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종교의 본질과 변천 본문
오늘날 우리사회에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종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정신은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탐욕적이고 이기적이 되어 버렸고
사회에는 정의가 사라지고 무질서와 부정부패가 팽배하다.
이처럼 국민성이 붕괴되고 사회가 살기 힘들어진 것은
세상에 빛을 전해야 할 종교가 생명력을 상실하여
큰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종교란 세상의 모든 문제에 대한 답을 주는 근원적인 진리를 가르치는 곳을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 종교 속에는 그에 부합되는 진리가 있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상식보다 더 못한 경우도 있어 오히려 사회의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오늘날 종교가 이처럼 혼돈스러운 이유는
종교가 전혀 다른 두 가지 기원을 갖고 있기 때문인데
하나는 원시종교의 기원이며 다른 하나는 성자들이 밝힌 진리의 기원이다.
이 둘은 모두 완전한 의미와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인간정신의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실체는 각각 진실과 거짓이며 그로 인해 나타나는 결과도 정반대이다.
즉 불완전한 인간들이 절대자를 상정하여 그에 의지하려는 원시신앙은
진리를 외면하고 책임을 회피함으로써 미신과 불행으로 이어지지만,
성자들의 가르침에 따라 진실과 이치에 근거하여 살아가는 것은
문제를 해결하여 합리성과 행복으로 이어진다.
원시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알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사태에 부딪히자
이를 벗어나려고 전지전능한 신의 존재를 상정하여 이에 의지하려 했다.
그들은 자신이 상정한 신이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라고 생각했기에
그가 일으킨다고 생각한 이 세상의 모든 일들에 대해 신성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할 수 있었고
삶의 방향과 목적을 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삶을 위안해주고 부족의 통합을 이루어주던 원시신앙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해관계가 얽히면서 많은 문제점을 야기하게 되었다.
즉 지배세력의 이익과 필요에 따라 신의 뜻으로 해석한 것들이
형식화되고 관념화되어 사람들의 삶을 지배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 무게에 찌들어 인간의 참된 삶과 행복을 상실하게 되었고
사회는 미신과 무지로 고통스러워졌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다가 기원 전후에 세계 곳곳에 성자들이 나타났다.
그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당시 상황이 인간이 살 수 없는 매우 어려운 시기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성자란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운 시대에
인간이 겪기 힘든 고난과 시련을 극복하고 피어나는 희귀한 인간 열매이며
우주의 정화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우주의 근원인 불성, 신성이 들어 있어서
올바른 삶으로 마음을 맑게 하고 세상을 위해 끝없이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완성되어 우주의 정화인 해탈을 이루게 되어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들은 힘만 있으면 모든 것을 약탈하는 어둠의 시대에 태어나
모진 시련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꺾지 않고
바른 이치로 악한 세상을 감당하며 치열하게 자신을 닦았기에
마침내 모든 업을 털어버리고 마음의 열매를 맺으신 것이다.
인간의 마음이 완성되면 그 마음은 우주의 근원(조물주, 신성, 불성)과 이어지기 때문에
세상의 모든 뜻과 진실을 깨닫게 되며 모든 이치를 보게 된다.
그래서 성자들은 제각각 다른 지역, 다른 시기에 서로 연락도 없이 살아갔지만
세상에 존재하는 진실과 이치를 동일하게 보며 그 가르침이 상통하는 것이다.
성자들은 활짝 열린 마음에서 세상의 잘못된 모습과 미신과 무지를 지적하고
참된 진실과 바른 이치 및 좋은 세상을 만드는 길을 가르치셨다.
성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삶을 무지와 불행으로 뒤덮고 있는 원인인
신의 존재와 구원의 진실에 대해 명확히 그 실체를 밝히셨다.
어느 날 부처님이 나란다 숲에 계실 때였다.
한 촌장이 뛰어난 수행자는 인간의 길흉화복을 마음대로 좌우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부처님을 찾아와서 여쭈었다.
“대덕께서는 세상에서 존경받는 분이시며, 정각을 이루신 분이라고 들었습니다.
대덕께서도 사람들이 죽은 뒤 능히 천계에 나게 해줄 수가 있습니까?”
그 질문에 부처님은 조용히 반문하시었다.
“촌장이여, 내가 그대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소.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답해 보시오.
어떤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도둑질을 하고, 거짓말을 하는 등 갖가지 삿된 행위를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죽은 뒤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이 사람이 죽은 뒤 천계에 태어나게 해주소서! 하고 기도하고 합장한다면 그 사람은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합장의 힘으로 천계에 날 수 있겠소?”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그 사람은 천계에 태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이 다시 물었다.
