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업을 지우는 길 본문

☆ 진실의 근원

업을 지우는 길

gincil 2013. 4. 23. 22:55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업을 지워야 한다.  
왜냐하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야에 들어야 하는데
마음 속에 업이 남아있는 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맑은 의식 만이 존재하는 반야에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을 지우는 것은 동양 구도계의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도를 구한다고 하는 동양의 구도계에서 
이 핵심적인 과제에 대해 실체를 알지 못해 헛다리를 짚은 채 수천년을 헤매왔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업을 지우는 방법에 대해 많은 오해가 있었다.
가장 큰 오해가 공사상이 번짐으로 인해 
업을 지우는 것을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오해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렇게 이해한 것은 
깨달음을 인간의 정신을 완성시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삶과 세상의 실체를 공으로 인식하여 자기를 버리는 것으로 이해한 때문이었다.

그동안 말법의 영향을 받은 이들은
이 세상이 존재하는 이유는 마야에 의한 미망 때문이며
실제 이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서
인간들이 착각에 의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긴다고 보았다.

세상을 보는 시각이 이렇게 관념적이니 비현실적이니
삶에 대한 진지하고 성실한 참여가 없고 염세적이고 현실도피적인 사고가 번져 
이것이 결국 동양사회를 어둠과 불행 속으로 밀어넣은 큰 원인이 되었다.
말법이 세상에 끼친 대표적 폐해인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은 완전한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법계로서
이러한 완전한 세상은 절대적이고 전지전능한 초월자를 원인으로 하지 않고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따라서 완전한 법계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삶 또한 
허망하고 고통스런 번뇌가 아니라 완전하고 숭고한 뜻을 가진 신성한 조재인 것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모든 생명과 마찬가지로 더 나은 자기를 짓기 위함이다.
모든 생명은 자기를 보존하려 노력하며
더 좋은 자기를 만들고 더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노력한다.
인간 또한 행복한 삶과 더 좋은 자기를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로 보고 좋은 원인을 지어 
불행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좋은 삶을 얻기를 원하며
세상에 좋은 뜻을 지어 훌륭한 사람이 되고 마침내 완전한 인간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인간은 생명으로 태어나 끝없는 윤회과정을 거쳐 헤아릴 수 없는 업과 깨우침을 경험하며 
생명의 근본인 자신의 영혼을 완전하게 만들어 나간다.

영혼이 밖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의식은 
습에 의해 흔들리는 혼탁한 의식과 모든 것을 이치와 사실에 따라 판단하는 맑은 의식으로 이루어지는데
인간완성의 경지는 수많은 생을 거친 바른 깨우침과 실천으로 
모든 업을 지우고 완전히 맑은 의식을 이루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흐름과 이치를 모르니 
말법에서는 생명의 근본인 자기마저 버리라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를 망치는 길이며
자기를 소중히 여겨 끝없이 단련해 나가는 것은 자기를 완성하는 길이다.

모든 것을 버린다고 생명의 근본인 자기의 영혼을 버리게 되면
생명으로 태어난 자신의 근본을 버린 가장 어리석고 불행한 자가 된다.

자기를 버리게 되면 주인없는 몸뚱아리에는 다른 의식이 들어와 주인행세를 하게 된다.
뜨내기 귀신이 들어오면 미치게 되며
깨달음을 욕심내어 한이 맺혀 죽은 귀신이 들어오면 혹세무민하는 사이비교주가 되는 것이다.

완전한 깨달음을 얻는 해탈의 경지는 
모든 업을 지우고 의식 속에 오직 맑음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집착과 오욕칠정으로 인한 모든 충동이 사라져
오직 맑고 평안하고 걸림없는 의식만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오직 맑음만이 존재하는 완전한 의식을 이루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주에서 수천년에 한번씩 나타나는 진기한 현상이기 때문이다.
우주에 태어난 끝없는 생명의 흐름 속에 희귀한 진리의 인연을 만난 고귀한 영혼이
끝없는 삶의 연단을 거쳐 이루게 되는 진기한 우주의 정화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인류사에 드물게 깨달은 자가 나타나 
이러한 희귀현상이 인간세상에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니
사람들은 누구나 쉽게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존재하기는 하나 매우 드문 일이니
사람들은 이러한 현상과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열심히 노력하는 것은 괜찮지만
이 생에서 반드시 깨달음을 이루겠다고 과욕을 부려서는 안된다.

