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업을 태우라고 말씀하시는데 본문
상대성에 빠진 현실에서 살다 진실의 근원에 처음 들어오면 진리의 존재에 대한 거부감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다른 많은 입문자를 위해 이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1. 업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과 자신의 의지(업을 불태우겠다는)에 의해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것을 일반인이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업은 과거에 지어 자신 속에 남게 되었던 일이 되풀이 되는 것이고
인간의 의지는 현실의 전체적 상황 속에서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업은 대개 욕망과 집착으로 나타나며
의지는 상황 속에서 인과를 분석하여 이치로 나타난다.
이 의지는 각자의 정신의 맑기에 따라 그 맑음과 강도가 다르다.
그래서 마음에 맑음이 없어 욕망이 자신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자신이 업에 의해 행동하는지 진리에 의해 행동하는지 구분하지 못하며
그 정신이 완성의 경지인 해탈에 이르러 업의 지배로부터 벗어나면
업에 의해 좌우되지 않고 이치에 의해 행동하기 때문에 운명에 걸리지 않는 것이다.
2. 선과 악, 법과 불법 , 양심과 비양심
이것을 일반인이 어떻게 구별하여 행동 할 수 있나요??
모든 현상에 옳고 그름을 누가 판단할 수 있나요?? 또 자신의 지은 결과의 1만년 100만년 뒤의 결과를 어떻게 알수 있나요? 또 만약 자신의 행동을 진심으로 고민하고 고민하여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결정이라고 생각하였으나, 이것이 잘못 된 것이라면요??
상대성에 빠져버린 현실에서 세상의 이치가 보이지 않으니 이런 의문은 당연하다.
세상의 이치는 자신의 수준만큼 보는 것이다.
성자들이 세상에 태어나 진리를 밝힌 이유는 그분들이 없는 진리를 만들어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 온통 이 세상이 진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데도 중생들은 보지 못한 것을 성자들이 발견하고 가르친 것이다.
지금 그대의 질문은 눈먼 장님에게 눈앞의 일을 설명해달라고 하는 것과 같다.
장님에게 눈앞에 무엇이 있는 지 아무 것도 모르며 가르쳐 주어도 그것만 안다.
앞에 나무가 있고 대문이 있다고 가르치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나무가 어떤 종류의 나무이고 대문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물으면 바로 막히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보는 자와 보지 못하는 자의 차이인 것이다.
따라서 중생들은 차근 차근 인과법을 깨달아가는 것이지 눈이 0.1 밖에 되지 않는 자가 1.0이 되는 자가 보는 것을 다 보여 달라고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안경을 쓰거나 앞을 보는 자의 말을 듣고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중생은 눈앞의 일도 보지 못한다고 하여 눈뜬 장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금 현실은 진리가 사라진 시대로 세상은 안개 속에 오리무중이다. 그러니 무엇이 진리인지 선인지 악인지 알 수가 없다. 진리를 본 자가 없으니 무엇이 옳고 그른지 현실이 어떻게 돌아가는 지 명확히 보는 자가 없다. 그래서 그런 자들로부터 배운 지식으로 인해 세상은 상대성에 뭍혀 온통 뿌연 안개 속인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앞을 보는 자를 따라 세상을 보면 세상이 명확히 보이지만
세상을 바로보지 못하고 안개속에서 보는 자를 따라 보면 같이 뿌연 안개 속에서 보는 것이다. 그가 보는 것은 생각으로 보는 것이니 여기 저기서 헷갈리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지식 체계인 것이다.
이런 상대성에서 깨어나 세상의 인과를 보는 눈을 깨쳐야만 이런 의문에서 벗어나 옳고 그름을 명확히 알 수 있고 공덕을 정확히 지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대는 안보이는 눈으로 모든 것을 보게 해달라고 떼를 쓸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의 눈과 마음을 밝히는 노력을 먼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사실을 기반으로 한 인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사실을 무시하고는 인과를 보지 못하며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똑같은 일이라도 원인이 다르면 처방이 다르다.
무릎이 아플 경우 신기가 달라붙어 무릎이 아픈 것과 무릎에 물리적 충격이 가해져서 다친 것은 그 대책이 달라야 하는 것이다.
사회현상도 마찬가지이다. 경제가 나쁜 것은 인플레로 돈이 너무 많이 풀려 경제구조가 취약해져 올 수도 있고 혁신과 경쟁력 부족으로 인한 수출감소로 오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이런 현실을 무시하고 단순히 경제가 나쁘다는 이유로 무조건 같은 정책을 쓴다면 망하는 길 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독사와 꿀벌에 대한 그대의 질문 또한 사실을 바탕에 깔지 않고 일반론적인 의문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제 이곳에 문을 두드렸으니 이러한 관념적인 논리에 빠지는 일보다 사실을 근거로 판단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
3. 모든 현상이 인과 과의 결과라고 하는데, 깨달은 자의 모든 결과(과)가 옳다는 말인가요?
