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생각의 실체가 무엇인지요? 본문

☆ 진실의 근원

생각의 실체가 무엇인지요?

gincil 2013. 4. 23. 22:55

부처님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보고
세상의 실상과 사실적인 영원한 원리인 인과법을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그 가르침의 생명력이 희미해졌지만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그 속에는 모든 것이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로 이어져 있어서
인간세상의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심지어 해탈마저도 
인과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초기의 부처님 가르침을 있는 일 사이의 관계를 밝힌다 하여 유법이라 했으며
그 가르침을 전하는 최초의 소승집단을 설일체유부라 불렀습니다.

사실을 바로 보고 그에 맞는 올바른 원인을 지어 그 결실이 무르익으면
누구나 예외없이 바라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그대가 찾는 해탈도 인과없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불교계 일각에서는 해탈을 인과와 무관한 것으로 보아
세상이 공한 것을 깨닫기만 하면 홀연 인과에서 벗어나 반야를 얻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공이 아니며 
인과에 벗어난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이러한 이치에 닿지 않는 주장을 말법이라 합니다.

힌두교의 영향으로 나타난 이러한 공사상이 불교를 지배함으로 인해
불교의 근본 가르침인 세상의 이치를 밝히는 과학적인 인과법이 희미해지고
말법의 영향으로 인해 동양에는 인과의 이치에 의한 합리적 사고가 사라져 
무지와 환상과 미신의 늪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금 불교 속에 부처님의 정법이 살아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지만
지금 불교는 수천년 내려오면서 관념화되고 형식화되어 
인간의 삶을 구체적으로 축복하는 살아있는 생명력이 숨쉬지 않습니다.
불교 따로, 생활 따로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수십억의 인구가 불교를 믿고 있지만
대부분 지역이 무기력과 체념과 어둠과 불행이 넘치고 있는 것입니다.

완전한 열매도 언젠가는 부패하듯이
부처님의 가르침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정법 상법 말법으로 변질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불타 입멸 후 이미 2천5백 년이 되어가니 그만한 시간이라면 모든 것이 변질될 수 있는 시간인 것입니다.

특히 불교가 처음 나와 불경의 형태를 갖추기 전까지 500년이라는 시간을 구전으로 전해 내려왔다는 사실은 
오늘날 경전 속에 부처님의 말씀이 원음 그대로 전해지지 않을 가능성을 충분히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의 실체가 무엇이며 왜 쉴새없이 떠들어대는가를 물었습니다.

생각이란 인간의 의식이 환경과 부딪혀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의식 속에는 수많은 생을 돌면서 인식하고 깨우치고 욕심내고 집착한 것들이 쌓여 있습니다.

그리하여 실상과 이치에 대한 깨우침이 많은 영혼은 의식이 맑고 
허황한 욕망과 삿된 집착이 많은 영혼은 의식이 흐려 청탁이 형성됩니다.
그리하여 각자의 영혼은 살아온 삶의 결과에 따라 그 의식의 순도가 다 다릅니다.

이 의식의 맑기가 곧 그 사람의 영혼의 수준이며 인간의 가치가 되는 것입니다.
의식이 맑은 자는 지혜롭고 자비롭고 강한 힘을 가지고 세상에 큰일을 하며
업이 커 의식이 흐린 자는 무지하고 의지가 약하고 욕망이 강해 자신과 세상을 망치게 됩니다.

그리하여 전생의 좋은 인연과 공덕으로 좋은 의식을 가지고 태어난 자는
세상을 바로 보고 많은 공덕을 쌓아
최종적으로 모든 욕망과 집착의 업을 지워버리고 완전히 맑은 의식을 이루게 되는데
이러한 경지를 반야에 도달했다, 해탈을 이루었다, 깨달음을 성취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의식의 맑음 정도를 수치로 표현한다면
깨달은 자의 의식의 순도 즉 진기가 약 99% 정도라면
일반인의 진기는 약 60~70% 정도가 됩니다.

그런고로 깨달은 자의 의식은 아무런 흐림이 없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비치고
비친 그대로 판단하고 걸림없이 행동하게 되지만
대부분 인간들의 의식은 업의 혼탁함에 의해 가리기 때문에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한 채 이치에 따라 행동하지 못하게 되고
업의 충동에 휘말려 자신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업이 의식을 흐리게 가리고 있는 한
결코 의식의 자유와 평안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눈을 뜨면 이 업이 의식을 가려 세상을 바로 보지 못하게 하고
눈을 감으면 업이 자기 멋대로 일어나 온갖 망상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대 속에서 쉴새없이 일어나 떠들어대는 정체입니다.