“촌장이여, 어떤 사람이 깊은 호수에 바윗덩이를 던졌다고 합시다.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바위여! 떠올라라, 떠올라 뭍으로 올라오라’고 그 연못을 돌면서 합장하고 기도한다면 그 바위가 사람들의 합장과 기도력에 의해 떠오르겠소?”
“대덕이시여, 그렇지 않습니다. 그 바위가 떠오를 리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요. 많은 악행을 저지른 사람은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기도하고 합장한다고 해서 죽은 뒤 천계에 날 도리가 없소. 그 사람은 몸이 병들고 명이 다한 뒤에는 악취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것이오.”
부처님은 다시 질문을 했다.
“촌장이여! 누가 깊은 못에 기름 항아리를 던졌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 항아리는 깨어져 기름이 물 위에 떠올랐소.
이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름아! 가라앉으라. 기름아! 가라앉으라’고 기도하고 합장한다면, 그 기름이 기도와 합장의 힘으로 못 바닥에 가라앉겠소?”
“아닙니다. 대덕이시여, 기름이 바닥에 가라앉을 리 없습니다.”
“그와 마찬가지요. 많은 바른 행과 선행을 쌓은 사람에게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빈다고 해도 악취지옥에 떨어질 도리가 없는 것이며 몸이 쇠해 목숨이 다하면 반드시 천계에 나는 것이오.”
예수님의 가르침도 이와 다름이 없었다.
당시 유대사회는 로마의 지배 하에서 참담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유대사회의 지배세력인 바리새인들은 하느님의 참뜻을 실천하지 않고 겉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척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탐욕과 위선을 행하여 유대사회를 어둡고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의 위선과 탐욕을 보고 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칭하면서 크게 진노하며 꾸짖었다.
그리하여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주여, 주여! 하며 나를 부르지 말고 하느님의 뜻을 행하라”고 하셨던 것이다."(마태복음 7장 21절)
이것이 바로 태초부터 이 세상을 감싸고 있는 신의 실체이니
이를 정확히 이해한다면 인간이 살아가야할 길은 분명해지는 것이다.
세상은 한치도 어김없는 진리와 사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짓는 만큼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며
짓지도 않은 일을 누가 대신해주는 이치는 없다.
즉 세상을 위해 공덕을 쌓고 자신을 승화시킨 만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지은 것과 관계없이 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수는 없는 것이다.
신은 세상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신은 자신이 만든 완전한 법칙에 따라 심판할 뿐이다.
그래서 인간세상이 지켜야 할 진리를 지키지 않고 사악한 원인을 많이 지으면
인류전체도 눈깜짝할 사이에 소멸시키는 것이 하늘의 뜻이니
완전한 하늘의 이치는 한치의 빈틈도, 자비도 없는 것이다.
하물며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을 들어줄 리가 없는 것이다.
종교인들은 자기 종교의 신은 우주에서 가장 높고 큰 신으로
자신들에게만 나타나 특별히 돌봐 준다고 믿고 있지만
높은 차원의 신이 인간 세상에 사사로이 나타나
자신이 만든 완전한 우주의 법칙을 어기고
개인적이고 구차한 사연을 지닌 인간들에게 나타나
영적 상징을 전하고 죄인을 천국에 올려줄 리가 없다.
만약 신이 인간의 일에 사사로이 간섭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완전한 세상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이며
자신이 만든 법칙을 스스로 깨뜨림으로써
자신이 만든 세상의 불완전성과 자신의 불완전성을 스스로 증명하게 되는 것이다.
하늘은 인간에게 세상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맡겨놓고
각자가 지은 만큼 대가를 받게 함으로써 세상을 완전하게 유지한다.
따라서 높은 차원의 신들은 진리로서 자신을 나타내며
사람들이 지은 원인대로 완전한 이치에 의해 판단하는 것이다.
그 좋은 예가 중세기의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십자군 전투에서도 볼 수 있다.
그들의 하느님은 모두 똑 같은 하늘에 있는 유일신이다.
두 종교는 구약에 나오는 인물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주장하며 섬기고 있다.
그들은 전투에 나서기 전에 각자의 승리를 하느님에게 기원했다.
하느님이 과연 누구를 선택했겠는가?
하느님은 자신의 종족과 나라를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할 줄 아는 미덕이 있으며
사회 속에 신뢰와 정의가 살아 있어 국력이 강한 나라를 승자로 선택했던 것이다.
요즘 어떤 종교단체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라는 신본주의를 주장한다.
얼마 전 지하철을 타는데 모 단체의 선교문구에서 이런 글이 있었다.
