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신성의 인식 가능성 본문
학자들은 법계의 실상과 이치를 전혀 보지 못하면서
자기 생각만 가지고 신을 생각하며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신은 과연 어떤 존재일까요?
기도하면 도와주는 인정 많은 신인가요?
아니면 지은만큼 이치대로 하는 공정한 신인가요?
신의 실체를 모른 상태에서 신의 형상을 이야기하고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그것은 환상 속의 신기루를 두고 무슨 색깔인지 따지는 것과 같이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인간은 신의 속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 만물이 조물주의 피조물이며 인간은 그중에서 절대자에 가장 가까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식은 완전한 절대자의 의식을 닮아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의식은 조금의 부족이나 흠도 용납하지 않고 끝없이 완전성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을 주체적으로 느끼고 사유하며 자신의 삶을 결정해 나가는 만물의 영장으로
조금만 더 노력하면 신성에 이를 수 있는 가장 고귀한 존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는 이 순간은 매우 소중하며 고귀한 것입니다.
그럼 창조주와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조물주는 자신의 완전함을 나타내기 위하여 완전하게 움직이는 이 세상을 만들고
완전성의 순환을 통해 자신이 완전한 존재로 머물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왜 완전한 신성이 지선극미한 상태에서 혼자 고요히 머물지 아니하고
번뇌와 혼란이 가득한 세상을 창조하여 돌고 있는가에 큰 의문을 가집니다.
그 이유는 완전함의 속성과 관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완전함이란 끊임없이 완전성을 만들어내는 살아있는 완전함이지,
고요 속에 혼자 머무르는 죽어있는 완전함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완전한 신성은 그 자체로 가만히 머물지 않고 완전한 뜻으로 완전한 세상을 그리고, 전지전능한 원력으로 한순간 이 우주를 창조해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지어진 뜻에 의해 기운이 나타나고 뜻과 기운이 서로 부딪히면서 번져나가기 시작한 거지요. 그래서 무거운 것은 뭉쳐서 물질이 되고 가벼운 것은 계속 부딪히고 스치면서 정화되고 진화되고 하면서 조물주가 짜놓은 완전한 우주의 질서와 형상이 만들어져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래서 점차 생명과 의식을 가진 진화된 기운이 나타나고, 이러한 생명과 의식의 기운이 만난 것 중 의식의 기운이 낮은 것은 식물이 되고, 점점 진화되어 동물이 되고, 그리고 동물 중에서도 의식의 순도가 낮은 것들은 미물로 되고 그 다음에 동물이 되고, 그 다음에 인간이 되고, 이런 단계를 거쳐서 태초에 조물주가 가지고 있었던 의식을 가장 많이 빼닮은 인간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인간은 지은 대로 받는 인과의 법칙을 통하여 이치를 어기고 어둠의 길을 간 사람은 불안과 고통 속에 소멸하고, 우주의 완전한 뜻과 이치에 따라 공덕을 완성한 사람은 인간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러 최종적으로 조물주와 같은 신성체에 도달함으로써 완전성의 순환을 계속해 나가는 것입니다.
즉, 콩이 콩을 낳고 팥이 팥을 낳아 자신의 존재를 이어나가듯이, 신성한 절대자는 자신과 같이 완전한 의식에 도달한 성자를 출현시킴으로써 자기의 완전성을 계속해 나가는 것이며 지은대로 받는 완전한 법계의 이치를 통해 자신의 완전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완전한 절대자의 존재방식입니다.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자신에게 존재하는 신의 유전자인 의식을 개발하여 신의식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묵상으로 하늘의 뜻과 계시를 받아 살아감으로써 신성에 이를 것인가?
아니면 진리를 깨우쳐 자신을 완성시킴으로써 신성에 이를 것인가?
이러한 논의는 법계의 실상과 생명의 길을 보지 못하고서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따라서 생명의 실체와 진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 교수들이 지식과 논리로 이를 이해하려고 해도 그것은 코끼리 다리 만지기이며 장님이 색깔을 이야기하는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부처님은 이러한 현상을 ‘중생은 눈뜬장님’ 이라는 말씀으로 잘 표현했습니다.
