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불교, 신, 성경, 변화기, 무질서, 자선 본문

☆ 진실의 근원

불교, 신, 성경, 변화기, 무질서, 자선

gincil 2013. 4. 27. 11:35

첫째,  진실의 근원에서 많이 인용하는 사상과 세계관이 불교로 보인다고 하면서

진리에 가까운 종교가 불교인지 물었습니다.


나는 불교를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곳에서는 불교에서 보면 반대할 말도 많기 때문입니다.


그중에서 모든 것을 창조한 절대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기존의 불교와 다릅니다.

이곳에서 절대적 존재를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한 세상을 생각할 때 

완전한 의식과 절대적 권능을 가진 초월적 존재를 제외하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 불교는 부처를 강조하면서 절대적 존재를 고려하지 않습니다.

초기에 부처님은 10무기라 하여 절대적 존재에 대해 언급하기를 꺼려하셨지만

후대의 제자들은 부처님을 신격화하는 과정에서 

인도의 절대적 존재인 브라만(범천왕)을 부처님을 수호하는 신으로 부처님의 아래로 내려버렸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계와 부처님이 가르치시는 진리는 

부처님이 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한 것이며 태초부터 존재한 일이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태초에 이 우주를 만들고 

완전한 성자를 이땅에 출현시킨 근원적 존재인 절대자를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곳에서는 오직 실상과 이치만을 이야기하지 불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우주가 하나인 이상 실상 또한 하나이며 세상이 이루어지는 이치 또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설혹 그것이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할 경우가 있겠지만 

그것은 실상이 그러니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일 뿐입니다.


스승이신 이삼한님 또한 불교에 대해 문외한이었다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그분은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무식한이었지만

깨달음을 얻으시고 한 후 어느 스님과 대화하는 중에 반야심경을 들었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난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 구절을 듣고

“이상하다. 이 세상에 깨달은 사람이 또 있단 말인가?” 하고 말했답니다.

그때 그 스님이 그 책은 과거 부처님이 깨달으신 체험을 말씀하신 반야심경이었다고 하니

그분께서는 그제서 불교에 그런 경이 있는 줄 알았답니다.

그러니 어찌 이곳에서 불교 편을 든다고 하겠습니까?


다만 현재 불교는 본 가르침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왜곡되었지만

본 가르침은 완전한 정각을 얻으신 부처님이 보신 실상과 인과법을 설명한 것이니

그때 깨달은 분이나 지금 깨달은 분이나 실상을 보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내용이 유사해 보이는 것입니다.


모든 부처님이 반야를 체득함으로 인해 깨달음을 얻고 인과를 보았으며

반야를 보고 인과법을 깨친 이상 그 맑은 마음으로 보는 실상과 이치는 다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불교와는 모습은 비슷해도 자신의 업을 닦아 완성으로 나아가는 실천법은 완전히 다르니 

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두 번째, 절대적 근원의 존재와 높은 차원의 신의 존재에 대해 질문했군요.


홈페이지 생명의 비밀에 천상에 존재하는 몇 개의 높은 차원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습니다.

지금 님은 그러한 차원 중 근원적 절대자와 높은 차원의 신들과 혼동을 일으켜 

이미 다 설명해 놓은 것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히 이해하고 질문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 창조주, 불성은 각 종파의 사람들이 우주의 근원적 존재인 창조주를 칭하는 말로 

보는 시각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말이니 달리 생각할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따라서 지금 님이 의문을 갖고 있는 높은 차원의 신의 세계에 대해 설명만 하면 될 듯합니다.


이 세상은 현실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결과에 따라 가게 되는 몇 개의 차원이 있습니다.

한과 집착 속에 유계로 돌아다니는 지옥계와 윤회를 벗어나 편안히 머무르는 영생계, 

그리고 높은 의식의 신들이 사는 천상계와 우주의 모든 것이 비롯된 근원의 세계(창조의 세계)가 있습니다. (이중 설명안한 다른 차원의 세계는 홈페이지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바른 이치에 따라 좋은 삶은 산 영혼들은 삶의 결과에 따라 영생계에서 천상계로 나아가고 

천상계에서 더 공덕을 쌓으면 마침내 우주의 근원적 차원인 창조의 세계에 들어가게 됩니다. 


여기를 조물주의 영역, 창조주의 영역이라 하는데 

이 근원의 세계가 바로 우주를 구성하며 유지하고 창조하는 신성(불성)의 세계로서 

모든 현상계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어 여기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근원의 세계는 높은 천상에 도달한 신이 더욱 완전한 공덕을 얻어 가는 곳이니

깨달은 자가 이 세상에 나타나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치는 삶을 사는 이유도

완성으로 나아가는 우주의 이치 속에 정해져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곳을 과학적으로 설명하자면 순도 100%의 완전한 신성체가 머무는 곳이니

천상의 높은 차원의 신들은 99% 이하의 경지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곳은 우주를 완전한 세상으로 설계할 수 있는 완전한 의식과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어야 가능한 곳이니

그동안 태어났던 성자들도 그러한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분들은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몸도 제대로 간직하기 어려운 분들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생각하는 성자들의 모습은 

후대에 제자들이 그분들을 숭배하기 위해 과장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들 중 이생에서 세상을 사랑한 공덕이 있었기에

근원적 차원에 이른 분도 계실 것입니다.


