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무아설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다 본문

☆ 진실의 근원

무아설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다

gincil 2013. 7. 26. 14:47

부처님은 끝없는 전생을 돌며 선근과 공덕을 쌓으시고 마침내 이 땅에 오셔서 수많은 수행을 거쳐 마침내 인연이 무르익어 어느날 새벽 자신 속에서 마지막 업이 사라진 해탈심을 얻어 마침내 깨달음을 이루셨다. 그리하여 삼계의 실상을 보는 법안을 얻어 일체지자가 되신 것이다.


그래서 그분이 하신 말씀은 오랜 동안 감추어졌던 이 우주의 실상과 이치를 밝히신 것으로 그로인해 사람들은 오랜 동안 짓눌려오던 애매한 신의 우상과 무지에서 벗어나고 눈뜬 장님들이 생각으로 지은 모든 말법에서 벗어나 참된 진리와 삶의 의미를 찾아 살게 되었다.


부처님의 말씀은 삼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법안으로 실상을 밝힌 것이기에 중생들은 그 말씀에 따라 행하면 모두 현실로 증명이 되어 부처님법은 인류 최고의 진법이 되었으며  부처님을 인류 최고의 스승으로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지자로서 모든 세상을 하나의 시각으로 바라보았기 때문에 어떠한 문제도 막히는 게 없었고 어떠한 말씀도 서로 모순되는 것이 없었다. 그분의 가르침은 삼계를 한눈으로 보신 것이기에 모든 것이 명확했고 간단했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한치의 어김없는 인과의 이치로 이루어지고 있으니, 진리의 가르침에 따라 무명에서 깨어나 좋은 원인을 지으면 천상에 이르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지니, 끝없이 도는 생명의 윤회 속에서 팔정도를 열심히 배워 이고득락의 복을 짓고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라는 것이었다.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이러한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해 아무런 의문이 없었다. 

따라서 오늘날 문제가 되고 있는 윤회의 유무, 업의 주체의 유무, 무아와 비아, 이 세상의 실체성과 공성에 대한 의문은 생겨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르거나 궁금한 것이 있어 물어보는 즉시 실상이 비치는 대로 바로 답을 해주셨기 때문이다. 불행하게도 요즘 쟁점이 되고 있는 문제에 대해 기록된 것이 없으니 한치앞도 보지 못하는 눈뜬 장님들이 모두 생각 속에서 신기루를 만들며 헤매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육친 제자들은 희유한 보물인 부처님 법을 잘 보존하고 널리 전하여 큰 공덕을 쌓고자 했다. 그들은 각자가 불사의 진리를 전한다는 사명감으로 충만했으며 인도 전역으로 흩어져 부파를 형성하며 법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육친제자들이 살아계시는 초기에는 부처님의 원음이 지켜졌으나 그분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10여세대가 흐르자 부처님 가르침은 그 실체가 점점 흐려져 갔다. 당시에는 문자문화가 발전하지 않아 구전으로 전승된 것이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그 후로 불교교리의 정립과 전파는 육친 제자들의 몫이 아니라 그들에게서 배운 제자들의 몫이었다. 그들은 구전되어왔던 부처님의 참 진리를 세상에 널리 전하기 위해 각 부파별로 자신들이 보고 듣고 이해한 것을 기초로 교리를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부파불교(아비달마)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법안이 열려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분들이 아니라 불교를 이론적으로 연구한 학승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정리하고 사유한 불교교리에는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의 습이 묻어있었다. 또한 그들은 인도에서 태어나 힌두적 관념과 논리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그들이 불교를 정립하면서 만들어낸 아비달마 이론 속에는 자연스레 염세적이고 관념적인 힌두교의  논리가 자리잡게 되었다.


즉 오늘날 불교교리는 부처님의 생생한 깨달음의 원음이 아니라 부파의 논사들이 철학적 사유로 정리 보완하고 취사선택한 이론적 체계로서 힌두교의 염세성과 마야(환, 공, 무실체)성이 강하게 묻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인 것이다.


