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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크하르트 톨레의 깨어있음과 참나에 대하여 본문

☆ 진실의 근원

에크하르트 톨레의 깨어있음과 참나에 대하여

gincil 2018. 2. 9. 23:13

김XX님이 소개해 주신 에크하르트 톨레와 오프라 윈프리의 비디오를 보았는데, 그 속에 있는 내용은 전형적인 영적 감염의 사례였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책을 쓴 것은, 영국에 살다가 어느날 마음속의 강한 충동에 이끌려 미국 서부 해안도시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내적 충동이 이끄는 데로 글을 썼다고 합니다. 그리고 영적 충동이 강한 날에만 글이 제대로 써지며, 쓰기 전까지는 자기가 무슨 글을 쓰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여기서 의미하는 것이 많습니다.


마음속의 강한 충동에 이끌려 미국 서부 해안도시로 여행을 갔고 그곳에서 내적 충동이 이끄는 데로 글을 썼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다른 영적 존재의 시킴에 의해 그런 행동을 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근거를 그는 스스로 고백했으니 그곳에 강한 영적 에너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미국 서부에 자신에게 영향을 주는 영적 존재가 머물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 충동이 강한 날에만 글이 제대로 써지며, 쓰기 전까지 그는 자기가 무슨 글을 쓰는지 모른다는 말은 그가 자기 정신으로 사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 존재가 시키는 대로 사는 영매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영이 시키는 날에만 글을 제대로 쓸 수 있는 것이며 제 정신이 아니니 자기가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무엇을 쓰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세상일에 눈을 뜨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세상일을 바로 보고 바로 알기에 깨달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깨달은 자는 자기가 아는 지식을 항상 자신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아는 것을 언제 어디서나 알고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은 모르는 자가 갑자기 자신도 모르는 일을 알고 행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어떤 일에 대해 모르는 자는 영원히 그것을 모르는 것이 자연의 법칙입니다. 호미를 만드는 사람도 쇠를 녹이고 두드리는 법을 배워서 호미를 만드는 것인데 갑자기 호미를 만들 수 있는 일은 이 세상 어디에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따라서 자기가 모르는 일을 가만히 있으면 갑자기 알게 되고, 자기가 원하지도 않고 내용도 모르는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인과의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처럼 인과의 이치상 있을 수 없는 일을 믿고 따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일은 신놀음이 일어날 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 일이 세상에 번지고 사람들이 믿기 시작하면 세상이 무지해져 망하게 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가?


그것은 그러한 지식을 알고 있는 다른 영적 존재가 자신 속에 들어와 일러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신이 머무는 장소에 가니 신이 영향을 주어 그런 글을 쓸 수 있으며 자신이 전혀 알지 못한 내용의 글을 책으로 써내는 것입니다. 과거에 나타난 많은 영적 경전들이 그러한 영적 감염에 의한 떠도는 신들이 말한 영적 환상이었던 것입니다. 수많은 아류의 성경이나 불경도 그러한 영적 존재들의 시킴에 의해 나타난 것이며 요즘 나타나는 많은 경전들도 바로 그러한 떠도는 신들의 환상적인 논리들인 것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자신이 알지 못하는 기이한 글을 쓰면 대단하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곳에서는 그런 현상을 유혼에 의한 영적 감염으로 보며 가장 천하게 여깁니다. 그것은 자신의 영혼을 버리고 다른 영혼의 종이 되어 그런 일을 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가 무엇인가?


그것은 가만히 깨어있으면 ‘머릿속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알려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김XX님은 ‘참나’라고 표현을 하는군요.


 


그런데 너무나 이치에 닿지 않고 황당한 이야기를 깨달음을 이용하여 정당화시키는 것이 어처구니없습니다. 그들의 논리대로 하자면, 삶의 답을 얻기 위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식인데, 과연 그것이 이성을 가진 인간에게 올바른 일일까요? 그것은 만물의 영장인 인간에게 이성을 버리고 그냥 바보처럼 기다리라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인간은 밝은 의식을 가지고 매일 자신에게 다가오는 현실의 문제를 분석하여 옳고 그름을 가리고 가장 좋은 원인을 실천하여 좋은 결과를 얻고자 합니다. 만약 그들의 논리대로 사실을 판단하지 않고 느끼는 데로 행동한다면, 그것은 좋은 결과가 오기는커녕 자신과 세상을 망치는 결과가 오는 것이 명약관화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볼 때도, 문제를 가만히 두고 고요히 있는다고 해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런 식으로 자연과 하나되어 살아갈 때 모든 해결책이 떠오른다고 하면, 자연 속에 살고 있는 늑대 아이는 저절로 지혜를 깨치고 깨달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연 속에 아이를 홀로 두면 그 아이는 참나를 발견하여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짐승과 같이 되고 맙니다. 사람도 가만히 둘 때 저절로 알아지는 경우는 없습니다. 오직 지혜있는 자에게 가서 물어야 답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도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논리가 세상에 나와 활개 칠 수 있는가?