자식이 아파서 애를 태우다 손을 쓸 수 없는 상태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께 맡기니 곧 병이 나았다는 내용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자신의 의지와 판단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다는 말은
짓는 대로 받는다는 인과의 법칙을 외면하며
인간의 주체성을 포기하고 떠도는 영들에게 자신의 영혼을 바친다는 무서운 말이다.
그들은 극히 예외적인 영적 현상을 과장하여 주장함으로써 사람들을 무지하게 만들고
문제가 생길 경우에는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세상을 불행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역사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앞두고
피할 수 없는 운명을 모면하고자 신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나 세상은 지어진 원인과 이치에 의해 이루어질 뿐
기적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죽음을 맞았다.
9.11테러때 충돌 직전의 비행기 안에서 많은 기독교인과 회교도들은
하느님에게 간절히 기도했으나 하느님은 기적을 내리지 않았고
그들은 지어진 원인에 따라 결과를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가 아닌 일은 사실에 부딪혔을 때 비로소 증명된다.
지금은 말세라 밝은 대낮에도 이처럼 이치에 닿지 않는 무지한 종교단체의 광신적 소리가
종교의 이름아래 버젓이 횡행하고 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영이 번성했던 나라치고 결과가 좋았던 나라는 없었으며
모든 나라가 멸망할 때에는 영적 현상이 가득 번지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진실을 깨닫고 개화된 세상에서 잘못된 관념에 빠져
자신의 영혼을 망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은 신보다 사람을 중시하는 인본주의와 세상을 이루는 바른 이치를 가르쳤다.
예수님이 태어날 당시 유대사회는 신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신본주의 사회였다.
바른 이치보다 신을 위하고 신의 뜻에 따른다는 명분이 사회를 지배했기에
그 사회에는 미신과 무지가 가득 찼으며
신의 권위를 등에 업은 성직자나 지배자들에 의해 인권은 여지없이 유린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신본주의를 거부하고
세상의 주체인 인간의 입장에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고 하시면서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요즘 종교인들은 믿음만 있으면 모든 것을 용서받을 수 있다는 잘못된 교리에 빠져
광신적인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들은 예수님이나 부처님의 관한 말만 들어도 감격해 눈물이 떨어지며
마치 생명을 바칠 듯이 섬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자들은 이렇게 자신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분들이 원하는 것은 자신을 우상처럼 섬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생전 목숨을 바쳐 가르쳤던 진리를
세상사람들이 실천하여 자신과 세상을 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성자들이 살아생전에는 그분들을 그토록 냉대했던 중생들이
오늘날에는 부모이상으로 열광적으로 섬기는 것은
그분들이 존경스럽고 그 가르침이 진리여서가 아니라
믿기만 하면 자신의 죄와 관계없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하는
원시종교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요행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실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종교는
인간이 자기 운명의 주체로 살아가는 삶의 소중함과 바른 이치를 가르치지 않고
부처나 예수, 신과 같은 제3의 존재에게 의지하여 구원을 얻을 것을 가르치고 있으니
빛을 전하는 진리의 사도가 아니라 거짓을 전하는 어둠의 전령이 되어 버린 것이다.
요즘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을 믿지 않고서는 어떤 공덕을 쌓아도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구원은 맑고 가벼운 것이 오르고
무겁고 탁한 것이 내려가는 자연의 완전한 이치에 의해
좋은 삶은 지은 영혼은 맑고 가벼워 저절로 천상에 오르는 것이지
어떤 초월적인 존재가 엉덩이를 떠밀어 천상으로 올려주는 것이 아니다.
하늘은 인간에게 삶의 주체로서의 역할을 부여하고
인과에 따라 결과가 나타나도록 완전한 질서를 마련해 놓았기에
스스로 짓지 아니하는 일은 아무도 대신해주지 않으며 어떠한 결과도 생기지 않는다.
따라서 구원은 아무도 대신해 줄 수 없으며 오직 자신이 이룬 결실에 의해 받게 된다.
사람이 삶을 통하여 자신 속에 있었던 보고 듣고 배우고 느끼고 행동한 일들이
의식 속에 쌓여 자신을 이루게 되는 것이니
구원을 얻고자 하는 자는 삶속에서 올바른 행으로 스스로 마음을 닦아
맑고 자유로운 영혼을 얻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것이니
각자가 자기 자신을 닦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면 그 마음이 밝아져
우주의 법칙에 따라 구원이 오는 것이다.
예수님이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한 말은
예수님이 대신 구원해준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을 성실히 지키고 행하여 스스로 마음을 정화시킨 자만이
우주의 질서에 의해 구원을 받게 된다는 말인 것이다.
