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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이치 나눔글

제사의 비밀

gincil 2016. 6. 4. 22:50

계절은 어김없이 바뀌고 또 다시 민족 대명절이 다가와 고향을 찾는 후손들의 대이동이 시작된다. 

 

인륜을 중시하는 유교 전통에 의해 우리 민족이 조상을 공경하는 마음은 세계 제일인 듯 하다.명절날 고향으로 밀려가는 인파는 세계에서 유래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이며 봉분을 비롯한 제사 등 장례문화는 엄중한 격식 아래 이루어져 장엄하기까지 하다.

그러나 인륜을 공경하는 유교 속에 숨어있는 어둠으로 인해 조상을 공경하고자 하는 제사가 조상을 복되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불행에 빠뜨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기에 제사에 깃들인 비밀을 밝혀 영혼을 올바르게 축복하는 방법을 찾아보도록 한다.

 

논어 선진편(論語 先進篇)에 보면 제자가 공자에게 영혼 섬기는 법(제사)에 대해 묻는 구절이 나온다. 이에 대해 공자는 “산 자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죽은 영혼을 섬길 수 있느냐?”고 우회적으로 대답하였다. 또 죽음에 대해 물었을 때 “삶을 다 알지 못하는데 어찌 죽음을 알겠느냐?”하고 반어적으로 대답하셨다.

 

공자는 망자에게도 산 자를 대하듯 정성스레 공경하는 것이 인(仁)을 지닌 인간의 바른 도리라고 하여 인간적이며 현실적인 시각으로 삶의 길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 당시 사회에서는 망자를 바로 물건으로 취급해 내버리는 경우도 있었고 너무 슬픔에 잠겨 몇 달이 지나도 장사를 지내지 아니하고 같이 지내는 경우가 있어서 공자와 같이 지혜있는 분이 산 자와 죽은 자의 관계를 명확히 정립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현실적 필요에 의해 공자는 장례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던 것이며 제사의 형식도 인간적인 시각에서 정립하였다. 공자는 제사의 비밀을 알면 세상의 모든 이치를 알게 된다고 하셨으나 거기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유교가 제사를 중시하면서 제사의 의미와 비밀에 대해 깊은 통찰이 없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한 일로써 여기에 바로 종교로서의 유교의 한계를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우주의 실상을 보신 성자들이 가르침을 전한 불교와 기독교에서는 죽음에 대한 분명한 이치와 가르침이 있다. 그분들은 이 우주는 완전한 법계이며 생명은 완전한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밝혔다. 그래서 사람도 하늘이 정한 완전한 법칙에 의해 지은 대로 결과를 받으며 가벼운 것은 위로 오르고 무거운 것을 아래도 가라앉는 이치에 의해 잘 지은 영혼은 맑고 가벼워 높은 곳에 오르고 어둠과 욕망으로 잘못지은 영혼은 무거워 낮은 곳에 떨어진다고 하셨다.

 

이처럼 생과 사는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생명 현상을 올바로 이해하게 되면 제사의 참된 의미와 방법에 대해 저절로 알게 된다. 즉 제사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면 인생의 의미와 생명의 지식을 스스로 습득하게 되는 것이다.

 

제사는 한 마디로 말해 죽은 영혼을 위로하는 위로연이며 떠도는 유혼의 한을 풀어주는 살풀이다. 생명의 이치에서 볼 때 죽은 자의 영혼은 이승을 떠나야 하며 인연이 끝난 이생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 된다. 죽은 자가 산 사람들의 세계에 계속 머물게 되면 생사가 따로 구분된 우주의 질서에 혼란이 생겨 세상이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요즘같이 어두운 세상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욕망과 집착에 짓눌려 살기 때문에 한과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죽은 뒤에도 평안하게 윤회하지 못하고 이승에서 계속 떠돌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유혼들은 의식으로만 존재하기에 끝없는 꿈속에 빠져들게 되는데 마음이 불안하기에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죽으면 한과 집착을 벗어버리고 홀가분하게 떠나야 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는 올바른 삶으로 지나친 탐욕을 버리고 자신을 밝게 정화시켜야 나가야 한다.

