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부처님의 원 가르침과 이를 파괴한 공사상 본문

☆ 진실의 근원

부처님의 원 가르침과 이를 파괴한 공사상

gincil 2013. 4. 24. 12:26

부처님은 이 우주 속에 끝없이 돌고 도는 수많은 생명의 윤회 종자들 속에 가장 밝은 진리의 인연을 만나 세상을 모두 덮는 큰 공덕을 쌓음으로써 마침내 모든 무명과 습을 지우고 모든 오욕과 번뇌와 갈애에서 벗어난 완전한 정신의 열매인 반야심을 얻어 우주 일대사인 영원한 해탈을 이 생에서 이루셨다.

그리하여 맑은 마음과 완전한 혜안으로 세상을 보니 사실과 다르게 중생들이 근거가 없는 무지한 관념(도덕부정론, 숙명론, 유물론, 불멸론, 회의론 등)에 사로잡혀 자신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거짓된 신을 섬기고 이치에 어긋난 삶으로 잘못된 업을 지어 스스로 고통 속에 돌고 있음을 보셨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까지 제자들과 세상에 밝힌 것이 세상의 참된 모습과 세상을 이루고 있는 불변의 이치와 중생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길과 인간완성을 위한 해탈법이였다.

부처님께서는 완전한 법계 속에 완전한 인과법에 따라 돌고 있는 생명들의 윤회를 보시고 바른 길을 따라 선업을 쌓으면 천상에 나 최종적으로 해탈에 이르고, 무명으로 잘못을 지어 나쁜 업을 지으면 지옥에 가는 생명의 순환인 윤회의 길을 밝히고 (초기 숫타니파타나 이따붓따까를 보면 거의 모두 이러한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음) 제자들과 찾아오는 중생들에게 진리를 배워 선업을 짓고 선근을 닦아 윤회에 끄달리지 않는 완전한 열반에 이르는 길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러한 가르침에 따라 인과법을 깨치고 열심히 노력하여 선근과 공덕을 쌓은 제자들에게는 다음 생에 부처에 이를 것이라는 수기를 주셨고 스스로도 수많은 공덕과 진리의 인연으로 과거 생에 천상에 났다가 다시 이 생에 와 비로소 완전한 해탈에 이르렀음을 밝혔다.
이것이 이 우주의 실상을 보고 인과법을 밝힌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이다.

인류사에 유일무이하게 삼계의 완전한 실상과 진리를 보신 분이기에 그분의 가르침은 사실과 이치를 중시하는 현대과학과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며 그 정신은 인류문명을 발전시키는 과학정신이나 진리정신과 일치하는 것이다. 부처님이 깨우친 것이 우주에서 가장 완전한 진실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음이 눈앞의 물질적 인과관계만 분석하는 눈뜬 장님들의 학문인 유물적 과학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현대 과학자들은 물질에 한정하여 인과관계를 연구하지만 부처님은 사회현상 뿐만 아니라 물질과 의식의 관계, 육체와 영혼, 현생과 사후에 이르기까지 완전한 상호관계를 인과의 이치로 밝힌 것이다. 이것은 우주 최고의 정등각을 얻으시고 삼계를 보신 부처님의 완전한 깨달음의 지혜가 있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이 세상은 고이고 허망하며 버려야 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은 한번도 없다. 이 세상은 완전한 이치로 돌고 있는 완전한 법계로서 지은 대로 받게 되는 것이니 부처님은 삼계를 모두 내다보시는 완전한 눈으로 완전한 법계 속에 돌고있는 생명의 순환을 살펴보니 그 속에는 두가지 흐름이 있었다. 그것은 실상과 이치를 모르고 무명을 원인으로 하여 돌고 있는 고통과 번뇌의 악순환과 바른 이치대로 살아 좋은 자기를 만들어 완전한 해탈에 이르는 이고득락의 선순환의 길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삿된 나에 집착하여 무명을 행하면 중생의 운명인 고통의 굴레를 돌아 이 세상은 고해가 되는 것이며 바른 이치에 따라 선업을 쌓으면 천상에 나고 다음 생에는 그 선근을 바탕으로 해탈에 이르게 되니 이들에게는 세상은 고해가 아니라 자신을 행복하게 만들고 완성으로 이끄는 복밭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상의 신들도 해탈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세상에 태어나 선업을 쌓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고라고 말해서는 안되며 허무하다고 이야기해서도 안된다. 부처님이 버리라고 한 것은 이치에 어긋난 무명과 습에 집착하는 삿된 나의 욕망을 나로 착각하지 말고 버리라고 한 것이지 선근을 닦고 이치를 찾는 밝은 나를 직접적으로 버려야 한다거나 나의 실체가 없는 아무 것도 없는 무아라고 하신 적은 한번도 없는 것이다. 