완전한 깨달음은 수없이 많은 생의 좋은 인연과 깨우침과 공덕이 무르익어야 오는 것이니
원인이 무르익지도 않은 것을 바라는 것은 욕심이기 때문이며
깨달음에 대한 지나친 집착 또한 자기의 마음을 얽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할 일은 열심히 인간의 길을 가는 것이고 결과는 하늘이 내는 것이다.
깨달음은 바랜다고 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길을 열심히 가다보면 그 원인이 무르익고 하늘의 뜻이 닿아 저절로 다가오는 것이다.

따라서 원인을 다 짓지 못한 자격이 없는 자가 
깨달음에 욕심이나 자리보전하고 앉아 애를 태우는 것은
숯을 갈아 거울을 만들려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짓이다.

인간의 길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치에 따라 열심히 사는 것이다.
진실을 깨우치고 바르게 사는 길을 배워 열심히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노력하다보면
완전한 세상은 그대에게 지은만큼 결과를 선물할 것이며
때가 무르익고 하늘의 뜻이 있으면
세상을 위해 사명을 짊어진 진정한 구도자가 되는 것이다.
세상은 그래서 공정하고 완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도의 본질은 올바른 삶 속에 있지
수행이란 별도의 형식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을 멀리하고 수행이란 형식적 생활을 해서는
끝없는 생을 통해 이 세상이 가득 지어야 하는 공덕을 쌓을 길이 없는 것이다.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먼저 업과 영혼과 마음의 구조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럼 업에 대해 알아 보자.
업이란 현재의 생을 이루어오기 까지 전생과 자신의 삶을 통해 자신 속에 지은 마음의 흔적이다.
이 업은 한번 생겨나면 모든 존재와 마찬가지로 자기를 계속하려는 힘을 가지기 때문에
자신 속에 남아 계속 자신의 의식과 행동과 운명에 영향을 준다.

이 업에는 사실과 이치에 따라 움직이는 좋은 업과 
거짓과 욕심에 따라 움직이는 나쁜 업이 있다.

좋은 업이란 거짓이 없는 진실함이며 세상의 이치대로 살아가는 밝고 당당함이며
삿됨과 욕망과 집착에 흔들리지 않는 맑음이며 
세상을 이치대로 공정하고 불평없이 만드는 정의로움이며 축복이며 사랑이다.

나쁜 업이란 사실과 다른 거짓됨이며 
세상의 이치를 어겨 자신의 사사로움을 추구하는 욕망이며 집착이며 흐림이며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죄악을 짓는 것이다.

이러한 좋고 나쁜 업은 별개가 아니라 서로 맞물려있기 때문에
좋은 업이 커지면 나쁜 업은 작아지고 나쁜 업이 강해지면 좋은 업은 약해진다.

이러한 업은 체험을 통해 영혼의 일부가 되어 과거로부터 물려온다.
모든 생명이 과거의 씨앗으로부터 되풀이되듯이
인간의 생명 또한 과거의 씨앗인 자신의 영혼으로부터 다시 되풀이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생명의 씨앗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혼도 다른 변화가 없다면 
계속 과거의 운명을 되풀이 한다.

그래서 인간은 더 나은 자기를 얻기 위해
반드시 새로운 좋은 인연과 가르침을 만나 자신의 영혼을 성숙시키는 원인을 지어야하는 것이다.

인간의 영혼은 기운에 의식이 붙어있는 형태로 되어 있다.
기운의 일종이기에 죽으면 몸을 떠나고
다시 새로운 육체에 붙어 새 생명으로 부활하게 된다.

영혼의 의식에는 과거의 모든 체험이 깃들어있다.
그래서 의식이 환경에 부딪히면 업의 작용을 통해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마음을 통해 경험하는 일은 다시 의식으로 스며들어 영혼의 핵에 저장되는 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영혼은 가슴속 명치 부분에 머문다.
그래서 세상일이 안풀리고 애가 탈 때 가슴이 미어지듯 아프고
놀라거나 감동이 있을 때 가슴이 떨리고 요동치는 것이다.