그들은 부처님이 완전하신 분이니 부처님 말씀을 한치의 오차나 흠이 없게 만들기 위해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당시 인도 풍토에 맞게 호소력있는 사례와 신화를 가미하면서 최고의 완성된 체계를 만들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부파의 논사들은 다양한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선택하여 각각의 의미에 대해 상세히 해설하고 나름대로의 정의를 내렸으며 이를 정리할 필요성에서 일정한 체계로 틀을 짰다. 이때 가장 두드러진 방식은 관계있는 교설을 숫자에 따라 정리하는 방법으로 일법(一法), 이법(二法), 삼법(三法)과 같은 순서로 배열하는 방법과 동일한 주제를 한 곳에 모아 정리, 배열하는 방법이었다. 즉 삼법인, 사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라는 분류들도 원 가르침에는 평범한 언어로 상황에 따라 사실적으로 표현된 것밖에 없었으나 부파불교의 논사들에 의해 숫자적인 개념으로 알아보기 좋게 새로 정의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불교를 체계화하고 자신들의 언어로 열반, 무루, 무상, 무아, 중도, 공, 삼법인, 사성제, 육근, 육경, 팔정도, 12연기 등과 같은 개념과 이론들을 구축해나가면서 이러한 단편적인 정의들이 부처님의 전체적인 말씀과 모순되는 현상을 가져오게 되었다. 즉 부처님 살아계실 때는 모든 것이 하나의 삶의 이치로 조화되었으나 중생들이 자신들의 생각으로 이론화하자 서로 모순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이 무아에 대한 문제였다.

오늘날 무아론은 불법의 핵심교리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친설이 아니라 논사들이 인위적으로 설정한 정의일 뿐이다. 부처님은 무상경에서 오온은 내가 아니라 했지 내가 없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후대의 논사들이 자신들의 시각으로 부처님이 무아론을 밝혔다고 주장하며 하나의 진리명제로 정립한 것이다.


무아론이 불교의 주요교리 중 하나로 채택되자 불교는 심각한 자체 모순에 빠지게 되었다. 본래 불교의 기본교리는 선인선과 악인악과라는 철저한 인과법에 의해 자기가 지은대로 과보를 받으며 해탈에 이를 때까지 끝없이 윤회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이띠붓따까와 같은 초기 경전을 살펴보면, 선한 원인을 지으면 천상에 나고 나쁜 원인을 지으면 지옥에 떨어진다는 것이 기본형식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무아론이 하나의 기본교리로 정의되면서 불교는 끝없이 윤회하며 업을 지고 가는 자아의 주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근본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자업자득의 원칙이 성립하려면 윤회하는 자아의 동일성이나 인격의 지속성이 요청되는데 무아론은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기 때문에 기억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 책임의 소재 등을 설명할 방법이 마땅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나의 근본이 되는 자아의 실체란 없는 것일까? 무상경에서 오온이 내가 아니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의 본 뜻은 무엇일까? 과연 부처님이 자아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부정하여 염세적으로 살라 하신 것일까?


아니다! 부처님은 나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무상경에서 말씀하시고자 한 뜻은 오온을 진정한 나로 착각하여 육체와 욕망에 집착하지 말고 부지런히 팔정도를 닦아 참된 자아를 완성하여 해탈에 이른다 하신 것이지 윤회의 과를 받아 지옥에 떨어지거나 천상에 이를 수 있는 나를 부정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의미는 열반경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열반경』에서 “나 자신에 의지하고 법에 의지하라.” 했으며, 『법구경』에서는 “나의 주인은 나이며, 나를 제어하는 것은 곧 나이다.”라고 하셨는데 이는 바로 자아가 바로 모든 삶과 수행의 핵심 주체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럼 무아경을 살펴보자.

그 요지는‘나라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오온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내가 아니며, 내가 원하는 것은 영원하고 좋은 것인데 오온은 무상하고 괴로운 것이니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며 나의 자아가 아니다'라고 올바른 지혜를 갖고 관찰하면 오온을 싫어지고 사라져 이를 벗어나 해탈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해탈하면 '나는 해탈했다' 는 지혜가 생겨나서 '태어남은 부서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지며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고 하신 것이다.


이런 경전을 살펴볼 때 무상경은 참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오온과 동일시될 수 없는 참된 자아의 존재를 설정하고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비아론을 주장하는 입장에서는 오온이 자아가  아니라는 무상경의 말씀은 비아론이며, 업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론은 아니라고 한다. 그리하여 윤회와 관련한 불교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 완성해야 할 어떤 의식의 존재, 즉 푸드갈라와 같은 심식류, 아뢰야식, 여래장, 진여, 불성의 존재 등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무아론자들은 어떤 형태의 의식체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힌두교의 아트만설을 받아들이는 유아론의 일종으로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무아론자들은 인간존재를 인연이 모인 『오온의 화합물』로 간주하고 해탈이란 이러한 오온의 집착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는 일종의 심리적 소멸현상으로 본다.