만약 내가 없다면 바른 이치를 깨닫고 공덕을 쌓아 선근을 완성시킬 내가 없으므로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을 것이라고 준 수기 자체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현재의 교리가 무아와 무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부처님 사후 힌두적 풍토 속에 제자들이 법을 전하고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힌두문화의 염세성이 작용한 측면도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중생들의 삶이 고라고 하고 삿된 욕망과 습을 나라고 집착하지 말라고 한 것을 가지고 이 세상이 모두 고해라고 착각하고 나의 실체가 없다고 착각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치에 따라 해탈에 이르는 올바른 원인을 짓지 않고 해탈과 무관하게 무지한 고행이나 쾌락에 집착하는 것을 크게 경계하셨다. 즉 이 세상 모든 일은 인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결과를 얻고자 하면 그에 합당한 원인을 지어야 하는 데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고행과 쾌락같은 극단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선근을 닦는 바른 원인을 쌓기만 하면 해탈이 저절로 이루어짐을 밝힌 것이다. 이것이 바로 후대에 팔정도로 체계화된 선업들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불교에서는 부처님이 처음 만난 사문들에게 해탈에 이르는 사실적인 원인을 밝히면서 고통과 쾌락을 버리고 중도를 이루었다고 말한 것을 가지고 그 낱말에 집착하여 부처님이 중도를 깨달았다고 주장하며 이를 중도대선언이라 한다.

그러나 부처님이 모든 업이 사라진 맑은 해탈심을 얻어 깨달으신 것은 이 세상의 실상과 진리인 것이지 극단을 멀리하고 중간을 취하라고 한 관념적인 중도 선언이 아닌 것이다. 근본불교에는 중도대선언이라는 용어 자체가 없다. 이러한 개념은 대승불교가 승하면서 중도론자들이 만든 용어일 뿐이다. 
부처님은 실상을 보는 눈으로 모든 집착과 습에서 벗어나 인간완성에 이르는 인과법에 따른 사실적인 길을 가르치신 것이지 중도와 같은 철학적 논리적 개념을 가르친 것은 아닌 것이다.

여기서 실상의 중요성이 나타난다. 부처님이 깨닫고 나서 밝힌 것이 명경같은 맑은 마음에 비친 자연 그대로의 실상이며 그 이치이니 이러한 사실적인 현상을 설명하는데 논리나 관념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것이다. 사실 부처님은 관념적인 말을 쓰지 않았다. 초기에 부처님은 일상적인 언어로 눈앞에 있는 자연의 모습과 생명이 돌고 있는 이치를 밝혔을 뿐이다. 자연 속에는 중도, 사제, 팔정도, 12연기 같은 철학적인 개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용어들은 나중에 학승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논리화시키면서 만든 개념들로서 이러한 개념들이 사실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독자적인 뜻을 가진 개념으로 정리하자 실질적으로는 부처님의 원 가르침이 왜곡되는 면이 나타났던 것이다. 사과맛은 먹어 본 사람만이 그 오묘한 맛을 느낄 수 있는데 제자들이 그것을 과일의 일종이며 그맛은 달고 시다라고 정의내리자 그 실체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지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말씀하신 것은 하나도 없다. 그래서 부처님을 참된 말만을 하며, 사실만을 말하며, 진실만을 말하며 속이는 말을 하지 않으며, 사실과 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나는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는 말로 오해되고 있으니 그 말은 ‘나는 자연에 없는 것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말 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며 실상을 있는 그대로 밝혔을 뿐이라는 말인 것이다.