중생은 바로 눈앞에 있는 실상과 이치도 보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이를 증명한 좋은 예가 바로 인간이성에 근거해 진리를 찾고자 한 근대철학입니다.
서구사회에 기독교가 번성해 소크라테스에 의해 정립된 그리스로마 문화의 이성적 진리가 사라진 이후 서구사회는 중세 천년 간의 암흑기에 빠져들게 됩니다. 이성과 진리가 사라진 후 불합리한 신의 계시에 의존했으니 세상이 어두워지고 무지와 불행이 커진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서구사회는 천여년의 기독교의 부패와 모순에서 벗어나고자 르네상스와 계몽주의, 종교개혁, 산업혁명을 거쳐 신의 억압을 거부하고 인간의 이성에 근거해 인간의 주체성과 진리를 발견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서구철학의 핵심 주제는 신이 없이 인간의 이성만을 가지고 진리를 찾아 올바르게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데카르트 같은 대륙의 합리론자는 인간에게는 신에게서 부여받은 신성을 닮은 이성이 있기 때문에 이 이성으로 합리적으로 사유하기만 한다면 진리를 인식할 수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는 동안에도 그렇게 사고하고 있는 나의 의식의 존재를 부정할 수 없다고 하여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라고 하는 기본 명제를 제시했습니다.
즉 인간이 무엇을 이해하고 깨닫는 인식의 근거에는 모든 것을 사유할 수 있는 신의 속성 물려받은 합리적인 이성이 있기 때문이며 이 이성을 근거로 합리적으로 사유하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즉 1+1=2이므로 1+2는 당연히 3이며 삼각형의 합은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어김없이 180〬 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식으로, 인간이 합리적으로 사유하기만 하면 모순없는 진리를 알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모순이 없다는 것이 그대로 사실적인 진리성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논리적으로 이상없는 수많은 이론들이 말로는 그럴 듯 해보이지만 현실과 맞지 않아 많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론이 바로 공산주의 이론입니다.
그래서 사실을 중시하며 산업혁명에 가장 먼저 나선 영국의 경험론에서는 이러한 대륙의 합리론을 비판하며 인간이 진리를 인식하고 사유하는 이성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시했습니다. 그중 로크는 인간의 마음은 본래 아무 것도 없는 백지(tabula rasa) 상태로 태어나 다양하고 광대한 경험의 축적을 통해 마음을 형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즉 인간의 모든 지식은 경험에 뿌리를 가지며 모든 지식은 궁극적으로 경험에 좌우된다”(인간 오성론)고 본 것입니다.
이것은 대륙의 합리론에서 제시한, 인간에게 태어날 때부터 존재하고 있는(생득관념), 사유할 수 있는 고귀한 능력인 이성이라는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험론에서는 사실 속에서 수많은 경험을 통해 동일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을 객관적인 진리로 인식하게 된다고 봅니다. 즉 공통된 경험을 진리로 보는 사실적인 관점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렇게 사실과 경험을 중시하다보니까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을 중요시하게 되었고, 그 결과 실험하고 검증하는 과학과 이치를 중시하여 영국은 가장 먼저 산업혁명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경험론 또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경험론에서는 유사 경험의 집적이 보편적 인식이 되어 진리를 이해하게 된다고 주장하나 보편적 경험 또한 하나의 거대한 신념일 뿐 완전한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천 번을 동일한 일이 발생해도 천한 번째는 다른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보편적인 경험이 예외없는 절대적 진리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은 감각의 집적에 불과하기 때문에 이러한 감각의 집적을 뛰어 넘어 이것을 하나의 완전한 진리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하는 신의식과 같은 인식 요소가 필요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이 인간의 사유능력과 진리 인식 가능성에 있어서 한계를 보이자,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칸트는 ‘3대비판이론’을 세움으로써 해결책을 모색하게 됩니다.
