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소크라테스는 왜 독서를 반대했을까? 본문
맑은 마음을 얻어 세상을 보는 눈을 얻은 성자들은 그 마음이 맑게 정화되어 마음 속에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혼자 있을 때는 아무 것도 없는 반야의 고요에 빠져들고 눈을 뜨면 명경같은 맑은 마음에 세상이 있는 그대로 비친다. 그래서 상대가 무엇을 물으면 그것이 사실 그대로 비쳐 있는 그대로 실상을 설명할 뿐, 혼자 있으면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에 생각과 논리로 말을 만들어 글을 쓰지 못한다. 따라서 생각이 없는 성자들은 애당초 글쓰는 것과 맞지 않다
그러나 성자들도 글은 쓸 수 있다. 성자가 글을 쓴다는 것은 하나의 창조행위이다.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일부러 의식을 내어 세상을 비추어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조물주가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세상의 완전한 뜻을 그 의식에 비쳐 그 원력으로 세상을 만들어내는 원리와 같다. 이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해 내는 일이니 엄청난 원력과 공덕이 소요되는 일이다. 이렇게 성자들이 쓴 글은 세상의 실상과 이치를 있는 그대로 정확히 밝혀낸 참으로 소중한 진실이니 언제 어디서나 세상을 밝힐 수 있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물인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책을 비난한 것은 그러한 진리가 들어있는 책을 비난한 것이 아니라 당시 나와있던 중생들의 생각으로 쓴 책을 비난한 것이다. 소크라테스 시절에도 당시 소피스트라고 하는 궤변론자들이 쓴 책들이 많이 있었다. 소피스트란 말은 원래 지혜로운 사람, 또는 현명한 사람이라는 뜻으로 그들은 당시 생존경쟁의 사회에서 웅변술과 문장술의 힘을 빌어 빈약한 주장을 정당한 주장으로 바꾸어 상대를 이기는 기술을 가진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눈에는 이들이 돈을 받고 지식을 팔고 사는 궤변론자에 불과했으며 진리를 왜곡하는 잘못된 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들은 실상을 보지 못하는 눈으로 자기 생각을 관철시키기 위해 논리를 짜 맞추고 여러 가지 억지증거를 들어 화려하고 그럴듯한 책을 만들어 세상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소피스트가 ‘인간이 만물의 척도’ 라고 한 프로타고라스였다. 그들은 절대적 진리는 존재할 수 없으며 모든 것은 인간의 내면적인 유용성에 기초하여 옳고 그름이 결정된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가치척도인 인간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영원히 옳은 것이 없으며 절대적 진리란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트라시마쿠스란 소피스트는 ‘정의는 강자를 위해 존재한다’고 정의의 본질조차 왜곡해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깨달은 눈으로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영원한 진리와 변치않는 진실을 밝혔다. 그래서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한 채 자기 생각에 빠져 덧없는 지식놀음을 하며 세상을 어지럽히는 소피스트들에게 너희들이 진정으로 아는 지식은 실제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깨달으라고 하여 『 너 자신을 알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당시 나왔던 소피스트들의 책의 폐해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다. 진리를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글과 책은 사실로 존재하는 일이 아닌 자신의 생각과 아이디어를 주장한 것으로 자신의 주장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논리를 구성해 말을 만든다. 의식이 허약하고 거짓된 자일수록 환상적인 생각을 많이 지으며 자신의 말의 호소력을 높이기 위해 당시 사람들에게 인정되는 미신이나 관념, 비진리를 가리지 않고 함부로 사용한다. 그래서 그의 말은 화려하고 논리 정연하여 세상의 인기를 끄나 진실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세상 사람들을 무지와 안개 속으로 밀어 넣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글들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많이 보면 볼수록 인간의 의식을 환상과 거짓으로 오염시켜 결국 그 영혼을 망치게 된다.
