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중관학파와 유식학파의 진실 본문
대승불교가 일어나게 된 데는 기존 소승불교의 잘못도 크다.
부파불교의 진행으로 교리의 이론화와 힌두적 관념화가 진행되면서
초기 부처님의 생생한 가르침은 진리로서의 생명력을 잃어갔고
기존 승려집단은 승원을 중심으로 고도의 철학적이고 난해한 논리를 전개하면서
소수의 지식인들만이 알 수 있는 고급종교가 되어
왕실과 귀족들의 지원아래 중생들과 유리된 엘리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재가신자들과 개혁적인 승려들은 중생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추상적인 사변만 일삼으며
권력과 유착하여 일신의 안락만 추구하는 기존 승단을 비판하면서
부처님의 본래 정신으로 돌아가 중생들을 구원하는 참된 불교가 되자고 대승운동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들은 기존 승려들의 이기적이고 귀족적인 모습을 '소승'이라 공격하고
스스로를 모든 것을 담는 ‘대승’'이라 칭하면서
대중적인 신앙운동을 발전시키고 대승경전을 편찬하게 된다.
그러나 그 의도는 좋았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깨달음과 진리의 빛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대중들에게 봉사할 수 있는 수단을
당시 중생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힌두 신앙과 철학으로부터 차용했던 것이다.
그들은 힌두교에서 유행하고 있는 박티 신앙을 받아들여
부처님을 믿기만 하면 법을 몰라도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아미타불 신앙을 발전시켜 나갔고
부파불교를 오염시켰던 브라만 사상을 본격적으로 받아들여 이를 대승불교의 철학적 기초로 삼았다.
그래서 AD 1세기경에는 반야계통의 대승경전이 나타나고
AD 2세기경에 화엄경이, AD 4세기경에 법화경이 나타났는데
이러한 대승경전이 출현하자 기존 불교교단에서는 이야기책에 불과하며
‘도무론자(都無論者 : 모든 것이 무라고 부정하는 자)’라고 하였고,
인도불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스리랑카 상좌부에서는 중관학파를 대공부(大空部)라 하여
이단으로 부정하였던 것이다.
우리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
역사와 법통을 가진 거대한 기존 교단에서 대승사상을 이단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은
그만큼 대승의 교리가 기존 부처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면이 많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대승의 이론적 기반인 중관학파와 공사상에 대해 살펴보자!
<중관학파>
공사상은 3세기 경 나가르주나(Nagarjuna:龍樹)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그는 여러 저술들을 통하여 <반야경>의 공(空)사상을 논리적으로 전개하면서
부처님의 사실적인 견해와 기존 힌두교의 주장들을 모두 비판 배척하게 된다.
용수는 모든 존재는 연기에 의하여 생기므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니,
이것을 깨달으면 진공중도의 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는 반야공관을 설하였는데,
이 설에 기초를 둔 학파를 중관파(中觀派)라고 한다.
용수는 『중론』에서 모든 사물은 상호 의존적인 연기관계로 존재하기 때문에
자성이 없으며 모든 실체는 공하다고 한다.
자성이란 인과 연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자립적인 것으로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홀로 존재할 수 있는 고정불변한 실체라고 할 수 있는데
상호의지하는 연기법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선 홀로 존재하는 자성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세상의 본질은 무자성(無自性)이며 공이라고 한 것이다.
그에 의하면, 최고의 진리(Param rtha, 眞諦, 勝義諦)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실체로서
인간의 사고 내지 인식작용이 미치지 않는 초월적 상태를 말하는데
이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의 세계, 본질의 세계와 유사하며
세상의 흐름과 무관한 영원한 무루의 실체를 의미한다.
이에 비해 덮힌 진리(俗諦, 世俗諦)는 상대적인 진리로
인간의 시각과 사유에서 본 법을 이야기하는데 플라톤의 현상의 세계, 동굴의 세계를 의미한다.
진제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사물은 생겨나지도 멸하지도 않으며
늙고 죽은 것도 깨달음도 모두 거짓된 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따라서 사물이 생겨나고 멸하며, 인간이 늙어서 죽는 것은 <덮힘>의 결과에 지나지 않으니
이 <덮힘>을 제거하면 불생, 불멸의 무루 세계에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견지에서 용수는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덮힘>의 세상으로 환영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눈을 뜨기까지 그것은 마음을 괴롭히는 고통의 바다지만
일단 눈을 떠버리면 고통스럽던 꿈은 이슬과 같이 사라지고
영원한 평안과 해탈 속에 머무르게 된다는 것이다.