이처럼 모든 일들은 과거의 원인으로 인하여 나타나고 있고 이것이 현실의 삶을 지탱하는 가장 근본적인 기반으로 부정할 수 없는 실재이니 부처님은 이것을 실상이라 하여 가장 중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온 기존 상좌 불교를 유부라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자연 속에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시기 때문에 ‘이것이면 이것이고 저것이면 저것’이라고 딱 부러지게 말하지 중도라는 개념을 내세워 극단은 무조건 진리가 아니며,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다고 하는 식의 비논리적인 말은 하지 않는다. 이러한 표현은 실상과 무관한 것으로 후기 대승철학이 성행하면서 관념에 사로잡힌 눈뜬 장님들의 철학적 사유가 만들어낸 희론에 불과한 것이다.

부처님은 삼계를 모두 보시는 완전한 눈으로 세상을 보시고, 물질이나 쾌락이 전부라던가 죽으면 그만이라던가 근거없는 신과 미신에 빠져있거나 무명 속에 헤매고 있는 중생들에게 참된 실상의 실체와 이치를 밝혔다. 길을 보지 못해 어둠과 불행 속에 헤매던 중생들은 부처님의 말씀이 모두 사실에 맞고 그에 따라 살아가니 삶이 밝아지고 해탈에 이르는 길이 나타나니 이를 진리며 정법이라 하여 받들어 모셨던 것이다.

이러한 부처님의 원 가르침을 정법이라 하는데 이것은 초기 육친제자들이 살아있을 때나 그 영향력이 유지되는 초기 100년 정도는 원음 그대로 유지되다가 나중에 불교가 대중의 세를 얻어 확장하면서 그후 300여년 동안 여러 부파가 형성되었고 이들 각 파들은 각자 자신들이 받아들인 교리를 정리하고 깊이 있게 다듬어 완전한 형태로 논리화 체계화시키게 된다. 

이러한 과정 속에 완전한 깨달음을 얻지 못한 당시 불교의 학승들은 당시 힌두사회에 설득력있는 논리를 만들기 위해 당대에 유행하고 있던 갖가지 관념과 논리들을 차용하게 되었고 그러한 개념들이 실상을 설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미되어 그 뜻이 조금씩 변질되게 된다. 

서지학이 발달된 지금 남아있는 팔리어 경전마저 각 부파에서 사용하던 경전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는데 초기 인도사회의 생활과 사실적인 인과의 이치가 평이한 언어로 생생하게 남아 있는 숫타니파타, 이띠붓다까 등이 원형으로 보이며 부처님이 생활 속에서 단편적으로 사람들과 만나 실상과 이치 등을 설명해 놓은 잡아함 등이 비교적 초기경전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중 중아함경은 실상을 근본으로 삼는 설일체유부에서 만들어졌으며 장아함경은 설일체유부에서 갈려나온 법상부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전통적인 상좌부와 자유분방한 대중부의 분열이 더욱 심해지면서 교리도 첨예한 대립을 이루게 되는데 후에 대승경전의 원형이 되는 증일아함경이 대중부의 경전으로 가장 늦게 나타나게 된다. 증일아함경의 제44권 불선품 중 육신은 죽지만 법신은 영원하다는 내용은 대승열반경의 법신상주설과 유사하며 보살은 마음을 내어 대승으로 나아간다는 구절이나 제2권 광연품 여래의 금강신 사상은 대승불교의 기초가 되는 사상들인 것이다.

이것이 불교의 변천과정이니 부처님의 완전한 정법마저 영원한 진리인 인과법의 변화 앞에 버틸 수 없었던 것이다. 삼계를 보시는 부처님은 자신의 사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탁한 인간세상 속에서 불법을 제대로 지키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아시고 정법은 500년 밖에 유지되지 못할 것이라 말씀하셨으니 이것이 바로 정법 500년 설인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의 정법이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하다가 500년이 지나면서 힌두교가 성행하면서 그 영향을 받은 대승불교가 나타나면서 부처님의 정법은 완전히 뒤바뀌게 된다. 즉 부처님의 실상법은 힌두적 영향을 많이 받은 자유분방한 대중부의 학승들에 의해 변질되기 시작하여 대승불교의 핵심인 용수의 공철학이 도입되면서 완전히 전도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우연찮게도 바로 이때가 부처님이 말씀하신 정법 500여년이 되는 시기였던 것이다.