더구나 잘못된 인연으로 사기가 몸에 들어오면 
의식에 영향을 주어 평안함을 빼앗아가는데
현대인의 정신을 병들이는 많은 원인이 바로 이러한 사기의 감염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일은 이러한 사기가 영적인 기운이 많이 돌아다니는
종교계나 수행계에서 일어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목표로 삼는 것이
바로 의식 속에 무형으로 들어박혀 마음의 평안을 해치고 있는 숙생의 업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마음의 때가 완전히 사라져야만 모든 것이 사라진 반야에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업을 제거할 수 있는가?
이 업은 지나온 삶의 흔적으로 자신의 의식 속에 보이지 않게 존재합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으면서도 세상 일에 부딪히면 항상 자기를 드러내 반복합니다.
그렇다고 보이지 않는 의식 속의 일이니 
유형적인 기를 돌려 제거할 수도 없습니다.
오직 삶의 실천과 자각을 통해 그러한 업의 힘을 새로운 깨우침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수행계에서는 가만히 앉아 기를 돌리거나 명상을 하면서
세상이 공한 것을 깨치기만 하면 홀연 모든 업이 사라진 반야에 이른다고 합니다.

아닙니다. 그런 우연은 없습니다.
깨달음에도 한치도 어김없는 인과법이 작용합니다.
이 세상은 법계이며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법이 작용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깨달음의 경지가
인과없이 한순간에 이루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입니다.

깨달음과 해탈이 인과없이 우연히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 세상 모든 삶이 존재할 가치없는 우연이며 무의미인 것입니다.

그러면 아무 일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명상의 결과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를 닦는다는 이유로 모든 인연을 끊고 산속에 들어가 욕망을 멀리하고 홀로 앉으면
마음의 흙탕물이 가라앉아 그 위로 맑은 물이 고여 세상이 비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라앉은 흙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다시 세상에 나가 인연에 부딪히면 가라앉았던 업과 욕망과 애착이 다시 일어나
마음은 다시 흙탕물이 되어 깜깜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생각만으로 짓는 명상 속에 숨어있는 비밀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사라진 반야에 들어야 하는데
반야에 들기 위해서는 자신 속의 업과 집착 등 모든 흐림이 사라져야 합니다.

따라서 명상으로 자신의 마음 속에 스며있는 흙탕물을 가라앉혀서는 절대 안되며
모두 태워 사라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것이 사라진 반야와 합일할 수 있으며
아무리 세상 일에 부딪혀도 흔들림이 없는 맑은 마음을 여일하게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업이 많아 세상 일을 보지 못하는 중생이 
아무 일 안하고 가만히 앉아 마음만 쓰게 되면
기운이 침체되고 심신이 부조화를 일으켜 병을 얻게 되고
흐린 눈은 더욱 어두워져 세상일을 아무 것도 보지 못하게 되고 사람구실을 못하게 됩니다.

또 선근이 없는 이가 아무 공덕도 짓지 아니하고 
생각만으로 해탈을 얻겠다고 욕심을 부리게 되면
그 욕심에 마의 유혹에 넘어가게 되고 결국 귀신이 든 자가 되고 맙니다.