실상에 맞지 않는 인간의 생각이 세상을 망친 대표적인 것이 공산주의 이론이며 요즘 나타나는 대부분의 인기있는 저서들도 바로 그와 같은 생각 속의 논리들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깨달음의 근거로 천부경과 계시를 제시하면서 즉문즉설이라 하여 세상을 자기 마음대로 좌충우돌하며 재단하고,
또 00 학당의 선생이라는 사람은 그의 프로필에도 나와 있듯이 자신을 학자이며 작가라고 소개하면서 동서양의 모든 철학들을 진실에 관계없이 자기 생각으로 마음대로 짜깁기해서 하나의 그럴듯한 이론으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곳에서 그 실체를 파헤친 천부경이나 육조단경 까지도 모두 완전한 진리가 있는 듯 해석하고 있다. 그들은 이러한 글 속에 있는 진실을 보지 못하니 과거에 깨닫지 못한 자가 생각으로 만든 모든 가설들을 자기 생각으로 진리라고 생각하고 그럴듯한 논리를 만들어 진리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깨닫지도 못했으면서 공과 견성, 무아, 참나, 깨달음을 자기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주무르고 단전호흡, 참선, 화두를 자기 마음대로 갖다 쓴다. 그는 업을 지워 견성에 도달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인류사 최대과제인 줄도 모르고 어린아이 공기놀 듯 무아, 참나, 무위의 경지를 함부로 말하고, 참된 수행법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모든 길은 하나로 통한다고 위험한 수행법을 함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매우 고차원적인 난해한 저서들을 이처럼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쉽게 설명해주니 참으로 재미있고 그 속에 무슨 큰 깨우침이 있는 줄 알고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작가이기 때문에 자기 생각으로 그럴듯하다 싶으면 아무 증거도 없는 말을 함부로 만들어 한다. 그는 진실로 깨달은 자가 아니니 모든 것이 생각 속의 이야기이며 진실인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자기 생각으로 그럴 듯해 보이면 아무 양심의 가책이 없이 함부로 말을 만들어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가상적인 이야기로 먹고 사는 작가들의 가장 큰 문제인 것이니 오늘날 세상에서 말 잘하고 인기가 있다는 것은 진리의 차원에서 볼 때 의식이 허약해 생각이 많고 함부로 거짓말을 잘 할 수 있는 자일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진리가 사라진 어두운 세상에서는 양심이 없어 거짓말 잘하고 대중에게 영합을 잘하는 자가 이기는 것이 현실인 것이다.
그러나 완전한 인과의 이치와 생명의 질서에서 보면 이와 같이 진실과 이치에 어긋나는 말을 하는 경우 그 과보는 실로 엄청나다. 그는 거짓된 말로 인해 그 마음을 탁하게 만들어 어둠의 세계에 빠지게 될 것이며 세상을 거짓과 불행에 빠뜨린 과보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요즘에는 또 인문학자들이 최첨단 과학의 지식을 인용하여 자기 마음대로 이를 인용해 오히려 진실을 오도하는 경우도 있다. 갖가지 융합과학이나 복합과학이라는 이름의 저서들이 그러한 것이다. 그들은 마음과 영혼과 신의 영역을 검증하지도 못하면서 마치 존재하지 않은 듯이 결론내리고 뇌과학으로 모든 문제를 풀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과학의 미신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는 영역은 모르겠다고 미루어놓아야 과학적 자세인 것이지 자신이 검증하지도 못한 것을 없다고 단정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들은 물질에 대한 과학적 분석으로 세상 모든 것을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물질적 영역의 분석은 결코 마음과 영혼의 영역을 넘지 못한다. 왜냐하면 마음과 영혼을 분석하려면 영혼보다 더욱 더 미세한 전파나 빛이 있어야 하는데 어떠한 물질적 파장도 마음보다 거칠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하이젠베르그의 불확실성의 정리가 똑같이 통용된다. 즉 양자와 전자를 분석하기 위해서는 빛을 비춰보아야 하는데 전자가 빛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양자와 전자를 정확히 측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즉 성긴 체로 가는 모래를 걸러내려고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이러한 근원적 불가능성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들은 거친 뇌와 전자로 인간의 의식을 측정하고 옮길 수 있다는 상상에 빠져있는 것이다. 그래서 논리와 상상의 극한으로 치달려 어떤 사람의 마음 속에 든 지식과 경험을 전파로 변형하여 다른 사람에게 옮길 수 있으며 알약으로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함부로 주장한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상상과 논리로 만들어진 책들이 인간의 의식과 세상의 진실을 해치는 좋은 사례인 것이다.