근원의 세계는 성자들의 의식도 닿지 않은 너무나 순수하고 신성한 차원이기에

과거 부처님도 10무기라 하여 여기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했으며

예수님 또한 그러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높은 차원의 신들의 현상을

절대적 존재인 창조주와 같이 생각해서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창조주가 아닌 높은 차원의 신들은 세상일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습니다.

설혹 관여할 일이 있으면 인간의 몸을 빌어 세상에 내려와 일을 하게 됩니다.


이 우주의 법칙은 일을 생명의 세계에 몸을 빌어 태어나야 일을 할 수 있지

결과의 존재인 신의 형태(죽은 생명의 혼)로서는 세상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높은 차원의 신들이 사는 세계에는 수많은 윤회를 거쳐 높은 차원에 이르게 된 신(죽은 영혼)들이 많으며

그 품격도 공덕의 크기에 따라 다 다릅니다.

그래서 각자의 능력에 따라 세상의 일을 할 수 있는 정도가 다 다르고 그 역할도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 성경의 진실성과 가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새글 게시판 110번 성경과 불경의 변천과정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넷째, 과연 지금 세상이 과연 혼탁하고 멸망의 순간에 가까워져 있느냐고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생각하는 것이야 각자의 자유이고 모든 것이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모든 사람의 마음이니 

탓할 수는 없고 당연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세상사람들이 바라는 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지어진 원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니 

인과에 의해 이루어지는 뜻의 세계를 보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세상사람들은 대부분 인간의 신성한 가치와 의미를 상실한 상태입니다.

완전한 세상과 자연의 조화와 진리에 대한 믿음을 잊어 버렸기에

자신이 태어난 의미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마음의 고향을 잃어버리고 정처없이 평생을 헤매다 

죽은 뒤에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고 불안한 공포 속에 떠나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목적은 현실속의 가족과 돈과 명예가 되지요.

그러나 모든 목적을 현실의 소유에 두다 보니 욕망이 많고 집착이 많고 한이 많아서

죽은 영혼은 이승을 떠나지 못하고 헤매며 유계에 빠지고 맙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종교에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목적을 찾습니다.

신에게 귀의하면 자신을 구원해줄 줄 알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러나 그것도 대부분 자신의 이기적 구원을 위한 것이지 순수한 사랑에 의한 자기 헌신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러한 사람들이 아무리 신에게 의지한 들 그 영혼은 세상의 이치를 몰라 무지하고 매우 허약하기에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한 신의 뜻과 질서정연한 생명계의 틀은  

맑은 강한 영혼에게만 높은 차원으로 올라갈 수 있도록 질서지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이나 예수님이나 부처님도 거역할 수 없는 태초부터 정해진 생명의 질서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람들은 완전한 조화와 질서가 있는 세상과 

이것을 주관하고 있는 절대적 신의 존재를 거의 믿지 않습니다. 


그러니 믿을 것은 자신밖에 없고 이기적 욕심을 위해서는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신성과 진리가 사라진 세상이니 양심을 지킬 이유가 사라진 것이지요.

그래서 인간 소외는 극에 달하고 비인간이 득실거리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불안해 살 수가 없는 어두운 세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 세상이 어떤지에 대한 판단은 각자가 경험해온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니

이 세상이 얼마나 험악하고 비인간적인지 세상을 겪어 보고 한 세월이 지나고 나면 알게 될 것입니다.


책 속에서 보는 세상과 상아탑에서 배우는 세상은 매우 이상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눈을 떠야 속지 않고 세상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지금 세상은 욕망의 노예가 되어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기에 죽은 후 평안을 얻을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리고 종교는 맑은 가르침을 잃고 미신화되어 종교를 믿어 천상에 오를 자도 거의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말세라 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세상에 혼돈이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겠습니까?




다섯째, 이치를 배워 행하면 인격적 성숙 뿐만 아니라, 부의 성취와 같은 세속의 일에서도 성공해야 하는데 

이치와 도리를 저버림으로써 부와 권력과 명예를 얻는 현실의 모순과 

성자들과 같이 올바르게 산 이들을 고통스럽게 살아야 하는 현실을 살펴볼 때

이치가 잘못된 것이 아닌지 하는 질문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문을 가지기 전에 자신이 세상을 완전히 보지 못한다는 사실과

세상이 완전한 법계이며 진리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성자들은 항상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먼저 인식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세상사람들은 이 세상이 혼동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세상을 보는 분들은 항상 세상이 완전하고 질서정연하며

모든 것이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님과 그분들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세상이 본래 혼동투성이며 무질서하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성자들이 잘못 본 것일까요?