인간의 의식은 기운의 일종이어서 다른 기운과 마찬가지로
가벼운 것은 위로 오르고 무거운 것은 아래로 가라앉아
맑은 의식은 머리에서 작용하고 탁한 업은 가슴 아래서 작용한다.
그래서 습의 충동은 가슴에서 일어나고 맑은 생각은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이 정화될수록 머리에서 작용하는 맑은 의식이 강해지며
아래 쪽에서 작용하는 업의 영향이 약해지는 것이다.
정→기→신으로 생명력이 승화한다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의식의 상승을 의미하는 것이다.

수행이란 바로 이와 같이 내면 속에서 충동하는 업의 힘을 제거하고
모든 욕망과 사사로움에 걸리지 않는 맑고 바른 마음만을 남기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업을 사라지면 업의 충동이 일어나지 않아 생각이 사라지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춰 이치대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바로 이와 같이 내면 속에 존재하는 모든 업을 지워야 한다.

반야심경에도 삼세제불이 모두 반야바라밀다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듯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모든 존재가 사라지는 반야에 들어야 하는데
한점의 걸림이 남아 있어도 모든 유가 무로 변하는 반야에 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 자기 속에 존재하면서 자신을 옥죄며 충동질하고 있는 업을 극복하고
완전히 맑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의식을 이룰 방법은 무엇인가?

업은 인간의 의식 속에 과거의 체험이 무형으로 쌓여있는 것이니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손으로 골라내거나 호미로 캐내거나 차크라 개발이나 기를 순환시키는 것 같이
유형적인 수단을 통해서는 어떻게 해도 제거할 수가 없다.
아무리 지워버리고자 애를 써도 마음 속에 숨어있는 이 흔적없는 업은 
환경에 부딪히면 또 다시 스멀스멀 피어나 인간의 운명을 장난질친다.

따라서 이처럼 찾을 수 없는 무형의 업을 지우기 위해서는 
오직 내면을 울리는 깊은 깨우침이 있어야만 한다.

실상과 일치하는 진실을 배우고 깨우쳐 한점의 거짓이 없으며
자연의 이치대로 살아 한점의 걸림이 없으며
안타까운 세상에 대한 진리와 사랑의 마음으로 열심히 노력하여
그 마음에 영혼을 울리는 체험과 깨우침이 있을 때
비로소 업을 극복하고 맑은 의식을 이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도를 이루겠다고 마음만 잡고 있으면 지은 공덕이 없으니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산속에서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가만히 앉아있으면 
가만히 둔 흙탕물이 가라않듯이 마음 속에 깃든 업도 밑으로 가라앉아 고인 물에 세상이 비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이것을 견성했다, 한소식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업이 가라앉은 것이지 업이 사라진 것이 아니다.
따라서 세상의 인연을 만나면 가라앉았던 업이 다시 피어나 온통 의식을 희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니 결코 반야에 들지 못하며 세상을 보지 못한다.
깨달은 자라면 마음의 평안을 얻어야 하며 세상을 보는 지혜도 얻어야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업이 사라진 증거이니 거짓 깨달음에 속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업을 제거해 버려야 한다.
그러면 업을 제거하는 이치는 무엇인가?
그것은 이미 자연 속에 분명히 나타나 있다.

웅덩이에 흙탕물이 고여 있을 때 이를 맑게 하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여기에 맑은 물을 흘려보내면 되는 것이다.
옆 개울에서 물고랑을 터 웅덩이에 물을 대주면 맑은 물이 자꾸 흘러들어가 
어느 듯 흙탕물은 엷어지고 마침내 맑은 물만 남게 된다.
이것이 한치의 어김이 없는 자연의 이치이며 인간완성의 길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인간의 의식 속에 
맑은 물을 흘려넣어 탁한 흙탕물을 정화할 것인가?

먼저 진리의 인연을 만나 좋은 것을 배우고 실천하며 나쁜 것을 바로 알아 멀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밝히는 불교의 가르침이니
그래서 칠불통계에서도 “모든 악은 멀리하고 모든 선은 받들어 행하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말은 쉬워도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고 몸에 새겨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더욱이 말세의 오탁악세 속에서 진리의 길을 행하기는 매우 어렵다.
진리를 행하면 바보같이 보이고
욕망과 아상을 키우는 것이 인간답고 멋있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자기 자신과 세상에 축복되는지 
선근이 없는 자는 알지 못한다.

