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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바른 삶

자신을 버리라는 말

gincil 2013. 4. 20. 21:52

우리는 그 동안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을

가장 훌륭한 사람이라고 배워왔다.

기독교에서도 무조건적인 사랑을 최고의 미덕이라 해서

자기 희생을 강조하고 있고

대승불교에서도 무아사상에 의해

자기를 버리는 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나를 중시하고 나를 위해 노력하는 것을

이기적이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사람이 태어나는 이유는 무엇을 하기 위함인데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좋은 자기를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자기가 세상의 주인이 된다.

따라서 자기를 소중히 하지 않고서는

결코 자기를 구할 수 없고 세상을 구할 수 없다.

 

자기를 소중히 하기에 악연과 악업에 빠지지 말아야 하며

정법과 인연하여 사실을 바로 보고 진리를 깨우쳐야 하며

부지런히 노력하여 좋은 자기와

좋은 인생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열심히 배우고 깨달으려고 하는 이유도

먼저 자기에게 봉사하고 기여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에그냥 내비둬~”라는 말이 있다.

이 말처럼 자기 자신에 대한 무관심을

잘 표현하고 있는 말이 없는 듯하다.

 

이처럼 요즘 사람들은 인생의 소중함이나

자기 자신의 참된 가치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기에

아무리 참된 진실이나 자신을 축복하는 길이 있어도

이를 잘 받아들이려 하지 않으며

타고난 자기 습대로 살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문화적 다양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논리 때문에

더욱 더 힘을 받고 있는데

이와 같은 자신과 삶에 대한 무관심으로

진리는 더욱 외면되고 세상이 더욱 황폐화되고 있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양한 것이 아니라

옳고 그른 일을 구분하여

좋은 일은 실천하고 나쁜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을

부끄러이 생각해서는 안된다.

자기 자신을 소중히 여길 때

올바른 삶의 길과 세상이 보이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를 희생하거나 버리라는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지 않으면 삶을 중심을 빼앗기게 되어 위험해진다.

 

이따금 우리들은 주변에서

사회의 일꾼으로 성실하게 잘 살아가던 사람이

갑자기 삶의 의욕을 잃어버리고 은둔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삶이란 현실이다.

현실을 부정하고는 삶이 존재할 수 없다.

현실은 장엄한 인과법이 펼쳐지고 있는 완전한 법계로서

그 속에는 현재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원인이 들어 있고

미래를 구성할 모든 가능성이 들어있다.

 

따라서 현실을 버린다는 것은

인과법을 흐르는 생존의 근거를 저버리는 것이며

존재 이유를 저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공하고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은

매우 위험하다.

 

자칫 잘못된 판단으로 공함에 빠져 사실을 버리게 되면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법은 사실이 가져다주는 엄중함으로 인해

무위에 빠진 자를 용서하지 않는다.

 

삶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바쳐야

생존이 가능한 정도로 엄중한 것인데

무위에 빠져 아무 것도 짓지 않는다면

끊임없이 돌아가는 완전한 인과의 고리는

그대에게 현실에 발을 붙일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을 것이며

외로움과 빈곤함만을 선물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정법이 흐려진 말법시대에

사실과 자신의 소중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처럼 무아의 혼동과 현실성의 약화는

수행에 있어서도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어떤 수행자의 경우 자기를 깡그리 잊어버린 결과

세상의 어떤 것도 개의치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부에서는 이를 높은 경지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과 이치를 무시한 비정상적 행동이지

걸리지 않는 자유를 얻은 무애행이 아니다.

법계에 정해져 있는 진실과 이치는

누구나 지켜야 하는 것이다.

 

요즘 일부불교에서는

이 세상을 마야(미혹,)에 의해 생겨난 환상으로 보고

자기를 버리고 모든 분별심을 버려야

본래부터 둥두렷한 실상을 볼 수 있으며

선업과 악업을 모두 버려야

끝없이 계속되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한 생각이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밝혀야 하며

분별심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시각과 정확한 사유로

사실 관계를 정확히 보아야 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인과법에 의해 펼쳐지고 있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 설한 것이 진실이고 진리이듯이

사실과 일치한 진리를 보아야 하며

환상과 욕망과 업에 의해 걸리지 않는

정견과 정사유를 얻어야 한다.

 

자기를 버리고 분별을 버리고 선악을 버려서는

결코 실상에 다가가거나 이치를 밝힐 수 없다.

분별심을 버리면 잠재된 업이 되살아나

사실이 더욱 흐려지고 중심이 사라져

말법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산방에 앉아 세상분별을 하지 않고

마음만 지우려 하는 구도자들이

세상물정에 어두운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치 때문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이 우주가 자리잡고 있는 법계의 실상이며

법계를 구성하고 있는 이치이다.