사실 부처님은 공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없다. 인과법에 의해 자연에 나타나 있는 그대로 실상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이치에 대해 주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것으로 세상은 완전히 해석되고 모든 불합리한 현상을 극복하고 바라는 바 모든 문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이 본인의 해탈지경을 표현하실 때 모든 업이 사라지고 생각이 사라진 자유롭고 평안한 마음의 경지를 아무 것도 없다는 식으로 많이 표현하셨는데 후대의 제자들이 그 실체를 알지 못하고 문자에 얽매여 이를 공이라고 해석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부처님의 경전은 처음에는 구술되다가 초기에 200여년이 지나 제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는데 수십세대를 흘러오면서 각 부파별로 교리들이 체계화되면서 제자들의 힌두적 마인드가 반영되었는데 초기경전에 군데 군데 나오기 시작한 공은 바로 이러한 부처님의 해탈심을 힌두식으로 이해한 제자들의 변질현상인 것이다.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끝없는 생을 통해 습을 지우고 탐진치의 갈애를 극복하여 완전히 맑게 정화된 경지로써 완전한 마음의 열매를 이룬 경지를 말한다. 그런데 대승불교가 대두하면서 극도로 관념화되고 철학화된 그들은 부처님의 해탈시에 느끼는 맑은 반야심을 공이라 해석하여 이를 힌두교의 마야(공)사상과 결부시켜 깨달음의 경지를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 관념하고 생생하게 실재하고 있는 이 우주마저 존재하지 않는 환에 불과하다고 견강부회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부처님이 어리석은 중생들을 위해 방편으로 실상법과 인과법을 가르쳤을 뿐 실제 내면으로는 근기가 높은 제자들을 위해 오직 공한 이치만을 가르쳤다고 기존 교리와 반대되는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처님 사후 500년동안 불교는 전통적이고 계율이 엄격한 상좌부에서 부처님 법을 지켜왔는데 이들이 지키는 가르침은 다른 종교의 교리와 달리 실상과 이치를 중시한다고 하여 사실적이고 합리적인 유법(존재하는 법)이라 불리었다.

그런데 공사상이 나타나 부처님의 진정한 가르침을 유법이 아니라 공법이라 하고, 존재하는 실상을 실제는 없는 것이라 하며, 세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해주는 인과법을 유위법이라 하여 부정하자 수백년 동안 실상에 기초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오던 기존 상좌부 교단에서는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공사상이 나타나자 당시 상좌부 교단에서는 대승경전을 관념에 빠진 이단자의 소설에 불과하며 정법을 붕괴시키는 악마의 법이라 질책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인도불교가 이슬람 세력 등 외세의 침략으로 붕괴되고 대승경전이 중국 등 북방으로 퍼지면서 그 관념성과 철학성으로 인해 오히려 초기의 사실적인 경전보다 더 인기를 끌게 되었으니 이것이 오늘날 대승불교의 원인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당시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당시 기존 500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오던 전통적이고 엄격한 상좌부에서 과연 부처님의 원 가르침을 잘못 오해하고 수준이 낮은 사실적인 가르침만 지켜온 것일까?

아니다. 수많은 권위있는 스님들이 지켜온 상좌부가 부처님법의 근본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당시 상좌부는 부처님의 육친제자들의 가르침을 정통으로 지켜온 조직으로 그들이 새로 나타난 공사상을 말법이라고 비난한 것은 공법이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포함되지 않은 이단적인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공법이 부처님의 정법이었고 그것이 내부에 비밀리에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면 그런 식으로 공개적으로 대승불교를 폄하하며 적대시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럼 대승론자들의 주장을 검토해보자.

