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세상 속에 정해진 일들과 명확한 이치 본문

☆ 진실의 근원

세상 속에 정해진 일들과 명확한 이치

gincil 2013. 4. 27. 11:32

진리가 사라진 시대에 사람들은 각자의 생각과 판단이 중요하며

세상의 흐름에 따라 사는 것이 현명하다고 말하지만

진리의 세계는 모든 것이 또렷하며 명확합니다.

세상은 하나이며 정해진 사실과 이치가 있는 것이니

이것을 분명히 아는 것이 진리의 세계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이러한 분명한 사실과 이치를 바로 알아야 길을 잃고헤매는 현대문명의 어둠에서 벗어나

사실에 부합된 올바르고 보람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며

이를 알지 못하고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아가다가는

결국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나 생명을 이루는 이치와 괴리된 삶을 살아

무의미하고 불행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문명은  이러한 생명과 진리에 관한 참된 지식을 상실하고 생각으로 살아가는 데서 

근본적 한계와 혼란이 나타나고 있으며 벗어나지 못할 중생의 운명에 헤매고 있는 것입니다.


님은 절대적 신을 이야기 할 때, 오차와 예외없는 우주 법칙으로서의 신이 

비인격체적인 성격을 띠는 것 같아서 무신론과 비슷하다는 의문을 표시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을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기존에 나와있는 논리를 의문없이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철저한 무신론이라면 완전한 뜻이나 질서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혼돈과 먼지 덩어리 밖에 없는 세상이라고 할진데

어찌 그러한 근원에서 완전한 질서와 뜻이 있는 완벽한 세상이 나타날 수 있겠습니까?


사실 무신론이라는 것은 신비한 생명과 이치가 존재하는 지구에서는 본래 존재할 수 없는 이론입니다.

태초에 먼지 밖에 없고 혼란 밖에 없다면 

이렇게 완전한 뜻과 질서가 자리잡은 우주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간들이 나타나 우주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고 진리를 생각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님은 서구 유신론적 관점에서 인격신을 가상하고 절대자를 생각하고 있기에

자의적으로 세상을 움직이지 않고 완전한 뜻과 질서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 세상을 

무신론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서구인들은 세상을 자의적으로 움직이는 인격신을 절대자로 가정하고 있기에 

(물론 이것은 예수의 뜻과 다르지만)  

아무리 완전한 뜻과 질서를 내포하고 있는 절대적 존재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를 무신론의 부류에 포함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신의 인격성 여부에 대한 의문은 철학계의 오래된 논쟁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를 보지 못하는 한 그에 대한 답변을 내리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이것은 오늘날도 기독교와 불교계의 영원한 쟁점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세계에서 보면 그 의미는 분명해 집니다.

완전한 법계 속에서는 이곳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일은 다른 곳에서도 이루어지지 않으며

이곳에서 있는 일은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이치로 존재하게 됩니다.


농사를 지음에 있어서 열심히 피땀 흘리지 않고 기도로서 농사를 풍년들게 하지 못한다면

세상의 다른 모든 일도 피땀 흘리지 않고 기도로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이 감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치에 의해 이루어진다면

신 또한 세상의 일을 이치에 의해 이루는 것이지 자의적으로 바꾸는 일은 하지 않는 것입니다.


완전한 신이기에 처음 만들때 두 번 다시 수고를 하지 않도록

모든 것이 공평하고 정의롭게 이루어지도록 완전하게 만들었기에

나중에 굳이 나타나 수고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물론 좋은 소망을 품고 열심히 노력하겠다는 바른 마음을 지니는 기도는

인간이 타고난 선근을 기르는 참된 생명력의 발현이니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인간의 본원적 양심에서 우러나오는 선한 마음의 흐름을

남에게 의지하고 덕을 보려는 의타적 기도와 같이 보아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헷갈리기에 사람들마다 신에 대한 자세와 기도의 의미가 다른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과 능력을 길러 세상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한다면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다른 존재에 의지해 이치에 맞지 않는 이기적 덕을 보려 기도한다면 

결국 눈은 흐려지고 능력이 약해져 자신을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신은 완전합니다.

물론 세속에서 말하는 신은 여러 종류입니다.

생명체의 죽은 의식을 신이라 하는 경우도 있고 천상의 높은 차원의 의식을 신이라 하는 경우도 있고

이 우주를 완전하게 창조하고 이루고 계신 절대자를 신이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은 제일 후자의 절대자, 조물주, 하느님, 불성, 신성을 말합니다.