 

이것을 바로 알기 위해 정법과 인연이 있어야 하며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최소한 사실에 근거해야만

허망함과 무익함을 피할 수 있다.

왜냐하면 현실은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법이

펼쳐지고 있는 법계로서 삶의 기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을 바로 알고

사실을 구성하는 바른 이치를 깨우칠 때

진실하지 않았던 거짓이나 환상,

이치에 맞지 않은 욕망이나 업이 사라지게 된다.

 

사실 속에는 일의 잘, 잘못이 모두 들어 있어

인과를 바로 보게 되면

정확한 사실과 올바른 이치를 알 수 있게 되어

모든 일을 뜻하는 대로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사실을 중시하고 인과의 이치를 깨달아

이를 열심히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그 과정에서 세상의 어둠과 장애에 부딪히게 되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강한 의지와 용기와 사랑과 지혜를 얻어

선과의 굴레를 도는 불퇴전의 선근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다음 생에는 이를 기반으로

더 큰 공덕과 자기를 지어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즉 해탈이라는 인간완성의 경지는 버려서 얻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고 승화시켜 얻게 되는 시련의 결실인 것이니

팔정도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깨쳐 이를 실천하는 과정을 통해

업에 찌던 삿된 자기를 버리고

타고난 여린 불성의 싹을 계속 고양하여

완전한 100%의 진기(불성)로 만듦으로써

마음의 꽃을 활짝 피워 맺게 되는 열매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알지 못하고 말법에 빠져

자신을 버리라는 말만 믿고

타고난 자신의 기운마저 자꾸 축소시켜 나간다면

자기와 세상을 위해 지은 것이 없어서

인간완성은커녕 그 기운이 점점 약해지고 세상일에 어두워져

다음 내세에 나면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무지하고 허약한 운명을 지녀

불우하고 빌어먹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것이 오늘날 현실을 외면하고 산속에서 마음만 굴리며

빈약한 공덕을 쌓은 대부분 수행자가

후생에 받게 될 운명이다.

 

더구나 수행시 자기 정신을 놓아버리면

주인이 사라진 그곳에는 공귀가 들거나 유혼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

 

그런 사람들은 조울증이나 정신분열증에 걸리게 되고

심하면 유혼에 의해 이상한 소리를 하는

예언가나 점쟁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수행법은 가만히 앉아

자기를 버리고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 나아가 팔정도를 실천함으로써

자신도 구하고 세상도 구하는 생활 속의 실천법이

최상승법인 것이다.

 

또 하나 오늘날 불교에서 혼동하고 있는 개념 중

하나가 선업과 악업이다.

 

이 세상을 미망에 의한 환으로 인식하는 공관의 입장에서는

이 세상 모든 일은 미망에 의한 업이므로

끝없는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선업도 악업도 모두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부처님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위험한 말이다.

칠불통계에도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는

어찌 이런 모든 부처의 공통된 가르침과도 달리

선업마저 짓지 말라고 하고 있을까?

그만큼 현 불교의 관념의 병은 심각한 것이다.

 

선업은 세상의 일을 밝혀 이치대로 실천함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세상에 공덕을 짓는 것이며

악업은 세상의 일을 모르고 자기 멋대로 욕심대로 함부로 살아

정신을 흐리게 하고 세상에 죄를 짓는 것이다.

 

이들의 관계는 빛과 어둠과 같아서

서로 다른 유형의 반대되는 업을 짓는 것이 아니라

밝음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고

어둠이 짙으면 밝음이 숨을 쉴 수 없는 것과 같이

악업은 업을 짓는 것이며 선업은 업을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선업을 지으면 중생의 운명을 받아

고통의 바다를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밝고 강한 선근을 얻어 악업에 물들지 않고

모든 것을 사실과 이치에 맞게 행하는 관계로

공덕이 쌓여 선과의 고리를 돌아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선과의 고리를 도는 자는

만나는 세상이 모두 축복이며 기회의 복밭이니

부처님의 육친제자들은 다음 세상에는

부처의 과를 얻게 된다는 축복의 수기를 받았던 것이다.

 

이러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선업마저 업으로 해석하여

선업마저 짓지 말아야 한다는 함부로 말하는 것은

말법에 의해 오도된 현대불교의 치명적 병인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진실과 진리를 바로 알아 자기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이를 위해서는 정법과 인연이 있어

참된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

 

바른 가르침이 없는 곳은 어둡고 불행하다.