 

그러나 올바른 삶을 살아 마음의 평안을 얻은 자는 죽는 즉시 깊고 편안한 잠에 빠져 윤회에 들거나 높은 천상으로 올라간다. 따라서 이런 맑은 의식을 얻은 분들은 더 이상 이승에 존재하지 않으므로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다. 부처와 예수가 제사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 이면에는 바로 이런 깊은 뜻이 숨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생명의 진실을 모르고 단순한 현실적 효용과 인간적 논리로 생활윤리를 전개한 유교에서는 죽은 자도 산 자와 같이 공경하는 입장에서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그래서 이것이 형식적으로 반복되자 산 자는 제사에 짓눌리고 죽은 자는 계속 제삿밥을 얻어먹으려고 이승을 떠돌아다니는 불행해지는 일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제사는 삶을 구성하는 중요한 생활방식이 되어 있어 사람들의 삶과 영혼에 깊은 영향을 끼친다. 왜냐하면 제사가 생활의 일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죽은 이들은 이승을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있을 때 망자에게 제사를 지냈듯이 후손 곁에 머물면서 계속 젯밥을 받아먹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며 영혼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영혼이 계속 이승에 있으면 단순히 머무는 정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엄청난 고통과 불행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영혼은 몸을 가지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에 이승의 환경이 너무나 가혹하게 다가온다. 몸의 보호막이 없는 영혼은 의식이 자유롭기 때문에 많은 꿈을 꾸게 되는데 불안한 의식체는 자연환경의 변화에 따라 무제한의 환상과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꿈과 환상은 유계 나름의 존재양식에 의해 불안과 공포가 형상화되어 갖가지 괴물과 위험으로 나타난다.

 

이것을 세상에서는 지옥이라고 말한다. 즉 지옥이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떠나지 못하고 맴도는 영혼이 이승에서 겪는 영적 고통인 것이다. 그 결과 지옥의 고통에 시달린 유혼은 정기가 고갈되고 피폐하여 마침내 기운이 흩어져 미물로 태어나는 과를 받게 된다. 영혼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불행한 후생으로 빠져드는 것은 생명의 질서를 알지 못하고 무지한 관습에 따라 함부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사가 나쁜 것만은 아니다. 제사는 죽은 자를 위로하는 행위로 억울하게 죽거나 한을 가진 사람들을 달래는데 매우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나라와 같이 제사가 일상화 된 민족이나 어둡고 한이 많은 세상일수록 더욱 제사가 필요하다. 이런 사회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유혼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승을 떠도는 유혼에게는 제사만큼 위안되는 것이 없다. 유혼에게 제사를 지내면 그 동안 떠돌면서 고달팠던 고통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위안을 얻고 자신의 삶을 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신이나 영혼은 의식으로 욕망을 충족하는 생존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과거 자신이 좋아했던 음식을 차려놓으면 영혼은 의식으로 접해 먹은 것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 그러나 가장 좋은 제사는 좋은 음식이 아니라 바로 영혼을 달래주며 그들이 좋은 후생을 맞도록 생명의 이치와 바른 영혼의 길을 일러주는 것이다. 유혼에게 가장 큰 축복은 사후의 영적 고통에서 벗어나 평안한 천상의 과보나 후생을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은 평소에 바른 삶으로 자신의 영혼을 가꾸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승을 헤매는 유혼이 되지 않고 마음이 가벼워 천상에 날 수 있게 된다. 사람은 죽을 때쯤 되면 그 사후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저승은 이승의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서 이승에서 이루지 못한 것은 저승에서도 얻을 수 없다. 따라서 살아있을 때 잘못된 삶으로 마음이 불안한 자는 죽어서도 지옥의 고통에 시달려야 하고 바르게 살아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으면 그 영혼이 맑고 가벼워 높은 천상에 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의 영혼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자신의 마음속에 업이 없어야 하지만 남의 마음속에도 한을 남기지 않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주 속에서 모든 마음은 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나를 원망하여 잡고 있으면 내 영혼이 상대에게서 자유롭지 못하며 이승의 끈적끈적한 인력대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이 바르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은 이처럼 생명의 원리에서도 볼 수 있는 완전한 이치인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제사 관습 중 하나가 제사가 끝나면 지방을 불사르는 것이다. 이때 불붙은 지방이 공중으로 올라가면 영혼이 감응했다 하여 사람들은 지방이 공중으로 올라가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이러한 영적 현상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영혼이 응답한다는 것은 곧 그 영혼이 이승을 떠돌아다닌다는 증거이며 고통 속을 헤맨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사가 생명의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해서 갑자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그 이치를 모르는 영혼은 매우 섭섭해하며 산 자에게 앙심을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제사를 갑자기 치우면 안 된다. 제사를 거둘 때는 마치 산 자에게 이야기하듯이 자연스러운 마음으로 제사의 의미와 생명의 길을 일러주면서 일정한 기간을 두고 점차 줄이겠다고 말하면 된다. 이러한 방법은 나쁜 영과 접촉했을 때 활용해도 된다.