그리고 이글을 쓴 저자가 인간의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뇌과학에 근거하여 논리를 구성하여 이글을 썼다는 것 자체가 독서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장애가 되고 있다. 그는 뇌와 의식과의 관계도 모르면서 독서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며 단계에 따라 뇌를 활용하는 정도가 다르다고 본다. 그에게 인간의 의식을 높이는 것보다 뇌를 발전시키는 게 중요한 과제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독서가 인간의 의식을 변화시킨다고 생각하지 않고 뇌를 활성화시키는 도구라고만 생각하고 있으니 근본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서의 진리에 대해 함부로 말을 만들어 논리를 구성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 높은 차원으로 승화된다는 것은 그 마음이 맑아져 우주에서 가장 순수한 진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진기가 높아진다는 것은 점점 더 진실해 진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 마음에 거짓과 환상과 인위적인 꾸밈이 사라져 자연스러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진실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의 억지논리가 가미된 책들을 보게 되면 그 마음에 거짓과 논리가 가미되면서 사실 아닌 것들이 끼이면서 그늘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래서 진실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이 쓴 가설적인 책들은 오히려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하여 저차원으로 떨어뜨리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그릇된 생각과 논리로 만들어진 책의 정체이니 그릇된 진리와 오염된 지식을 전하는 독서는 아니함 만도 못한 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말은 살아있으나 글은 죽어있다고 한 것은 맞는 말이다. 진리는 서로 대화를 통하여 모르는 것이 있을 때는 물어서 풀어야 한다. 그러나 문자는 고정되고 일방적이어서 의문이 있을 때 풀길이 없다. 그래서 잘못된 것을 일방적으로 참고 견뎌야 하며 자칫하면 그 잘못에 그대로 감염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같이 진리를 보는 분이 대화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지 진리를 보지 못하는 자의 화려한 거짓을 듣는 경우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요즘 인기있는 진실이 빠진 강의들은 대화를 통해 오히려 거짓에 감염되기 쉽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록은 기억을 파괴한다는 말은 와전된 말이다. 올바른 진실을 기록한 글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며 그릇된 지식을 쓴 글은 적을수록 좋은 법이다. 올바른 기록을 통해 실상을 바로 이해하고 실천한다면 그것은 의식을 맑게 만드는데 도움이 되지 방해가 되지 않는다. 실상에 대한 깨우침과 바른 지식은 많을수록 좋은 것이다. 문제는 잘못된 책 속에 있는 거짓된 지식들이다. 이러한 것은 많을수록 인간의 마음 속에 때가 되어 마음을 흐리게 한다.
그리고 마음이 맑은 이는 기억력이 없다.
마음에 집착이 없고 고인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치는 대로 볼 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논리는 싫어한다.
그래서 직관이 매우 뛰어나며 사물이나 현상을 보면 매우 창조적으로 해결책을 생각해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 천재들이 난독증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일리있는 이야기이다.
---[질문]---
>4대 성자 가운데 한 분이신 소크라테스는 왜 독서를 반대했을까?
>
>흔히 소크라테스의 대화법은 알고있지만
>대화법이 왜 필요한지, 반면 독서는 어떤 폐해가 있을수 있는지에 대해선 생각해보지 못한것 같습니다.
>
>물론 아래에 나오는 "책 읽는 뇌"라는 도서가 말하려는 촛점은 소크라테스에 관한 것만은 아니지만..
>실상을 어떻게 봐야하는지, 그리고 독서가 어떤 장애물이 될수 있는지 참고가 될 듯 합니다.
>
>독서에 대한 성자의 시각을 짐작해 보시죠~ ^^
>
>
>
>사이언스타임즈 (April 29,2014)
>
>왜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반대했을까?
>
>[서평]'책 읽는 뇌'...독서와 뇌의 상관관계 집대성
>
>‘너 자신을 알라’는 명언으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역설적이게도 독서를 반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왜 소크라테스는 독서를 반대했을까?
>독서와 뇌, 난독증과 창조성의 은밀한 동거에 관한 이야기인 신간 ‘책 읽는 뇌(매리언 울프 지음/이희수 옮김/살림출판사)’에 그 해답이 나와 있다.
>
>터프츠 대학에서 인지신경과학과 아동발달을 연구하는 매리언 울프(Maryanne Wolf) 박사는 “인류는 책을 읽도록 태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
>5천년 동안의 독서 역사와 최신 뇌 과학의 성과를 종합해 그가 내린 독서의 정의는 “작가의 지혜가 끝나는 곳에서 우리의 지혜가 시작”되는 행위다.
>
>
>< 소크라테스가 독서를 반대한 이유 >
>
>앞서 언급한, 소크라테스가 독서를 반대한 이유는 크게 3가지였다.
>
>첫째, 살아 있는 말과 달리 글은 ‘죽은 담론’이다. 대화는 열려 있기 때문에 스승이 잘만 유도하면 진리에 이르는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글은 우리에게 지혜를 줄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가 질문을 던져도 ‘당당하게 침묵만 지키고’ 있으며 ‘똑같은 이야기만 끝없이 반복할 뿐’이다.