오늘날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을 모함하고 부정한 방법으로 청탁을 넣어 사사로운 이익을 도모한다.
그러나 그로인해 그 영혼을 망가지는 결과를 생각하면 결코 그러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다.
한번 잘못된 판단으로 죄업을 저지르게 되면 그 영혼은 영원히 그 업으로 더러워지고 
세세생생 그로인해 화를 당하게 되니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준 귀한 근본을 이생에서 망쳐
다시는 인간의 몸을 받지 못하고 생명 완성에 이르는 길과 단절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을 부리지 않고 공정하고 성실하게 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 아니다.
사실을 바로보고 올바른 판단으로 현실에 정확히 대처하며
공정하고 성실하게 일하면 마음은 밝아지고 주위사람들 모두가 좋아한다.
양보가 능사가 아니니 맑고 열린 마음으로 사실관계를 정확히 밝히고
받을 것은 받고 줄 것은 준다면 손해볼 일이 없으며 당당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밝고 정확해진 영혼은 다음 생에도 좋은 영혼을 만들어
영원히 좋은 길과 좋은 운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좋고 나쁨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가르침이 없어서
항상 현실에서 혼동을 일으키며 악업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무지가 모든 어둠과 불행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거짓없이 살면 마음에 걸림이 없고 항상 평안하며 밝고 당당하다.
마음이 밝고 진실해지면 마음에 힘이 생겨 세상을 자기 뜻대로 움직일 수 있으며 
의지의 힘이 강해 세상의 지도자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내면 속에서 자기를 조정하는 삿된 욕망과 집착의 업의 충동에서 벗어나
이치대로 공명정대하게 세상을 축복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업이 강한 자는 마음이 밝지 못하고 항상 심각하며 불안하고 환상적이다.
생각이 많기 때문에 현실적이지 못하고 게으르며
욕심이 많아 충동적이며 판단이 정확하지 못하다.
그래서 이치에 어긋나는 일을 해 남에게 미움을 받고
심지어는 사회에 범죄를 저질러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된다.

그 결과 남과 원한을 맺게 되며 불행한 운명을 얻고 
죽어서도 한맺힌 영혼이 되어 지옥의 과를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좋은 영혼의 결실을 얻고자 한다면 좋은 업을 쌓고 나쁜 업을 멀리해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실상과 진리의 길을 배우고 깨우쳐야 한다.
그리고 계율을 지켜야 하며 열심히 실천해야 한다.

바른 이치와 실상을 배우고 깨우치면 
세상이 보이고 선업과 악업을 알게 되어 계율을 지킬 수 있게 된다.
계율을 지키게 되면 악업을 멀리할 수 있게 되고
악업을 멀리하면 악업은 저절로 힘을 잃고 스러지게 된다.

세상 모든 것은 활동을 통해 자신을 유지하는 힘을 얻게 되는데
악업과 인연을 끊고 오랫동안 악업을 일으키지 않으면
악업의 윤회고리가 끊어져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모든 것은 순환하지 않고 정체되어 있으면 생명력을 잃고 죽게되는 것이다.

다음은 실천해야 한다.
세상은 있는 일로 이루어지니 원인을 짓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세상을 바로 알고 진리를 배웠으면 실천해야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은 완전한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기에 인간이 가야할 길이 분명하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법에 빠져 환상과 욕망과 편견에 의해 굳이 생명과 축복의 길을 무시하고
자신의 업이 시키는 대로 자신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드는 길로 가고 있다.

진리의 길을 가는 자들은 이와 같이 잘못된 길을 가는 중생들을 보고 안타까움을 느끼게 되고 
중생들을 축복해주기 위해 올바른 길을 가르치고 실천하게 되는데 이것을 공덕행이라 한다.

그러나 중생들에게 좋은 삶을 살도록 바른 이치를 가르치며 축복해주면
그들은 자신의 삶이 좋아지는 길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잘못된 관념에 빠져, 혹은 자신의 삿된 이기심에 의해 이를 멀리하고 
오히려 바른 삶을 권하는 이를 모욕하고 해를 끼치려 한다.