그러나 앞의 무상경에서도 살펴보았듯이 불교에서는 해탈을 하게 되면 오온의 공성을 자각하는 마음을 증득하게 되는데, 이런 마음이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해탈이 단순히 심리적 변화에 불과하며 모든 것을 소멸하여 사라지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불사의 진리를 밝힌 위대한 종교인 불교라 할 수 없을 것이며, 끝없는 윤회를 통해 진리를 배우고 공덕을 쌓아 자신을 갈고 닦아 좋은 세상과 인간 완성을 지향하는 불교의 가르침을 모두 허망하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어쨌든 무아경에 근거하여 무아가 불교의 기본교리로 자리잡자 이를 둘러싼 거센 알음알이 논쟁이 시작되었다. 즉 불교의 기본교리가 선인선과 악인악과의 인과론에 기초한 생명의 윤회를 기반으로 하는데 윤회의 주체를 부정하다 보니 불교교리 자체의 성립이 어려워진 것이다. 부처님은 윤회를 당연한 듯이 말씀하셨고 오온을 나라고 집착하지 말라고도 하셨으니 이 둘의 관계를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난감해진 것이다.


부처님은 육친제자들에게 팔정도를 수행하면 그 과보로 천상에 나고 다음 생에 해탈을 얻어 부처에 오른다고 수기를 주셨다. 이것으로 부처님의 수행과 자아에 대한 가르침은 완전하게 마무리된 것이다. 즉 부처님이 가르쳐주신 팔정도에 따라 열심히 노력하면 저절로 해탈에 도달하는 것이니 자아의 존재 유무를 따질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알음알이를 내는 중생들이 무아론이라는 불필요한 말을 만들어내어 사량으로 헤아리려고 하니 무아와 윤회 간의 논리적 모순을 이론적으로 해명해야 할 문제에 부딪힌 것이다. 


즉 무아론이란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 실천과는 관계없이 순전히 중생들의 알음알이 충족을 위해 만들어진 형이상학적 사변의 문제인 것이다. 나의 실체가 무엇이든 간에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이고득락의 복을 얻고 해탈에 이르러 세상에 자비를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므로 구태여 무아라는 개념을 만들어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파의 논사들은 불교의 기본교리인 윤회와 무아 사이에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여러가지 알음알이를 내는데 그중 주요한 아이디어가 인간의 생명 속에 오온과 별도로 기억을 지니고 가는 존재를 상정하게 되는데 이런 유형의 이론을 심식류라고 한다. 


초기 상좌부에서는 오온 이외에 구체적 심식에 대해서는 명확히 나타나지 않고 있으며 윤회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해 모든 일체법이 유유상종으로 인연지어진다고 주장하며 윤회 또한 그렇게 연결된다는 일반적인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죽은 자의 오온의 습이 비슷한 습을 지닌 미래의 부모와 인연을 맺어 다시 윤회한다고 본다. 


그리고 상좌부의 가장 큰 부파였던 설일체유부에서는 업력이 색의 일종인 무표색에 담겨 후생으로 이어진다고 보고있다. 그러나 설일체유부의 주장대로 업력을 담은 무표색이 색온에 포함된다면 죽음으로 색온이 파괴될 경우, 몸에 부착되어 있던 무표색도 함께 멸하게 되는데, 어떻게 그 업력이 남아 다시 오온을 형성하여 윤회를 성립시키는가에 대한 답이 궁색하게 되었다. 


설일체유부의 일파인 경량부도 무아설과 업보를 조화시키는 문제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만약에 인간 존재가 무아설에 의거, 일시적 인연에 의해 만나는 제법의 흐름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간이 업의 주체로서의 나와 업보를 받는 나 사이에 동일성을 주장할 수 있겠는가? 도대체 과거에 지은 업은 어떠한 형태로 어디에 존속하다가 과보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일까? 