이들은 진리를 두가지로 나누어 진제 속제, 세간법 출세간법, 유위법 무위법, 유루법 무루법이라 하여 세상에서 통용되는 진리와 해탈에 이르는 진리가 별개인 것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일 수 없다. 부처님은 사실을 보는 분이고 두말을 하지 않는 분이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 분이기 때문이다. 그런 분이 해탈에 이르는 길을 두고 평생을 가르치신 팔정도의 길을 부정하고 뒤로는 이런 법은 모두 필요없고 실제로는 공함을 깨치는 것 밖에 없다고 말했을 리가 없는 것이다.

대승론자들은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경지를 공이라 관념하여 실제는 없는 것이라 하고인과도 실상도 본래 없는 것이며 인간이 닦아야 할 것도 없다고 하여 누구든지 본래 아무 것도 없음을 깨우치면 바로 해탈을 얻는다고 한다.

이렇게 실체와 이치를 부정하고 공함만 깨치면 부처가 된다고 하니 인과에 구애받지 않고 하루 빨리 깨달음을 얻고 싶어하는 업이 많은 중생들에게 매우 큰 인기를 끌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중의 인기를 끌어 세속적인 대중불교가 되었지만 그때부터 불법 속에 실상이 경시되고 이치가 사라지는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부처님은 실상을 중시하고 이치를 중시했다. 그래야만 현실의 문제를 정확히 해결해 바른 삶을 살 수 있고 무지몽매한 사회를 바른 이치대로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법이 나타나 모든 실상이 착각이며 헛것이고 인과법도 인간의 분별에 불과할 뿐 실제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 하니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바른 이치를 깨치고 악업을 제어하고 선업을 쌓아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는 정법의 근거와 기본체계가 송두리째 무너지고 만 것이다.

그들은 세상이 환이고 이치 자체가 분별에 불과하여 헛되다 하니 부처님이 진리를 깨닫고 선업과 악업을 구분하여 열심히 자신과 세상을 축복하며 살라고 하는 가르침이 유치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공은 부처님 법이 아니다. 공은 힌두교의 핵심사상인 마야(환)사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브라흐만이 세상을 창조할 때 브라흐만이 입김을 불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본다. 그래서 이 세상은 실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꿈같고 환같고 거품같고 그림자같은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그대로 금강경에 나타나 있다.

우리는 이것을 심각히 생각해야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하게되면 생생한 현실을 부정하고 세상을 합리적으로 보는 인과를 부정하고 열심히 노력하여 선업을 쌓는 것을 부정하고 그동안 지어온 원인마저 부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인과를 중시하여 중생들의 선근이 약하니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하고 열심히 배워 깨닫고 노력하여 수많은 생을 선업을 쌓아야 비로소 다음 생에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 했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모든 것은 실체가 없고 인위적인 구별에 불과하므로 모든 것이 환임을 깨치기만 하면 아무 노력도 필요없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 하니 습이 많은 중생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은 과정이 필요없는 최고의 비법이며 한방에 출세할 수 있는 복권처럼 여겨진 것이다.

그리하여 이를 따르는 공관 불교는 중국의 참선과 이어지면서 더욱 성하게 되었는데 그러나 이러한 화려한 이론과는 달리 공과 참선으로 인해 부처님과 같이 세상의 실상을 밝히고 세상을 밝히는 인과법을 설한 자는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으니 그 이유는 무엇일까?

부처님은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과의 이치에 따라 숙생의 윤회를 통해 진리의 인연을 만나야 하고 진리를 배우고 깨쳐 공덕을 쌓아 선근이 커져야 하며 천상을 가쳐 다음 생에 가서야 깨달음에 이른다고 하셨다.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인과적 과정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선업이나 공덕은 중요하지 않고 공함만 깨치면 된다고 하여 자신의 지혜와 의식을 닦는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앉아서 공함만 보고 있으니 노력하지 않는 열매가 열릴 리가 없는 것이다.

그들은 공관이 우주의 실체이고 최고의 진리로서 돈오돈수로 이 자리에서 죽는다는 자세로 공함만 깨치면 당대에 도과를 성취해서 해탈 열반을 이를 수 있다고 하며 참선수행이 불교의 핵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참선을 한다고 자리에 깔고 앉아 인과가 공하고 세상이 공하다고 수백번 공함을 깨쳐도 자신 속에서 튀어나오는 숙생의 업에 의한 충동을 벗어나지 못한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과거 생에 지은 모든 업을 지워야 하는데 공관에서는 이런 것은 본래 없는 것이라고 모든 업을 부정하고 업을 씻을 원인을 짓지 않으니 자신 속에 내재된 숙업을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과를 무시하고 업이라는 실체를 무시한 오늘날 공을 중시하는 대승불교의 근본 문제인 것이다.