그것은 서양에서 신지학회로 시작된 영적 구도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의 가르침은 사실과 이치에 맞지 않는 환상적인 말법에 불과한 관계로 그들은 결국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죽어 유혼이 되었고, 자신들의 한을 풀기 위해 서구의 유신론적 풍토를 교묘하게 파고들어 진리의 신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신을 믿고는 싶지만 신의 불합리성이 의심스러운 많은 기독교 신자들에게 깨어 있음, 깨달음, 참나, 신성이라는 아름다운 말로 자신을 미화한 영적 형태로 파고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에크하르트 톨레에게 들어온 신은 톨레 자신도 알지 못하는 깨달음에 대한 글을 쓰게 한 것입니다.


 


톨레는 머릿속의 목소리에 따라 살아갑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생각, 자기 판단으로 살아야 합니다.


어찌 정상적인 인간이 자기의 의식이 아닌 다른 외부의 소리를 자신의 머리에서 듣고 그에 따라 살아간단 말입니까?


그것은 자신의 삶이 아닌 다른 신의 삶을 살아주는 것이며 자신의 몸을 다른 신에게 바친 것입니다. ‘깨어있음’ ‘깨달음’ 이라는 신에게 자신의 몸을 바친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이나 불성이나 신성은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우주의 근원인 절대자는 모든 우주와 생명과 신을 다 포함하는 절대적 존재로서 작은 뜻 하나만 내어도 바다를 가르고 달을 인간이 살 수 있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존재입니다. 그러한 존재가 작고 허약한 인간에게 남모르게 나타나 이해할 수 없는 기이한 말로 그렇게 일일이 사사로운 이야기를 해준다는 것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의 원인이 된 근원적 존재(창조주, 조물주, 신성, 불성)로 너무나 차원이 높아서 이 탁한 인간 세상에 절대 나타나지 않으며 완전한 뜻으로 세상을 운영할 뿐입니다. 만에 하나라도 이러한 존재가 세상에 나타나 자신이 만든 완전한 질서에 편파적으로 개입한다면, 그것은 자신이 만든 세상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스스로 자인하는 것이 되며, 그러한 세상을 만든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스스로 나타내는 일이 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나타나 편파적이고 사사로운 개입을 하는 존재는 근원적 절대자가 아니라 한과 집착과 욕망에 얽매여 떠도는 유혼으로 생전에 맺힌 자신의 한과 욕망을 풀기 위해 그러한 사소한 심령현상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곳에 왜 사람들이 모이는가? 그냥 깨어 있으면 참나가 나타나 해답을 준다는 말도 안 되는 가르침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가?


그것은 영적 감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쓴 책을 보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면 그곳에 떠돌던 영이 들어와 사람들에게 그런 이상한 현상들을 일으키기 때문에 영에 감염된 사람들이 그 황홀함과 기이함에 빠져 계속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에게는 황홀한 체험이 오지만, 그것은 마약과 같이 자기 상실로 이어지는 악마의 유혹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현상을 좋아하고 그 속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을 살펴보면 몇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그 근본이 매우 허약하고 삶이 불행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통 속에 살다가 그 의식이 붕괴되어 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강한 의식을 가진 사람은 신이 침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의 전력을 조사해보면 거의 십중팔구는 대부분 삶이 병약하거나 불행했던 과거를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열매는 좋은 씨앗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나쁜 씨앗은 좋은 가지를 만들지 못하고 좋은 열매를 만들지 못합니다.


이것이 자연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입니다.


 


인간이 좋은 근본을 가지면 어디서든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밝은 삶을 살게 됩니다.


대부분 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허약한 근기를 지니고 났기에 불행한 운명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가 고통스런 삶에 정신이 파괴되어 결국 신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툴레도 젊은 시절 삶에 충실하지 못하고 이상한 곳을 전전하다가 결국 신을 만난 것입니다.


 


이렇게 신이 들면 자신이 평안을 얻었다는 말을 하며 마치 자신이 대단한 경지에 오른 듯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바른 진리의 실천으로 자신의 문제를 모두 해결하여 편안함을 얻었다면 매우 바람직한 일이겠지만, 문제는 그냥 있는데 신의 도움으로 편안함을 얻었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현상은 영에 의한 일종의 자기상실 상태로 마치 술이나 마약을 통해 자기를 잊음으로써 편안함을 얻는 것과 같이 일시적인 마취상태인 것입니다.