이러한 안타까움 속에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진실해지고 진리화되며 
자신의 모든 사사로움과 습을 던져버리게 되고 양심과 진실의 불이 피어나 
자신의 업을 모두 불살라 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안타까움을 보고 의식의 불이 일어나는 체험은 아무에게나 오는 것이 아니다.
전생의 공덕이 무르익어 의식에 진실한 힘이 있고 좋은 마음이 있어야 온다.
여기에 마음의 힘이 매우 중요하다.
의식에 강한 힘이 있어야만 자신의 의지대로 세상 일을 할 수 있으며
그 힘으로 모든 충동과 사사로움을 이겨내고 업을 태워버릴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힘은 공덕으로 생겨난다.
바른 이치와 세상에 대한 공덕으로 마음이 진실해지면
의식의 힘이 강해져 사실을 바로보고 실천하는 힘이 생기는 것이다.
이것을 공덕의 힘이라 한다.
깨달은 자가 중생을 축복할 때 사용하는 정신의 힘이 바로 공덕의 힘이며 진실의 힘이다.
따라서 공덕행이 커 진실의 힘이 강해져야만
자신의 업을 태우는 마음의 불이 일어날 수 있고 업을 극복하고 지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정법과 말법의 구별이 있다.
정법은 인간이 가야할 분명한 길을 걸어 공덕을 쌓아야만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지만
말법은 인간의 길이란 본래 없는 것이니 요령있게 수행만 잘하면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러한 말법이 세상을 지배하면서 인간세상에는 진리의 빛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바른 이치와 사랑으로 축복하는 공덕행이 깨달음의 바탕이며
공덕이 무르익어야 마음에 힘이 생기고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이 다가온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따라서 전생에 진리의 인연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위해 쌓은 공덕이 없는 자는 
아무리 안타까운 세상 일을 보아도 결코 마음에 불이 나지 않으니 
업을 극복하고 태워버릴 길이 결코 없는 것이다.

더구나 욕망과 집착이 많은 말세에서 세상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고귀한 영혼을 만나기가 매우 어렵다.
말세에 번져있는 수많은 욕망과 잘못된 관념들 때문에
인간의 마음에는 너무나 많은 오욕의 때가 묻어 있기에
이 모든 것을 씻어버리고 한점 걸림없는 해탈을 얻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잘못된 세상을 보며 업을 태우라 했지만
좋은 성품과 진실한 마음이 없는 자가 세상의 잘못과 욕망을 보면
오히려 원망과 한이 커져 업이 깊어지게 된다. 

세상의 잘못을 보고 원망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커지면 
가슴이 미어질 듯이 아프고 속병이 생기며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 오탁악세의 어둠 속에 살아가는 중생들의 운명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의 잘못을 보고 안타까움에 자신의 사사로움을 바치고 
그들을 축복하기 위해 애를 태우게 되면 진리화되면
마음이 아련한 전율과 평안이 오며 정신이 더욱 맑아지게 된다.

똑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와 사슴의 경우와 같이 만들어내는 것이 다르듯이
똑같은 체험을 해도 각자의 근본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허황된 욕망을 바람직한 소망으로 바꾸어 밝고 떳떳하게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깨달음을 욕심낼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바르게 살려고해야 할 것이며
대통령이나 재벌이 될려고 할 것이 아니라 가치있고 보람있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면 현실의 삶을 모두 자신을 완성시키는 수행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나를 얽매고 충동질하는 모든 업을 지워버리고 
완전히 맑고 걸림없는 마음의 평안을 얻고자 한다면
진리와 인연을 맺고 공덕행을 통해 자신의 모든 업을 불살라버려야 한다.

깨우침과 계율을 통해 나쁜 원인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는 있지만
과거생으로부터 물려받은 내면의 욕망과 습은 지우기가 매우 어렵다.
숙생의 업을 지워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공덕행을 통해 
자신의 마음 속 깊숙이 스며있는 습과 어둠을 모두 불살라버려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전생의 공덕과 타고난 의식의 힘이 커도 생각만으로는 모든 업을 지울 수가 없다.
영혼의 근기와 의식의 힘은 과거생의 공덕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그것으로 불충분해 또 다시 이생의 몸을 받아 완성으로 나아가게 되어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생에서의 노력으로 마지막 남은 업을 태워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 대한 사랑과 끝없는 간절함과 진실함으로 
잘못된 현실을 보고 태우고 또 태워 자신의 모든 것을 새하얗게 태워버려야 한다.
마음 속에 깃들어 있던 모든 욕망과 집착을 한점 흔적도 없이 모두 불살라
오직 맑음만이 남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해탈이라 한다.

그런데 자신을 잡고 있는 업 중 가장 근본적인 것이 자기에 대한 갈애이다.
갈애를 벗어나야 모든 붙잡음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해탈을 얻게되는 것이다.