과거나 현재나 이 세상은 변함이 없습니다.

대답은 현재 님의 시각이 아직 열리지 않으니 모든 것이 안개 속에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 일은 원인에 의해 움직이며 그것은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사람들이 성인들의 말씀을 읽고 착각하는 것이 

세상 일이 책에 쓰여진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자들이 쓴 글은 하나의 현상을 일예로 들어 설명한 글이지 

여러 가지 현상을 복합적으로 설명한 글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원인이 복합적으로 개입되면 인과법으로 설명해야 할 일이 더 많아지는 것입니다.


선인선과 악인악과는 어김없는 인과의 법칙이지만 

그것은 이치가 뒤집어진 악한 세상에서는 맞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악한 세상에서는 인간들이 인과의 질서를 어기려는 나쁜 원인을 지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곳에서는 불성실한 자가 성공하게 되는 인과법에 어긋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김없는 인과법에 의한 결과이니 

인과법을 피하고 인과법을 어기려는 원인이 지어져 인과법이 파괴되는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세상이 계속되면 결국 그 세상은 무질서속에 사람들은 서로를 불신하게 되고 

상대를 믿고 거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스스로 붕괴하고 맙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법을 어긴 원인을 지은 세상이 받게되는 어김없는 인과의 결과입니다.


우리나라에 그런 어지러운 일이 많다는 것은 

세상이 사악해졌다는 증거이며 비인간적인 세상이 되었다는 증거이니

그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매사에 조심해야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가 성공한 듯해도 그는 곧 자기 꾀에 망하고 맙니다.

그자가 저지른 비양심과 배신과 사악함을 좋아하는 이는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따금 메스컴에서 잘 나가던 유능한 인사가

하루 아침에 부정부패에 연루되어 감옥에 가던 것을 많이 보고 높은 자리에서 낙마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그것은 바로 얕은 꾀나 음모는 사람들의 미움을 사기 때문에 곧 마각을 드러낼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설혹 인과의 이치가 현실 속에서 작용하지 않아 악한 자가 현실 속에서 그 위용을 계속 유지하더라도

그 영혼이 망해있기 때문에 그의 영혼과 후생은 매우 불행해지는 것이니

인과법의 엄정함은 한치의 어김이 없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이 보지 못한다고 해서 

세상이 혼동투성이로 이치가 없다거나 

깨달은 이가 세상을 거짓되게 보았다고 함부로 말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인간애의 발현으로 남을 돕는 선행이 과연 진정한 공덕이 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남을 돕는 것은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는 것이니 가장 위대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입니다.

무조건적 사랑은 잘못된 결과를 낳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게으른 자를 무조건 도우면 게으른 자는 평생 그 게으름을 이어갈 것이니 

쓸데없는 자를 도운 것이 되고 그 재물을 헛되게 쓴 것이 될 것이며 

또 헛된 일을 구분할 줄 모르고 함부로 재물을 버린 사람은 그 어리석음이 대를 이어가

후생에도 계속 헛된 일을 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을 진정으로 안타까워한다면 무조건적인 적선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과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자존하게 도와주어야 할 것입니다.


남을 돕는 사랑에도 이러한 분명한 이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우리는 올바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길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남을 도울 때는 자신이 아는 범위내에서

능력 닿는대로 그들을 도와주면 됩니다.


돈이 있는 자는 돈을 주고, 마음이 있는 자는 동정심을 보내며

진리를 아는 자는 진리로 축복하면 됩니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가는 종교라면 무조건 남을 도우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이치에 따라 세상을 축복하고 상대를 축복할 수 있는 사랑을 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상대가 좋아지고 세상이 좋아지는 참된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덧붙여 세상일을 운영하는 이치를 한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 일은 원칙적으로 열심히 일한 자는 부족함이 없이 살고

노력하지 않은 자는 배가 고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세상의 원리로 확립될 때 세상은 제대로 굴러가게 됩니다.


그 다음으로 자연재해나 가정파탄, 불구 등으로 인한 불가피한 가난이 있을 때

국가가 공적 재원으로 이들을 구조해야 합니다.


이러한 틀이 제대로 돌아갈 때 

국가는 모든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는 근면검소한 풍조 속에

나라는 갈수록 부강해지고 그들이 낸 세금으로 불우가정이나 장애인들이 

인간적 생활을 누리며 각자의 가능성을 키워갈 수 있게 됩니다.


개인들이 돕는 구호는 이러한 틀을 보완하는 정도에 그쳐야 하며

높은 차원의 종교는 이런 무조건적 구호를 외칠 것이 아니라

올바른 이치로 불우한 이웃을 자존하게 만들어 

스스로 인간적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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