 


이러한 영이 인간의 몸에 들어오면 그 영은 다른 의식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기존 인간의 영혼을 억눌러 지배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자기를 상실하니 마취가 된 듯 황홀해지며 짐을 내려놓은 느낌에 평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을 느끼고 희열을 느끼지만 그것은 떠도는 신으로 인한 일시적인 심리적 현상일 뿐 현실의 문제는 그대로고 완전한 해결책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시 현실로 돌아오면 현실의 무거운 짐이 그대로 느껴지고 이를 피하고 다시 황홀경과 평안을 찾으러 종교단체로 가는 것입니다. 마치 마약에 빠지면 마약에 의존해 비현실적인 인간이 되듯이 신에 씌이면 신에 의존해서 정상적인 사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며 이로 인해 현실이 더 불행해지고 이를 잊기 위해 나중에는 생활도 가정도 자기도 버리고 신에게만 의존하는 광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영혼으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외부의 영이 들어오면 자신의 영혼은 기생충이 든 생명체처럼 정상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병 든 상태가 되어 자기 판단에 의해 사고하지 못하고 다른 의식에 의해 간섭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판단력이 흐려지고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또 하나의 의식작용 때문에 작은 심리적 충격도 견디지 못하고 안절부절하게 되며 심하게 되면 정신분열증을 일으키며 나중에는 미치광이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이 세상에 영적 가르침이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이유인 것입니다. 신이 들어 제정신이 아니고서는 정상적인 사람이 그렇게 불합리한 가르침에 쉽게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대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그대는 자신이 참나를 얻었다는 증거로 사람과 사람, 사람과 동물, 식물까지도...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는 그리고 과거, 현제, 미래가 연결 되어 있는 둥그런 지구 같은 하얀 영상을 보았다고 하는데, 깨달은 자가 보는 반야는 그런 유형적인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깨달은 자는 있는 것을 보는 것이지, 없는 것을 보지 않습니다. 없는 것을 보는 것은 사실을 보는 진실한 눈(정견)을 얻은 것이 아니라 환상을 보는 거짓된 눈(사견)을 얻은 것입니다.


 


그대는 자신의 모든 일이 잘 풀리고 기운이 넘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현상이 자기 것이면 영원히 그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현상이 자신의 능력으로 증득한 진정한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얼마 전 무기력한 증상이 온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증상이 점점 자주 올 것이며 점점 심해질 것입니다. 그때가 되면 이미 신이 그대를 완전히 지배한 상태이기 때문에 치유는 불가능해집니다.


 


그대는 에너지가 넘친다고 하는데 왜 갑자기 무기력증이 왔을까요?


그 이유는 마약을 쓰는 원리와 같습니다.


예부터 신들린 자에게는 장정 서너명도 못 당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들린 자는 며칠간 잠을 안자도 밥을 안 먹어도 눈에서 광채가 나고 펄펄 난리를 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마약을 먹은 것과 같이 신이 들어와 자신이 지니고 있는 원기를 일시적으로 몰아 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약을 쓰면 죽어가는 사람도 벌떡 일어나고 운동선수들도 지치지 않고 최고 기록을 내지만 결국 그 중독 증세로 폐인이 되듯이 신의 힘으로 남다른 에너지를 발휘하게 되면, 급속도로 원기를 소모하게 되고 그 반대급부로 무기력증을 가져오다가 나중에는 완전히 탈진하여 자신의 몸을 완전히 망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삼년간 걱정, 불안, 두려움이 다 없어지고 집착, 인간의 현실적인 높은 목표, 이런 게 모두 사라지고 거의 모든 욕구가 사라졌고 현실이 그저 편하고 만족스럽다고 했는데, 그것은 비정상입니다.


 


깨달은 자도 항상 현실에 부딪히면 힘이 드는 법입니다. 어두운 세상이 진리를 거부하여 벽에 부딪혔을 때 그 큰 짐을 항상 느끼고 사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는데도 그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것은 영이 자기를 지배하여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은 예로 선가에 전해지는 이야기에 불심이 극진한 노파가 공덕을 지으려고 유망한 스님을 모셔놓고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공양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난 후 법력이 얼마나 커졌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홀로 있는 스님 방에 미모의 자기 딸을 보내 유혹을 하게 했답니다.


딸이 스님의 무릎에 앉아 애교를 부리니, 스님 왈, "다 말라 죽어버린 고목에 웬 매미가 간질거리는가……!” 하면서 전혀 마음의 흔들림이 없음을 강조했다고 합니다.