>
>둘째, 기록은 기억을 파괴한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거나 지혜를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생각의 단초들을 끝없이 떠올려야 하는데, 그것이 기억의 주된 기능이다. 그런데 문제로 기록하는 순간 우리는 기억할 필요를 덜 느끼게 된다. 우리의 삶에서 기억하는 힘의 중요성이 낮아져 세대가 거듭되어 그 능력이 감퇴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책을 찾을 수 없다면, 혹은 전기가 나간다면?
>
>셋째, 문자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한다.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대화는 양방향적이지만 문자는 일방적이다. 선악을 판단할 지혜를 갖추지 못했다면 문자가 주는 것을 그대로 받아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 없이 지혜를 얻기는 힘들며, 독서는 개인의 폐쇄된 행위에 가깝다.
>
>결과적으로, 소크라테스가 걱정한 것은 ‘독서’ 자체가 아니라 지적 능력을 총동원해 문자를 사용하지 않을 때 우리가 맞을 수 있는 파국이다.
>다행히 독서의 역사는 그의 걱정과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됐지만, 기능적 독서가 강요되는 오늘의 상황은 소크라테스의 걱정을 떠올리게 만든다.
>
>인터넷으로 대표되는 우리 시대의 독서는 단편적인 정보의 습득 수준에서 멈추며, 독서의 핵심인 ‘사색하는 과정’을 통한 뇌의 재편성을 경시하고 있다.
>울프는 책을 통해 웹에서 꿈틀대는 새로운 가능성들에 희망을 걸면서도, 우리 시대 독서가 낳을 미래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고 강조한다.
>
>울프는 또한 이 책에서 독서하는 아이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의 규명을 통해 아이의 독서를 어떻게 이끌어야 하는지를 제시하고 있다.
>그가 던지는 ‘왜’라는 질문과 해답에는 최신 뇌 과학에 근거한 독서의 과학적 사실이 담겨 있다.
>왜 남자 아이가 여자 아이보다 글을 늦게 읽는지, 왜 5살에 책읽기를 시작왜 부모가 아이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줘야 하는지를 뇌 과학의 근거를 들어가며 차근차근 설명한다.
>
>·심리학적으로 바라본 독서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를 담은 이 책은 아이에게 독서를 가르치는 부모, 학생들의 독서를 지도하는 교사와 효과적인 독서법을 연구하는 독서 지도사, 효율적인 독서를 하고 싶은 독자들에게 지혜를 선물할 것이다. 또 난독증으로 힘겨워하는 이들에게도 작은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
>< 밥상머리 대화의 중요성-독서의 부인부빈익빈 >
>
>캘리포니아 지역의 다섯 살 아이들을 대상으로 어휘 수준 차이를 조사한 연구에 따르면, 언어적으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는 빈곤한 환경에서 자란 아이보다 3,200만 개의 어휘를 더 듣고 자랐다고 한다.
>
>캐나다의 심리학자 앤드류 바이밀러는 어휘력 면에서 하위 25%에 속한 유치원생들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면 또래보다 독해 능력면에서 3년이나 뒤쳐진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어릴 적 언어 환경이 독서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
>어휘력만큼 중요한 것은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이다. 어릴 적 듣고 읽는 수많은 이야기들이 그대로 상상력의 원천이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아이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아이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것을 권한다. 독서의 많은 부분이 어릴 적에 형성되기 때문이다.
>부인부 빈익빈은 독서에서도 발생한다.
>
>< 최고 단계의 독서를 찾아서 >
>
>독서에는 여러 단계가 있으며 단계에 따라 뇌를 활용하는 정도가 다르다. 초보 단계에서는 언어 이해에 필수적인 베르니케 영역과 브로카 영역 등이 주로 활성화되지만, 숙련된 독서 단계에 이르면 이 영역들뿐 아니라 감정을 담당하는 영역, 기억을 담당하는 영역, 심지어는 운동을 담당하는 영역까지 연합해 활성화된다.
>
>이는 독서가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시각을 통해 들어오는 정보를 이미 뇌에 저장하고 있던 정보들과 다채롭게 조합하고 비교하고 유추하고 추론하는 행위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
>< 난독증은 신의 선물? >
>
>저자의 마지막 호기심은 ‘난독증과 창조성의 관계’로 이어진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피카소, 아인슈타인 등 천재적인 창조가들이 난독증으로 고생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난독증 뇌의 독특한 발달과 창조성의 은밀한 관계를 조심스럽게 점쳐 본다.
>어쩌면 난독증 뇌는 신이 인류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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