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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중도는 공이 아니다. 본문

☆ 진실의 근원

불교의 중도는 공이 아니다.

gincil 2013. 7. 26. 14:46

중관론자들은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이 공이며 그것을 초전법륜경에서 중도로 밝히셨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공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부처님 가르침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한다.




그러나 초전법륜경에서 중도가 공이라는 말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다. 초전법륜경에서 중도란 팔정도를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상에 전하려 한 것은 공이 아니다. 공은 팔정도를 통해 오랜 세월 공덕을 쌓아 부처의 과를 이루어야 체득하는 것이므로 오직 깨달은 자들 끼리만 이심전심으로 전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깨달은 자만이 느끼는 해탈지심인 공은 중생들에게 널리 전할 성질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중생들에게 전하려 한 것은 공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 당신이 보신 세상을 널리 축복할 수 있는 우주의 실상과 진리였던 것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눈으로 보니 세상은 완전한 법계였으며 인과법에 의해 모든 것이 완전한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셨다. 그곳에는 올바른 이치대로 바르게 보고 깨치고 행하여 마음을 완성시켜 해탈에 이르는 길과 실상과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는 무명에 빠져 자신의 의식을 망쳐 지옥에 빠지는 두가지 큰 흐름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제일 처음 제자가 된 5비구를 만나 고와 락에 빠지는 것은 깨달음의 길이 아니니 해탈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길을 가라고 하셨고 자신도 그것을 행하여 깨달음을 얻었다고 첫 가르침을 펴셨다. 이것이 그 유명한 초전법륜인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초전법륜경에 있는 중도가 부처님법의 핵심이며 공이라는 논리가 불교 속에 들어오게 된 것일까?




그것은 초전법륜경이 갖는 불교사에 있어서의 상징적 의미 때문이다.


초전법륜경은 북방불교에서는 그 의미를 크게 두지 않고 있지만 인도 등 남방불교에서는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경이다.




왜냐하면 부처님이 어두운 세상을 구하기 위해 진리의 빛을 최초로 밝힌 우주일대사의 대사건을 기록한 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초기의 표현에 의하면 초전법륜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신들까지 감동시킨 대사건으로 묘사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소식은 전 우주에 즉각 퍼져 나갔다. 가장 먼저 이 소식을 전한 존재가 바로 사슴동산에 있었던 땅의 신이었다. 땅의 신이 사대왕천의 신들에게 전달 하고, 사대왕천의 신들은 삼십삼천의 신들에게, 야마천의 신들에게, 도솔천의 신들에게, 화락천의 신들에게, 타화자재천의 신들에게, 범신천의 신들에게 차례로 위로 즉각 퍼져 나가 전달되었는데 그들이 한결 같이 외친 말은 다음과 같다.




“세존께서 바라나시에 있는 이시빠따나의 사슴동산에서 위없는 법륜을 굴리셨나니,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도 천인이나 마라도 범천도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이것을 멈추게 할수 없다!”




즉 무지몽매한 이 세상에 최초로 밝혀진 부처님법은 어느 누구도 멈추게 할 수 없는 ‘불사(不死)의 문’을 여는 법으로 산천초목이 춤추고, 온 우주가 진동하는, 한량없는 찬란한 빛으로 표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중관론자들은 초전법륜과는 전혀 무관한 공을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라는 권위를 부여받기 위해 초전법륜경의 중도에다 공을 결부시키는 무리수를 두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중관불교에서는 다음 구절에서 부처님이 중도라는 깨달음의 실체를 밝혔으며 그것이 중도이며 그 실체가 공이라고 주장한다.




『그 때에 세존은 다섯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이 고와 낙, 두 변을 버리고 중도(中道)를 바르게 깨달았느니라.』[남전대,율부]




그러나 이 구절은 깨달음의 실체를 이야기하는 구절이 아니라 깨달음에 이르는 방법에 대해 언급하는 구절이다. 문장구조상 이 방법도 아니고 저 방법도 아니니 올바른 방법으로 해탈에 이르렀다는 구조가 되어야 하는데 앞에서는 두 방법이 틀렸다고 말하다가 갑자기 목적격인 중도를 깨달았다고 하니 문맥구조상 맞지 않는 것이다.




이러한 의문은 원문을 보면 명백히 드러난다.




『초전법륜경(初轉法輪經, The Dhammacakkappavattana Sutta)』


세존께서는 다섯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출가자가 따라서는 안되는 두 가지 극단이 있다. 그것은 저열하고 통속적이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이며,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비구들이여, 이러한 두 가지 극단을 따르지 않고 여래는 중도를 완전하게 깨달았나니, 이 중도는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으로 인도한다."




그렇다면 이 중도란 무엇인가? 그 답이 바로 다음 구절에 바로 나오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성스러운 팔정도(八正道)로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생계[正命], 바른 정진[正精進], 바른 알아차림[正念], 바른 집중[正定]이다. 비구들이여, 여래는 참으로 이 중도를 통하여 완전하게 깨달았으며, 눈을 만들고, 지혜를 만들며, 고요함과 높은 지혜와 바른 깨달음과 열반을 얻었다.”




이처럼 초전법륜경 자체에서 팔정도가 바로 중도의 실체이며 중도가 바로 방법론임을 직접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원문에서 중도란 것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임을 명확히 하고 있으며 중도가 공이라는 말은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데 중관론자들은 전해들은 공논리를 생각없이 되풀이하며 중도가 부처님의 깨달음의 본질이며 그것이 공이라고 확대해석하여 견강부회하고 있는 것이다.




공은 부처님이 성취하신 해탈지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일반인들이 말로 표현조차 하기 어려운 경지이다. 그것을 함부로 말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우며 주제넘은 짓이다.




그러나 오늘날 불교는 극단적으로 관념화되어 오직 깨달은 자만이 증득할 수 있는 반야지경을 철학적 사유의 공으로 정의내리자 모든 불제자들이 마치 자기가 깨달았다는 듯 공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며 함부로 농단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 공을 우주적 차원으로 확대하여 본래 이 우주 자체가 환이며 나타난 바가 없는 것이라고 극단적으로 관념하여 부처님이 실상을 보고 명백히 밝혔던 완전한 인과법과 팔정도를 경시하고 누구나 공만 깨치면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고 하여 끝없는 윤회를 거쳐 공덕이 이 세상을 덮어야 이룰 수 있는 신성한 해탈지경을 경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도가 공이며 우주의 실체라는 말은 부처님이 절대 하신 적이 없다.


그러므로 중관론자들이 중도대선언이라고 주장하고 하고 초전법륜에서 중도가 공이라 밝혔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초전법륜에서 밝히신 것은 중도도 아니요, 공도 아니며 오직 완전한 법계와 인과법이 있으니 인과법에 따라 해탈에 이르는 가장 올바른 원인을 짓는 팔정도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초기 부처님 가르침의 요체는 본래부터 아무 것도 없다는 공을 깨치는 것이 아니라 인과의 이치에 따라 열심히 배우고 계율을 행하여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을 이루는 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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