경량부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대답으로서 인간 의식의 밑바닥에 존재하고 있는 어떤 기체가 있음을 상정했다. 부처님은 윤회한다고 해놓고 오온은 내가 아니라고 했으니 오온 이외에 다른 존재를 상정한 것이다. 이것을 일미온 혹은 근본온이라 부르며, 이 일미온은 언제나 동일한 본질로서 작용하고 있는 미세한 의식으로 윤회의 주체가 되는 존재로 보았다. 


이 문제와 관련해서 독자부는 독특한 이론을 주장했다. 인간에게는 오온과는 다른, 그러나 오온을 떠나서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非卽蘊非離蘊)으로서의 푸드갈가라는 것이 있어 이것이 업보를 받는 주체로서 작용한다고 본다. 만약 푸드갈라가 오온 이외의 어떤 존재라 하면 그것은 어떤 영원한 존재를 인정하는 상견에 해당되며, 만약 푸드갈라가 오온과 동일하다면 모든 것이 사라지면 끝이라는 단견에 빠지므로 푸드갈라는 오온과 같은 유위법도 아니요, 오온과 다른 무위법도 아닌 규정하기 어려운 독특한 존재라 보는 것이다. 이 이론은 항시 변하는 현상적 존재로서 인간의 자기동일성을 확보와 동시에 열반을 유부에서처럼 무위법으로 간주하지 않고 유위법과 무위법의 중간적 형태로 파악하려는 입장을 취하게 된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화지부에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을 주장하였는데 이 주체들은 개체의 죽음과 함께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여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모든 생명체의 생사는 물론 궁극의 해탈에 이르기까지 부단히 돌고 있는 윤회의 주체로 생각되었다. 


그리고 정량부에 의하면 과보식(果報識)이라는 종자가 있어 이는 잠복기간 동안 불변하게 존속하는 것이 아니라 근거없이 돌며 떠돌다가 인연을 만나는 경우 현상으로 나타난다고 하는 부실법(不失法) 혹은 잠주멸설(暫住滅說)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초기불교에서는 이런 심식류를 가지고 어떻게 기본교리로 설정된 무아설과 모순없이 윤회를 설명하려고 했을까?


여기에 대해 부파의 논사들은 불교에서는 인간의 영혼이 따로 있어 윤회하는 것이 아니라 업이 인연에 따라 흩어지고 만나 일시적으로 현생을 이루는 것으로 인간 존재를 지속적인 흐름의 한 부분으로 본다. 즉 현재의 강물이 과거의 물이 아니라 현재의 물만 존재하지만 과거의 물과 현재의 물이 이어지기에 강물이라 부르듯 인간도 과거의 업과 연결되지만 그것은 과거의 인과를 이어받은 오온이 그대로 돌아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오온이 흩어졌다 인연따라 다시 만나 현생을 구성하는 것으로 그 흐름 자체가 일관된 동일성을 가지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부파의 논사들은 윤회의 주체가 동일하지는 않지만 하나의 인연의 흐름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봄으로 자아의 존재를 부정하는 무아설과 모순없이 업을 설명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엄밀히 말하자면 조삼모사적인 해석이다. 오온과 별도로 나의 삶의 흔적을 간직한 어떤 심적인 요소를 상정한다면 이는 무아설이 아니라 유아설의 일종인 것이다. 비록 오온과 같이 흩어져 인연에 따라 일시적으로 모여 새로운 주체를 만든다고 하지만 기억을 간직하는 어떤 요소가 중심이 되어 새로운 자아의 존재를 만들어나간다는 점에서 어떤 형태든 윤회의 주체인 자아의 실체가 존재함을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 불교학자들은 이런 이론들이 무아론에 속하기는 하지만 실제 심식류는 오온만 인정하는 무아적인 교리로는 윤회의 주체와 해탈심을 설명하기가 어려워 유아적인 논리를 편법으로 활용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이 세상의 모든 실체를 부정하는 대중부와 대승불교에서는 상좌부 계통의 소승부파들에서 주로 주장된 이러한 심식류들은 모두 무아설에 반한다고 주장하며 인간은 오온이외에 다른 것이 없으며 해탈은 오온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 다가오는 소멸현상으로서 결국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나중에 유식론자로부터 악취공자라고 비난받는 계기가 된다.