자기에 대한 갈애는 자신의 생명을 이어온 근본원인으로
육체의 모든 욕망과 자기애, 자기 보존을 위한 생의 의지가 모두 여기에 속하는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몸을 갖고 있는 한 자기에 대한 근본 갈애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갈애가 깨달음의 마지막 장애가 되는 것이며
해탈의 최후 관문에서 부딪히는 것이 바로 나인 것이다.

부처님도 말씀하셨지만 세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더욱 위대한 것이 바로 나를 정복하는 것이다.
결국 해탈은 마지막으로 자기 극복이라는 관문을 통과해 의식의 완성을 이루는 것이다.

생명을 구성하는 오욕의 업은 자기를 있게 한 원인이었지만
생명의 최고 결정체인 의식의 완성을 이루는 단계에서는
생명의 수단이었던 몸의 구속에서마저 벗어나 완전한 자유와 평안을 이루어야 한다.

뗏목을 타고 강을 건넜으면 더 이상 뗏목을 붙잡지 말고
자유를 찾아 새로운 길로 훨훨 날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습과 집착에서 벗어난 맑고 자유로운 해탈인 것이다.

그러나 갈애를 극복하기가 쉽지 않다.
자기에 대한 갈애는 생명의 근본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최후의 관문을 넘을 것인가?
바로 여기에 세상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밝은 마음과 공덕행이 필요한 것이다.

마음 속에 짓눌러 붙어있는 마지막 습과 갈애를 모두 지우기 위해서는 
세상을 위해 자기를 완전히 바칠 수 있어야 한다.
자기를 완전히 바치지 못하는 자는 마지막 잡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한점의 걸림없는 맑고 평안하고 자유로운 마음을 절대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여기에 이곳에서 항상 강조하는 세상을 담는 큰 사랑과 어떠한 불의와 거짓에도 흔들리지 않는 용기와 양심의 중요성이 있는 것이다.

갈애는 자기이기 때문에 자기를 극복하지 못하는 자는 
결코 갈애의 붙잡음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이 자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진실과 진리의 소중함이며 세상과 인류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그리하여 오직 세상을 모두 담는 큰 사랑과 진실만이 빛나 자기를 극복할 힘을 얻게 될 때
크고 참된 사랑의 빛에 의해 사사로운 집착과 하잘 것 없는 욕망이 모두 힘을 잃고
오직 맑은 의식만이 빛나게 되는 것이다.

자기를 극복해야 한다.
완성에 이르기 위해 반드시 자기를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이 큰 세상에 비해 자기가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사로우며
수많은 인류의 행복에 비해 자기에게 집착하는 욕망과 갈애가 너무나 작고 부질없기 때문이며
모든 것을 극복한 인간완성의 경지가 너무나 소중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를 바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이 잡고 있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애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개인의 노력과 의지만으로도 안되며 
모든 공덕이 무르익어야만 하며 하늘의 뜻이 닿아야만 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쌓아야 할 공덕행이 무르익어야 완성의 단계에 이른 자만이 
비로소 자기의 갈애를 모두 지울 수 있는 것이며 
마지막 남은 업의 끈을 잘라 버리고 해탈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해탈은 인간이 가야할 목표이며 모든 번뇌에서 벗어나 영원한 평안과 자유를 주며 
밝은 깨달음으로 모든 인류를 축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놓아버려야 한다.
자기를 잡고 있는 마지막 갈애의 끈을 놓아버리고 오직 맑은 의식만이 남아야 한다.
밝은 세상이 있고 완전한 진리가 있는데 더 이상 잡아야 할 사사로운 자기 것이 없는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잘못된 말세의 문명에 의해 무조건 잡고 쌓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영원하지 않으며 물질적인 것은 모두 놓고 떠나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잡고 쌓을수록 마음은 무거워지고 이치에 어긋나게 되는 것이니
들에 핀 백합처럼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삶인 것이다.

사사로움과 욕심을 버리고 모든 것을 이치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면 나와 세상이 모두 행복해지고 밝아지고 평안해진다.

이것이 깨달음의 길이며 수행의 본분이니
인연있는 이들은 이를 깨닫고 성실하게 인간의 길을 가야 할 것이다.