즉 전생에 공덕이 없어 그 의식이 허약한 자는 
그 의식에 힘이 없어 업의 충동을 극복하지 못하니 
아무리 고요히 앉아 선정에 든다 해도 숙생에 지은 업을 지울 길이 없어 
끝없는 번민과 고뇌에 헤매다 인생을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이들이 마음의 평안을 얻는 경우는 하나 있습니다.
늙고 병들어 모든 것이 귀찮아지고 오직 몸하나 편하기 만을 바라는 경우입니다.
이때는 다른 고민은 아무 것도 없고 병만 나으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습니다.
그래서 좋은 인연을 만나 병이 나으면 마냥 행복합니다.
이것은 허약한 상태의 평안입니다.
오늘날 산속에 은거한 수많은 수행자들이 얻었다고 하는 평안이
바로 이와 같은 포기와 체념으로 인한 일시적 평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허약한 영혼의 쪼그라든 평안이니 세상을 보거나 공덕을 짓지 못합니다.
이러한 평안은 업이 사라진 것이 아니니 오래가지 못하며 
몸이 건강해지면 다시 업이 되살아나 번뇌와 망상과 고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일들이 진리와 인연이 없고 공덕이 적은 이들이
혼자서 공함을 잡고 깨달음을 얻겠다고 욕심을 내는 경우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의식 속에 들어있는 업을 지우고 맑은 의식을 이룰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의식의 구조와 깨달음의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의식은 마치 흙탕물과 같아서
좋은 원인을 쌓아 그 의식에 깨달음의 맑은 물을 부으면 그 의식이 점점 밝아지고
나쁜 원인으로 업이라는 흙을 집어넣으면 흙탕물이 진해져 그 의식이 점점 어두워집니다.
그래서 좋은 의식을 얻어 인간완성에 이르기 위해서는
진리의 인연을 만나 좋은 원인을 짓는 공덕을 계속 지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세상을 바로 보고 이치를 깨우쳐 끝없는 공덕행으로 
업으로 흐린 의식에 맑은 물을 계속 채우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 흙탕물의 농도가 옅어져 그 곳에 세상이 바로 비치게 되는데
이때부터는 업의 흐림에 걸리지 않고 맑은 의식으로 세상을 보며
강한 의지와 평안함으로 세상을 이끌어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업에 의해 흐려져 있는 의식이 
진리의 인연과 공덕으로 일정한 정도의 맑은 수준에 도달해야
비로소 자신 속에 있는 업의 힘을 이겨내고 
자신을 완성으로 이끌어갈 힘과 의지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다음 생에 태어날 때에는 스스로 세상을 바르게 판단하여 업을 멀리하게 되고
공덕행을 실천하여 깨달음으로 향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존 불교이론에서는 이러한 경지를 더 이상 퇴보하지 않는 불퇴전의 선과를 얻었다고 표현합니다.

따라서 좋은 근본을 얻어야 합니다.
좋은 근본이 있어야 세상을 바로 보고 업의 충동을 이겨낼 수 있어
세상을 위한 공덕행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현실 속에서 바른 삶을 실천해 자기부터 바로 세워야 합니다.
세상을 구하겠다고 하는 자가 자신의 삶의 문제도 해결하지 못한다면
처음부터 잘못된 것입니다.

거짓없고 부지런한 올바른 삶이 있어 생활에 걱정이 사라지고 의식에 평안이 다가오면 
이제 세상과 하나가 되어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는 진실한 근본이 생긴 것입니다.
이때부터 그 밝은 마음으로 참된 진리와 가치를 찾고 공덕을 실천할 수 있게 됩니다.

즉 이때를 기준으로 여기까지가 신자의 삶이라 하면
이후부터는 진리를 밝히고 공덕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바로 보고 자신과 세상을 축복하는 올바른 길을 밝혀 좋은 원인을 지으면 
좋은 과보와 좋은 근본을 얻게 되고 
그 좋은 근본이 업의 충동을 이기게 하여 점차 더 큰 공덕을 행할 수 있게 되고
마침내 모든 사사로움과 욕망을 극복하여 완전한 맑음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근본을 얻고 깨달음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합니다.
지난 수천년 동안 수많은 구도자들이 산야를 헤매며 수행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한을 품은 채 광야에서 쓰러져 죽은 것은 
진리의 인연을 만나지 못해 빛이 없는 깜깜한 어둠 속에서 혼자 허우적거리다 말법에 빠져 인생을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인연이 중요한 것입니다.
부처님 재세시 육친제자들이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수기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그분 자체가 완전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진실하고 깨달음 자체인 그 분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 하기만 하면
똑같이 진리화되어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이후 진리의 빛이 사라져 진리의 인연이 끊기자 다시는 깨달은 자가 나지 못했던 것이니
깨달음의 길을 가려는 자는 반드시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하는 것입니다.

진리의 인연을 만나 실상을 보는 눈과 깨달음의 길을 얻지 못하면
결코 말법의 환상에서 벗어나 업을 지울 길이 없으며
진실한 마음과 양심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진실해야 합니다.
진실해야 하는 이유는 
마음에 모든 가식과 거짓과 어둠이 사라져 실상과 어긋남이 없어야만 모든 업이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모두 현실을 구성하는 사실들 즉 진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 일들은 모두 환상이며 거짓입니다.
그러므로 사실 속에 존재하지 않는 환상과 거짓을 가까이 하면
그 마음이 점차 어두워져 있는 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업이 쌓이게 됩니다.

