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화두선이란 무엇인가? 본문
<질문>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아래의 글을 읽어 내려가면서 예전에 저 또한 화두를 풀려고 의심하는 수행을 함으로써 중풍 초기증상인 수전증과 윗 입술이 떨리고 머리가 몹시 무겁고 아파 화두의심을 그만 둔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스님께서 답변을 주셨지만 아래의 질문에 대한 선생님의 바른 가르침을 받고 싶습니다. -----------* -------------* ---------------- 선사님 안녕하십니까? 저가 단전호흡하는 것처럼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어 의식하는 것의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읽고 '잘못 된것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그후로 단전에다가 화두를 의식하는 것을 하지 않고, 그냥 궁금증을 내면서 화두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런데 머리가 점점 아파오고 나중에 너무 아파서 화두를 의심하지 못했습니다. 단전의식을 하지 않은지 대략 하루~이틀 되지않아서 그만두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생각으로 화두를 들다가 상기(上氣)되어 미친사람들이 한두명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위험했구나' 라고 생각하고, 다시 단전에다가 화두를 의식하고 있습니다. 화두를 어떻게 의심해야 바르게 하는 화두 참구가 되나요? [선사] 參(의심) 禪(실상)은 오직 화두 가운데 깨쳐야 할 도리를 간절히 알려고 의심 해 가는 수행이라오. 따라서 단전에다가 화두를 두어 의식는 것은 곧 의식을 어느특정한 곳에 둠으로써 생각을 의심하는것(사유) 외에 두시게 되므로 의심이 집중된 의식(사유)으로 모이는것(定)이 아니라 단전이라는 정한 처소를 두게 되면 의식이 그 곳과, 의심하는 의식으로 흐트러 지게 되어 하나로 집중 해야 할 定이 여러갈래로 분산되게 되는 것이라오. 단전에 두고 의심을 하던 것을 처소를 두지 않고 오직 의심하는 수행으로 고쳐 공부하셔온 것은 지극히 바른 수행이었건만 머리가 너무 아파서 화두를 의심하지 못하게 되셨다니 화두를 생각으로만 굴려서 알려고 애를 쓰시다가 보니 상기(上氣)가 되신것 같구려. 그래서 '위험했구나' 라고 생각하고, 다시 단전에다가 화두를 의식하고 있다. 하시니 참으로 안타깝다 하지 않을 수 없구려. 공부란 스승을 쫓아 의지하며 하는 것인데 혼자 이것이 좋고 이것은 않되겠다는 식으로 스스로 가늠하고 방법을 찾으며 하는 공부는 실다운 성취의 결실을 얻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로소이다. 바른 스승을 의지하시고 자주 참문해가며 지도를 받아가면서 열심히 수행하시기를 당부하리다. <답변> 화두선은 마음을 찾아가는 명상법의 일종으로 의심의 주체를 찾아들어가 그 근원을 찾는 수행법입니다. 108개나 된다는 수많은 화두 중 그 중 가장 으뜸인 것이 무자와 이뭣고? 화두인데 그 이유는 “이뭣고”로 생각하고 있는 이 물건의 주체가 무엇인가? 하고 계속 물고 들어가면 마침내 의식의 근원이 나오고 무자화두로 모든 것을 비워버리고 나면 최종적으로 업이 사라진 맑은 마음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의식의 근원을 찾는 이유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해 마음의 근원에는 모든 것이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반야지경이 있고 그것을 본 자는 깨달음의 지혜를 얻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명상과 화두선을 통해 의식의 근원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진정한 깨달음이 아닙니다. 세상과의 인연을 끊고 조용히 명상에 들면 오고가는 감각의 자극이 사라지고 조용히 자신 속에 침잠하게 됩니다. 그러면 조용한 가운데 흙탕물이 가라앉듯이 감정의 흐름이 가라앉고 그 위에 맑은 마음이 고이는 현상이 나타나는데 이때 의식의 주체를 찾는 화두를 잡으면 생각이 일어나는 맑은 마음자리가 드러납니다. 이것을 마음의 근원을 보았다고 하며 견성을 했다고 하며 한소식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흙탕물이 가라앉아 일시적으로 세상을 비치는 것에 불과하기에 조용히 있을 때는 마음 거울에 온 세상이 비치지만 다시 세상과 인연에 부딪히면 마음속 깊이 가라앉은 숙생의 업과 욕망이 흙탕물을 일으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러므로 공덕이 없고 마음이 정화되지 않는 자가 화두로 자신의 의식의 근원을 파고 들어 갔다 하더라도 그가 볼 수 있는 것은 깨끗한 반야가 아니라 탁한 업과 오욕의 소굴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견성을 하더라도 마음의 업을 지우지 않고서는 반야의 세계에 머물지 못하며 반야의 세계에 머물지 못하는 한 법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진정한 깨달음은 마음을 어지럽히는 모든 먼지(업)가 사라진 경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털어도 일어날 먼지조차 없기에 행주좌와 어묵동정 간에 항상 맑게 비치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나 있는 그대로를 비치고 법을 설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견성과 완전한 깨달음과의 차이입니다. 그동안 선가에서 수많은 견성자들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세상에 법을 전하지 못하고 산속에서 스러져간 이유는 이와 같이 마음 속의 업이 남아있어서 세상의 실상과 법을 비춰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한소식 했다고 하는 이들은 마음 속에 끼어있는 모든 먼지를 지워버리려 다시 보림행을 하거나 토굴에 앉아 면벽 10년을 하는데 법이 사라진 관계로 업을 지우는 길을 모르기 때문에 생각만으로 업을 지우려고 하다가 아무 결실도 없이 인생만 낭비하고 한을 품고 사라지고 만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가로막고 있는 업장은 숙생의 잘못된 삶을 통하여 쌓여온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을 지우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은 업보다 더 많은 노력과 공덕이 필요합니다. 