 

기독교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점에서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유교보다 합리적이다. 기독교 신자들은 죽으면 신의 곁으로 가고자 의식하기 때문에 이승에 대한 집착을 보다 쉽게 잊을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기독교에도 잘못된 가르침이 번져 이승을 떠도는 영혼이 많이 나타난다. 그것은 죽어서도 기독교를 세상 끝까지 전해야 한다는 광신적인 집착과 예수재림과 함께 다가온다는 부활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이러한 교리는 예수가 말씀하신 진리가 아니라 그 제자들이 전도의 편의를 위해 나름대로 지어낸 논리이다.

 

그러나 그 영향은 매우 커, 지금도 이 세상에는 죽어서도 살아있는 몸으로 부활하려는 욕망을 지닌 영혼들이 저승으로 떠나지 않고 계속 성전에 머물며, 예수가 재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또한 이들은 기독교를 세상 끝까지 전하려는 광신적 집착으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기이한 성령현상을 일으킨다. 이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집착이며 생명의 이치에 어긋나는 일이다. 죽은 자는 이생에서 할 일을 다했으니 우주의 흐름에 순응하여 다음 생을 기약하고 떠나야 하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같은 취지에서 제사를 지내고 있지 않다. 그러나 불교 또한 부처님의 정법이 아닌 인간적인 욕망에 의해 변질된 교리가 세상을 병들이고 있으니 그것은 바로 천도제를 통해 영혼을 구원한다는 주장이다.

 

삶의 길은 엄연한 우주의 질서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평소 그 사람이 살았던 행위의 결과가 마음에 쌓여 업보를 받는다. 따라서 자신의 행위 이외에는 그 사람의 업보를 좌우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설혹 부처라 하더라도 이것은 바꿀 수 없다.

 

만약 천도제나 기도를 하여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면 돈 많고 권력있는 자들은 모두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절이나 교회에 성금을 많이 내고 화려한 장례를 치르고 멋있는 굿을 한다면 모두 천국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엄중한 인과의 이치가 지배하는 진리의 세계에서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

 

불교에서는 장례를 화장으로 치르고 있는데 이것은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매우 좋은 방법이다. 화장을 함으로써 영혼은 이승에 자신이 머물 곳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빨리 삶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여 후생으로 떠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영혼을 생명의 이치에 따라 흐르게 하여 생사의 질서를 밝게 한다. 따라서 요즘 일어나고 있는 화장장려 운동은 사회를 건강하게 하고 인간의 정신을 맑게 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하겠다.



출처 진실의 근원(http://www.ginc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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