그리하여 나가르주나는 이러한 주장에 근거하여 초기불교의 실체론과 유위적 인과법은 무아론과 무상론에 반하는 말법이라 주장하며 인간은 오온의 집합체로서 어떠한 실체도 없으므로 모든 것이 공이며 자신은 부처님의 근본 법으로 돌아간다고 파사현정을 외쳤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세상의 일체 법(현상)은 다른 것에 의존하여 생기기 때문에 고유한 자성이 없다. 따라서 연기하여 나타난 모든 일체 현상을 공으로 본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진실로 존재하는 것은 <존재>, <비존재>, <그 둘> 및 <그 둘 모두 아닌 것>이라는 네가지 논점(四句分別)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서 연기현상에서 벗어난 것이라 주장한다. 용수는 인간이 사고할 수 있는 4가지 일체의 범주에 대한 모순을 지적하며 그것을 부정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실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중론』 서두의 문구로서 유명한 귀경게는 대담하게 팔불(八不)을 선언한다. 팔불이란 사물의 <소멸>, <생기>, <단절>, <영속>, <동일성>, <부동성>, <도래>, <퇴거>에 대한 부정을 말한다. 그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현상을 <불생>으로서 이해했다. 따라서 생겨나지 않는 사물은 본래 존재하지 않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사고의 대상으로 하고, 그것들을 인식에 의해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더욱이 존재하지 않는 사물을 소멸한다고 보는 것은 논리의 모순이므로 팔부중도로 여덟가지를 모두 부정하여 공을 밝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가르주나는 연기에 의해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실체가 없는 환으로 이해한다. 즉 모든 현상은 “환영과 같으며, 꿈과 같으며, 건달바성과 같다. 생기도 그와 같고, 지속도 그와 같으며, 붕괴도 그와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로 용수의 중관론은 결국 힌두교의 마야(환)사상과 연결되며 불교의 힌두화를 불러왔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즉 나가르주나는 대중부의 무위적 연구를 종합화한 관념적 논리로 부처님이 말씀하신 모든 사실적인 가르침을 방편적인 유위법이라 하여 부정하고 오온도 없고 영혼도 없고 해탈도 없이, 모든 것이 환영이며 그림자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자 유식학파는 요가선정의 체험에서 오는 마음의 작용을 중시하여 공 대신에 마음을 이 우주의 실체로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동안 오랜 인도 명상수행 전통에 따라 선정을 많이 해본 결과 수행자들은 선정의 과정에서 의식의 근원으로 느껴지는 텅빈 마음의 세계를 많이 경험하여 우주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이 공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이해했던 것이다.


즉 인간의 자아의식의 바탕에 깔려있는 불변의 의식체를 우주의 근본으로 인식하고 자아의식의 근원을 찾아 들어가면 우주의 근원인 불성과 이어질 수 있다고 하여 자아의식인 말나식과 우주의식인 아뢰야식의 상호관계와 깨달음의 가능성을 탐구한 것이다.


여기서 아뢰야식의 아뢰야란 뜻은‘간직한다’는 말로서 종자를 소장하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 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어떠한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소의처가 되어 그 속에 종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은 환경이나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모든 세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기존에 계속 되어오던 불교의 근본적 모순인 무아설과 부처님의 수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무아론의 주장대로 업을 실어 나를 실질적인 영혼의 종자가 없다면 제자들에게 공덕을 쌓으면 다음 생에 부처가 된다고 수기를 준 부처님의 말이 거짓이 됨) 선정 속에 나타나는 의식의 근본인 아뢰야식을 자아의 주체로 인식했던 것이다.


그래서 유식론자들은 명상 속에서 나타나는 너무나 당연한 초의식의 존재를, 관념과 논리만 가지고 부정하는 중관학파에 대해, 있지 않은 추상적인 공에 집착하고 있는 극단론자로 비판하면서 논쟁을 벌이게 되는데 불교 교리사에 있어 유명한 중관과 유식의 공과 유에 대한 논쟁이 바로 그것이다. 유식론자들은 중관론자에 대해 ‘그들은 일체가 이름뿐이고 실체가 없다고 보는 것이 올바른 관찰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것이 허망하며 오직 이름일 뿐이라면 어느 곳에 진실이 있겠는가? 라고 하면서 '그들은 최고의 허무론자들로 차라리 아견(我見)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과 같은‘악취공자’보다 낫다' 고 중관론을 질타하게 된다.