용수는 이와 같이 <반야경>에 나타나는 공을
왜곡된 연기설로 이론적으로 논증함으로써 대승불교의 철학적 위상을 정립하였지만
생생한 깨달음의 실체인 해탈지경을 실체가 없는 관념적인 공으로 바꿔버림으로써
불교를 사실에 관한 법에서 관념이 지배하는 추상적인 법으로 변질시키고 말았다.
즉 부처님의 해탈지경은 업이 사라진 인간의 완성된 마음으로
우주의 실상과 진리를 비추는 살아있는 거울이었지만
관념론자의 사고와 논리에 의해 반야는
철학적 사유로만 존재하는 관념적인 공이 되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래서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비현실적인 사람들은 논리로 공임을 깨닫고는
모두 반야를 얻었다고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이 세상은 범부들이 집착하고 있는 것과 달리 실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오온을 필두로 하는 제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눈을 가리고 있는 환상(덮힘)에서 벗어나면
본래 속박되지 않고 해방되지도 않은 제법의 본래 모습인 진여를 보게 된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브라만의 마야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정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꿈이나 환과 같으며
제법은 본래 존재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부처님의 깨달음마저도 하나의 차별관념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처럼 용수는 부처님을 넘어서는 정각을 얻지 못하였으면서도
관념과 논리로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을 부정하고
사실과 이치에 입각한 초기 가르침인 실유론 마저 거부하였던 것이다.
현실의 존재마저 실제하지 않은 환이라 생각하니 현실의 중요성은 경시되고
인과법 마저 구분이라고 부정하니 이치로 이루어지는 세상을 보는 눈이 사라져
이후 불교에서는 세상을 올바르게 만드는 바른 이치와 생생한 실천력이 사라지고
염세적 무기력증과 추상적 관념만이 팽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승불교에서 일체를 부정하고 우주의 본질이 공하다는 결론을 내리자
불교는 힌두교와 차이가 거의 없게 된다.
처음부터 브라만적 환경 속에서 생겨나 자라온 불교였고
힌두교와 더불어 교리의 변천이 이루어졌으며
결국 힌두교 속으로 함몰되어버린 불교역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부처님의 사실적인 가르침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의 교리변천을 거치면서 마침내 힌두교화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그리하여 이슬람권의 침입으로 인도사회가 흔들렸을 때
힌두교는 살아남았지만 불교는 사라진 것은
불교의 진리로서의 생명력과 특이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도인들은 힌두교만 믿어도 불교를 내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유식파>
중관파와 더불어 대승불교를 구성하고 있는 또 하나의 거대한 사상은 유식파이다.
이들을 요가짜라라고 하는데 그 말은 '요가를 실천한다'는 뜻이다
유식학파는 요가선정의 체험에서 오는 마음의 작용을 중시하여
용수의 반야공관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공 대신에 마음을 이 우주의 실체로 본다.
왜냐하면 그동안 인도 명상수행의 전통에 따라 오랜 동안 선정을 닦은 수행자들은
요가선정의 과정에서 의식의 근원으로 느껴지는 텅빈 마음의 세계를 많이 경험했기 때문에
우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공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근원인 마음이 깨달음을 낳는 원천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미혹의 세계를 낳는 원인이 된다고도 하여
업과 깨달음과 불성의 관계를 밝히는 여래장연기설과
인식의 근원을 밝히는 유식론을 주장하게 된다.
그들은 중관학파를 관념적인 공을 설정하여 ‘있지 않음’에 집착하고 있는 극단론자로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불교 교리사에 있어 유명한 중관과 유식의 공과 유에 대한 교리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그들은 모든 것이 관념적으로 공한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의식이 있으며
그 의식이 모든 존재를 결정한다고 하여 공 대신에 의식을 근본에 놓고 있다.
유식학파들은 중관학파에 대해 ‘그들은 일체가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는 것이 바른 관찰이라고 하지만 오직 이름일 뿐이라면 어디 진실이 있겠는가? 하고 주장하면서
'그들은 최고의 허무론자들로 차라리 아견(我見)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같은 ‘악취공자’보다 낫다' 고 중관을 질타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 의식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중관학파가 허무론자로 오해되었던 것처럼
유식은 또한 실체인 법을 무시하는 ‘주관적 관념론자’로 비판받게 된다.