지금 현대물질문명이 무의미하고 불행한 것은

말법이 세상을 지배하기 때문이며

아프리카가 기아와 고통과 분규에 헤매는 것은

세상을 복되게 하는 좋은 가르침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존재하는 가르침은

종파적 신에 대한 무조건적 숭배이며 인종에 대한 편견이며

환상에 대한 지식이며 진실이 아닌

인간의 생각과 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교육을 하는 근본이유도

바로 좋은 가르침을 전하고 가르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인간을 참되게 하고 세상을 복되게 하는 내용이 적고

인간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내용이 많다.

진리가 사라진 말법시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두운 이 세상을 밝히기 위한

좋은 가르침은 무엇인가?

 

그것이 진실의 근원에서 세상에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의 요체이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은

완전한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법계로서

이치에 따라 지은 대로 받으면 밝고 공정한 세상이 되며

양심을 일깨우고 정의를 실천하면

좋은 자기와 좋은 세상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세상은

말법이 번지고 인간의 관념 속의 헤아림이 커져

‘진리가 없다하고세상이 무질서하다하고

‘욕망과 출세가 제일이라하고,

‘양심과 정의를 버려야 살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세상인심이 거꾸로 뒤집혔는데

어찌 말세가 멀리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말법이 성행한 어두운 이 시대에

수천년 만에 나타난 정법과 인연이 된

우리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오염된 말법의 환상과 논리들을

진실과 인과법으로 깨뜨리고

현대학문의 상대주의적 논리와 가치를

절대적 진리와 가치로 정화하여

인간의 영혼을 구하고 모든 것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밝은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참된 진실과 바른 이치만이

무지를 깨뜨리고 세상을 축복할 수 있는 것이다.

 

정법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전해지는 말에 무한한 윤회의 고리 속에

사람으로 나기 어렵지만

정법의 인연을 만나기는 더 더욱 어려워

하늘에서 떨어진 바늘이

씨앗에 꼽히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했다.

 

수천년간 뜻있는 수많은 구도자들이

황야와 산속으로 들어가 진리를 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모두 스러지고 말았던 가장 큰 이유도

정법과의 인연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대는 정보의 홍수시대라 진실과 관계없는

수많은 인간의 생각과 논리들이 전해지고 있다.

이러한 진실이 아닌 생각 속의 논리들은

많이 알면 알수록 인간의 사고와 눈을 흐리게 된다.

 

세상의 이치란 명백하여

보는 자의 눈을 따라 같이 보게 되면 세상이 분명히 보이지만

뿌연 안개 속에서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를 따라 보면

결국 세상이 흐려보이고 사실을 바로 보지 못해

판단불능 상태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정각을 얻은 부처님 곁에서

부처님의 시각과 행동을 그대로 따라했던

육친제자들은 모두 부처의 수기를 받았지만

그 이후 정법과의 인연이 사라지자

다시는 부처의 과를 받은 자가 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만큼 진리의 세상에서 정법과의 인연은 소중한 것이다.

조금만 벗어나면 천만리나 멀어져 버리는 것이

진리 속의 일인 것이다.

 

정법과의 인연을 통해 실상과 바른 이치를 배우고

세상일을 그릇됨이 없이 착실하게 실천한다면

좋은 자기와 좋은 세상을 만나게 된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나듯이

수생을 통해 자신의 삶속에 지은 업은

생활 속에서 뼈저린 각성이 있어야만 지울 수 있는 것이다.

 

욕망을 이기려면 현실 속에서 욕정을 극복하는

깊은 내면의 자각이 있어야 하는 것이며

뇌물을 이겨내려면 돈의 유혹이라는 습을 이겨내는

맑은 의지를 세워야만 하는 것이다.

 

조선초 명종시대 산부처라 추앙받던 지족선사가

황진이의 유혹에 파계하고 만 것도

바로 그의 수행이 생활 속에서 얻은 결실이 아니라

단지 마음 속의 결심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여기에 진리의 실천성이 나타난다.

현실이 가장 큰 스승이니

가장 좋은 삶이 가장 좋은 수행법인 것이다.

 

오늘날 관념에 젖은 말법은

세상도 없고, 나도 없고, 선도 없고 악도 없고 부처도 없고

해탈도 없다고 함부로 말을 하고 다닌다.

그만큼 사실을 보는 눈이 없고 실천성이 떨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선악이 있고

인과법이 흐르는 완전한 세상이 있고 인간완성의 경지가 있다.

따라서 사실관계를 바로 보고 인과의 이치로 옳고 그름을 밝혀

선업을 부지런히 지어야

좋은 세상과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이러한데

가만히 앉아 실천하지 않고 자기마저 버린다면

지키고 행해야 얻을 수 있는 다른 세상일과 마찬가지로

결코 인간완성의 열매는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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