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깨달음과 행복 - 라즈니쉬 본문

☆ 진실의 근원

깨달음과 행복 - 라즈니쉬

gincil 2013. 4. 23. 22:45

<질문>
어떻게 하면 자아의 그물에서 벗어나 자유로이 날며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이 글에서 답을 찾고자 합니다.
노자의 사상을 성토한 바그완 슈리 라즈니쉬는 그의 저서 "道 (영원한 大河)"에서 
다음과 같이 깨달음을 밝히고 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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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마음이나 무엇인가 당연치 않은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것이 자아의 무엇인가이다. 항상 무엇인가 특별한 '누군가'가 되려고 한다.
항상 '아무도 아닌 사람'이 되는 것은 두려워하고 있다.
항상 공백을 두려워하고 있다.
닥치는 대로 무엇인가로 내면의 텅 빔을 메꾸려 하고 있다.
그렇게 하여 어느 인간이나 보통이 아닌 것을 추구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야말로 비극의 원흉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생트집이다.
'아무도 아닌 것'이야말로 바로 당신의 본성 그 자체인 것이다.
비실존이야말로 바로 당신이 그것으로 이루어져 있는 재료 그 자체인 것이다.

불행이라는 것은 자아의 그림자인 것이다. 야망에 불탄 마음의 그림자인 것이다.
불행이란 당신이 무엇인가 불가능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이 희망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당신은 불행한 것이다.
당신은 무엇인가 부자연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필사적이 되어 그것을 하고 그리고 실패한다.
당신은 욕구불만을 느끼고 불행해진다.

'깨달음'이란 자기 자신의 텅빔에 완전히 깨어 있으면서 또한 그것과 싸우고 있지 않은 사람을 말한다.
오히려 그는 그것을 즐긴다. 그것은 지복으로 충만된 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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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말대로 자아를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욕망없이 살다 사라져가는 것이 가능할까요?
더욱이 가까운 사람(부모형제처자 친구)들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그 어떤 사람이기를 포기하고.


<답변>


라즈니시의 글은 그럴듯한데 그 속에 진실이 없다.
명상에 대한 글은 있는데 삶에 대한 글은 없다.
그러므로 그는 정견을 얻어 실상과 인과법을 본 자가 아니다.

그는 깨달음이란 본래부터 텅 비어있음을 깨닫는 것이며
행복이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텅 비어있음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불행이란 인간이 비어있음을 즐기지 않고
인위적으로 무엇이 되고 억지로 채워 넣으려 하기 때문에 오는 생트집이라고 본다.

아니다. 마음이 텅 비어 있음을 느낀다고 해서 깨달음이 오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생각으로 마음을 비워버려도 내면 속에 깊숙이 박혀있는 업이 스멀스멀 피어나는데
어찌 더 이상 갈증없는 맑은 마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주장은 실상을 무시하고 모든 것을 환상으로 보는 관념적 사고 때문에 생겨난 오류이다.
생각만으로는 안된다.
깨달음은 마음을 비워 깨치는 것이 아니라 공덕의 실천으로 업을 태워 이루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세상은 환상이며 본래 아무 것도 없는 것이니 
본래부터 텅비어 있음을 깨달으면 해탈에 이르며 지복을 얻는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현실과 생생한 삶을 경시하고 삶을 명상으로 대체하라고 한다.
그가 이렇게 세상을 부정하는 이유는 세상의 존재이유를 무명(마야)으로 보아
이 세상을 실재로 존재하지 않는 환상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것은 신의 실체를 둘러싼 환영에 불과하므로
어느 것 하나 부정할 것도 긍정할 것도 없으니 모든 구별과 판단을 놓아버리고 
모든 것을 신의 몸짓으로 받아들여 신과의 일체감 속에서 자유를 얻어야 하는데 
이를 위한 수단이 바로 명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관념이 아니라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실체이다.
그는 모든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낙공(도무론, 허무주의)에 빠져 
완전한 법계 속에 존재하는 실상과 생생한 삶을 한갖 꿈으로 관념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 결과 그의 추종자들은 현실속에서 공덕을 쌓는 생생한 생명과 진리의 길을 무시하고 
인생을 단순히 즐기고 명상하는 꿈으로 생각하고 살아감으로써
그들의 집단인 아쉬람은 성적 타락과 마약의 소굴이 되어 인도사회의 큰 비난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 것도 바라지 않고 모든 욕망에서 자유로운 상태가 되는 것! 맑게 개인 완전한 의식을 얻는 것은 
바른 이치를 깨닫고 진실을 끝없이 추구할 때 다가오는 삶의 열매인 것이지 
현실과 유리된 명상이나 마음의 자각만으로 얻는 경지는 절대 아닌 것이다.