딸에게서 그 말을 전해들은 노파는 "헛고생했다"고 하면서 스님이 거주하는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아무리 깨달은 자라 해도 몸을 가진 생명체는 환경에 의지하여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환경에 부딪히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마음이 생기고 추우면 추운 마음이 생겨야 정상인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깨달음을 얻어 명경같은 마음을 얻었다면 여자가 유혹하는 것은 욕망의 어둠이 다가오는 것이니 맑은 마음이 어두워지는 것을 느끼고 “어이쿠, 어지러워라!” 하고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대는 자기 정신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정신은 뒷방으로 물러앉아 있고 들어온 신이 대신 자신의 몸을 관리하고 있으니 모든 것이 평안하고 황홀한 것입니다.


 


만약 그대의 마음이 맑아졌다면, 그런 사람이 가끔씩 미친 싸이코처럼 화를 폭발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낼 수 있을까요? 그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영의 의식이 발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대에게 들어온 신이 업을 버리지 못해 세상을 헤매는 유혼이기 때문에 업의 발동에 의해 그런 이상한 행동을 갑자기 하는 것입니다.


 


그대는 생과사가 두개가 아니라는 불교의 생사불이도 바로 알게 되었고 우주의 원리를 알게되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대가 우주의 원리를 깨우친 것일까요?


 


그대가 안 것은 맑은 영혼을 얻어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신이 들려 신의 생각과 신의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는 지금도 자기 몸에 적응이 안 되거나 궁금해질 때는 그냥 지켜보기만 하면 참나가 마음의 소리로 알려 준다고 했습니다.


 


머리가 탁하면 참나가-산책하러 가라.


몸이 뻐근하면 참나가-스트레칭 해라.


배가 고프면 참나가-밥을 먹어라.


아이가 징징거리면 참나가-아이와 함께 놀아줘라.


내 스웨덴어 발음이 안좋아지면 -오디오북을 틀어놓고 이십분씩 매일 따라해라.


툴레도 그 소리를 따라 여행을 했고, 책을 쓰라고 했으니 썼고, ....


이러한 현상이 귀신 들린 사람의 행동이 아니고 참나를 발견한 사람이면 누구나 다 하는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을 얻은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바로 신이 들어와 이중인격현상을 띠었을 때 나타나는 대표적 현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그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지금부터 확인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만약 그대에게 알려주는 마음의 소리가 참된 진리가 아니라면


그대가 믿고 있는 참나는 불성도, 신성도, 창조주의 영도 아닌 떠도는 잡신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대는 이 세상의 본질이 사랑이라고 하면서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이 남을 섬기는 일로서 마더 테레사가 자신의 롤 모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마더 테레사가 하는 일이 참 사랑이 아니며 그는 큰 공덕을 지은 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 대해서는 이곳 글을 검색해보면 그 진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지금 그대는 사랑이 무엇인지, 마더 테레사 같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사실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찌 자신이 세상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자신이 가진 참나가 진정한 존재이며 참나의 소리가 진리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결론적으로 그대의 참나는 진실을 보는 자가 아니며 견성도, 불성도, 신성도 아니고, 그냥 아무 이치도 없는 아름다운 소리나 하며 세상을 헤매는 유혼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성을 가진 인간은 사실을 바로 보고 자기 정신으로 올바르게 판단하며 살아야 합니다.


가만히 깨어 있는다고 해서 세상이 바로 보이고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눈이 어두운 중생이 세상을 바로 보기 위해 세상을 보는 자의 시각을 빌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인연을 찾아 부지런히 공부하고 깨쳐 맑은 시각과 지혜를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것이 된 지식과 지혜로 세상을 바로 보고 올바른 원인을 지어 좋은 자기와 좋은 세상을 짓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대는 이러한 사실적인 이치를 무시하고, 가만히 깨어 있으면 참나가 저절로 모든 문제를 알려준다는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환상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대처럼 그런 식으로 인생을 산다면 배움이 왜 필요하고 삶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가만히 깨어 있으면 참나가 저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데요.


 


님의 논리처럼 세상 사람들이 산다면, 진리를 찾고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실적인 사람이 사라지고, 가만히 앉아 지혜가 얻고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불합리하고 관념적인 사람들이 넘쳐나 결국 세상은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대가 참나를 얻었는지 다시 물어보겠습니다!


그대가 세상의 이치를 깨닫고 진리를 본다면 여기에 대해 답을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1. 깨달음의 근본은 무엇인가?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


 


2. 누구나 좋은 세상을 원하는데 세상이 불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3. 세상을 밝게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조건은 무엇이며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 답을 한다면 그대의 참나를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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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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