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명상의 효용 본문
많은 사람들이 수행에 대한 마술에 걸려 있습니다
부처님이 그당시 유행하던 모든 요가행과 고행을 모두 경험하시고
수행의 헛됨과 실체를 명확히 밝혔건만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그 주변에 있던 거짓된 자들은
자신들의 밑천을 버리기 아까워
다시 불교를 믿는 순진한 이들에게 명상의 신비를 가르키면서
불교의 순수한 가르침인 올바른 인과의 가르침을 흐려놓았던 것입니다.
수행에 대해 김강희님의 인식은 어느 정도 방향은 바로 잡았다고 할 수 있지만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지한 것이어서
잠시라도 헛되이 보낼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삶을 통하여 자신을 닦아야 하는 것이지
삶과 유리된 수행을 통하여 자신을 닦기에는
현실은 너무나 냉엄하다는 것입니다.
지금 나와있는 명상기법을 수행하게 되면
현실을 버린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세상에 비추게 될 것이며
결국 진지한 삶을 까먹어 빈쭉정이 인생만 남게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삶도 수행이며 명상도 수행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분명히 말하거니와 명상은 올바른 인생의 수행이 아니며
단순한 기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삶을 통하여 올바른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깨달으며
헛된 욕망을 버리고 맑은 정신을 얻을 때
진정한 인간수행이 가능한 것이지
참선을 한다거나 소리나 빛에 집중하거나 인체의 특정부분에 집중하는 것을 통하여서는
결코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명상은 자신의 삶의 수행을 통하여 얻게 된 마음을 보는 기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평소에는 제자들에게 명상을 가르치지 않았으며
팔정도를 배우고 행하여 세상에 공덕을 쌓고 자신의 마음을 닦으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기가 와서 세상을 위해 일을 할 수 없을 때
그동안 닦아온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하한거 시간을 가졌던 것입니다.
참선이나 단전호흡이나, 각가지 명상기법들은 자신의 마음의 실체를 보게하는 단순한 기술이기에
이것을 통하여 마음의 묘용을 체험할 수는 있으나
마음 자체를 닦을 수는 없습니다.
즉 마음을 닦은 정도에 따라 마음의 묘용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지
명상의 기법에 따라 욕망과 집착을 버릴 수는 없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모든 욕망과 집착을 끊어버린 사람은
어떠한 명상기법을 해도 즉시 근원적인 반야의 마음으로 들 수 있으며
마음이 어두운 사람은 어떤 명상기법을 해도
마음을 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부처님이 요가행의 최고경지인 인식의 대상이 사라지고 인식의 주체도 사라진 비
상비비상처에 이르렀지만 또 다시 바람결에 흘러가는 가족과 나라의 일을 접하고
는 흔들리는 마음을 어쩔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명상의 한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다시 요가수행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을 닦아 마침내 보리수 나무밑에서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나의 경우에도 소리에 집중하면 막바로 명치속의 아득한 경계속에 들어가게 되고
미간에 집중하면 온몸의 기운이 선천기운이 발동하며 아득해지고
내단에 집중하면 정수리가 열려 하늘의 기운이 온몸으로 들어와 하나가 되며
이뭣고를 잡으면 곧 마음의 실체를 보고 텅빈 경계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그러한 황홀경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은 마음을 닦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이미 정화되어 있는 나의 마음을 보는 것이지
그러한 단계를 통하여 내마음을 정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부디 이러한 명상의 사실을 분명히 알아
자신에게 주어진 소중한 삶의 기회를 놓쳐
인생을 후회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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