이러한 절대자의 완전한 뜻과 자비와 의지를 인간의 생각으로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절대자의 속성은 가장 완전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와 지혜가 성숙해 신의 행동을 완전하게 이해하게 되면 

신이 이룬 모든 일은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 중 가장 완벽한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고 이치에 따라 해결하는 방식으로

이러한 방식이 가장 완전하며 가장 인간적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뜻을 인간들은 자신의 시각으로 해석하려 하기 때문에

신의 뜻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 수많은 모순이 생기고 

성지회복이라는 성전을 행하는 십자군이 아라비아군에 패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완전한 신은 인간을 감정으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치로 대하는 것이며 

이것이 신과 인간 간의 가장 완전한 관계입니다.


완전한 질서에 의해 짜여진 법계를 보고 인과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점차 감정이 사라지고 사실에 의해 판단하며 옳고 그름에 의해서만 행동하게 됩니다.


그러한 사례는 완전한 신에 가까워진 성자들의 행적에서도 잘 볼 수 있습니다.

성자들은 감정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치와 옳고 그름에 의지하여 행동하는 것이니

예수나 부처와 같은 성자들이 제자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정이 없고 너무 냉철하여 비인간적으로마저 보인 이유는

흐린 감정이 사라지고 오직 맑은 마음과 이치만이 남은 진리의 화신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음 속에 업이 사라져 맑게 정화된 근본의 세계(반야)의 들게 되면

세상의 모든 일이 마치 도화지위의 숫자처럼 명확히 나타나게 됩니다.

정해져 있는 일들과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에 의해 모든 일이 완전히 이루어지고 있으며

흥하는 일과 망하는 일이 모두 어김없는 법칙 속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처럼 세상은 정해진 일과 이치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니 이러한 법칙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절대자는 완전한 세상과 질서와 이치에 의해 세상이 완전하게 굴러가게 만들어 놓았으므로

이 세상에 나타나 개입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만약 나타난다면 자신의 불완전한 창조와 그러한 세상을 만든 자신의 불완전성을 드러내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절대자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이며

세상의 주인은 산 생명으로 오직 산 자만이 그 노력에 의해 세상을 만들어가며

죽은 영혼은 이승에 떠돌아다닐 수 없도록 원칙이 정해져있기에

무당이나 종교단체에 나타나는 영들은 불완전한 영적 존재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세상에 영적 존재가 돌아다니면 끈적한 인력대의 힘에 의해 고통을 받게 되고

세상의 인연을 만나게 되어 다시 재생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게 살아가는 영들만이 이 세상에 나타나 

세상에 큰 의미가 없는 이상한 영적 현상을 일으키며 생명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세상에 나와있는 회색빛 어둠에서 벗어나 분명한 원칙을 깨닫느냐 여부가 

세속의 논리에서 사느냐 아니면 진리의 세계에 사느냐의 전환점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생각으로 중생의 생각으로 만든 갖가지 사회 이론에 입각하여

세상이 매우 불평등하고 빈부격차가 비인간적으로 커진다고 불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속에 있는 인과의 이치를 바로 보게 되면

가난한 자에게는 가난하게 된 분명한 이유가 있고 

부자에게는 부자가 된 분명한 원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세상의 주인은 사람이며 각자의 능력에 의해 개인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구조나 환경은 인간이라는 주된 변수가 영향을 주는 종속적 요인에 불과한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그 속에는 자수성가하는 사람이 있고

세상탓만 하며 타락하거나 파괴분자가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타고난 근본이 약하고 분열적이기 때문입니다.

오이는 오이가 되고 참외는 참외가 되듯이 그 근본은 계속 되풀이되는 것이니 

이것을 모태의 법칙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타고난 근본이 강하고 좋은 씨앗은 거친 환경에 떨어져도

자신의 뿌리를 튼튼히 내리고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를 맺지만

근본이 약한 씨앗은 곧 시들어 불행한 삶을 마치게 되는 것입니다.


과거 위대한 영웅들은 모두 어려운 환경을 자신의 밑거름으로 삼아

더 큰 역량과 성취를 이뤄냈던 역사적 사실을 되돌아 보시기 바랍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일은 명확한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지 불명확하게 이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이러한 분명한 인과관계를 보아야만 비로소 세상을 본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요즘 나오는 각종 사회과학 이론들이나 철학 이론들은 성자들의 살아숨쉬는 지혜가 사라지고 

세상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관념과 논리에 의해나타난 것들이어서 

그 속에 젖게 되면 세상이 전혀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들은 세상을 보지못한 상태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이상에 의해 자기 나름대로 세상을 꾸미고 있기에

그들의 논리와 시각을 따르면 그들처럼 세상이 안개 속에 놓이게 되고 

아름다운 상상과 신기루같은 꿈만 꾸며 살게 됩니다.