따라서 명상으로 텅빈 마음을 깨닫기만 하면 해탈과 지복이 온다는 이러한 시각은 
진리를 배우고 깨우쳐 공덕을 쌓아야만 이룰 수 있다는 부처님의 정견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다..

부처님은 신에 의지한다던가 명상이나 고행으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짓이며 이치에 맞지 않은 비진리로서 이런 주장을 외도라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천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런 말법들이 아직도 남아 힘을 쓰는 것은 
어두운 세상 속에는 업이 두터운 자들이 많아 바른 인과법보다 허황함을 좋아하게 되고
이런 자들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과 권위를 유지하려는 탐욕스럽고 위선된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과의 이치에 따라 꾸준히 공덕을 쌓는 것이 너무 힘들고 지루하기 때문에
신에 의지해 쉽게 구원을 얻거나 한소식하여 빨리 깨달음을 얻는 명상비법에 더욱 끌리는 것이다.

모든 것이 인과의 이치에 의해 이루어지는 완전한 법계 속에서 
바르고 좋은 원인을 짓지 않고 완전함에 이룰 수가 없다.
따라서 노력하지 않고 쉽게 얻으려고 하거나 삶을 무시하고 생각으로 깨달으려고 하는 것은
모두 외도이며 사법인 것이다.

따라서 완전한 법계와 인과법을 부정하고 세상에 허무와 혼돈을 전하는 라즈니시는 
정각을 얻은 자가 아니라 관념 속에서 말법을 전하는 어둠의 사도인 것이다.

그는 행복에 대해 말하기를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텅빔을 알면 지복을 누린다고 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일은 사실로 존재하는 것이니 행복도 마음만으로는 안되며 현실적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모든 것을 마음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인간이 육신을 갖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외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인 인간이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는 
정신과 함께 육신도 만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삶이 힘들고 불안하니까 행복을 원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 행복이 실현된 적이 없는지라 사람들은 
행복을 손에 잡을 수 없는 신기루로만 생각하지 스스로의 노력에 의해서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한 법계이니 그 이치를 알고 원인을 찾아 실천하면 이루지 못할 일이 없는 것이다.
농사일도 때를 가려 지킬 것을 지키고 행할 것을 행해야 풍년이 오듯이
삶의 행복도 인간의 길을 지키고 가꾸면 반드시 다가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복이란 과연 무엇이며 행복의 법칙은 무엇인가? 
인간세상에서 행복이란 배고프지 않고 외롭지 않고 밝은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단순히 마음만 비워서는 안되며 그러한 조건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먼저, 배고프지 않기 위해서는 열심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서 저축을 해야 한다.
부지런히 노력하고 철저한 계획을 세워 수입범위 내에서 지출하다보면 
점차 삶의 고단함에서 벗어나 풍족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습이 많아 사치스럽고 허영이 많으며 게으르고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들은 
안정된 삶을 얻기 어려운 것이다.