깨달음에 있어서 업이란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모든 업이 사라진 완전히 정화된 맑은 마음을 얻어야 반야에 들 수 있으며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존 업도 지워야 하는 상황인데 
거짓으로 새로운 업을 지어 마음을 흐린다면 더 이상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짓없이 살아가는 것은 깨달음의 기본조건입니다.
즉 진실과 업은 정반대의 개념이니 진실이 커지면 업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입니다.

완전한 법계와 이치로 이루어진 우주 속에서 
실상과 이치에 따르지 않고 인간의 생각대로 지어내는 일들은 곧 모순과 부조화에 부딪힙니다. 
따라서 실상과 자연의 흐름에 따라 조금의 거짓없이 산다면 
진실과 하나가 되는 것이며 업이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이 팔만대장경을 설하셨으면서도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고 한 이유는 
그 많은 말씀 중에 생각으로 지어낸 말이 한마디도 없으며 
자연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그대로 표현했다는 뜻인 것입니다.

성자들이 보신 것은 바로 이와 같이 사실 속에 나타나고 있는 진실이며 진실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의 이치인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사람들은 있는 일을 말하지 않고 자기 생각과 환상을 함부로 말함으로써 
세상을 더욱 어둠과 거짓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자기가 분명히 아는 것만 아는 대로 솔직히 이야기한다면
그 말을 듣고 잘못될 사람이 없고 문제가 생길 일도 없습니다.
잘한 일은 잘한 대로 잘못된 일은 잘못한 대로 사실을 사실대로 정확히 알면
속을 사람도 속일 사람도 없고 모든 것이 이치대로 이루어지는 밝고 공정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특히 그동안 종교계통에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은
그동안 자기가 들었던 관념적인 지식과 논리체계에 사로잡혀 
그것을 마치 자기가 실상을 아는 듯이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실상의 지식과 사실적인 이치가 아닌 관념적인 지식과 논리를 많이 아는 것은 
아무 것도 모르고 현실을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보다 못한 것이니
이런 모든 지식을 버려야만 비로소 참된 진리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다음은 공덕행을 해야 합니다.
공덕행이란 세상을 축복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는 실상을 바로 알아야 하고
세상을 볼 줄 알아 생생한 현실 속의 세상문제를 풀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참된 진실이고 진리이며 생생하게 살아 숨쉬는 깨달음의 모습입니다.

이 세상은 진실과 다른 많은 거짓과 환상과 미신과 욕망에 휩싸여있고
공정한 이치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해하고 한을 갖고 삽니다.
이러한 잘못된 현실을 바르게 만들어 밝은 세상을 이루고
사람들이 바른 길로 가도록 애를 태우며 실천하는 것이 
바로 살아있는 진리이며 수행이며 공덕행인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삶을 축복하는 
참된 진실과 진리를 전하는 공덕이 가장 큰 것입니다.

부처님이 남을 도와주는 봉사활동이나 나라를 밝히는 정치를 하지 않았지만
가장 큰 공덕행을 했다고 하는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세상 일을 밝히고 축복받는 진실한 가르침을 제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두운 세상에서 진실을 밝히고 진리를 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세상의 거짓과 환상, 위선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환상과 위선으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과 생존을 건 싸움을 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덕행을 해야 하는 이유는
세상에는 완전한 뜻과 조화가 있어 세상을 위해 자신을 불사를 때 
완성에 이르는 오묘하고 깊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오묘하고 완전한 은혜를 베풀어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맑은 마음과 세상을 자비하고 사랑하는 마음을 주셨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통해 그 마음을 꽃피우면 완성에 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맑고 좋은 마음을 키워 열심히 세상을 축복하면
이를 실천하는 과정에서 맑고 선한 마음이 일어나 불이 나면서
애욕과 이기심에 집착하는 삿되고 어리석고 습을 태우고
완전한 의식을 이루도록 한 것입니다.

숙생의 삶을 통해 가슴 속 깊이 엉켜있는 업의 덩어리는
절대 생각이나 명상기법만으로는 지워지지 않으며
진리와 실상에 대한 깨달음과 실천행을 통해 양심과 사랑의 불로 태워야만 제거됩니다.