그러면 공관의 등장으로 부처님의 실상법과 인과법이 약화되자 불교사회에 어떠한 영향이 나타났는가를 살펴보자.

첫째 공관론자들이 일체법이 꿈 같고 환상 같고 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것이라고 세상의 실체를 부정하자 삶의 근본적인 전제인 현실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됨으로써 말 그대로 관념에 빠져 현실을 무시하는 가장 비현실적이고 비진리적인 종교가 되어 버렸다.

그들은 인과가 연기하여 서로 의지하므로 자성이 없으니 모두 공하다고 한다. 그러나 눈앞의 존재하는 현실을 두고 모든 것이 변하여 실체가 없다고 이를 부정한다면 이보다 더 어리석고 세상을 속이는 일이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과를 통해 변화하며 영원하지 않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없는 것은 영원히 없는 것이며 있는 것은 변화를 통해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다. 모든 존재는 변화하는 인연 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현재 나타난 세상은 그동안 온 우주의 모든 원인들이 모여 있는 이 우주의 실체이며 전부인 것이다.
만약 눈앞에 보이는 이 생생한 실체를 부정한다면 그는 이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으며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깨달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눈뜬 장님들이 보지 못하는 우주의 실체를 바로 보는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이다. 부처님은 한점의 업도 사라진 맑은 반야심을 얻어 이 우주를 비추어보고 이 이 우주가 만들어지기까지 모든 인과를 밝힌 것이 바로 부처님의 실상에 대한 가르침이며 그 일이 그렇게 되기까지 과정과 원인을 밝힌 인과의 이치인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사실과 이치를 가장 잘 설명한다 하여 유법이라 하는 것이며 사실과 이치를 중시하는 현대사회에 가장 적합하여 가장 이성적인 종교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서양은 18세기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진실을 깨닫고 사실을 중시하고 이치를 밝히는 과학을 발전시켜 세상을 정복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니 만약 공관 불교에 의해 부처님의 실상법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동양사회는 이미 오래 전에 현대과학문명을 발전시켜 인류문명의 주역이 되었을 것이다.

각설하고, 이처럼 모든 업이 사라진 해탈의 맑은 의식상태를 공이라 생각하여 힌두교의 마야(환)사상과 결부시킨 결과 공관불교는 부처님이 가장 중시한 실상을 부정하여 사람들을 현실을 부정하는 관념적인 사람들로 만든 대죄를 범하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 삶의 근거이다. 이 현실이 있기에 우리는 발을 딛고 살고 있는 것이며 이에 근거하여 판단하고 삶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우주 속에 살아가는 존재로서 이 우주의 흐름과 일치하여 살아간다면 그 삶은 자연과 일치한 삶을 살아 부조화나 무의미가 없을 것이며 진정한 보람과 가치를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려면 이 세상을 근거로 해야 한다.
이 세상에 존재하고 흐르는 이치와 같으면 그것은 진실이요 진리인 것이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면 거짓이며 환상이며 비진리인 것이다.

그런데 공관이 불교 속으로 들어와 세상이 실질적으로 공하다는 지극히 관념적인 생각으로 이 세상의 실제성과 진리성을 송두리째 붕괴시켜 버렸으니 그 폐해는 실로 몸서리친 것이다.

둘째 인과법을 유위법이며 유루법으로 보아 참된 진리가 아니며 집착이고 분별에 불과하다고 결론짓자 불교를 믿는 사람들에게서 합리적인 사고가 사라지고 세상을 통찰하는 힘과 해결하는 능력이 약화되게 되었다.

이들은 모든 연기가 자성이 없으므로 실체가 없어 공이며, 공이 곧 진실이고 진제라 한다. 그러나 연기법의 본질은 상호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원인에 의해 현재의 모든 현상으로 나타나며 현재의 모든 일들이 후대의 원인이 된다는 원인과 결과의 과학적인 이치이며 실상의 구성원리인 것이다.

