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제사의 비밀 본문
계절은 어김없이 오고 또 다시 정월 초하루가 코앞에 다가와 고향을 찾는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될 것이다.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전통에 의해 우리 민족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은 세계 제일인 듯 하다.
명절날 고향으로 밀려가는 인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며 봉분을 비롯한 제사 등 장례문화는 엄중한 격식아래 큰 부담과 정성을 들여 이루어져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륜을 공경하는 유교 속에 숨어있는 어둠으로 인해 조상을 공경하고자 하는 제사(차례)가 조상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제사 속에 깃들어 있는 숨은 비밀들을 밝혀 내어
세상사람들의 삶을 밝게 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논어 선진편에 보면 제자가 공자에게 영혼 섬기는 법(제사)에 대해 묻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공자는 『산자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영혼을 섬길 수 있느냐?』하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고
또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 하고 반어적으로 대답하였다.
그는 단지 산자를 대하듯 망자에게 대해서도 정성스레 공경하는 것이
仁을 지닌 인간의 바른 도리라고 하여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으로 삶의 길에 접근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망자를 바로 물건으로 취급해 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슬픔에 잠겨 몇 달이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같이 지내는 경우 등이 있어서
공자와 같은 지혜 있는 자가 산자와 죽은자와의 관계를 분명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공자의 장례에 대한 의견제시가 있었고
제사의 형식도 그러한 인간적인 입장에서
정립되었던 것이다.
공자는 제사에 대해 그 속에 숨은 비밀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된다고 이야기하였으나
스스로는 제사의 비밀에 대해 한마디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유교가 제사를 중시하고 있는 종교이면서
제사의 의미와 비밀에 대해서는
깊이 있는 언급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바로 종교로서의 유교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성자의 깨달음에 의해 우주의 실상과 생명의 이치에 대한 분명한 고찰이 있는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죽음의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석이 있었고
인간의 올바른 삶의 길에 대한 가르침도 제시되고 있다.
생명의 길은 모두 서로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사후의 세상과 영적 현상을 알게 되면 제사의 의미도 알게 되고
참다운 제사의 방법과 효과에 대해서도 저절로 알게 된다.
그런 견지에서 제사의 진실에 대해 아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지식이 아닐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사는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로연이며
크게 말하자면 죽은 영혼의 한을 풀어주고자 하는 산자의 살풀이인 것이다.
생명의 이치에서 볼 때 죽은자는 이승을 떠나야 하는 것이 원칙이다.
모든 생명은 이생을 다하면 더 나은 후생을 위해 자신의 영혼을 저승으로 떠나가도록 해야지
인연이 끝난 이생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그러나 요즘 같은 어두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과 집착에 짓눌려 살기 때문에 한과 미련에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죽은 뒤에도 평안하게 윤회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계속 떠도는 유혼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올바른 삶을 통해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는
죽는 즉시 깊은 잠에 빠져
윤회에 들거나 높은 신계로 올라가게 되므로
이승에 존재하지 않게 되어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게 된다.
부처와 예수가 제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유에는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숨은 진실을 모르고 단순한 현실적 효용과 인간적 논리에 의해서 생의 윤리를 전개한 유교에서는
죽은 자도 산자와 같이 공경하는 입장에서 제사를 지니게 되었고
그것이 점차 형식적으로 전개되어, 산자는 제사에 짓눌리고
죽은자는 불행 속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빛어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우에는 제사가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방식이 됨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명과 영혼에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왜냐하면 제사가 생활의 중요한 일부분이 됨으로써
죽은 자들은 이승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들이 살아있을 때 망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후손들의 곁에 머물면서 제사를 받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며
영혼 그 자신에게도 매우 불행한 일이다.
문제가 심각한 것은 영혼이 이승에 머무는 것이 단순한 머무는 정도가 아니라 죽은 영혼에게는 엄청난 고통과 불행으로 다가온다는 사실이다.
영혼들은 이미 몸을 가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승의 환경이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오게 된다.
몸의 보호막이 없는 영혼들은 무제한의 의식의 자유 속에 있기 때문에 그 불안한 의식체들은 자연환경의 변화에 의해 무제한의 환상과 고통을 받게 되며
또한 유계의 나름대로의 존재양식에 의해 갖가지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되어 괴물과 공포와 고통에 휩싸이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옥도라고 하는 것으로 지옥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들이 이승 속에서 겪게 되는 영적환상인 것이다.
그 결과 지옥의 고통에 시달린 영혼들은 피폐하고 고갈되어
좋은 후생을 결코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한 후생의 길로 가는 것은
진리를 찾지 아니하고 인간이 만든 무지와 관습에 따라
함부로 인생을 살아온 어리석은 중생들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제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억울하거나 한을 가진 사람들을 달래 주는 데는 매우 요긴한 방법이다.
특히 오늘날과 같이 어둡고 한이 많고 고통스런 세상에서는 더욱 제사가 필요하며 우리나라와 같이 제사를 삶의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관습이 있는 민족에게는 더 더욱 그러하다.