명상을 중시하는 사람들은 명상수행만으로 숙업을 지우고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화두에 전력 집중하면 어느 순간 확연대오하는 순간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든 명상법은 현재의 자기마음을 바라보는 기술에 불과하기 때문에 마음 속의 먼지를 가라앉히고 마음거울을 보게 할 수는 있어도 직접 먼지를 닦아내어 맑은 마음을 얻게 하지는 못합니다. 왜냐하면 인과의 철칙 상 짓지 않은 것을 거둘 수는 없으며 완성에 이르는 원인을 짓지 않은 자가 깨달음을 얻는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명상법이 지닌 근본적 한계입니다. 분명히 말하거니와 화두선은 부처님의 정법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처음 깨닫고 나서 세상의 실상을 보니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며 모든 것이 인과의 이치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참다운 우주의 실상과 진리의 법을 밝히시고 바르게 사는 인간의 길을 가르쳤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환상과 우상, 명상과 고행을 가르치는 기존 인도 종파들과의 차이점인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깨달음도 고행이나 명상이 아니라 수많은 생을 통해 쌓은 공덕이 이생에서 열매맺어 나타난 것이라 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부지런히 법을 배우고 공덕을 쌓아 해탈에 이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초기 부처님의 가르침은 팔정도에 의한 실천행이 강조되었으며 기존 요기들과 같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고행과 명상만 하는 것은 금기시 되었던 것입니다. 다만 인도의 환경상 비가 많이 오는 우기에는 활동이 어려우므로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조용히 앉아 그동안 팔정도를 통해 닦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는 기회를 갖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후대에 각종 명상기법들이 불교 속으로 들어오게 되는 배경이 되었고 중국에 와서는 도가의 영향을 받아 화두선으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중시하지 않았고 가르친 적도 없는 중국의 화두선이 깨달음에 이르는 정법이 되고 불교의 정수로 자리잡은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부처 이래로 새로운 깨달음을 얻어 세상에 법을 전한 이가 없고 화두선을 통해 실상의 세계를 보고 진리의 빛을 밝힌 사람이 없는데 아무 증거가 없는 화두선이 진리를 구하는 정법으로 인식되고 그 정법성을 놓고 돈점 논쟁이 치열한 것은 인간의 환상과 우매함이 만들어낸 거대한 어둠이며 토끼뿔 만지기와 같이 허망한 일인 것입니다. 혹자들은 멀리는 육조스님과 가까이는 성철스님의 예를 들며 왜 선가에 깨달음이 없었는가? 하고 반문합니다. 하지만 빛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어둠이 걷혀지며 진정한 깨달음이 있었다면 그 증거가 세상에 남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수많은 각자들이 많이 나타났다는 동양 3국이 깨달음의 기미조차 없었던 서양보다 세상이 더 어둡고 무지와 미신이 가득한 이유는 실상과 진리를 보는 정법이 이 땅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증거이며 그동안 나타난 수많은 깨달음이 진정한 것이 아니라는 반증인 것입니다. 더구나 화두선에는 상당한 위험이 숨어있습니다. 화두를 잡는 것 자체가 의식을 집중하는 일이니 상기가 되기 쉬우며 기혈이 조화를 잃어 머리가 아프기 쉽습니다. 더구나 좌선의 자세는 중앙의 충맥을 자극하여 몸의 문을 여는 비밀이 있기 때문에 몸이 비정상적이 되거나 허약해지면 그 문으로 유혼이 들어가기 쉬우며 화두 자체에도 주문의 뜻이 있어 인연있는 유혼을 불러들이는 역할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이 밝히신 정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은 법계이며 완전한 진리가 흐르고 있어 신성한 삶의 실천을 통해 선근을 기르면 마침내 마음이 꽃을 피워 깨달음의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따라서 장엄한 삶의 현장 속에서 생명이 번뜩이는 실천을 통해 바른 이치를 깨닫고 좋은 원인을 쌓아야 합니다. 하늘이 인간에게 복을 지을 터전과 완전한 인과의 이치를 마련한 이유는 살아움직이는 생생한 삶을 통해 자신을 만들어 가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업을 씻고 강한 의지와 좋은 마음을 얻어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현실에 부딪혀 직접 눈물을 흘리고 진실로 뉘우쳐 아상과 탐심을 진정으로 극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은 너무 빠르고 주어진 시간은 너무 부족합니다. 그런데 말세의 우매한 인간들은 이러한 좋은 복밭과 삶의 실천을 소홀히 하고 신에게 의지하거나 원인을 짓지 않는 명상으로 세월을 허송하며 일확천금의 헛된 꿈만 꾸고 있습니다. 세상과 자신의 변화는 인간이 지은 원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집니다. 만약 님에게 좋은 일이 생기기를 바라거든 헛되고 추상적인 관념에서 하루속히 빠져 나와 좋은 뜻과 바른 이치를 배워 현실 속에서 유효한 원인을 지어야 합니다. 영원하고 불변하는 인과의 법칙에 따라 세상을 축복하는 좋은 원인을 짓는 것만이 부처님의 참된 가르침이며 깨달음에 이르는 정법인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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