이처럼 현상을 가장 잘 설명하는 완전한 인과의 이치를 두고 상호 의존하므로 세상의 실체가 없다는 허무론으로 이용하는 것은 힌두적 염세론이지 실상을 보는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이것은 세상을 무상한 환으로 보는 힌두교의 마야사상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이다.

이처럼 공관에 의해 세상을 가장 올바르게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인과법 자체가 인간의 분별이며 희론에 불과한 것으로 치부되어 버리자, 대승불교를 믿는 사회에는 올바른 이치란 것이 존재하지 않게 되고 이치에 의해 움직이는 밝은 사회를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 
세상일을 바로 보고 불합리한 것을 올바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치대로 문제를 분석할 수 있어야 하는데 세상을 이루는 인과법을 부정하게 되자 그 사회에는 옳고 그름을 판단할 기준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면 어리석은 집착에 불과하다고 하고,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으며, 옳은 것 자체도 별 의미없다는 비이성적 사고가 성행하게 되니 이러한 비과학성과 비이치성이 동양의 합리성을 약화시켜 결국 서양과의 경쟁에서 뒤져 식민지화되는 불행을 겪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과학적인 인과법 속에 이치를 부정하는 관념적인 공관이 들어옴으로써 야기된 지독한 폐해인 것이다.

셋째 대승론자들은 옳고 그름을 밝히고 악업을 멀리하고 선업을 짓는 팔정도에 의한 노력을 유법이라 하여 하근기에 대한 방편적인 가르침으로 경시하고, 실제 부처님 가르침의 정수는 공관을 가르친 상근기에 대한 것으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선업 악업과 모든 인과를 버리고 선정으로 공함만 깨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초기에 부처님의 원음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는 숫타니파타, 이띠붓타까를 보면 거의 대부분이 인간이 가야할 진실과 도리와 선업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를 실천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 대승론자들은 이와 정반대로 업 자체도 미망이니 본래 없는 것이라 하며 선근을 닦아나가는 팔정도의 수행마저 부정하며 공함만 깨치면 그동안 지은 업과 공덕에 관계없이 바로 깨달음을 얻는다고 한다.

이렇게 선업과 공덕행에 의한 노력을 부정하자 불교 속에는 자신과 세상을 좋게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사라지고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공함만 깨쳐 바로 해탈을 이루려는 욕심만이 가득하게 되었으니 사회 속에는 세상을 밝게 만드는 좋은 원인이 사라지고 무기력이 넘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승불교가 성행한 사회에는 정의가 사라지고 가난과 불행과 고통이 넘치게 되어 불교는 현실에서 아무 소용이 없는 비현실적인 종교가 되었던 것이다.

넷째 공관론자들은 출세간(열반/제일의제/진제/승의제)법은 공하여 그 어떤 모습도 없다고 한다. 따라서 모습이 없으므로 이 우주 자체도 없고 나 조차도 실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상과 공의 관념이 극한까지 나아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 마저 버리니 불교를 믿는 사회는 정의와 좋은 사회와 선업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적 인간이 사라지게 되었던 것이다. 

세상의 주체는 자기이다. 끝없는 거대한 우주의 생명의 흐름 속에서 모든 것은 자신을 지키며 돈다. 콩은 콩을 돌고 팥은 팥을 돈다. 자기를 지키며 더 좋은 자기를 만드는 것이 모든 생명의 존재원리인 것이다. 윤회는 바로 이와 같이 모든 생명이 자기를 도는 과정을 나타내는 것이니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도 더 좋은 자기를 만들고자 함인 것이다.

모든 생명은 정상적인 과정을 살면 다시 자기 씨앗을 보존하여 다음 생에 다시 자기와 똑같은 씨앗을 낳게 된다. 그런데 콩과 팥을 햇살과 물을 잘 주어 제대로 키우지 않고 황무지에 심으면 비비 말라 비틀어져 쭉정이가 되어 다음 생에 제대로 후대를 남기지 못한다.