게다가 수많은 논리를 받아들이다 보면 서로 모순되는 것이 복잡하게 얽혀

의문이 온통 머리를 채우게 되고 결국 아무런 결정도 하지 못하는 판단정지 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현실을 무시하고 불평만 늘어놓고 생각만 하는 반사회적인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분명한 사실을 보고 인과를 보는 눈을 깨우쳐야만 진실과 진리를 볼 수 있으며 

바르고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됩니다.


참된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어렴풋한 관념과 논리에서 벗어나

완전한 법계 속에 분명히 존재하는 사실과 이치를 하나씩 깨닫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이 처음에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인과의 이치상 한꺼번에 이루어지는 일이 없듯이

기존에도 내가 계속 이야기했듯이 어린아이가 걸음마를 배워 동구 밖으로 나가듯이

처음에는 하나씩 배우고 길을 익혀 나중에는 혼자서 세상을 정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작은 깨달음이 쌓여 아라한이 되면 더 이상 불퇴전이 없는 단계에 이르고

이를 기반으로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정각자가 되는 것입니다.


작은 깨달음이 없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의 병폐는 작은 노력과 성취없이 한꺼번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으려는데 있습니다.


과거 부처님은 제자들에게 일일이 세상의 일을 가르쳐 세상을 보는 지혜와 바른 마음을 가르쳤고

이를 근본으로 하여 노력하여 공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아라한이 되어

최종적으로 부처의 과를 얻게 된다고 말씀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도 수많은 생을 거쳐 공덕과 지혜를 쌓았고

마침내 전생에 아라한에 이르러 이생에 와서 정각을 이루었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한번 말하고 싶은 것은 진리의 길을 가기 위해서는 

기존의 논리와 관념과 의문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문이 건설적이기 위해서는 그 의문을 품은 전제가 정확해야 하는데

지금 님이 품은 많은 의문들은 전해들은 관념과 학자들의 근거없는 논리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받아들인 논리와 관념만큼이나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게 되어

세상을 사실대로 받아들인 마음의 여유와 공간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길을 가는 데는 현대의 잘못된 지식과 환상을 많이 아는 것이 

아무 것도 모르고 순수하게 산 자보다 오히려 더 큰 장애가 됩니다.


과거 부처님의 곁에 한 구도자가 찾아와

자신의 의문에 답해주면 제자가 되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은 그 의문에 답하는 대신 자신의 곁에 1년간 머물면

그때 가서 어떠한 질문에 대해서도 답해 주겠다고 했습니다.

1년뒤 부처님은 그 구도자에게 하고 싶은 질문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구도자는 자신 속에 기존에 품었던 의문들이 

어느새 모두 사라져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 곁에서 1년간 사실에 관한 실상의 일들과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듣다보니 

그곳에서는 분명한 사실들과 있는 이치만 존재하고 어떠한 환상적 논리와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자신이 기존에 자기 논리와 관념에 의해 품었던 의문들이 실제 존재하지 않은 생각 속의 일이며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와 의미없는 혼자만의 의문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갖고 있는 의문을 잠시 내려놓고 

먼저 이곳에 있는 진실과 이치를 살펴보는 시간을 갖기를 바랍니다,


바른 이치와 실상에 근거한 참된 진리의 길만이 인간완성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며

육도를 헤매는 수많은 중생이 수천 생을 헤매도 만나기 어려운 길이니 

이곳의 인연을 소중히 생각해 주시기 바랍니다.




>바쁜 일정 중에도 자세한 답변 주셔서 감사합니다. 

>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답을 주셨네요.

>

>그런데, 답변 말씀을 읽던 중 또다른 의문이 일었습니다.  우주에 의지력을 행사할 수 있는 성자가 악령을 제압하는 일 조차도 인과의 법칙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면...악령 조차도 세상의 균형을 위해 필요한 힘이란 의미도 되는건가요?   제가 생각기에는 순리와 이치를 벗어난 병적인 존재와 힘에 불과한 것이었었고, 그렇기에 없앨 수록 제압할 수록 세상의 균형과 이치가 바로 잡힐 거라 생각했는데요. 

