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여러 가지 수련을 통해서 얻으신 우주의 진리, 인간의 본질적의미와 가치가 현실속에서 선업을 닦아나감으로써 인과응보의 이치에 순응하여야 나타난다는 말씀은 공감이 가지만요 저는 구체적인 수행법을 듣고 싶답니다
오늘도 苦. 苦集. 苦滅. 苦滅道跡聖諦를 바르게 사유했을때에 眼智明覺이 생한다....1轉4行...
苦聖諦智를 마땅히 알겠노라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苦集聖諦를 알았으니 마땅히 끊겠노라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괴로움의 원인을 없애고 苦滅聖諦를 알았으니 마땅히 증득해서 알리라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苦滅道跡聖諦를 알았으니 마땅히 닦아야겠다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2轉4行....
苦聖諦를 알았으니 알고난후에는 벗어나야지 라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苦集聖諦를 알았으니 이미 끊고 벗어났다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苦滅聖締를 알았으니 이미 증득하여 벗어났다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
苦滅道跡聖諦를 알았으니 이미 닦아서 벗어났다고 바르게 사유했을 때 眼智明覺이 생한다...3轉4行...
....잡아함경권제15.초전법륜경 중에서 ....
해석은 좀 껄끄럽지만 조용히 바르게 사유할 때 眼.智. 明(12연기의 明).覺 이 생긴다고 말씀하신 경전이네요
밝은 지혜와 공덕행으로 마음을 정화시키라고 하셨지만 저는 경전속에서 지혜와 밝음이 생긴다는 말씀에 의지해서 마음을 관하거든요
쉽지가 않아서요
단지 저로서는 구도체험기에 있는 데로 따라할 수가 없으니 계단오르기처럼 순차적으로 이르는 길이 있다면 알고 싶네요
<답변>
서현민님은 팔정도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고 보리월님은 경전속에서 지혜와 밝음이 생긴다는 말씀에 의지해서 사성제를 관하고 있다고 하면서 구체적인 수행법과 순차적으로 이르는 길이 있다면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보리월님이 지금 고집멸도에 대해 관하는 있는 것이 바로 순차적인 길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어긋난 길은 아니지만 정법은 아닙니다.
부처님은 정각을 이루신 분으로서 인과의 이치를 명확히 보셨기 때문에 상황에 처해서 상대의 근기와 공덕에 따라 상대에게 가장 적합하고 필요한 생명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던 팔대 제자들은 모두 아라한의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깨달은 이는 진리 그 자체이기 때문에 옆에서 따라 행하기만 하면 100% 모두 진리화되고 공덕이 되어 곧 바로 높은 경지에 곧 이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후대에 불경을 보는 사람들이 헤메기만 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지금의 불교가 형식화되고 생명력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좋은 음식도 오래되고 손을 대면 상하는 것처럼 부처님의 말씀도 사사로운 생각이 개입되고 가공되면 변질되는 것입니다.
지금의 불경은 부처님 사후 수백년이 흐르는 동안 고승들에 의해 계속 첨삭되는 과정에서 많이 왜곡되었습니다. 요즘과 같이 통신이 즉시 교환되는 때도 서너사람만 거치면 뜻이 왜곡되는데 그당시 걸어서 오고가며 기억에 의지해서 법을 전할 당시에 과연 얼마나 정확히 부처님의 진리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겠습니까?
팔대제자가 존재하던 1차 결집 이후의 불전결집은 부처님에 대한 환상과 미화가 나타나고 가르침이 분석화·논리화·체계화되어 신앙의 대상으로서 불교는 남았지만 깨달음에 대한 가르침으로서 불교의 생명력은 많이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불경 전편에 흐르는 가르침의 요체를 아는 것입니다. 혼자서 앉아 아무리 사성제에 대해 관한다고 한들 중생의 입장에서 깨닫는 것은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전의 한구절을 참구하여 이치를 깨닫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분야에 대해 아는 것이지 그것으로 모든 지혜를 다 깨달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도 제자들이 무엇에 대해 관하더라도 부처님에게 그것에 관해 끊임없이 그 이치를 물으며 참구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대와 같이 경전의 한구절에 심취해 그것을 전부인양 세월을 보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바로 불경의 형식화인 것입니다.