그들은 기존에 계속 되어오던 불교의 근본적 모순인 무아설과 부처님의 수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무아론의 주장대로 업을 실어 나를 실질적인 영혼의 종자가 없다면 제자들에게 공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부처가 된다고 수기를 준 부처님의 말이 거짓이 됨)
선정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근본을 말라식과 아뢰야식으로 나누어 논리를 전개했다.
즉 기존 불교에서 인간의 감각을 6식(안이비설신의)으로 나눈 것에 더하여
그들은 2식(감각을 넘어선 나의 주체인 말나식과 우주의 주체인 아뢰야식)을 추가하여 8식으로 인식하였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불변의 의식체를 우주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자아의식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우주의 근원인 불성과 이어질 수 있다고 하여
자아의식인 말나식과 우주의식인 아뢰야식의 상호관계와 깨달음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그들은 제7식인 말나식(末那識, manas-vij na)을 세세생생 윤회하는 주체로 보았는데
이것이 요즘 말하는 자아의식에 해당된다.
그들은 우주와 자아의 근원적 바탕인 아뢰야식 속에는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아치(我癡)ㆍ아견(我見)ㆍ아만(我慢)·아애(我愛) 등 근본번뇌가 일어나고
이들이 업의 흔적(업종자)을 남기게 되는데
제7 말나식이 이것을 '나와 내것’이라고 착각함으로써
번뇌의 근본인 탐(貪)·진(瞋)·치(癡)가 시작된다고 한다.
그래서 선정을 통하여 이러한 업종자가 환임을 깨닫기만 하면
말나식은 저절로 사라지고 아뢰야식은 불성으로 돌아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업종자가 환임을 깨닫는 것은 세속에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요가 수행을 해야 하는데
오직 선정에 의해서만 업이 소멸되고 아뢰야식으로 돌아가 해탈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말라식(칠식)과 아뢰야식(팔식, 근본식)의 관계를 파도와 물에 비유한다.
파도가 물을 떠나 독립적으로 존재할 수 없듯이,
말라식은 아뢰야식에 의지하여 나타나지만
파도가 잠잠해지면 파도는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고 맑은 물만 남듯이
파도가 환임을 깨달을 때 모든 번뇌와 자아(말나식)가 사라지고
아뢰야식(불성)만 남아 해탈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유식학파의 핵은 바로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즉 선정으로 홀연 모든 분별과 인식이 환임을 깨닫으면
아뢰야식에 얼룩진 업종자가 저절로 사라져 중생심이 불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의식을 한번 크게 돌려 우주의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한 순간에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 유식론의 요체인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사실을 부정하고 법을 왜곡하는 근본적인 오류가 있다.
그들은 부처님이 가르친 삶을 통한 실천과 인과법에 의한 공덕보다는
일체를 마음의 장난으로 보고 선정으로 모든 것을 깨닫을려고 하는 관념적인 방법을 택함으로서
자신과 현실을 변화시키는 원인을 하나도 짓지 않고
오직 마음 만으로 깨달음을 얻으려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완전한 우주의 법칙인 인과법을 어기고
괭이를 대지 않고 땅에 있는 보물을 캘려고 했으며
산에 가서 물고기를 잡으려 했기 때문에
대승불교가 성행한 수천년 동안 수많은 사람이 선정으로 평생을 보냈지만
부처님과 같이 정각을 이룬 자가 단 한사람도 나타나지 않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삶이 살아 숨쉬는 이세상은 환상이 아니며
우리 속에 내재되어 삶에 영향을 주는 업 또한 환상이 아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라 했으며
이 세상에는 근본이 마야라면 나타날 수 없는 완전한 진리의 법인 인과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완전한 인과법에 의해 수많은 생동안 지어놓은 원인들의 모임이니
가만히 앉아 무명과 환임을 깨닫는다고 해서 지워지는 것이 아니며
치열한 삶을 통해 뉘우치고 반성해 큰 자각을 얻어야만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그토록 사실을 중시하고 팔정도의 실천을 강조하신 이유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부처님께서 명확하게 밝히신 바 있다.