또 기독교에서는 예수님이 고귀한 죽음으로 중생들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종교를 믿어야만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분은 세상에 대한 사랑과 진리에의 확신이 있었기에
죽을 줄 알면서도 예루살렘으로 들어가 죽음을 받으신 것이지
남의 죄를 대신 사해주는 대속과 같은 이치는 없다.
우주의 이치는 각자가 지은 것이 각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니
이것은 예수님은 물론 하느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우주의 법칙이다.
따라서 그분은 죽음으로서 당신의 삶을 사신 것이니
모든 인간은 각자가 지은대로 각자의 결과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죽음으로써 중생들의 죄를 대속했기 때문에 예수를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은
후세의 성직자들이 교인을 끌어들이기 위해 만들어 놓은 허구이며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성자들에게 있어서 생사는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에
죽음은 단순한 통과의례에 불과할 뿐이었다.
그래서 생명보다 더 소중한 진리와 중생들이 행복해지는 길을 전하기 위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최고의 사랑, 즉 살신행을 행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에 전해진 가르침 중에 가장 고귀한 공덕행인 것이다.
그리고 성자들이 가르치신 것은 세상을 이루고 있는 완전한 법칙과 진실이다.
세상의 일은 태초에서부터 정해져있는 법칙과 사실에 의해 움직인다.
무거운 것은 가라앉고 가벼운 것은 떠오르며 물은 높은 곳에서 아래로 흐른다.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나타나며 결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원인이 있다.
원인은 반드시 지어야 생기는 것이니
좋은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좋은 원인을 지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바위가 물에 떠오를 수 없고 기름이 물아래 가라앉을 수 없는 것과 같이
태초부터 정해져있는 진리이며 진실인 것이다.
인과의 이치는 불교의 핵심이니 만큼 더 이상 거론할 필요가 없지만
예수님의 가르침도 인과의 이치에서 한치의 어김이 없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16~21>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장 33~35>
이처럼 세상의 일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좋은 원인이 나쁜 결과를 맺는 일은 없으며
좋은 결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원인이 있다.
그래서 각자가 지은 대로 가시나무는 가시를, 포도는 포도를 낳고
잘못된 삶을 지은 자는 불에 태워지는 지옥의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좋은 나무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맺히듯이
좋은 것이 마음속에 쌓인 자만이 좋은 결실을 맺는 것이니
좋은 운명과 구원을 얻고자 하는 사람은
바른 이치와 사랑으로 자신의 삶을 가득 채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선근의 중요성과 같다.
부처님은 선근이 있어야만 자신을 키우고 세상을 밝히며 완성에 이를 수 있기에
진리를 배우고 공덕을 쌓아 선근을 키우라고 하셨다.
선근을 한번 얻게 되면 그것이 씨앗이 되어
더 맑은 지혜와 강한 용기를 갖게 되어 더 큰 공덕을 쌓게 되고
그로 인해 선근이 더욱 강해져 마침내 악의 영향에서 벗어나
스스로 밝은 길로 나아가 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부귀와 권력과 화려한 위광만 좋아하지
자신의 근본을 좋게 만들기 위해 열심히 일하고 바르게 사는 삶이 얼마나 소중한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선근이 있어야 세상을 바로 보고 바르게 살아갈 수 있으며
좋은 자신과 좋은 세상을 만들게 되므로
삶의 결과로 이룬 선근의 크기가 곧 그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성자들의 말은 이 세상에 정해진 원인과 결과의 인과법에 의해 이루어진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는 찍혀 불에 던져지듯이
그 결과를 보면 그 원인이 옳았는지 그 근본이 선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의 종교를 판단하고자 한다면 그 결과를 보면 된다.
오늘날 한국의 종교들은 저마다 정통임을 주장하고 엄청난 외형을 자랑하지만,
사회는 날로 혼탁해지며 사람들의 삶은 날로 불안하고 힘들어지고 있다.
더구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삶이 밝고 유능해지지 않고
오히려 기복적이고 이기적이며 배타적이 되고
방언과 이적, 신들림 등 갖가지 심령현상으로 사회에 많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을 보면
오늘날 한국의 종교에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내재되어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오늘날 우리사회의 종교가 성자들의 가르침과는 달리
이처럼 이치에 맞지 않고 온갖 환상과 관념으로 혼탁해진 것은
후대의 종교인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권위를 위하여
미신적인 원시신앙과 비정상적인 생명현상을 실체도 밝히지 않은 채 함부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종교교리는 겉으로는 성자들의 가르침과 비슷해 보여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온갖 환상과 비이치로 오염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진리는 아주 정갈한 음식과 같아서 순수한 상태일 때는 삶에 도움이 되지만
다른 세균이 들어와 진리를 왜곡시키면
부패한 음식물과 같이 아니 먹음만도 못한 것이다.
