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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이치 나눔글

장애의 운명

gincil 2016. 6. 7. 22:05

오늘날 장애를 보는 시각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불교적 입장으로 개인의 업보 때문이라고 하는 시각이며

또 하나는 기독교의 입장으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하기 위한 역사의 일환으로 보는 시각이다.


과연 진실은 무엇일까?

 

기본적으로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야 생겨난다.

따라서 장애 또한 마찬가지로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원인이 있었기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한 원인에는, 개인이 지은 업과

사회전체가 같이 지어놓은 공업(共業)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데

 

어떤 일이 개인이 지은 원인에 의해 나타나면

그것은 그의 업보 때문이었다고 말하게 되며

사회전체가 지은 공업에 의해 나타나면

불행과 인연이 닿았다고 말하게 된다.


왜냐하면 삶이란

살아있는 생명의 주체가 기존의 자질을 근거로

새로운 인연을 지으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

삶의 결과가 과거의 업에 의해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인연에 의해서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날과 같이

인간들이 대대로 저질러 놓은 수많은 악과 불행이 가득한 말세에서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불행과 인연을 맺어

고통스런 삶을 살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오늘날 개인들이 받는 많은 불행은

공업과의 새로운 인연이 맺어져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인류는 쾌락과 소유가

삶의 이유라고 하는 잘못된 가치관에 빠져

발전이란 명목으로 자연을 파괴하고, 쾌락과 이익을 위하여

수많은 유해요소와 위험물을-불량식품, 공해, 자동차 등- 양산하여

인류를 각종 위험과 장애 속에 전면적으로 노출시켜 놓았다.

 

따라서 오늘날 현대인들은 조금만 잘못해도

불행과 인연이 닿아 장애를 당하기 십상인 것이다.


따라서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장애아를 출산한 경우

그것은 개인의 업이라기보다는

공업에 의해 불행과 새로운 인연이 닿았다고 하는 편이 정확한 것이며

이러한 사유로 오늘날 장애는

개인의 책임보다는 사회전체의 책임이 큰 것이다.


이러한 불행의 원인들은

그동안 인류가 함께 지은 공업 때문이라는 점에서

그로 인해 나타난 개인의 불행에 대해 우리 모두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며

이러한 제도를 운영하고 책임지고 있는

국가 또한 그에 상응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복지제도를 실시해야 하는 국가의 책임근거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장애가 나타났을 경우

기본적으로는 인연이 있는 가족의 책임이라 할 것이나

국가가 이차책임을 짊으로써

장애인과 가족이 인간적인 생활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이러한 경우, 장애라는 것이 

하느님의 위대한 뜻을 실현하기 위해 한 개인에게 마련한

하느님의 역사라고 주장하는데 이와 같이

하느님이 한 인간을 고통의 시험에 들게하고 나중에 다시

은혜를 베풀어 신의 은혜를 증명한다는 것은


참으로 잔인하고 장난스런 일이며, 하느님의 선의지와 자비를 생각해 볼 때

있을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은

그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선택하는 창조적 주체이다.

이러한 장엄한 생명의 역사는 조물주라고 해도 관여할 수 없는 것이다.

 

신이 스스로 자신을 결정하는 능동적 주체이듯이

신의 자식인 인간 또한 이를 이어받아 살아있는 생명의 주체로서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 아래 자신의 운명을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우주는 신과 그 자식인 생명체가 같이

한 몸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하나의 역사이며, 완전한 인과의 법칙에 의해

자신이 지은 만큼 결과를 받는 완전한 역사인 것이다.


이러한 이치를 생각해 볼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릴 수 있다.


장애는 개인의 업으로부터만 오는 것이 아니며

불행과 악의 씨가 많이 뿌려진 어두운 사회일수록

공업에 의해 많이 나타나게 된다.

 

그 이유는

삶이란 항상 새로운 인연을 지으며 자신을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

불행의 원인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그만큼 불행과 인연이 닿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장애는

누구나 만날 수 있는 공통의 불행으로 인식해야 할 것이며

그로 인해 닥쳐온 개인의 장애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가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장애는 인간이 가진 수많은 흠 중 하나로서

육체와 경제적인 면에 국한된 작은 흠에 불과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육체적 장애보다 더 큰 시련이 많고 많음을 알아야 한다.


인류 역사상 사회의 행복과 국가의 독립과

참된 진리를 위해 자신의 가정과 몸을 바쳐야만 했던 수많은

선인들의 시련과 고통을 생각해 볼 때

육체적인 장애는 너무나 사소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육체적 장애를 만났을 때, 이에 대해 너무

비관하거나 절망할 필요는 없다.

 

생명의 이치상 인간으로 태어난 이유는

단지 육체적으로 호사하여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류와 세상을 축복하는 과정을 통하여

자신을 완성시키고자 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불행의 인연이 닿았을 때는

자신보다 더 한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인류의 빛이 된 수많은 선현들을 생각하여

 

불행을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불행을 잘 극복하여

더 좋은 자신을 만드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람의 인생은 인연이 모여 이루어지는 것이며

인연이 다하여 흩어지면 그의 이승에서의 인생도 다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주어진 인연은

어느 하나라도 자신의 생이 되는 것이며

불행이라고 해서 외면하고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선연이면 더 좋게 발전시켜야 할 것이며, 악연이면 이를 극복하여

자신을 발전시킬 거름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위대하고 존재가치가 있는 것은

세상을 올바르게 축복하려고 애쓰는 가운데

자신의 영혼이 진실로 고양되고 밝아져 완성에 이르게 되는

하늘의 뜻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장애자를 돌보는 과정에서도

더욱 성실하고 올바른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며,

상대를 올바른 인간으로 축복하려는 희생적인 노력을 통해 자신을 닦아

그 공덕과 밝음으로 완성에 이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항상 부족함과 어려움 속에 처해 있으며

시련을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 성장하도록 되어있다.