>

>악령의 소멸에서조차도 일종의 '에너지 보존 법칙'과 유사한 개념이 유지된다는 말씀처럼 들리네요. 

>

>그렇다면, 성자이든, 그 위의 신적인 존재든, 궁극적으로는 인격체적인 성격을 갖지 않고, 우주의 법칙으로서만 존재한다는 무신론과 맥을 같이 하는 건 아닌지...

>

>교회라는 일종의 통치 체계가 세운 교리와  어찌 되었든 사람의 손을 통해 씌어진 성경이, 신의 뜻(성령)으로만 이루어졌다고 보지는 않는 불량한 카톨릭 신자로서 신앙의 문제로 갈등을 겪고는 있지만,  계속되는 고민과 갈등의 보류, 되새김질을 반복하면서  종교라는 형식과 테두리를 초월한 나름의 신관과 영성관을 확립해 가고 있는 중입니다.   물론, 지금은 아니지만, 그런 과정에서 한 때 무신론에도 크게 기울었었구요.  

>

>진실의 근원에서 밝히는 우주와 생명 현상을 들여다보면... 가끔 그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귀신, 유혼 등의 잡령들을 논할 때에는 육신을 갖지 않았을 뿐인 인격체(?)로 묘사가 되는데,  인간 생명과 영혼의 본원인 성령, 궁극의 신을 이야기 할 때에는, 무신론에서와 같은, 오차와 예외 없는 우주 법칙으로서의 비인격체적인 성격을 띄는 것 같다는... 

>단순한 저의 착각인지요?

>

>제가 아직 깨어있지 못한 탓인지는 몰라도, 제게는 귀신들이 감정을 느끼듯, 신도 감정이 있을 것이란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노력 않고, 제자리에 엎드려 복을 구하는 기복 신앙은 없느니만 못하며, 철저히 지양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노력하는 가운데에, 그 노력을 위해 필요한 의지력과 내면의 힘, 자기 확신( 고귀한 영적 존재로서 가치 있게, 행복하게 살도록 신이 창조하셨고, 그러기에 바람직한 순간에는 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을 잃지 않고 고양시키고자,  그리고, 인간이기에 당연히 가질 수 있는 '바램과 소망, 간청'의 심정을 자신의 근원인 신께 전달하고자 기도하고 신앙함은,  신의 인격성을 인정한다면,  너무나 당연한 삶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

>물론, 사실을 짓지 않은 채, 의식과 바램 속으로만 무엇을 이루려는 욕심은, 베스트셀러로 회자된 지 오래인  '시크릿'류의 책들을 비롯해,  의념을 현실화려는 수많은 수행 단체 및 자칭 마법사(?)들의 투기적 행태와  다를 바 없겠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면서, 신에게 갖는 바램과 간청의 마음은 절대적이지는 않더라도, 얼마간의 긍정적인 영향력을 지닐만한 가치가 있다고 봅니다.  정당한 노력을 기반으로 한 의념력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노력이며, 에너지이며, 원인을 짓는 행위로서 분명한 역할을 담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이런 제 생각을 앞서 드렸던 질문과 연관지어본다면,  그러한 악한 인연을 짓게 된 원인을 자신이 가진 심신의 불균형과 습에서 찾아보고, 해소하려 노력하는 가운데에, (특정 종교인에게 개인적으로 의지한다거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신에게 도움과 구원을 간구하는 행위 조차도 카톨릭이라는 사회적으로 공인된 시스템 하에서 결국은 보다 큰 세력을 가진 유혼의 힘에 의존하는 것에 불과하냐는 문제가 되겠습니다. 

>

>제가 갖고 있는 생각과 믿음이 진실과 진리에서 벗어난 것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영성 및 신과의 관계 정립이라는 주제가, 일상사와는 분리된 다른 차원의 관념적인 무엇으로 여겨졌었는데,  나이가 들어 가면서,  먹고 자고 숨쉬는 일상사 전반에 걸쳐서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대전제가 되어감을 실감합니다.  점점 늘어만 가는 책임, 그리고 선택과 판단의 기로에서 더더욱... 

>

>때로는 영성이라는 것에 아예 가치를 두지 않으면서  단순하지만 무리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세상이 결국은 그렇게 제각각의 안경을 쓰고 와 보여지는 것만 보다가 살다 가는 게 아닌가, 거기까지가 인간의 몫 아닌가 싶을 때도 있구요. 

>

>시급한 주제는 아니니,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의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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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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