부처님이 선정의 최고단계인 비상비비상처에까지 오르셨으나
마음의 어둠을 완전히 벗어버리는 해탈을 얻지 못한 이유도
바로 이와 같이 인과의 실천을 통해 업을 지우려 하지 않고
기존의 전통에 얽매여 선정으로 모든 업을 지우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부처님은 “나의 깨달음은 선정과 고행으로 온 것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통해 쌓은 공덕이 세상을 덮을 정도가 되어
그 선근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이땅에 와서 해탈을 얻은 것이니
모든 제자들은 부지런히 법을 배우고 노력하여 깨달음에 이르라“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업과 인과의 이치를 사실로 보고 삶의 실천지침으로 삼느냐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 환상이며 그림자로 보아 벗어 던지느냐에 따라
부처님 법과 힌두 및 대승사상이 나누어지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불교의 중심인 선불교도 바로 이러한 유식론적 수행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선가에서는 선수행은 염화시중의 미소로서 마하가섭에게 직접 전해진 법으로서
부처님은 하근기를 위해서는 염불과 기도를, 중근기를 위해서는 팔정도에 의한 연기적 수행을, 상근기를 위해서는 홀연 깨닫는 선수행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에 만들어진 말이며 초기불교의 가르침 속에는 그런 구절이 전혀 없다.
부처님께서는 당시 유행하던 모든 요가행과 고행을 모두 경험하시고
‘나의 깨달음은 고행이나 명상에 의해 온 것이 아니라’고 하시며
그당시 유행하던 수행법의 헛됨을 밝히고 중도를 주장했건만
부처님이 돌아가시자 그 주변에 있던 마음이 어둡고 게으른 자들은
자신들의 밑천을 버리기 아까워 환상을 좋아하는 후인들에게 명상술을 가르치면서
불교의 정법인 인과의 실천법이 사라지고
가만히 앉아 단 한번에 요행을 노리는 명상법이 성행하게 되었던 것이다.
인간의 삶은 너무나 소중하고 진지한 것이어서 잠시라도 헛되이 보내서는 안된다.
인간은 실천을 통하여 자신을 닦아야지
현실과 유리된 명상을 통해서는 결코 자신을 닦을 수 없다.
세상의 모든 일은 활동을 통하여 변화하며
자기가 짓는 원인에 따라 좋아지기도 나빠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가 한치의 어김없이 맞물려 돌아가는 인과법인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변하는 것이니
변화는 무상함 뿐만 아니라 완전한 해탈로 나아가는 발전의 고리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앉아서 하는 명상이나 호흡같은 것은 원인을 짓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근본을 좋게 만드는데 기여하지 못한다.
오늘날 수행자들은 바로 여기에 걸려 한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이 우주와 자신의 실체가 공함을 생각으로 깨친다 하더라도
자신 속에 숙생의 업을 통해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 업이 계속 스멀스멀 피어오르는데
이를 지울 길이 없는 것이다.
그 방법은 오직 바른 이치를 배워 실천하는 길 밖에 없다.
땅으로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다.
지금 시중에 나와 있는 명상기법을 수행하게 되면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키는 원인을 짓지 못하여 결국 쭉정이 인생만 남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완전한 인과법이다.
바른 이치를 깨닫고 자신과 세상을 위해 좋은 원인을 쌓지 못한다면
완전하고 냉혹한 인과법은 가난과 외로움을 선물할 것이며
관념과 지식에 가득 차 세상을 보지 못하는 비현실주의자가 되게 할 것이다.
만약 이것이 의심이 든다면
열심히 명상을 하고 호흡을 한 후 세상에 나가 현실문제를 해결해 보라!
세상의 진리인 인과법과 생생한 마음을 버리고 공을 받아들였으니
머리는 텅비고 눈은 흐려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가 하나도 보이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인연에서 멀어져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을 딪고 사는 현실이며 세상이 흘러가는 사실적인 이치이니
사실이 아닌 것에 집착하면 삶이 허황하게 되며
세상이 흘러가는 이치를 어기면 삶이 불행해지는 것이다.
요즘 젊은 시절에 잘못된 관념이나 이상한 단체에 빠져 허송세월을 보내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이 아닌 환상에 빠져 이치에 맞지 않은 삶을 살게 되면
한치도 어김없는 인과의 법칙이 주는 인생의 패배자라는 선물을 받고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허황된 환상과 거짓에 빠져 살았음을 알게 된다.
잘못된 관념에 빠진 사람들은 삶도 수행이며 명상도 수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거니와 명상은 인생을 닦는 것이 아니며 단순히 마음을 보는 기술에 불과하다.
