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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과 거짓

무에 관한 고찰(반야, 무,무명, 절대무)

gincil 2013. 4. 21. 08:43

선가에서는 이상적이지만 절대무가 가능하다고 본다.

 

그래서 선정에 있어서도 인식이 소멸하고 인식하는 주체도 사라지는 경지를 수행의 최고 단계로 보고 최종적인 화두도 자 화두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자 화두를 깨면 모든 수행이 끝난다고 선지식들은 이야기 한다. 선가에서는 모든 것이 시작되고 사라지는 우주의 근원을 순원무잡한 불성으로 보아

 

세상에 피어난 모든 것은 불성을 더럽히는 탁하고 덧없는 것으로써 이러한 번뇌에서 벗어나 절대무에 이르는 것을 최고의 경지로 삼는 것이다.

 

즉 마음이 절대무에 이르러 순원무잡한 우주의 근원인 불성과 하나되는 것을 인간이 가야할 최고의 경지인 해탈의 경지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은 무명에서 나타난 고통스러운 것이므로 하루빨리 무의 경지를 깨쳐 윤회를 벗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진실을 알지 못한 이론적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만약 절대무가 우주의 근원이고 완전한 자리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 속에서 무명이 생겨나고 우주라는 찌꺼기가 생겨날 수 있겠는가?

 

또 이 혼탁한 세상이 생겨나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면 이 세상은 불성 이외에 다른 곳에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 이를 설명할 길이 없는 것이다.

 

선가에서는 무를 불성의 실체로 보아 이 세상을 죄스럽고 허무한 것으로 보는 염세적 경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이세상이 아무리 환상이라 하더라도 그 환상의 인연을 계속 이어가는 현실의 모습들이 있고 삶의 실존이 환상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면 그것은 실재라고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비록 연기와 같이 무상하게 나타났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일이라지만 우리의 삶은 그 순간에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우주를 꾸며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깨달음에 이르러 이세상의 실체가 환영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이세상속에 존재하고 있는 중생들의 생생한 고통이 사라지거나 무시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이 현실 속에 중생들의 고통이 생생히 존재하는 한 깨달은 자의 해탈심도 결코 홀로 편안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해탈은 중생의 고통과 함께 함으로서 비로소 완성의 의미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실제 깨달음에 이른 분은 현실을 소중히 생각하고 분명히 세상에 주어져 있는 뜻과 진리를 세상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어둠 속에 헤매고 있는 것을 보고 연민에 어쩔 줄을 모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처님과 예수님인 것이다.

 

그분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전국을 떠돌며 자신을 바쳐서까지 사람들에게 좋은 삶의 길을 가르쳐 주려고 노력하다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과 분리된 해탈이 가능하고 절대무가 가능하며 이세상이 무명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결코 진정한 깨달음을 얻은 자가 아니며 불성에서 무명이 나타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세상이 허무하다고 외치며 절대무를 주장하는 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태어나는 반야의 실체를 체험하지 못하고 단지 논리적 생각으로 절대무를 상상하여 공함에 빠져있는 것이다.

 

진정한 반야의 세계는 절대무가 아니라 모든 만물이 새로 태어나는 우주의 자궁으로 실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반야의 실체는 절대무가 아니며 모든 것이 새로 태어나는 우주의 모태로서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가득 차 있는 것이다.

 

반야의 체험은 생각이나 결심으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며 올바른 삶의 길을 통하여 자신의 업을 태우고 영혼을 정화시킴으로써만 비로소 이를 수 있는 곳이다.

 

선가에서 깨달음을 모든 것을 비워 무를 증득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 아는 것이며,

 

실제 해탈은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것으로서, 소아적인 나를 버리고 완전한 불성으로 이루어진 법계와 하나되어 우주적인 대아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내 마음이 무를 깨달았다고 해서 내 몸이 무가 될 수 없으며 생생한 이 우주가 무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인과의 이치에 의해 모든 일이 엄연히 이루어지고 있고 수많은 사실들이 계속 쌓여가고 있는 이 세상은 개개인의 깨달음과 무관하게 계속 실제의 세계로 존재하는 것이다. 어찌 이 실재의 세계를 무시하고 진리가 존재하며 깨달음이 존재하겠는가?

 

깨달음을 얻고 무를 증득한 후에도 계속 나의 몸과 이웃과 이세상은 아픔을 간직한 체 우리의 주변에 그대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선가에서는 진정한 깨달음은 무의 추구가 아니라 바른 세상을 짓는 공덕에서 온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망각하고, 명상으로서도 해탈에 이를 수 있다는 엉뚱한 환상 속을 헤매고 있다.

 

이것은 진리에의 방향을 잘못 잡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의 실체는 공적시색으로 실재하고 있는 우주의 근원에의 도달이며 공덕으로 완성된 인간의 마음만이 들어갈 수 있는 우주창조의 문인 것이다.

 

공덕을 짓는 팔정도의 길을 무시하고 관념으로서만 마음을 비우며, 행동으로 자신을 닦지 않고 명상으로서만 깨달음에 이르려고 한다면 결코 해탈의 실체에 도달할 수 없으며 공망과 악업에 빠지는 것 이외에 다른 길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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