일단 이승을 떠도는 유혼이 된 영혼에게는 제사만큼 위안이 되는 것이 없다.
떠도는 유혼에게 제사를 지내면 고달팠던 고통의 상태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 볼 기회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영혼들은 과거 자신이 좋아하던 음식을 차려놓으면
그 음식을 의식으로 접하는 것으로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신이나 영혼들은 의식만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제사는 좋은 음식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영혼을 달래주며 그들이 좋은 후생을 맞이하도록 바른 영혼의 길을 가르쳐 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제사를 지내는데 있어서 전해져 내려오는 관습 중 하나가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사르는 것인데
만약 불붙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면 영혼이 감응했다 하여
사람들은 지방이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기이한 현상은 나타나지 않는 것이 좋다.
영혼이 응답하는 것보다 응답하지 않는 것이 영혼에게 좋은 현상이기 때문이다.
영혼이 응답한다는 것은 곧 그 영혼이 이승을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증거이며 고통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제사가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해서
제사를 지내던 사람이 갑자기 제사를 지내지 않을 경우
그 이치를 모르는 영혼들은 매우 섭섭해 하며
산자에게 악감을 품고 이상한 현상을 일으킬 수가 있다.
이러한 경우 갑자기 제사를 치우면 안되며
마치 산자에게 이야기 하듯이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제사의 의미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생명의 길을 일러주고
일정한 기간을 두면서 점차 줄이겠다고 말하고
제사를 점차 줄여 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나쁜 영과의 접촉이 있을 때 활용해도 된다.
영과의 접촉에 의해 집안에 우환이 생길 경우
영을 생각하면서 정성껏 젯상을 보아 이웃을 부르는 듯한 마음으로 영을 초빙하여
영이 오해하고 있는 일을 해명하고 생명의 길에 대해 말해 주어
더 이상 구천에 헤매지 않도록 설득해야 한다.
그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자기 마음속에 그러한 느낌이 오게 되어 있다.
이리하여 영과의 화해가 이루어지면 제사가 효과를 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는 작은 영적 오해에서 비롯된 일들을 처리하는 것에만 효과 있는 것으로
삶의 근본문제를 해결하거나 깊은 원한을 품은 영혼들을 달랠 수는 없다.
철천지 원수로 깊은 한을 품고 있는 원귀들은
달랜다고 해서 한을 풀지 않을 것이며
잘못된 삶으로 인해 영혼이 망쳐져 버린 유혼들을
제사를 지낸다고 해서 좋은 후생을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평소에 좋은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하며
남에게 한을 짓지 않도록 하고 스스로도 한을 품지 않도록 하여
마음을 맑고 가벼이 지니는 지혜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므로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유교보다 훨씬 합리적이다.
죽은 자는 신의 곁으로 가고자 의식하기 때문에
이승에 대한 집착을 보다 쉽게 잊어 버릴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에도 잘못된 가르침이 번져 이승을 떠도는 영혼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광신적인 믿음에 의해 죽어서도 기독교를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집착과
예수재림과 함께 이루어 진다는 부활의 의미에 대한 잘못된 교리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는 예수가 이야기한 것이 아니라
그 제자들이 자기의 생각대로 지어낸 논리에 불과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 영향은 너무 커서
오늘날 교회에 가면 이 세상에서 부활하고자 하는 욕심을 지닌 영혼들이 계속 교회당에 머물러 있으면서 예수가 재림하여 자신을 육신 그대로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으며
기독교를 세상에 퍼뜨리고자 하는 집착에 맺혀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고 기이한 심령현상 등을 일으키며 헤매고 있는 영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참으로 어리석은 관념의 노예짓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죽은자는 이생에서 할 일을 다했으니
다음생을 기다리는 오고 가는 우주의 진리에 순응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생명현상에 대한 고찰이 가장 깊은 불교에서도 같은 취지에서 제사를 지내지 않고 있으나
이종교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변질된 교리가 세상을 병들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천도제를 통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행위와
"나무관세음보살과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교리이다.
삶의 길은 엄연한 우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소 그 사람이 살았던 행위의 결과가 그 마음에 쌓여
영혼이 업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자신의 행위 이외에 그 사람의 업보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설혹 신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꿀 수가 없다.
만약 기도나 제사를 통해 구원이 가능하다면 농사를 짓지 않고도
기도만 하면 풍년을 들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
세상에 그런일이 벌어진다면
하루 아침에 세상은 망하고 말 것이다.
만약 천도제를 지내고 기도를 한다고 해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돈많고 권력 있는 자들은 모두 천당을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된다.
절이나 교회에 헌금이나 시주를 많이 하고
좋은 장례에 멋있는 굿을 한다면
모두 천당에 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불변의 엄중한 진리가 지배하는 이법의 세계에는 이런 일이 결코 일어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불교에서는 장례를 화장으로 하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매우 좋은 방법이다.
화장을 통해 이승 속에 자신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은
영혼에게 있어서 빨리 이승을 포기하고 후생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지름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즘 일어나고 있는 화장장려운동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정신을 맑고 가벼이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진실의 근원 ginc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