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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의 근원

수행의 핵심

gincil 2013. 4. 27. 11:55

님은 기존에 전해지는 말에 의거,

돈오를 해서 점수를 하는 것이 가장 빠른 정법이라는 결론을 가진 듯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말을 하기 위해서는 기존에 나와있는 방법들이 

깨달음을 얻는데 가장 올바른 방법이며 검증된 방법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현재까지 그런 방법을 사용하여 

부처님과 같이 정각을 얻어 세상에 빛을 전한 분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말로 전해지는 것과는 달리 그러한 수행법들은 말로만 치장된 허명일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세상에는 그와 같이 증명되지 않았으나 수행의 고전으로 전해지는 

주문과 참선, 단전호흡과 선정같은 방법들과 각종 명상비법들이 어지럽게 유행하고 있어

사람들은 아직도 삶과 수행 사이를 헤매며 인생을 낭비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수행계가 깨달음에 대한 명확한 실체와 과정을 갖지 못하고

이러한 혼돈 속에서 헤매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수행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야를 보아야 합니다.

이 반야의 세계는 바로 모든 것이 죽고 다시 태어나는 자리이며

모든 것의 근원이 되는 극미의 세계이기 때문에

이 근원과 하나가 되어야만 모든 것과 통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야심경에도 모든 부처는 반야로 말미암아 난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근원의 세계인 반야에는 업을 가지고는 아무도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 간단하면서도 분명한 명제 때문에 수행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즉 모든 수행은 반야에 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업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틀을 충족하지 못하면 올바른 수행법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러한 사실을 놓고 돈오점수법에 대해 알아 봅시다.


먼저 돈오는 마음자리를 본다는 뜻인데

업이 있는 자가 과연 마음자리를 볼 수 있을까요?


모든 접촉을 끊고 고요히 명상에 들어가게 되면 

욕망과 집착이 가라앉은 맑은 마음이 나타나고 그 위에 세상의 이치가 비치게 됩니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고인 물에 세상이 비치듯 세상이치가 잠시 비치게 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를 견성했다, 한소식 했다고 하여 크게 인정해 줍니다.


그러나 이것은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흙은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물이 괴어 얼굴이 비치는 것과 같아서

다시 세상의 인연이 흔들어 버리면 그 거울은 흐려져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마음공부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마음은 

우주의 근원인 반야의 실체가 아니라 개인의 일시적인 맑은 마음을 본 것이니

근원의 세계와 합일하지 못해 세상을 보는 시각이 열리지 못합니다.

세상을 보지 못하니 마음의 업을 지울 길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로부터 많은 선사가 선정을 하다가 

한소식한 후 조금만 닦으면 될 듯하여  폐관칩거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이 아무런 빛을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만 것은

세상의 이치를 보고 그 길에 따라 열심히 공덕을 실천하지 못하고 

세상을 보지 못한 채 생각만으로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길을 보지 못하고 조용히 앉아 마음으로만 깨달으려고 하는 

선정이나 참선과 같은 명상법은 올바른 방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깨닫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세상의 이치와 실상을 배워야 합니다.


이치를 이해하고 각성이 있어 좋은 마음을 얻어야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과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를 보게 되면

거짓과 환상이 없어지고 마음이 맑고 진실해져서 있는 일이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이치대로 살아간다면

우주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헛됨없는 참된 삶을 살 수 있으며 

자연과 하나가 되어 업이 없는 진실한 삶을 살 수 있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업과 무지를 벗어나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나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진리를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는

아무리 산중에 들어가 수십년간 도를 닦아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것이며

진리를 깨우친 자는 집에서도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자는 먼저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에서 진리를 스스로 안다는 것은 매우 어려우니

수천년만의 진리의 인연을 만난 여러분은 참으로 귀한 인연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자비와 사랑이 있어 

어두운 세상과 불쌍한 중생을 안타까워하고 축복해주려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사람들을 바른 이치로 행복하게 이끌려는 노력을 하게 되고

세상의 벽에 부딪혀 그일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사랑의 불이 일어나 업을 태우게 됩니다.


마음에 불이 나는 이유는 인간에게 맑고 좋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오묘하고 완전한 은혜를 베풀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세상을 자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었고

이를 통해 완성에 이르게 하신 것입니다.


즉 인간이 맑고 좋은 마음으로 열심히 세상을 살면

그 맑은 좋은 마음이 작동하여 활활 타올라 나쁜 습을 태우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 속에 들어있는 흐리고 잘못된 업을 태워 

맑고 순수한 마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업은 생각으로 지우는 것이 아니라 공덕행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진리로 축복하는 과정에서 끝없이 부딪히고 튕겨나오는 과정에서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되고 

가슴에 활활 타오르는 사랑의 불이 업의 덩어리를 태울 때 

가슴 속에 맺힌 업덩어리가 헛된 재와 연기가 되어 모두 흩어지고 사라져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좋은 삶과 인간완성의 길은 하나이며 따로 도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아직까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수행의 요체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사랑없이 하는 공부는 모두 헛공부입니다.

그동안 도 공부를 한다고 세상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불쌍한 중생들에 대한 자비심 마저 버린 수행자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은 공부할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근본에 큰 공덕과 사랑이 있다면 

결코 세상과 중생에 대한 자비를 버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삶을 통한 참된 수행이며 모든 수행의 으뜸인 공덕행이니

이 법이 흐려짐으로써 세상 속에 깨달음의 빛도 사라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완전한 이치가 있기에

세상을 밝게하려는 좋은 마음과 축복하려는 사랑으로

계속 진실을 키우고 업이 지우면 

선정을 통해서나, 고행을 통해서나, 사랑을 통해서나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누구나 해탈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허해구 선생님 책을 읽다가 홈페이지가 있을것 같아 검색을 하여 찾은 곳이 지금 보니까, "주요문답" 칼럼 이었네요. 그곳에서 홈사이트로 들어오는 링크를 발견하지 못하여 그곳에 글을 남겼습니다.  이곳에 다시 질문을 올립니다. 

>

>

>많은 명상단체에서 수행법으로 나를 바라본다, 자각한다 라는 방법을 제시합니다.  

>선생님의 책을 읽다가 보니까, 이런 방법들은 나를 깨닫는 길에 있어서 정도가 아니고

>오직 선업을 지어야만 해탈에 이를수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

>선업을 짓는다는 것은 제 나름의 이해로는 불교에서 말하는 점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데요.

>그래도 나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먼저 얻어야 (돈오) 점수를 할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선업을 짓는 것 만으로 깨달음에 이르기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어쩌면 영원의 시간) 걸리는 것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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