사람은 삶을 통하여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배우고 욕망과 습을 버리며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맑고 강한 정신을 얻을 때 진정한 수행을 하게 되는 것이지
명상을 한다거나 소리나 빛에 집중하거나 기를 돌려서는 결코 자신의 정신을 닦을 수가 없다.
조용히 명상에 들어 모든 자극을 끊고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면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욕망의 흐름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여 우주의 모습과 법이 비치는 현상이 나타난다.
수행자들은 이때 마음의 고요 속에 비치는 신비를 보고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이 생각하여 견성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마음이 갖고 있는 작은 신비를 일시적으로 보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해탈심을 얻은 것이 아니다.
이 상태는 세상과 인연을 끊고 고요히 앉아 있음으로 업이 활동력을 잃고 잠시 가라앉은 상태이기 때문에
다시 세상 인연을 만나면 업이 다시 일어나 마음은 온통 흙탕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정각을 얻은 자의 해탈지심은 업이 가라앉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에 쌓여있는 모든 업의 뿌리를 뽑아내어
다시 헝크러질 먼지 자체를 지워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아무리 흔들려도 더 이상 흐려질 것이 없으며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항상 진여가 빛나
세상 모든 일이 그 위에 비쳐 모든 법을 보고 지혜를 밝히게 되는 것이다.
그동안 선가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데
보림행을 하거나 면벽 구년을 하였으면서도
결국 세상에 아무 빛도 전하지 못하고 말없이 스러진 것은
그들이 흙탕물이 가라앉은 마음의 고요만 보고
모든 흙먼지가 사라진 밝게 빛나는 진정한 반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한 결과를 빚은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처님이 가르치신 영원한 법칙인 인과법에 어긋난 수행으로
수많은 생을 통해 실질적으로 쌓아온 사실적인 업을 무시하고
조용히 앉아 아무런 원인도 짓지 않고 생각만으로 이를 지우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사라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다.
따라서 수많은 각자가 나타났다는 동양사회에 아직도 환상과 어둠이 넘치고
사람들의 삶이 무지와 고통 속에 헤매는 것은
아직 세상을 밝히는 부처님과 같은 정각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인 것이다.
요즘 많은 수행단체에서는 유식론의 기본 관념과 논리를 이어받아
모든 것이 공하고 마음 조차도 환이라고 하는 여러 가지 수행법으로
더 이상 구할 것도 없고 걸릴 것도 없는 대자유를 얻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리 허공을 보고 마음의 희열을 얻은 들
혜해탈을 얻어 실상을 보는 눈을 얻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진정한 깨달음은 법과 지혜로서 증명되기 때문이다.
진정한 깨달음이란 나 혼자만의 기쁨이나 자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이치를 밝히고 중생을 축복하는 지혜를 발휘함으로써
비로소 그 의미와 가치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들은 세상을 밝히는 지혜가 없는 해탈은 정각이 아니라는 지적에 대해
세상은 무명의 소산으로 모두 환에 불과하므로 더 이상 세속에 얽매지 않는다고 하며
세상 모든 것이 그대로 불성이고 모든 중생이 다 깨달은 존재이므로
더 이상 구할 것도 안타까워할 것도 없다고 한다.
그러나 주위에서 처절하게 아파하는 수많은 이웃을 두고
모든 것이 부처이고 불성이며 환이라고 오도하며 혼자 열락에 머무는 것은
비양심적이며 사실을 무시하는 착각이다.
부처님이 비상비비상처에 이르렀으면서도 보리수 아래서 목숨을 건 수행을 한 것은
중생들의 아픔을 곁에 두고 혼자서 열락을 즐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과거 동양에서는 수천년동안 이러한 논리와 관념에 의해
많은 수행자들이 세상을 버리고 혼자만의 기쁨에 머물렀기에
그들은 삶이 세상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을 쭉정이로 만드는 우를 범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깨닫고자 하는 자는 세상에서 가장 자비심이 커야 한다.
그래서 사사로운 자신을 모두 버릴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거짓을 버리고 모든 집착을 버리고
마지막 갈애마저 던져버려야 하는 것이다.
100% 진실하고 순수하고 사랑이 가득한 자만이
완전히 아집과 갈애를 극복하고 순수한 반야심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수행을 하면서 경계해야 할 점이 있다.