인간 농사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인간도 정상적인 삶으로 좋은 마음을 지키고 큰 원한과 집착에 멍들지 않으면 다시 그 영혼이 인간으로 되돌아오며 다음 생에 더 좋은 가르침과 공덕으로 더 좋은 근본을 얻으면 점차 근본이 좋아져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된다. 

이것이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열심히 가르치고 좋은 근본을 지니게 한 후 부처의 수기를 주셨던 이유인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모두가 끝없이 자기를 돌고 있는데 자기에 대한 중요성을 소홀히 하고 자기를 정화시키는 좋은 원인을 짓지 않고 가만히 앉아 공만 찾거나 삿된 욕망과 집착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어둡게 하면 그 영혼은 혼탁해지고 무거워져 자기를 간직하지 못하고 축생과 지옥에 들어 자신을 망치고 만다. 

이와 같이 인과에 의해 자신을 좋게 만드는 노력을 무시하고 공관에 따라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삶을 경시하면 이런 수행자는 세상 이치에 어둡고 선근이 약하여 다음 생에 다시 태어났을 때는 시각이 무지하고 게을러 거지팔자가 되는 운명을 받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계율을 지키는 것도 나이며 선업을 닦는 것도 나이며
나에게 공덕이 쌓이고 나의 업을 정화하여 내가 해탈심을 얻는 것이다.

부처님도 열반경에서 자기에게 의지하라고 했다.
부처님은 이 세상 속에는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지경이 있으니 열심히 노력해 선근을 닦아 깨달음에 이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으니 그 주체가 바로 자기인 것이다.
따라서 나를 무아라고 생각하여 아무 실체가 없다고 생각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승불교에서는 부처님의 모든 업이 사라진 완전한 맑은 반야심을 모든 것이 사라진 절대 공과 같이 본다. 그래서 나도 실체가 없는 무아이며 세상도 공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무라는 관념에 빠져 공함에 빠져 세상을 부정하고 자기마저 버려 정신줄을 놓게 되면 자기가 사라진 자리에 공귀가 들어오게 된다. 소위 깨달았다고 이치를 무시하고 막행막식하며 신기를 풍기고 신통을 자랑하는 자들이 바로 이런 상태인 것이다.

반야의 경지는 인간의 정신을 갈고 닦아 모든 업을 지워버리고 모든 사사로운 집착과 갈애에서 벗어난 맑고 자유롭고 평안한 경지를 말한다. 즉 이것은 텅 비어버린 경지가 아니라 끝없는 삶을 통해 선업과 공덕으로 인간의 영혼을 고양시켜 마침내 인간정신이 완성된 열매의 상태인 것이다. 이것은 오직 세상을 바로 보고 선업을 쌓아 자신의 삿된 욕망과 집착을 모두 극복하고 오직 세상에 대한 자비와 맑음 만이 남은 이 만이 얻을 수 있는 마음이니 알음알이만이 가득한 자가 아무리 관념으로 공을 깨치더라도 증득할 수 없는 경지인 것이다.

따라서 나의 마음 속에 내재된 숙생으로부처 지어온 업습을 정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공이라는 관념에 빠져 있으면 아무리 머리로는 공을 깨쳐도 마음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습과 갈애의 충동을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마음 속에 습이 남아있는 자는 결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나타나기 이전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경지인 반야지경에 들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공관으로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참선법의 한계인 것이다.

진정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세상의 실체를 공이라 관념하여 깨치려고 할 것이 아니라 바른 이치로 세상을 축복하는 공덕을 지어야 할 것이며 진정한 자비심으로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모든 삿된 욕망과 집착과 갈애를 모두 불살라버리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선근이 있어 세상에서 가장 밝은 의식과 가장 큰 용기와 자비심이 넘쳐야 할 것이니 아직 그대 속에 그러한 큰 선근이 없으니 우주일대사인 해탈의 열매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공관으로써 부처님의 실상법을 오염시킨 대승불교의 영향이니 우리는 부처님의 초기 가르침인 실상에 대한 정견과 인과에 따른 바른 이치를 알아 이 세상을 바로 보고 이 우주의 원리와 일치한 올바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선업과 공덕으로 좋은 자기와 밝은 세상을 만들어 나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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