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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길

화두의 정체

gincil 2013. 4. 21. 22:32

어떤 학생에게서 화두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그런데 이메일이 잘못 되었는지 되돌아와 여기에 글을 쓴다.

대부분의 한국인이 그렇듯이 그 학생도 불교에 깊은 영향을 받고 있으며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는 듯 했다.

 

이러한 분들에게 현행 불교와 화두의 실체를 이야기하면 강한 반발을 할 것이 분명하지만 이제는 밝힐 때가 온 것 같아 그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

 

선불교에서 말하는 화두는 생명의 근원인 의식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방법을 응용한 명상기법이다.

 

왜 생명의 근원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가?

그 이유는 생명의 근원은 의식이며 의식의 근원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는 반야의 자리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화두는 자신의 의식의 근원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의문을 가지고 계속 자신의 생명의 근원을 추적해나가는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분명한 사실은 이 화두에 대해 해답을 한다는 것은 최종적인 반야의 자리에 들어 깨달음을 얻고 세상의 이치를 볼 수 있는 해혜탈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요즘에 나와있는 화두에 관한 많은 글들은 한결같이 자신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듯 자신 있게 정답을 써놓고 해석까지 붙여 놓았다는 사실이다.

 

김용옥이란 사람도 자신 있게 선문답을 하면서 그것이 마치 자신의 경지인양 자랑하고 다니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착각이고 관념의 유희일 뿐 진실이 아니며, 선문답을 아무리 능숙하게 한다고 한들 그것이 깨달음을 증명하는 증거가 되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전혀 보지도 듣지도 못한 깨달음을 자신의 생각이나 논리로 유추해 함부로 말하며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 말하는 깨달음과 직지인심은 함부로 거론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그러한 경지는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이가 아니면 전혀 보거나 체험할 수 없는 일들이기 때문이다.

 

부처이래 깨달은 이가 없었는데 어찌 그리 깨달은 자가 많은지 알 수가 없다.

 

만약 진정 깨달은 자가 나왔다면 그 주위에 빛이 비치어 좋은 세상이 나타나야 하는 것이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깨달음이 있는 곳에는 빛이 있고 빛이 있는 곳에서는 세상이 밝아진다.

동양에 그렇게 많은 선승들이 많이 나왔으면서도 서양보다 무지하고 어두웠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가의 깨달음과 화두와 선문답 속에 환상이 있었을 뿐 진실과 이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실 속에 있는 이치를 보지 못하고 관념적 유희에 빠져들었기 때문에 현실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했던 것이다.

화두선을 주장하는 사람은 화두에 전심집중을 하면 어느 순간 확연대오한다고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소리다.

 

세상의 이치 속에는 갑자기 깨닫는 것처럼 원인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없다.

깨달음은 명상의 기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바른 이치와 선업으로 마음을 닦아 공덕이 세상에 가득 참으로써 그 결실로 마음의 꽃이 피어 증득하게 되는 것이다.

 

공덕이 없고 마음이 정화되지 않는 자가 화두로 자신의 의식의 근원을 파고 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깨끗한 반야가 아니라 탁한 오욕과 잡념의 티끌밖에 없다.

 

진정 반야를 보고자 하거든 공덕과 바른 이치로 세상을 위해 일을 하고 그 사랑으로 마음에 자비의 불이 일어 자신의 애욕과 사심을 모두 태워버릴 때 변치 않는 불멸의 반야를 얻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탁한 자는 어떠한 명상을 해도 반야를 볼 수 없지만 마음이 밝음으로 정화된 이는 아무런 일을 통해서도 반야에 쉬이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안다면 한소식 할려고 평생을 산속에 갖혀 사는 사람들보다 어리석은 이는 없는 것이다.

 

이런 소리를 한다면 불교계에서 펄쩍 뛰겠지만 이것이 바로 오늘날 불교계가 침체되고 세상을 어둡게 하는 근본원인인 것이다.

 

화두선은 중국에 와서 도가의 영향으로 생긴 것으로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는 절대 화두선은 없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정통 동남아 불교에서는 대승이 나타났을 때 근거 없는 것들이라고 부정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화두선은 일종의 명상의 기술로서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정법이 결코 아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화두선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말씀하신 바처럼 팔정도에 의한 바른 이치와 공덕의 쌓임에서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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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진실한 자가 절에 들렀을 때의 일이다.

그 절에서 한소식했다고 하는 스님이 물었다.

"금시조의 발톱이 몇 개냐?"

그래서 진실한 이는 이렇게 물었다.

"여보시오! 당신 금시조 본적 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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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에 사로잡힌 이들은 이러한 이치에 닿지 않는 질문에 당황하여 어쩔 줄을 모르지만 진실한 이는 그러한 질문이 사실 속에 없는 환상임을 알기에 망설임 없이 그 헛됨을 지적하는 것이다.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말을 짓고 가공하여 함부로 환상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것이다.

 

그래서 답이 없는 질문을 하여 상대를 혼란에 빠뜨리고 자기만의 독점적인 권위를 구축하며 거짓된 관념체계를 유지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일은 아무리 아름다워 보여도 지으면 지을수록 세상을 헛되이 하고 어둡게 만든다.

 

따라서 화두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 인과의 법칙에 충실히 사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 선불교는 온갖 이론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지금 내가 하는 말이 어리석은 주장으로 들리겠지만 나도 동국대 불교대학원 선학과 정규과정을 다닌 사람으로 선불교에 대한 이론이나 수행의 단계는 남보다 떨어지지 않는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빨리 화두와 선불교의 환상에서 벗어나 팔정도에 의해 현실 속에서 좋은 삶을 짓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

 

불교의 요지는 팔정도에 있는 것이지 참선과 같은 명상에 있지 아니하다. 화두를 잡고 명상을 하는 것보다 바른 이치를 배우고 행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이다.

 

세월은 너무 빠르고 주어진 시간은 너무 부족하다.

세상의 변화는 그대가 지은 원인에 의해 이루어진다.

만약 그대가 자신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거든 헛되고 추상적인 관념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와 선하고 바른 이치를 배워 현실 속에 아름답고 좋은 원인을 지어야 한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인과의 법칙에 의해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원인을 짓는 것만이 부처님이 말한 진정한 가르침이며 정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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