불교학자들은 불경을 한구절 한구절 분석하고 미화하여 극적으로 구성해놓았는데 그 작은 부분에 몰두해 전체를 외면한다면 결코 이생에서 부처님의 진법을 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법계이며 모든 것이 이치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며 지금 이생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할 것이 너무나 많은 것입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이땅에 가장 정확하게 실천하기 위해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대강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부처님 재세시에도 기존 브라만교와 육사 외도가 있어 많은 잘못된 관념과 주장들로 세상을 어지럽히고 사람들을 잘못된 길로 오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브라만을 믿어 광신적인 기복을 행하였고 유물론, 회의론, 운명론, 쾌락론을 주장하면서 세상을 혼동과 어둠속으로 몰아넣고 있었습니다. 마치 지금과 유사한 사회상이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때 부처님이 나타나서 하신 진리의 말씀은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로서 모든 것은 인과의 법칙에 의해 나타나고 있으니 이치에 맞지 않는 관념을 버리고 스스로 좋은 원인을 지어 좋은 결과를 얻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좋은 원인을 지으면 좋은 자신과 세상을 얻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불행한 자신과 고통스런 세상이 온다는 간단하고 명확한 이치가 바로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실인 것입니다.
나머지 사성제, 팔정도 등의 관념들은 바로 이와 같이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한 방편들을 설명해 놓은 것으로 후세의 제자들이 더욱 체계화하고 논리화시킨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자연그대로 일의 선후를 설명하셨을 뿐 딱딱한 문자를 쓰지 않았습니다. 문자는 자연에 없는 것이며 성자들은 경전을 만들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자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 자연의 법이며 이치였기 때문에 쉬운 일상의 말들로 제자들이 행해야 할 인과관계를 명확히 밝히셨던 것입니다. 성자들의 가르침에 비유가 많은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 때문입니다. 진리가 문자화되고 체계화되고 분석화되면 그만큼 원뜻에서 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원인을 짓는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원인을 짓기 위해서는 세상의 원인과 결과를 정확히 알아야 하고(사성제) 세상을 위한 자비와 사랑이 있어야 하며 바른 생각과 실천이 같이 이루어져야 하는 것입니다.(팔정도)
즉 이것은 우리의 삶 자체인 것입니다.
우리가 경전을 보고 관하는 것은 바른 길을 알아 보람있고 가치있는 일을 하기 위한 것으로 관하기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진리는 삶속에 있는 것이며 세상은 모두 하나인 것입니다. 삶에 있어서 어찌 세상살이와 도와 수행법이 따로 있겠습니까? 따로 수행법을 찾는 것이 바로 잘못된 병인 것이며 삶과 진리의 분리인 것입니다.
깨달음은 삶을 통하여 자신을 불사를 때 그 삶의 결과로 오는 것이지 결코 앉아서 명상하거나 말을 참구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를 실천하려고 혼신의 힘을 다해 애를 태울 때 탁한 업과 사심이 사라지는 것이며 헛된 탐심과 애욕의 집착이 모두 비워지면 비로소 자신의 생명속에 우주의 근원인 깊은 반야가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고 싶은 말은 깨달음을 탐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과의 이치상 완성이란 좋은 원인이 수많이 쌓여 우주의 순환과정 속에서 가장 좋은 정수가 모일 때 나타나는 우주의 꽃이며 열매인 것입니다.
부처님도 윤회의 굴레를 돌며 수없이 많은 공덕을 쌓은 결과 이 생에 이르러 비로소 해탈에 들게 되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을 위해 좋은 일을 함으로써 마음이 조금씩 맑아지고 세상을 축복할 수 있음에 만족해야 합니다. 내가 하는 일로 인하여 나와 세상이 좋아진다면 인간으로 나서 그것보다 더 좋고 보람있는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깨달음도 결국 세상에 봉사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것은 모두 축복 속에 있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