그럼 종교에 왜곡된 관념들이 들어오게 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성자들이 나타나셨을 때 당시 상황은 매우 어둡고 고통스러웠으며
악이란 악은 다 모인 오탁악세였다.
그러나 당시의 기득권 세력들은 자신들이 주도하고 있는 제도와 관습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세상을 고통스럽게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성자들이 나타나 자신들의 잘못과 위선을 지적하자
전통적 권위와 존엄성을 보장받던 이들은
자신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기득권이 침해되는 것이 두려워 이를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자들을 핍박하였고
그 결과 예수와 소크라테스는 그들의 모함에 의해 죽음을 당했으며
노자와 석가는 길가를 떠돌다 외롭게 죽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어둠과 빛의 관계이며 성자들의 운명이다.
어둠과 빛은 서로 어울리기가 불가능하다.
어둠은 빛을 보면 깨어지고 빛은 어둠이 오면 질식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탁악세에 태어나게 되어있는 성자들은
항상 세상에서 거부당하며 핍박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자들의 가르침은 항상 당시 세상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다가
시간이 흘러 그 가르침이 오염된 후에야 비로소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분들의 가르침은 너무 완전하고 맑아
흐린 물속에 사는 중생들이 바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당시 성자들은 기득권층의 핍박과 중생들의 외면 속에 매우 외롭고 힘든 날을 보냈으며
다만 소수의 인연있는 제자들만이 그 말씀을 이해하고 그분들을 따랐다.
지금 사람들은 경전에 있는 글을 보고 성자들이 가는 곳에는
수많은 군중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그분들을 환대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분들의 삶은 매우 비참했으며 환영받지 못하고 냉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우리는 남아있는 증거로 당시 상황을 보아야 한다.
실제 그분들은 배고픔에 못 이겨 밀 이삭을 뜯어먹고 구걸했으며
말할 곳이 없어서 맨발로 전국을 떠돌아다녔던 것이다.
만약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분들이 성자로서 대접받고 가만히 있어도 항상 청중이 구름처럼 몰려왔다면
그분들은 배고플 일도, 진리를 전하기 위해 사람을 찾아 거친 황야를 돌아다닐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실 속에 남아있는 증거인 것이다.
핍박 속에 진리를 전하는 일은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이었지만
어두운 세상과 불쌍한 이웃에 대한 사랑이 끝이 없었기에
그분들은 목숨이 다하는 날 까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중생을 구하기 위해
거친 세상을 진리를 전하러 돌아다녔던 것이다.
초기에 성자들은 말씀을 전하시기에 바빴기 때문에 별도의 말씀을 기록해놓지 않았다.
그분들은 살아 생전 그분들의 언행 자체가 진리였고 성전이었으므로
별도의 경전과 종교를 마련할 필요가 없었으며
또, 당시 문자 문화가 발전하지 않아 제대로 기록할 수조차 없었다.
오히려 성자들은 당시 원시종교의 거짓됨과 형식주의를 비판하였기에
우상을 섬기고 성직자와 지배층의 이권을 보장해주는 종교를 만드는 것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나자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 되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생한 진리의 실체였던 그분들의 행적을 기록하고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이것이 경전의 기원이다.
그런데 사후 제자들이 성자들의 가르침을 전하는 과정에서
각자의 기억과 이해력에 따라 들은 바가 달랐으며
전도의 편의를 위해 각자 자기 나름대로 현실에 맞게 변형하여 전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변형된 경전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렇게 변형된 교리들은 이성적으로는 삶의 의미와 진리에 따른 실천력을 제시하고
감정적으로는 신과 성자에 대한 귀의로 구원도 손쉽게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였으므로
머리에 든 것이 많은 지식인들이나 욕심이 많은 중생들의 관심을 쉽게 끌어 종교로서의 조직을 갖추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성자들께서 직접 완전한 진리를 가르칠 땐 모두가 외면하던 가르침이
후대에 수많은 무리들이 따르는 종교가 되었다는 것은
그만큼 중생들의 입맛에 맞게 가르침이 변형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진리로서의 생명력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오늘날 종교의 실체이니
만약 요즘 세상에 진정 완전한 진리를 깨친 깨달은 자가 나타나
실상을 밝히고 인과법을 전하며 인간이 행복해지는 바른 길을 가르친다면
그 분은 과거 성자들이 유대교나 힌두교, 기득권 세력에게 핍박을 받아 죽음을 받았듯이
오늘날의 성직자들이나 지식인들에게 사이비로 몰려 죽음을 받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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