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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이 과연 부처님 가르침의 핵심인가?

gincil 2013. 7. 26. 14:47

얼마전 불교관련 질문란에 “무아인데 물질덩어리인 몸뚱아리를 사랑한다고 하는 게 과연 옳은가?” 하는 질문이 올라왔다. 이 질문을 보고 나는 가슴이 쿵하는 충격을 받았다.



지금 공과 무아, 중관불교를 가르치는 사람들은 자신들은 고차원의 불교를 가르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실제 청소년들은 그러한 가르침을 전해 듣고는 이렇게 자신을 소홀히 생각하고 삶을 허망하게 생각하는 염세적 경향을 띄고 있으니 심각한 문제인 것이다.



부처님은 열반하실 때, 가장 중요한 유훈으로 자등명 법등명이라 하여 진리에 의지하고 자기에게 의지하여 부지런히 노력하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는데 오늘날 불교는 자기를 버리고 모든 소망과 의지마저 버리게 하고 있으니 무언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오늘날 불교의 흐름이 공관에 입각하여, 이 세상이 실체가 없고 인과도 없고 옳고 그름도 없고 깨달을 것도 없고 부처도 없다는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논리를 부처님법의 핵심으로 가르치고 있어 젊은이들이 불교를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불교의 핵으로 알고 있는 공이라는 논리는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이 아니라 대승불교 성립 이후에 불교에 들어온 논리이다. 초기 500년간 부처님의 가르침을 지켜오던 전통적인 상좌부 교단 아래서는 공이 우주의 실체라는 말은 없었다.



초기 불교의 기본 가르침은 삼계를 모두 보신 일체지자인 부처님이 기존의 우상과 미신을 타파하고 분명히 밝히신 사실적이고 과학적인 실상법과 인과법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적인 가르침은 인류사 최초로 모든 무명을 타파, 진리로 이루어지는 밝 은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믿고 따르면 그대로 현실 속에 증명되기에 부처님의 말씀은 실상을 밝힌 불변의 진리로 숭상되었던 것이다.



즉 이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인과의 이치가 자리잡고 있으니 세상을 바로보고 바른 이치에 따라 좋은 공덕을 부지런히 지으면 이고득락의 좋은 결과를 얻게 되고 마침내 해탈에 이르게 된다는 것이 초기불교의 기본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다만 공에 대해서는 부처님이 당신의 깨달음의 경지인 해탈지경에 대해 언급하실 때 이따금 나타나고 있을 뿐 형이상학적 주제인 우주의 실체나 철학적 의미로서의 공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이란 오직 깨달은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희귀한 의식현상으로 일반인들에게 말하거나 전할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처님이 세상에 전하려고 한 것은 깨달은 자만이 체험할 수 있는 반야의 공이 아니라 깨닫고 나서 보신 우주의 실상과 세상을 이루는 인과법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초기 불교에 있어서 공은 거의 언급되지 않았고 오직 깨달은 자만이 도달하는 최고의 의식상태로서 일반적으로 의식의 맑게 개임, 마음의 비움, 맑음, 영원한 즐거움, 평안, 열반의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초기경전 중 맛지마 니까야의 소공경에서 이러한 공의 의미를 명쾌하게 설하고 있다.



“아난다여, 이전에도 지금도 나는 자주 공에 든다. 해탈되면 그에게 ‘나는 해탈했다.’는 앎이 생겨난다. 그는 ‘욕망의 번뇌를 조건으로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존재의 번뇌를 조건으로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무명의 번뇌를 조건으로 고뇌가 있지만, 여기에는 없다. 그



러나 유일한 고뇌가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이 지각의 세계는 욕망의 번뇌와 존재의 번뇌, 무명의 번뇌에 관하여 공하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하지 않은 것이 있다. 즉 생명을 조건으로 여섯 가지 감각 영역을 지닌 몸 그 자체를 조건으로 하는 것이다’라고 분명히 안다. 그는 없는 것을 공이라고 여긴다. 하지만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은 있으므로 ‘이것은 있다’라고 분명히 안다.”



이처럼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은 상태를 공이라 보며

거기에 무언가 남겨진 것이 존재할 때, 불공 즉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즉 해탈에 이르면 의식적으로 무명과 욕망과 번뇌는 사라지고(공하고), 눈 귀 코 혀 몸 뜻의 6가지 감각장소를 가진 몸은 비어 있지 않다(불공)라고 분명히 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초기 경전에서 공이란 해탈한 마음의 완전한 상태, 즉 의식의 완전한 맑음,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아니함, 비어있음, 아무 걸림없는 자유롭고 평안한 의식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공이 의식의 차원이기 때문에 의식의 주체인 육체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초기 경전에서 말하는 공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초기불교의 공의 의미는 잡아함경 청정걸식주경(淸淨乞食住經)을 보면 더욱 잘 알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이 경에서 공이란 탐진치 없음, 즉 무명, 갈애, 취착, 번뇌 없음, 열반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공을 얻었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제자들이 스스로 검증할 항목들을 제시하고 있다.



1) 걸식하러 갈 때, 돌아올 때 열망,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있는가?

2) 다섯 가지 감각적 욕망이 사라졌는가?

3) 다섯 가지 장애가 사라졌는가?

4) 다섯 가지 취착된 무더기들(오취온)을 철저하게 알았는가?

5~10) 사념처, 사정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가 개발되었는가?

11) 사마타와 위빠사나가 개발되었는가?

12) 영지와 해탈이 깨달아졌는가?



즉 일상 생활에 있어서 모든 욕망이 사라졌는지 팔정도와 사성제를 저절로 지킬 수 있는 경지에 도달했는지를 확인하여 이것이 완전히 이루어졌을 때 완전한 공, 즉 완전한 마음의 열매인 해탈심을 이루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처럼 부처님께서 설하신 공의 의미는 해탈에 이른 의식의 차원을 설명하는 것으로 오욕의 극복과 삼매의 깊이, 영지와 해탈의 체득 등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불교에서는 이러한 해탈의 의식적 차원인 공을 확대해석하여 우주의 존재론적 근원을 밝히는 형이상학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주의 실체가 공이며 환이며 마음 뿐이라고 철학적, 관념적 주장을 하고 있으니 부처님이 전혀 하시지 않는 말이 불교의 핵심으로 오해되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가장 경계했던 부분이 바로 이와 같이 눈앞의 사실로 증명할 수 없는 우주의 근원과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였다. 잘 아시다시피 이러한 사실적인 문제가 아닌 관념적 의문에 대해 부처님은 무기로 대응하셨던 것이다.



부처님 자신도 본래부터 존재하고 있던 이 우주의 실상과 법을 깨달았다고 했을 뿐 우주의 실체가 마음이라든가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라고 하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따라서 공이 우주의 실체라는 말은 부파불교와 대승불교, 공관불교를 거치면서 불교가 철학화, 논리화되면서 불교를 연구하던 학승들이 부처님이 무기로 제시했던 형이상학적 문제에 대해 추상적, 관념적 논담을 일삼는 가운데 나타난 철학적 사유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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