여기에서 자기를 버리는 것과 자기를 바치는 것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자기를 버리는 것은 자기를 망각하는 것이며 포기하는 것이지만
자기를 바치는 것은 세상을 위해 작고 사사롭고 그릇된 모든 것을 버린다는 뜻이며 
오직 맑은 진리와 진실만을 지킨다는 뜻이다.

자기를 버리는 자는 혼돈 속에서 살지만
세상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자는 맑고 걸림없는 깨어있는 의식 속에서 진리와 함께 머문다.
그래서 몸은 항상 없는 듯이 평안하며
자연의 이치대로 움직여 배가 고프면 먹고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고 때가 되면 떠나는 것이다.
이것이 깨달은 자의 의식이며 삶인 것이다.

그러나 세상을 위해 자기를 바치는 것도 
무조건 헛되이 엉뚱한 곳에 자신을 바친다면 그것은 공덕이 못된다.
자기는 세상을 위해 바친다고 하는데
세상을 보지 못해 오히려 세상을 어지럽히는 파당을 짓는 일에 자신을 바치게 되면
자신의 업을 불사르기는커녕 어리석은 업을 더하게 된다.

그리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쳤다고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생에서 나를 바치고 그 공덕이 모자라면 후생에서 다시 바쳐야 한다.
그리하여 공덕이 쌓이고 하늘의 뜻이 닿아야 비로소 깨달음의 인연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겠다는 큰 사랑과
한점 흐림없는 맑은 마음과 전생의 공덕이 무르익은 이가 
하늘의 인연을 받아 빚어내는 우주의 결정체인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덕을 지니고 마지막 완성을 위해 이땅에 태어나는 자는 매우 드물다.
깨달음이란 수천년에 한번씩 우주의 정화가 맺혀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세상을 모두 밝히고 담을 만한 큰 사랑과 공덕이 있고
어떠한 시련에도 꺽지 않을 양심과 용기가 있는 사람만이 완성의 열매를 얻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음을 무조건 욕심내어서는 안된다.
만약 깨달음에 이르는 원인을 짓지 못하고 인연이 닿지 않은 자가 
욕심이 앞서 깨달음을 얻고자 하면
심신이 조화를 잃어 병을 얻어 죽거나 마의 유혹에 넘어가 자신과 세상을 모두 망치게 된다.

그러므로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고 싶지 않은 자는 굳이 깨달음을 얻으려고 해서는 안된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형극의 길이며
깨달음에 이르러서도  결국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깨달음은 전생의 공덕과 인연이 무르익어 
기쁘게 자신을 세상을 위해 쓸 사람만이 구해야 할 것이며
일반인들은 인간에게 그러한 완성의 길이 존재함을 알고
열심히 인간의 길에 충실하는 것이 올바른 본분인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업을 지워 나가는  방법에 대한 여러 말씀을 들었습니다..
>
>그 중에 "세상을 축복하라" 는 얘기가 너무 추상적으로 느껴져요.
>
>제가 쉽게 알아 듣고 실천할 수 있게,, 구체적으로 설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또, "애를 태운다" 는 얘기가 종종 나오던데,, 애를 태우면 업을 지울 수 있다는 뜻 같은데요..
>
>이것 또한 좀 쉽게 설명해 주세요..
>
>특히 너무 밉거나 상처를 준 사람들을 축복하거나 하는 문제는,, 참 힘든 일인데요..
>
>그들을 축복한다는 것은 그들의 잘못을 용서하란 뜻이 담긴건가요? 
>
>제가 사실,, 원래 상처를 잘 받는 근성이 있어서 그런지,,
>아님,, 진짜 상처 받을 일이 인생중에 많이 생겨서 그런진 몰라도,,
>
>상처를 잘 받고,,그것을 잘 풀지 못하고 두고두고 힘들어하고 그래서요.. 다른일들이 손에 잘 안잡힐 정도로..
>
>이것도 결국은 저의 업 때문인것 같고,, 업을 지워야 할 것 같은데,,
>그들을 축복해야 업을 지울 수 있다는 건데.. 
>다람쥐 챗바퀴 도는 듯한 문제 같아서요..
>
>업이 있다->업을 지워야 한다->지우는 방법이 업 때문에 잘 안되고 힘들다->
>
>
>업을 지우고 상처에 대해 자우로워 지고 싶습니다.
>쉽고 구체적으로 답변 부탁드려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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