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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본질 본문

깨달음의 길

불교의 본질

gincil 2013. 4. 21. 22:33

[ 질 문 ]

 

평소 존경하는 마음으로 오늘 한가지 의문에 대하여 문의 드립니다.

 

불교의 3개 분야에 대한 의문으로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불교에도 크게 3개의 관심 분야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1.참선이나 기타의 수행을 통하여 득도, 해탈, 성불하는 본연의 길

2.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행해야 할 갖가지의 선행, 보시 등의 가르침

3.사후의 극락과 그 많은 불국토의 세계, 윤회에 의한 재 탄생 등

 

이 중에서 불교의 가장 과학적이고 철학적이며 이성적으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은 오직 첫 번째의 것이며,

 

두 번째의 것은 한없이 옳고 바람직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으나

첫째의 것과는 부합되지 않는 별개의 윤리적이며 인위적인 것으로 보여지며,

세 번째의 것은 사실 황당 무계하여 너무 종교적인 것으로 보여 집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주를 믿으면 천당 가고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는 것과 별로 다른 것이 없어 보입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를 제거하고 나면 첫 번째의 항목이 더욱 빛나고 타당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상기 건에 대하여 저의 무지를 씻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답 변 ]

 

부처님의 가르침의 요지는 단하나!

오직 자비와 사랑이다.

지금 사람들은 말법에 물들어 이를 혼동하고 있다.

그대는 불교의 길로

1.참선이나 기타의 수행을 통하여 득도, 해탈, 성불하는 본연의 길

2.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행해야 할 갖가지의 선행, 보시 등의 가르침

3.사후의 극락과 그 많은 불국토의 세계, 윤회에 의한 재 탄생 등 3가지 길을 제시하면서

둘째와 셋째의 길을 하책으로 보고 첫째를 가장 본질적인 길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잘못된 것이다.

오히려 둘째와 셋째가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더욱 중요한 길인 것이다.

이러한 혼동이 바로 오늘날 대승불교가 빠진 함정이며 말법현상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나누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실은 알면 하나인 것이며 모르면 수없이 나뉘어지는 것이다.

진실의 세계는 결코 나뉘어 질 수 없는 것이다.

 

불법은 진실을 밝히는 사실적인 가르침이다.

그것은 생명과 정신과 우주의 실체에 대한 가르침이며 우주의 이치와 인간의 길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득도와 해탈은 이러한 사실 속에서 인간이 바른 삶을 삶으로써 그 결과로 증득하는 것이니

삶의 본질인 현실에서의 생활을 무시하고 어찌 결실을 바라겠는가?

 

오늘날 말법은 올바른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완성시키고 세상을 축복하는 것을 가벼이 보고

그대의 말처럼 참선이나 수행을 통하여 득도하는 길을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완전한 인과의 법칙은 이 법계 속에는 올바르고 좋은 원인을 짓지 않고서 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인간의 완성인 해탈과 성불은 오직 삶의 본질인 바른 행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삶과 동떨어진 참선이나 수행을 통해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 우주는 완전한 뜻 속에 나타나 있으며

그 속에는 근원의 세계, 천상의 세계, 현실세계, 유혼의 세계 등 많은 법계가 존재하고

그러한 구조 속에 하늘의 완전한 뜻을 실현하는 주체로 인간이 이 땅에 태어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늘의 뜻에 따라 올바른 삶으로 자신의 불성을 완성시키면

높은 차원의 천상의 세계에 이르렀다가 마침내 우주의 근원에 들게 되는 것이며

만약 우주의 이치를 거슬러 잘못된 삶을 살게 되면

불행과 고통을 받다 쭉정이가 되어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일들은 모두 진실을 보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실들로서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며

동전의 양면과 같이 한면이 없으면 다른 면이 설자리를 잃는 유기적인 관계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실상을 모르는 학자들은 자신의 판단과 인식능력에 근거해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실들을 함부로 기계적으로 나누어 개념화함으로써

불교는 추상화되고 삶의 지주로서 생명력이 약해져 버린 것이다.

 

누누이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불교의 핵심은 참선과 같은 명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의 실천인 자비와 사랑에 있다.