둘째, 외롭지 않기 위해서는 양심과 사랑이 있어야 한다.
밝고 좋은 마음이 있어 바르고 성실하게 일하면 신임을 얻어 좋은 이웃을 만나게 된다. 
서로 위해주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 서로 의지하고 축복을 나눈다면 
나쁜 일을 이겨내며 외롭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셋째, 마음이 밝기 위해서는 정직해야 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마음에 어둠이 없고 항상 맑고 당당하게 살 수 있다. 
아무리 부귀와 권력을 누린다한들 그 마음이 불안하고 죄스러우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근면, 검소, 양심, 사랑, 정직이 행복을 얻는 지름길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세상과 더불어 함께 흘러가는 인생이다 보니 좋은 세상을 만나야 한다.
어둡고 위험한 사회에서 개인이 아무리 모든 조건을 갖춘다 해도 행복을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불행한 일이 자기에게 없을 때, 자기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 때 
행복을 느낄 수 있고 또 항상 그 행복을 유지할 수 있다. 
따라서 맑고 공정하고 평안한 환경을 만나는 것이 행복의 외부적 조건인 것이다.

더러운 탁류 속에서는 아무리 고고하게 산다한 들 구정물이 묻지 않을 수 없듯이
바른 이치가 사라지고 정의가 무시되는 사회에서는 
아무리 올바르게 열심히 살아도 좋은 결과를 얻기 어려운 것이다.

캄캄한 세상에서는 아무리 좋은 시력을 가지고 있더라도 장님의 시각과 별로 다를 바 없다. 
그런 세상에서는 눈을 감고 장님처럼 살아가는 게 오히려 편한 것이다. 

오늘날 바른 정신을 가지고 참된 가치를 추구하는 자가 살아가기 힘든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진리가 뒤집어지고 정의와 양심이 숨을 죽인 어두운 세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나만 좋아져서는 안되며 이 세상도 함께 좋아져야 한다.
그 길이 바로 바른 이치를 세상에 전하고 축복하는 공덕행인 것이다.
그래야만 상상 속에 존재하는 행복이 아니라 
인간 세상 속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상천국이 다가오는 것이다.

이일을 누가 해야 하는가?
인간 스스로가 해야 하며 귀한 진리의 인연을 만난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다.
행하지 않으면 아무도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으며 어디에도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실상에 대한 진실과 바른 이치에 눈뜨지 않으면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모르며 어떻게 해야 행복한 세상이 오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동안 세상에 나타난 수많은 유토피아들은 행복해지는 길을 모른 채 이상으로 그린 세상이었기에 
모두 실천할 길이 없는 존재하지 않은 환상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정법의 인연을 만나 세상의 진실과 이치를 배워야 한다.
법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일은 인과법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이치 속에 있는 일들을 알면 사람은 자기 스스로 자기가 원하는 삶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자아를 비우고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욕망없이 살다 사라져가는 것이 가능한가 물었다.

욕망없이 산다는 것과 소망없이 산다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이치에 맞지 않은 욕망은 부려서는 안되지만 인간이 가야할 소망을 찾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 것이다.
진리가 사라진 세상에서는 이 구분이 잘 되지 않아 사람들이 혼돈 속에 방황했던 것이다.

소망은 모든 것이 순리에 맞기 때문에 일할수록 삶이 건전해지고 무르익지만
욕망은 이치에 맞지 않으므로 집착할수록 거짓이 생기고 마음이 병들어 자신을 망치게 된다.
따라서 좋은 뜻을 품고 열심히 노력할 때 인간의 뜻과 소망이 완성되며 인간완성에 이르게 되는 것이며
함부로 허황된 욕심을 부리게 되면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부모, 형제, 처자, 친구들이 바라는 사람이 되는 것을 포기하는 것이 꼭 나쁜 일은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일이 인간이 가야 할 참된 소망이 아니라 세속의 굴레에서 바라보는 탐욕이라면
그러한 요구에서 벗어나 참다운 보람과 가치를 이루는 것은
자신에게서나 부모, 처자, 형제, 친구 모두에게 축복되는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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