즉 끈적끈적하게 깊이 얽혀있는 숙업은 
단순히 가라앉혀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불로 태워 완전히 재와 연기로 날려 버려야
다시는 마음자리가 흐려지지 않는 완전한 맑음을 얻어
우주의 근원인 반야의 세계와 합일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어두운 세상과 불행한 중생들을 위하여 자신을 다바쳐 노력하지만
나쁜 습과 무지에 빠진 중생들은 오히려 법을 모독하고 선한 자를 해꾸지하려 합니다.

그러면 그 안타까운 마음에 불이 일어 자신의 습과 애가 타서 사라지고
자신의 아상과 욕심이 너무나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아
마음은 청정해지고 완전한 사랑과 진리체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업을 태우는 것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사람들은 속을 태울 경우 그것이 집착이 되어 
오히려 업을 짓게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우는 것과 욕망과 애착에 속을 끓이는 것은 다릅니다.
속을 태울 때는 업이 사라지지만 욕망과 애착에 속을 끓일 때는 업이 쌓입니다.

물론 세상을 위해 속을 태우는 것과 애증과 욕망에 속을 끓이는 것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이 속이 끓는 것인지 속이 타는 것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속을 끓일 때는 상대가 밉고 증오심이 일어나며 가슴이 아파오지만
실상과 바른 이치를 깨달아 진정으로 상대를 잘 되게 하려고 애를 쓰면
미움이나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고 마음이 아련해지며 열이 납니다.

이처럼 미움과 증오심이 없이 속에 열이 나며 몸이 아련해지고 마음이 편해지는 것이
바로 업이 타 사라지는 현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세상을 밝게하고 불행한 중생을 축복하겠다는 선근이 없이는
이러한 어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극복하여 완전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세상을 덮는 큰 사랑과 진실, 
하늘이 무너져도 흔들리지 않을 양심과 용기가 있는 자만이 
하늘의 뜻을 받아 완전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랑과 용기와 양심이 없다면 
그러한 근기를 얻을 때까지 더 많은 생을 돌면서 공덕을 더 쌓아야 합니다.
그 공덕이 완성되는 생을 만났을 때 비로소 인간완성의 열매인 해탈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깨달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스승께서도 5만년의 전생이 있었다고 밝힌 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근본이 어두운 무지한 자가 아무런 원인을 짓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공함을 깨달아 마음의 해탈을 얻으려하는 것은
아무 땀을 흘리지 않고 풍년을 거두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며 환상인 말법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이 거짓과 환상으로 가득찬 자나
세상에 좋은 원인을 아무 것도 짓지 않은 공덕없는 자나
세상을 사랑할 선근이 없는 자들은 
그 의식이 허약하며 자신의 업을 극복할 힘이 없으며 업을 태워버릴 불을 피울 수가 없으니 
깨달음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입니다.

이것이 공덕행에 의한 진정한 수행입니다.

따라서 그대 속에서 틈만 나면 일어나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그놈을 지우자면
인과법에 따라 살아 움직이는 삶속에서 좋은 원인을 지어야 합니다.
공덕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인이 없이 변화가 오지 않듯이 좋은 원인을 짓지 않고 좋은 자기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행하는 자들 중에는 인간 완성의 경지인 해탈을
삶의 지향점이나 세상에 대한 사랑에서가 아니라 
마치 출세나 명예처럼 욕망으로 얻으려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이란 세상에 이름을 날리거나 부귀영화를 누리는 일이 아니라
외롭고 저주받으며 세상을 위해 짐을 지는 희생적이고 거룩한 일이니 
세상을 담는 큰 사랑이 없이는 절대 이르지 못할 경지입니다.

따라서 깨달음의 길을 가는 이들은 하늘이 깨달음의 인연을 주지 않는 것을 원망할 것이 아니라
작은 욕망과 집착에 얽매여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지 못함을 안타까워해야 할 것이며
자신에게 그러한 선근과 노력이 부족함을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좀 다스려 보고자 여기저기 기웃거리고 있네요..
>
>여기 보니 영혼의 구조에 대해서 간단명료하게 정의 하시던데
>
>생각의 실체는 무엇인지요?
>
>이런저런 테크닉으로 생각을 멈추면 텅비고 고요함을 느끼지만..
>
>도대체 틈만나면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이놈의 실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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