유식론자들은 본질적으로 모든 실체가 없어 공한 것이 아니라 그 바탕에는 의식이 있으며 그 의식이 모든 존재를 결정한다고 하여 공 대신에 의식을 근본에 놓고 있다. 그리하여 오직 마음을 우주의 근본으로 봄으로써 이로부터 일체유심조라는 말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 의식에만 집착했기 때문에 중관학파가 허무론자로 오해되었던 것처럼 유식은 또한 사실적인 현상(법)을 무시하는‘주관적 관념론자’로 비판받게 된다. 


유식론자들은 모든 현상계가 오직 마음이 지어내는 꿈같은 것이기 때문에 일체현상이 꿈(공)임을 깨달으면 그 순간 해탈이 온다고 한다. 유식학파의 핵은 바로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이다. 즉 선정으로 모든 현상과 인식이 환임을 깨닫으면 아뢰야식에 얼룩진 업종자가 저절로 사라져 중생심이 홀연 불성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즉 의식을 한번 크게 돌려 우주의 실상이 공하다는 것을 깨닫기만 한다면 한 순간에 해탈할 수 있다는 것이 유식론의 요체인 것이다.


즉 무명으로 인하여 이 세상이 꿈인 것을 알지 못하고 사실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하여 아집[我執]을 내어 윤회하게 되며 법집[法執]을 내어 일체현상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선정으로 이 세상 일체 현상이 아뢰야식이 꿈꾸어 만들어낸 환상임을 깨닫고 공을 자각하면 곧 진여[眞如]의 체득하여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깨달을 때 아뢰야식에서 깨어나 내 자신의 의식과 이 세상의 일체현상이 공하다는  『我空아공, 法空법공』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아와 세계의 공성 즉, 인무아[人無我]와 법무아[法無我]를 깨닫는 것이 유식이 지향하는 바이며 이런 의미에서 유식을 무아론의 완성이론으로 본다. 


그리하여 오늘날 선가에서는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모든 것이 적멸한 자리에 나타나는 소소영영한 주체에 대해 무아설의 전통에 따라 해석하는데, 선정으로 업식에 얼룩진 아뢰야식마저 지워버리면 대원경지가 발현하여 진정한 공과 무아를 체득하여 해탈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나와 이 우주 속에는 본질적으로 공이 깃들어 있는데 이를 진여라고 하기도 하고 불성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진여가 무명에 의해 업식으로 덮혀 있어서 분별과 집착을 내어 윤회를 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업식과 그로인해 나타난 모든 현상이 환이며 착각 임을 깨달으면 무명에 덥혀있는 본래의 진여(진아.불성,무아,중도,법계,연기,진리)가 나타나 해탈을 이룬다는 것이다. 따라서 업식으로 얼룩져 끝없이 윤회하는 중생도 그 근본은 다 같은 진여이며 불성이므로  한순간 그것을 자각하여 깨어나면 중생 또한 바로 깨달음에 이른다고 본다. 그래서 선가에서는 모든 중생이 불성을 갖고 있는데 환에 의해 가려 있으므로 다른 어떠한 것도 필요없이 한순간 모든 것이 환임을 깨우치기만 하면 해탈에 이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상의 삶속에서는 세상 일이 환임을 알지 못하므로 오직 참선을 통해서 이를 깨달으면 시방법계가 내 마음이며 중도이며 공이며 불성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즉 세상을 보되 공임을 자각한다는 것이며 모든 대상에서 벗어나 우주 자체의 본질적인 존재인 절대 공성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즉 나의 공성을 깨침으로서 우주 자체의 본질적인 절대 공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는 초기의 부처님 말씀과는 너무나 다르다. 초기에 부처님은 해탈로 청정하게 마음이 비었음을 보았다는 아공을 주장했는데 이들 중관론자들과 유식론자들은 오온으로 모인 아도 공하고 일체 현상도 모두 공하다는 법공을 주장하게 된 것이다. 즉 부처님이 전혀 말씀하신 바 없는, 이 세상이 모두 마음의 현현이며 그 실체가 모두 공이라는 주장을 하게 된 것이다. 부파의 논사들이 관념적으로 형이상학적 논리를 발전시켜온 결과 너무 심한 논리적 비약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불법의 핵심이라고 알고있는 무아론, 공사상, 아뢰야식, 진여, 그리고 이를 이어받은 참선법이 만들어낸 거대한 관념의 신기루인 것이다. 즉 초기에 부처님은 모든 생명의 공통적 흐름인 윤회를 자연스레 이야기하고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어 다음 생에 그 선근과 공덕을 이어받아 부처에 이른다 하셨는데 앞을 보지 못하는 중생들이 알음알이를 내어 무아론이라는 말을 새로 만듦으로써 이를 정당화시키기 위해 갖가지 인위적이고 관념적인 이론이 만들어졌고 결국 오늘날과 같은 방대한 불교교리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쟁점을 정리할 시점이 왔다.