관념적인 말법에 빠져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세상이 공이며 환이라고 자신마저 던져버리면
이때 주인이 사라져 버린 텅빈 의식 속에 떠돌던 공한 영들이 들어와 지배하게 되니
이를 공귀라 한다.
공귀의 노예가 되면 세상 모든 것이 공하고 무상하게 보이기 때문에
사실의 세계를 부정하고 영의 세계와 통하여 혼자 열락에 빠져 환상 속에 살게 된다.
이때 그는 영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영의 특성을 이용하여 한 곳에 앉아서도 다른 곳을 보거나 남의 마음속을 들여다 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도가 높은 사람으로 착각하지만
이는 자아상실에 의한 영적 현상으로 자아상실과 자아완성은 겉으로는 비슷해 보이지만
실상은 정반대이며 그 차이는 천상과 지옥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요즘 이러한 잘못된 관념과 공귀의 영향으로 수많은 구도자들이
자아와 양심과 이치를 버리고 미치광이처럼 사는 경우가 많이 있는데
이와 같이 자아를 상실하면 눈앞의 일을 보고서도 알지 못하고
아무 일도 하지 못하는 바보가 되고 만다.
이처럼 불교는 정법 이후 수천년이 흐르면서
기본교리에서부터 수행법에 이르기까지 철두철미하게 변질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불교를 통해 참된 진리와 생명의 빛을 얻고 해탈로 나아가기가 매우 어려운 상황이다.
변질된 법은 거짓된 법보다 위험하다.
거짓된 법은 사람들이 미리 알아 경계하지만
변질된 법은 자신도 모르게 감염되기 쉬운 까닭이다.
변질된 법은 상한 음식과 같아서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먹고 나면 생명에 치명적인 충격을 주듯이
변질된 법도 겉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으나
그 내용 하나 하나가 삶의 방향을 근본적으로 오도하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을 병들이고 삶을 망치게 하는 것이다.
육체가 병드는 것은 한몸이 소멸하는 것에 그치지만
정신이 병들게 되면 병든 생각과 습이 세세 생생 그 영혼을 갉아먹어
인간으로 태어난 의미와 가치를 망치고 윤회의 종자마저 소멸시키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다시 한번 세상의 실상과 이치를 밝힌 부처님의 정법으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이를 위해 먼저 부처님 법 중에 사실과 이치에 근거한 가르침을 찾아 이를 근본종지로 삼아야 한다.
부처님 법은 환상과 무지와 거짓을 깨고 실상과 이치를 밝힌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이 완전한 법계라는 것, 완전한 자연법인 인과의 법칙이 작용하고 있다는 것, 모든 것이 지속적으로 윤회하고 있다는 것, 인간에게는 완성의 경지인 해탈이 있다는 것, 이 세상은 원인과 결과의 연속체로서 모든 것이 반드시 원인과 결과가 있다는 것, 원인과 결과의 변화 속에 모든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인 나가 있다는 것, 악한 일에는 반드시 나쁜 원인이 있고 좋은 결과에는 반드시 좋은 원인이 있다는 것, 진리를 배우고 행하면 반드시 인간완성이 온다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진실이며 진리인 것이다.
이것이 사실인지 아닌 지 보려면 초기의 순수한 가르침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는 숫타니파타를 보라!
그곳에는 부처님이 일상생활에서 제자들과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세상의 모습이라던가 이치, 인간의 살아갈 바를 밝혔고 수행자들이 지녀야 할 자세 등을 평범한 언어로 밝혔던 것이다.
따라서 요즘 경전에서 보는 것과 같이 사제, 육식, 육경, 팔정도, 12연기 같이 일반인이 알아듣기 힘든 현학적이고 관념적인 말이 거의 없다. 진실하게 살고 거짓하지 말고 미신을 행하지 말고 바르게 듣고 배우고 좋은 원인을 짓고 해탈에 이르라는 말이 주종인 것이다.
칠불통계와 같이 부처님께서도 선과 악을 밝혀 모든 악은 짓지 말고 모든 선은 열심히 행하며 마음을 정화하여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라고 공통적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의 불교에서 이러한 실상에 입각한 사실과 자연의 흐름에 따른 진리를 모은다면
다시 한번 부처님의 정법을 볼 수 있게 될 것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 보람있고 참된 삶을 이루어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로 나아갈 수 있게 될 것이며
불교를 믿는 나라는 모두 양심이 밝고 정의가 바로 서는 건강하고 힘찬 나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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