그는 먼저 ‘순수이성비판’에서 인간 이성의 진리인식 가능성에 대해 비판합니다. 인간은 고귀한 이성이 있어 사유를 할 수 있으나 그 사유는 완전할 수 없으며 경험에 의해 제한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경험할 수 없는 신성이나 진리는 인간의 이성으로는 인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근거로 그는, 만약 인간이 신으로부터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선험적인 순수이성이 있다면 어린 아이나 장애자도 진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적으로는 그러하지 못하다는 예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인간이 신성과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면 어떻게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 수 있는가? ‘실천이성비판’은 바로 여기에 대해 답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의 영역에서 신과 영혼의 문제를 배제하고 순수이성을 논한 칸트는, 실천의 영역에서는 신과 영혼의 인위적 필요성을 제기합니다. 인간들이 진리나 신성을 분명히 인식하거나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천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마음 속에 순수이성보다 더 높은 천부적인 실천이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칸트는 머리 위에 빛나는 별과 같이 가슴속에는 빛나는 도덕률이 있다고 주장하며 도덕적 필요성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이 왜 도덕적으로 선하게 살아야 하는가? 그 이유는 도덕적으로 사는 사람만이 선하게 이 세상을 통치하는 신의 곁에 가까이 갈 수 있고 내세의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러한 실천이성비판은 철학의 완결이라고 하기보다는 철학의 퇴보라고 보는 것이 옳습니다. 그는 신성과 진리의 존재, 그리고 인간이 가야할 길에 대해 사실과 이치 속에서 분명히 증명하지 못하고 전해져 내려오는 관념과 현실적 필요성에 의해 인위적으로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도입했던 것입니다. 즉 그는 철학을 논하다 갑자기 종교가나 정치인들처럼 사회적 필요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이러한 한계에 대해 칸트는 이렇게 자백합니다. 순수이성을 통해 당연히 인간이 행하여 할 실천이성을 이끌어내는 것이 철학자의 올바른 길이며 인간이성의 필연적인 요구이나 현실적으로는 그것은 요원한 일이며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실토했던 것입니다. 즉 그의 실천이성비판은 철학적 결론이 아니라, 하나의 사회적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데올르기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여기에 대해 해결책을 제시했습니다. 눈뜬장님인 중생의 0.1의 시각으로는 아무리 해도 진리를 볼 수 없지만 그것에 머물지 말고 인간의 시력을 1.0으로 만들면 법계의 실상과 생명의 길에 대해 보게 되고 진리를 밝히는 길과 도덕적으로 사는 길과 신성에 이르는 길이 모두 하나로 통하게 된다는 완전한 법계의 원리를 밝힘으로써 순수이성과 실천이성의 통합과 해결방안을 제시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칸트가 칸트는 대륙의 합리론과 영국의 경험론을 종합적으로 비판하면서 인간이성이 신성과 진리를 인식할 수 없으며 실천이성은 사회적 필요성에 근거하게 된다고 주장하자 서구철학은 인간의 이성이 신성과 진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서구철학은 신성과 진리 문제를 인간의 사유에서 제외하고 단순히 자연과 물질과학의 원리를 밝히는데 중심을 두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그 후에 나타난 생의 철학과 유물론적 공산주의 철학, 그리고 현대 실존주의 철학, 언어철학이 우주의 실체와 신의 속성, 진리의 존재성을 포기하게 된 근본 이유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신의 실체와 참된 생명의 진리를 이해하려는 것을 포기하고 혼돈과 무의미 속에 던져진 인간이 어떻게 해야 스스로 의미를 살려 가치있게 살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처세술에 주목하게 된 것입니다.
완전성과 의미를 추구하는 상징적 존재인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존재이유와 삶의 가치인데 이것을 알 수 없는 것이라고 제외했으니 인류에게 길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현대문명이 길을 잃고 헤매는 근본적인 원인입니다.