첫째, 무아론과 비아론 중 어느 것이 옳은 이론인가? 물론 이러한 논변은 깨달음의 실체를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형이상학적 토론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무아론과 비아론 자체가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 아니라 논사들의 머리에서 나온 관념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인가? 오온 이외에 다른 어떠한 영혼의 형태도 존재하지 않는 무아론이냐? 아니면 영혼이 존재하는가? 아니면 오온도 아니고 영혼도 아닌 심식(어떤 의식의 형태)의 일종이냐? 아니면 자아의 바탕에 깔려있는 우주의식인 진여나 불성인가?


오늘날 불교에서 정설이 된 무아론이 진실이라면 모든 것이 실체가 없다는 공사상이 불교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유식론에 바탕을 둔 선정이 중심이 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없다고 하니 선정을 해서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의식의 존재에 대해 부정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현실적 수행과 실제적 깨달음의 필요성에서 오늘날 불교는 아뢰야식과 우주의식의 일체를 통한 깨달음을 본질로 하고 있는 것이다. 


즉 무아론을 주장하려면 자아의 실체를 인정할 수 없으니 나와 별개로 존재하는 우주의식의 존재를 주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논리가 참된 자아의 실체인 아트만과 우주의 신성한 본성인 브라만이 합일하여 해탈에 이른다는 힌두교의 범아일여사상과 궤를 같이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많은 불교학자들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여래장, 진여, 불성 등의 깨달음의 체험은 힌두교의 범아일여 사상과 동일하다고 지적한다. 논리상 불교에서 무아를 체득하여 공성을 깨치고 나로부터 벗어난 진여, 불성을 깨우치는 것이나 힌두교에서 무명에서 벗어나 가장 고양된 자아인 아트만을 얻어 우주적 실체인 브라만을 깨치는 것이나 같은 흐름의 수행법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오늘날 공불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선정으로 아뢰야식이 사라지면 본래부터 존재하는 진여, 불성을 체득하게 되는데 이 마음은 아트만과 다른 반야공이기 때문에 진공묘유의 묘용이 있어 아트만과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 내용 상의 문제이니 깨달아봐야 알 수 있는 문제로 논리적인 문제와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물론 모든 것이 공이며 공을 체득하면 모든 분별과 사유에서 벗어난다고 하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까지 실질적인 깨달음의 성취와 관계없이 논리로 깨달음의 진실을 논해 왔다. 따라서 지금와서 갑자기 깨달으면 모든 의문이 풀린다는 식으로 논의를 얼버무리면 안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동안의 논리의 일관성을 살펴 여기에 대해 분명히 답을 해야 할 것이다.


즉 오늘날 대승불교는 말로는 무아론을 주장하면서 실제로는 유아론을 택하거나 아니면 힌두교의 아트만과 브라만의 합일이라는 범아일여사상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불교가 오랜 세월동안 관념적인 알음알이 논쟁을 벌여온 과정은 모두 힌두교로 가기위한 안간힘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주의식을 주장하는 선가의 주장이 과연 부처님의 정법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무상경에도 나오듯이 해탈하면 해탈했음을 자각하는 마음이 있다. 그리고 자신이 고타마라는 자각도 있으며 아난다의 스승으로서의 자기도 계속 인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마음은 무엇인가? 

이 마음을 있다고 할 것인가? 없다고 할 것인가? 

이 마음을 나의 마음이라 할 것인가? 아니면 나와 관계없는 우주심이라 할 것인가?


둘째, 모든 게 환임을 깨우치는 선정으로 과연 해탈이 가능한가?