 

이것은 이미 수천년전 부처님이 기존 힌두교의 무지를 타파하면서 선언한 절대명제인 것이다.

 

부처님은 보리수 나무밑에서 깨닫고 나셔서 "자신의 정각은 요가와 고행 같은 명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거쳐 자신이 쌓아온 올바른 공덕에 의한 것이니

바르게 배우고 행하여 정법을 행하라"고 분명히 선언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명상을 가르친 이유는

여름 우기 때는 아무 곳에도 돌아다니지 못하고 가만히 방에만 앉아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이 가만히 있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해

그 동안 보살행을 하면서 마음을 닦은 정도를 비춰보고

자신의 마음을 반성하고 결심을 다지는 명상을 시간을 갖도록 하신 것이다.

 

인간완성의 경지인 깨달음은 마음의 정화와 완성에 의해 다가오는데

이것은 삶을 통해 올바른 공덕을 지음으로써 이룰 수 있는 것으로

가만히 앉아서 결심만 한다고 마음을 정화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지은 대로 결과가 나타나는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는 우주 속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사람은 삶을 통하여 온갖 고통과 유혹을 극복하고 바른 일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그에 상응한 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

 

공직자가 재물에 대한 탐심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세상일을 하는 과정 속에서 뇌물에 굴하지 않고 국가와 민족을 위해 공명정대하게 일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깨끗한 마음을 얻었다 할 것이며

 

지족선사가 아무리 견성을 했다고 큰소리 치더라도

황진이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고서는 정심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명상을 하는 경우에도 어느 순간 마음이 환히 밝아져 세상이 모두 비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사람이 모든 감각과 자극을 끊고 고요히 앉아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어느 순간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마음속의 욕망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여

세상의 모든 일이 비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수행자들은 이와 같은 경험을 견성했다고 하며 마치 깨달음을 얻었다는 듯이 말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갖고 있는 작은 신비를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해탈지심을 얻은 것은 아니다.

 

중생의 마음도 조용히 가라앉으면 이러한 엄청난 효험을 발휘하는데

반야지심을 증득한 성자의 완성된 마음이 나타나면 그 위력은 우주를 감싸안을 만큼 엄청난 것이다.

 

이와 같이 흙탕물이 가라앉듯 가라앉은 마음은 또 다시 인연이나 풍파를 만나면

가라앉은 마음속의 찌끼가 일어나 다시 흐려지고 만다.

 

정각을 얻은 마음은 찌끼가 가라앉은 상태가 아니라 모든 찌끼가 완전히 사라져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완전한 반야지심을 증득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성을 한 상태와 정각을 얻은 상태는 명확히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 많은 선승들이 대부분 깨달았다고 말하고

다시 보림행을 하거나 토굴에 앉아 면벽 9년을 하면서 일생을 산속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분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찌끼를 씻어낸 완전한 해탈심을 얻은 상태가 아니라

마음의 흙탕물을 가라앉힌 상태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경험은 부처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부처님은 깨닫고 나셔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깨달음을 얻고자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고행을 했으며

두 요가스승을 만나 그들보다 앞선 비상비비상처의 경지에 올랐지만

나는 내 마음을 해탈하여 절대적인 평안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저자거리에 나가 세상의 번잡한 일들과 바람결에 들려오는 가족들의 소식을 들을 때면

다시 내 마음속에 가라앉아 있던 집착과 애욕의 물결이 출렁거렸다.

깨달음을 얻은 지금 돌아보면 그것은 정법이 아니었다.

 

깨달음은 고행이나 기도, 선정에 의해 의해 오는 것이 아니라

올바른 삶에 의한 공덕의 실천에 의해 업을 태워서 오는 것이었던 것이다.

 

나의 깨달음도 이생의 수행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나의 공덕에 의해 점차 정신이 맑아져

이생에서 마지막으로 세상에 대한 사랑과 자비의 불로 애를 태운 결과

비로소 모든 사사로움이 떨어져 깨달음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완전한 깨달음은

자신의 마음속의 흙탕물을 가라앉히는 참선과 같은 명상으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치열한 삶으로서 자신의 사심과 탐욕을 모두 태워버릴 때

비로소 그 결과로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선언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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