그러면 서구철학이 이런 한계에 빠진 근본적인 문제는 무엇인가?
좀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서구철학은 인간의 업에 의해 가려진 인식능력을 전부로 생각했기에 인간의 사유는 경험을 뛰어넘을 수 없으며 따라서 경험할 수 없는 신의 실체와 진리를 인식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해 부처님은 눈뜬장님인 중생의 인식능력은 업이 그 마음을 가려서 진리를 제대로 보지 못한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따라서 장님이 길을 보려면 눈을 수술하여 시력을 회복해야 하는 것이지 눈을 감은 상태에서 길을 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망상에 불과하다고 식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즉 서구철학은 업에 의해 가려진 인간의 시각이 0.1에 불과해 진리를 볼 수 없다고 결론내린 데 비해
부처님은 중생은 시각이 0.1이어서 진리를 볼 수 없지만 진리의 인연을 만나 약을 먹고 눈이 좋아져 1.0의 시각을 갖게 되면 진리를 보게 된다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업에 의해 눈앞의 일도 바로 보지 못하는 눈뜬장님인 중생이
진리의 인연을 만나 업을 지우고 진리의 눈을 뜨게 되면
법계의 실상과 신의 실체와 진리를 볼 수 있다고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업에 가려진 생명의 주체인 의식이 있어서
바른 깨우침으로 무지를 지우고 업을 잘 극복하면
중생의 인식 한계를 벗어나 맑은 해탈심과 완전한 법안을 얻어
법계의 실체와 생명의 실상과 세상이 이루어지고 있는 진리를 있는 대로 볼 수 있게 된다고 밝히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이치에서 서구의 묵상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서구문명의 시각은 미약한 인간의 의식으로는 신의 뜻과 진리를 알 수 없으므로
겸허한 마음으로 자신을 모두 내려놓고 묵상하며 간절히 신의 뜻을 생각하면
완전한 인격적 신이 이를 다 아시고 계시로 알려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그동안 받았다고 하는 계시를 살펴보면
자기들 이해관계에 맞게 자기 편한 대로 받은 것이지
그것이 객관적 진리라는 보장이 없으며 대부분 많은 문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이 받은 계시는 완전한 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길을 보지 못하는 장님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서는 시간낭비밖에 없습니다.
그런 중생의 방법은 이미 한계를 드러냈습니다.
중생의 인식능력으로는 신성을 이해할 수 없고 진리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장님이 아무리 생각 속에서 물건을 이야기해도 그것은 실체와 다른 환상일 뿐입니다.
즉 오늘날 같이 정법이 사라진 어두운 세상에서
눈을 뜨지 못한 장님들은 생각 속에서 지어내는 화려한 말을 더 이상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눈을 뜨고 세상을 보는 자의 안내를 받아야 세상의 실상과 이치를 깨칠 수 있습니다.
신성의 실체와 완전한 법계와 진리에 대해 진정으로 알고자 한다면
수천 년 만에 완전한 깨달음의 빛이 나타난 이곳에서 지혜의 빛을 받아 눈을 떠야 할 것이며
공덕행을 통해 수많은 생을 거쳐 자신 속에 눌러 붙은 숙생의 업을 지워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그 맑은 마음에 세상이 비치고
맑고 가벼워진 순수한 의식이 신성에 도달해 신의 실체와 뜻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질문]---
아직 무엇이 진리인지 잘 알 지 못하지만 익숙한 세상에서
벗어나려고 노력 중입니다.
제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가 쓴 "인간의 위대한 질문" 이란 최근 저서에서
"인간 안에는 '신의 형상' 이라는 위대한 유전자가 숨어 있으며 신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는
모두가 신의 자녀이며 심지어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 예수님 처럼...
이란 글이 있습니다.(61쪽)
질문 1. 우리 모두에게는 정말 신의 형상이란 신의 DNA 가 있는가?
질문 2. 묵상을 통해 신의 형상을 찾으면 우리 각자의 존재 의미를 알 수 있을까?
이 주장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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