부처님은 모든 것을 실체로 인정한다. 그래서 인간의 내면 속에는 전생의 결과로 짓눌러 붙은 숙업이 있어서 진리의 인연으로 바른 이치를 깨치고 팔정도로 마음을 맑게하면 마침내 부처의 종자를 얻어 다음 생에 깨달음을 얻는다고 하신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신 이치인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선가에서는 공사상과 유식론의 영향으로 세상이 환임을 깨쳐 한 소식하면 바로 부처가 된다고 한다. 그들은 부처님이 설한 모든 유위법이 방편이며 진정한 가르침은 모든 것이 비었다는 공이라 한다. 그래서 이 세상 모든 것이 환이고 착각이니 이를 깨치기만 하면 해탈이 온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율을 지키고 팔정도를 행하고 가르침을 배울 필요도 없다. 모든 유위적 가르침이 방편으로 나타난 것으로 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선정의 깨달음법과 부처님의 깨달음법은 기본적으로 다른 법이다.

부처님은 해탈을 이루기 위해서는 끝없는 전생을 돌며 선근과 공덕을 닦아야 하며 팔정도를 지켜 열심히 노력하여 부처의 종성을 얻어야 다음 생에 해탈을 얻는다고 제자들에게 수기를 주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것을 부처님의 정법이라 할 수 있는가?


오늘날 모든 것이 환임을 깨쳐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들이 부처님과 같이 정등각을 얻었는가?

그들이 진정 정등각을 얻었다면 해탈한 맑은 마음에 온 세상이 비쳐 삼계의 실상을 모두 밝히고 어둠 속에 헤매는 중생들에게 밝은 삶의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러지 못하는 이유는 모든 것을 버린 공함만을 보았지 진정한 해탈심을 얻어 마음거울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인연을 끊고 고요히 앉아 마음의 근원을 찾아들어가면 흙탕물이 가라앉듯 들끓던 마음의 먼지가 가라앉아 맑은 공함이 나타난다. 이것을 선가에서는 한소식했다, 공함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말 그대로 이것은 마음의 업이 가라앉아 맑음이 고인 것이지 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 거울이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혼자서 해탈한 것 같아도 세속의 인연을 만나면 다시 업이 일어나 마음이 흐려지며 과거의 습을 되풀이하게 되는 것이다.


진정한 해탈을 하여 세상을 보는 마음거울(법안)을 얻으려면 숙업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

그러나 선불교에서는 본질적으로 숙업을 제거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실질적으로 존재하는 업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그동안 관념적으로 들어온 논리에 근거해 마음 속에서 꿈틀대는 숙업을 환이며 착각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업을 지울 원인을 짓지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업의 존재를 실체로 보았다. 과거에 지은 원인에 의해 자신 속에 남은 것이 바로 업인 것이다. 따라서 이를 지우기 위해서는 환이라 하여 의식으로만 강하게 집념하지 말고 구체적 원인을 지어야 한다. 땅에 넘어진 자는 땅을 짚고 일어서야 하는 것이 영원한 진리인 부처님의 인과법이니 돈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뇌물의 유혹에서 벗어나야 하고 색의 집착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색의 유혹에서 이겨내야 하며 나약한 업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세상을 위해 실천적인 용기를 내야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부처님이 가르치신 것이 바로 모든 것이 환이니 잊으라 하신 말법이 아니라 모든 것은 실체이고 인과법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으니 바른 이치를 배우고 행하여 선근 공덕을 지으면 이고득락의 과를 얻고 다음 생에 이를 바탕으로 더 좋은 자기를 얻어 부처가 되니 방일하지 말고 자기와 법에 의지하여 열심히 노력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선가에서는 업의 실체와 마음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이 환이라 여기며 마음을 닦는 원인을 짓지 않고 있으니 빈자리를 보았다는 사람은 많은데 세상의 실상을 밝히는 참된 정등각을 이룬 이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셋째, 부처님은 깨닫고 나서 그 마음이 공함을 보았다고 했지 이 우주가 공하다고 한 적이 없다. 맑은 반야심을 얻어 그 마음으로 이 세상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세상의 실상과 진리를 밝혔던 것이지 이 세상이 아무 것도 없는 공이라 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깨달음을 얻지 못한 이들이 말로 온갖 깨달음의 경지를 세분하여 만들어 놓고 눈앞에 분명히 존재하는 세상을 아무 것도 없는 환상이며 착각이라고 극단적인 관념에 빠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방대한 철학적 논쟁들과 심각한 의문점이 바로 무아론의 근거에 있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무아설은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부파논사들의 사변 속에서 만들어낸 가설로서 이로부터 구체적 해탈과 관계없는 방대한 관념적 건달바성이 불교학이란 이름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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