해 이를 극복하려는 자세를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고 가난이 자신의 책임이 아니라 
세상이 만들어 놓은 불평등 구조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모든 것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인과법과 세상이 법계임을 부정하는 악마의 주장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세상이 완전한 이치와 조화로 이루어진 법계인지 
아니면 부조화와 갈등으로 이루어진 혼동덩어리인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것이 사회학의 가장 오래된 쟁점 중 하나인 갈등론과 기능론의 다툼이다.

기능론에 따라 세상이 이치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이치를 발견하여 실천만 하면 잘 될 수 있지만
갈등론처럼 세상이 이치가 없이 부조화와 갈등으로 이루어지는 세상이라면 
아무리 원인을 잘 지어도 되는 일이 없을 것이므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내 몫만 확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신 성자들은 모두 세상이 완전한 질서와 이치로 이루어져있다고 말씀하신 것과는 달리
갈등론은 모두 학자들이 주장한다는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갈등론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이상이자 감정적 바램인 측면이 강한 것이다.

따라서 갈등론은 태생적인 한계를 안고 있으며 논리에도 근본적 모순이 있다.
갈등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이치가 없고 불평등한 구조이므로
이를 깨뜨리기 위해서는 하부구조의 힘을 길러 상부구조를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상부구조를 뒤엎기 위해 하부구조의 힘을 길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전제 자체가 세상의 조화와 법칙성을 근거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그들이 힘을 길러 혁명을 성공시키기 위해 소수의 힘을 조직화하는 원인을 지어야 하며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여 이를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리는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세상의 부조화나 불균형과는 달리
세상이 사실의 바탕위에서 이치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갈등론이나 기능론 모두 논리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인과법의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자연질서와 사실을 기초로 하고 있으므로 
갈등론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그들의 주장은 자연의 질서나 이치와 맞지 않은 이상에 불과하기 때문에
현실에 나타날 때는 기존 질서를 붕괴시켜야 하는 엄청난 부조화와 충격이 뒤따른다.

근세에 공산주의자들이 혁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노동자 농민들을 조직화하여
폭력으로 가진 자를 뒤엎고 가난한자의 천국을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힘을 기르는 것은 쉽지 않았다. 세상은 저절로 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엄청난 사회적 인간적 피해가 속출하였고
그들의 희생을 밑거름으로 결국 20세기 초 세상은 공산주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폭력으로 세상을 뒤엎으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그들이 흘린 피땀으로 이치에 따라 세상을 개척하려는 원인을 지었다면 
인류사에 그러한 잔인한 기억이 없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은 세상이 나타났을 것이다.

혁명의 결과로 많은 나라에서 공산주의자들은 정권을 잡았지만 
주인이 된 평등한 국민들은 이상에만 빠져 있었지
냉엄한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현실은 인간의 모든 것을 다 바치지 않고서는 
자기 몸하나 먹고 살 것도 보장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게으른 주인이 되어 버린 그들은 형식적인 노동만 하고 모든 고상한 인간적 삶을 누리기를 바랬다.
그러자 그 사회에는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평범한 소인이 되는 결과가 나타나 
국가는 인민들의 밥거리도 제공해주지 못하는 가난한 나라가 되어버렸으며
모든 것을 국가에서 좌우하다 보니 관료주의가 팽배하여 
뇌물과 독재가 판을 치는 저질스런 나라가 돼버리고 만 것이다.

그 결과 공산주의의 붕괴가 나타났고 
사실적 이치를 무시한 마르크스의 평등주의 이상은 관념적 허구로 드러났던 것이다.

이러한 원칙은 지금 농민운동과 노동운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하층민의 힘을 규합하여 현재의 자본주의 체제를 극복하고 
노동자와 농민이 제대로 대우받는 세상을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세상일은 힘과 이상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이치에 근거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 일은 개인의 주체성과 책임을 근거로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경제의 효율을 살려 모든 사람이 잘 살기 위해서는 
개인의 자율성과 능력을 활성화시킴으로써 전체의 부를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그러지 않고 현재 상황에 대한 불만에서 무조건 힘으로 현재의 구도를 깨뜨리고 
자신들의 이익만 추구하려 해서는 결국 모든 사람이 가난하게 되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세상 일은 사실을 기초로 이치에 따라 만들어 나가야 하는 것이지
사실과 이치에 맞지 않은 이상일 때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화를 부르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을 근거하여 사고하고 행동하기 위해 진실을 깨우쳐야 한다. 
좋은 가르침은 인간에게 진실을 깨우치는 가르침인 것이다.

진실을 바로 가르칠 때만이 거짓에 속는 일이 없어지고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여 올바른 대책이 나오게 된다.
만약 힐책이 두려워 나쁜 것을 숨기고 좋은 것만 내세우게 되면 
나쁜 것은 불행을 만들고 좋은 것은 위험을 부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을 깨우치는가? 
있는 일을 두고 깨닫게 해야 한다.
이것을 진실한 가르침이라 한다.

그 예로 현실의 힘과 권력에 대해 가르칠 때는
강한 힘이 약한 힘을 굴복시키는 현실도 가르치지만
나약한 힘도 모으면 큰힘이 되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힘을 악하게 쓰면 자신도 망치고 세상을 망치지만
정의롭게 사용하면 세상을 축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모두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말세이니 어둡고 거짓된 관념이 퍼져
환상이나 탐욕을 이야기하면 들으려 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실을 이야기하면 하품을 하며 들으려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진실은 마음에 선근이 있어 
환상을 멀리하고 진리를 좋아하는 소수의 사람만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마음에 진실이 없는 자는 그 마음 속에 거짓과 환상이 가득하니
진실을 보여주어도 보이지 않거나 가치가 없게 보이는 것이다.

있는 일 속에 나타나는 인과의 이치를 진리적인 가르침이라 하고 
세상 일이 인과의 이치에 의해 생겨나는 결과를 진리적인 해답이라고 한다. 
사람이 진실하지 않아 있는 일을 보지 못한다면 이러한 공식과 결과를 알 수가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거짓이 드러날 까 두려워 진실을 숨기고 진실한 자를 탄압하는 길을 택한다.

어둠과 밝음은 상극으로 밝음이 짙어지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기 때문에
어두운 자들은 결코 밝음을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예로부터 성자들의 삶이 고통스러웠던 이유도 
세상의 어둠이 밝음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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