 

성자들이 최악의 인간적 상황에서, 성자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의 마음의 빛을 버리지 않고

그 어려움을 극복함으로써

그 마음을 정화시키고 완성시킬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는

반드시 오탁악세가 되어야만 나타날 수 있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온실 속에 고이 자란 것들은

태어난 상태 그대로 머물게 되므로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힘은

오직 시련을 이겨낼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장애 또한 그렇게 해석해야 한다.

장애는 인간을 더욱 승화시키기 위한 밑거름이며

자신이 발전할 수 있는 계기인 것이다.


그리고 요즘은 장애의 경우에도

많은 사회적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다.

 

따라서 가정에 장애가 있는 경우라면

누구에게나 장애가 있을 수 있는 만큼 이를 감출 것이 아니라

삶의 지극히 정상적인 일부분으로 생각하여

사회와 함께 이를 해결하도록 해야 할 것이며, 정상적인 생활에 참여하여

장애를 삶의 일부로서 성취의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장애와 시련 속에 있는 이치를 모르고

오늘날 소위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크게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더 큰 문제 속에 빠져 있는 것을 모르고

장애자를 자신에 비해 매우 불행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소위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출세하고 쾌락을 즐기는 것에 인생의 목표를 두어

자신들과 같이 쾌락과 소유와 집착을 누리지 못하는 장애인들에 대해

매우 불행하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은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으며

정신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상인들은 한평생을 쾌락과 소유를 위해

집착하고 이치를 어기며 고통 속에서 살다가 곧 인연이 다하여

한과 집착 속에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나게 되는데

 

생명의 이치에서 보면 이러한 정상인들의 삶은

너무나 무의미한 것이며, 그의 영혼을 위하여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한

낭비적인 삶을 살다가 떠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인간의 길이 사라지고

동물적 욕망과 집착이 번성한 곳에서는

정상인들이 추구하는 삶인 현실의 출세와 부귀영화는 누리면 누릴수록

그 영혼은 어두워지고 무거워지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어두운 현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둠과 더 많이 타협해야 하고

더 많은 권모술수와 집착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건강한 개인이 정상적인 영혼을 가지고

바른 인연을 만나 세상을 축복하며 올바르게 산다면

이보다 더 보람있고 가치있는 삶은 없다고 할 것이지만

 

오늘날과 같이 어둠과 거짓이 만연한 말세에서는

정법을 만나 좋은 삶을 살기가 거의 불가능한 실정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쁜 인연과 소유와 쾌락 속에서 동물적으로 살다가

애욕과 집착 속에서 죽어 유혼이 되는 불행한 운명에 빠져들고 있다.


따라서 진리의 입장에서 보면 말세에서는

장애인보다 정상인이 더 불행하다는 아이러니가 나타나는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서 장애아로 태어나는 것은 다행인지 모른다.

왜냐하면 장애아는 악연을 접할 기회가 적어, 인간으로 태어난

자신의 영혼을 더 이상 망치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장애자의 경우 그가 의식을 사용하지 못하는 식물인간이라면

그는 자신의 영혼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게 된다.

 

그러나 그는 인간으로 태어났으므로

그 속에 다른 사람과 똑같은 인간의 영혼을 지니고 있게 되며

그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과 똑같이

고귀한 인간으로 대접받을 자격과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다만 구조상 장애로 자신의 영혼이 제대로 기능하지 못하는 상태일 뿐이다.


그것은 마치 운전사가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엔진이 불량인 때에는 자동차가 제대로 굴러가지 못하는 경우와 같이

인간의 영혼이 아무리 좋다고 하더라도 뇌라는 기구가 불량이면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식물인간이 아니라고 한다면, 비록 장애가 있어

정상적인 사고는 할 수 없어도 인간으로서의 의식작용은 가능한 것이며

그만큼 자신의 영혼은 가꿀 수 있게 된다.

 

이들의 영혼은 완성으로 향하는 거대한 순환고리 가운데서 잠시

장애를 당해 멈춘 상태라 볼 수 있을 것이며 최소한

그 영혼은 보존하게 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의 어려움을 승화시켜

완성을 향한 밑거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소중한 사례를 많은 위대한 장애인들에게서 보게 된다.


인간의 삶은 살아있는 것이며

살아있다는 것은 운명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것이며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뜻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삶을 만든 과거의 인연 속에서 나와

새로운 인연을 취하여 어떻게 자신을 변화시켜 나갈 것인지는

자신의 책임인 것이다.


오늘날 곳곳에 위험이 만연한 불행한 말세 속에서

불행과 인연을 맺지 않고 좋은 삶을 거두기 위해서

매사에 진지하고 성실한 삶을 살도록 해야 할 것이며

어두운 곳은 미리 조심하고 좋은 인연과 정법을 가까이 하여

행복한 삶을 스스로 가꾸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들이 진리를 밝히고

정법을 찾아 행하는 근본이유가 있는 것이다.

 

출처 진실의 근원(http://www.gincil.com/) 사실과 이치로 삶의 의문을 밝히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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