예를 들어 깨달은 자가 깨닫지 못한 자에게 자신의 의도와 달리 꾸짖어 마음속에 독한 악을 심어 주어 그 악으로 인해 주변사람들에 피해가 갔다면요? 깨달은 자가 지은 원인은 진실을 향한 옳은 일이기 때문에 그의 과가 없어지는 가요?? 그것도 그 피해를 당한 사람의 업인가요?
깨달은 자는 삼계의 인과를 모두 본다.
그래서 중생들이 알지 못하는 정확한 인과를 보고 처방을 정확히 일러주는 것이다.
아무리 중생들이 자신들과 맞지 않다고 거부를 해도 사실을 정확히 본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 있는 인과는 명확하며 깨달은 자가 밝힌 처방을 따르게 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들은 사실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처럼 각자의 마음을 기준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은 자가 가장 올바른 처방을 제시하여 이를 따르면 자신에게 복이 되고 세상이 좋아지는데도 중생들이 자신의 어리석음과 업으로 인해 이를 따르지 않고 화를 자초하는 것을 가지고 깨달은 자의 책임이라고 하면 안되는 것이다.
깨달은 자가 세상의 진실과 이치를 보고, 신과 기도가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니 인과를 바로 깨달아 마음을 반성하고 좋은 원인을 열심히 지으라고 가르치면, 신에 매인 자들은 결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신을 모독하는 악마의 앞잡이라고 나서며 매일 기도를 하며 복받기를 바란다. 그래서 더욱 미신화되고 일은 해결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럴 경우 중생들의 잘못인 것이지 깨달은 자의 잘못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부처라도 중생을 직접 구제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말을 강가로 데려가도 물을 마시는 것은 말인 것이다.
모든 중생은 자기 인생의 주체인 것이다.
깨달은 자는 진리를 전하는 것이며 그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중생의 몫이다.
따라서 깨달은 자의 방법이 틀려 모든 사람을 구하지 못했다고 중생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는 일인 것이다.
4. 선업으로 악업을 없앨 수 있나요? 없앨 수 있다면 그 상관관계를 어떻게 증명하나요?
선업과 악업을 일반인이 어떻게 구분하나요?
무얼 그리 어렵게 생각하는가?
도둑질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악업이다.
그렇다면 남의 것을 훔치지 않고 자기 노력으로 열심히 일해 거짓없이 바르게 사는 것은 선업인 것이다.
그래서 선업이 커지면 악업이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선업은 빛이고 악업은 어둠과 같다.
그래서 빛이 커지면 어둠은 저절로 사라지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가 선업과 악업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어서 그렇지
선업과 악업은 어린아이라도 다 아는 상식적인 말인 것이다.
5. 현재 모든 세상의 현상이 한 영혼의 인과 과의 현상이라고 하는데, 전생에 행동했던 원인를 가지고 현재의 결과가 나왔다고 말하는 것은 현생을 불행하게 사는 사람들에게 자신도 알지 못하는 전생의 행실에 대한 죄책감을 안겨주는 것은 아닌가요? 그러면 그 발언이 너무 무책임 한것은 아닌지요? 말 그대로 전생의 모든 기억을 잊고 새로운 몸을 빌어 이 생이 났는데 말이죠... 또 왜 전생에 그 과를 받지 않고 현생에 그 과를 받는지요? 그 생에 그 과를 받으면 안되나요? 그렇지 않다면 그 상관 관계는요?
기본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원인이 있어 나타난다.
그것이 자기의 업이 원인일 수가 있고 새로운 인연을 만나 생겨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던 원인이 없이 생겨나는 일은 없는 것이다.
아무리 현실 밖에 보지 못해도 흑인을 보면 그 부모가 흑인인 줄 아는 것이며
노랑 분꽃을 보면 과거의 꽃도 노랑색이었음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자신이 용맹한 자는 과거에 용감한 사람이었음이 분명한 것이며
어리석은 자는 과거에 자신이 어리석게 살았던 전생이 있음을 아는 것이다.
우리는 과일점의 과일들을 보고 맛없고 빈약한 과일은 그늘지고 양분이 없는 곳에서 잘못 자란 것인 줄 알고 잘 영근 과일은 토양이 좋고 햇살이 좋은 곳에서 잘 자란 줄 뻔히 안다.
이처럼 아무리 자신이 부정하고 싶어도 원인이 없는 현생은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인과의 이치를 명확히 깨달아야만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고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처럼 인간의 불행은 신이 인간을 얼마나 축복하는지 시험하는 것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단순한 관념보다는 인과의 이치를 알고 대처하는 것이 가장 쉽고 올바르게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모든 불행에 처한 사람은 먼저 자신에게 잘못이 있는지 반성하고 문제를 분석하여 해결책을 실천함으로써 더 좋은 성품과 근기와 인내와 지혜를 갖추는 것이 인간으로 태어난 보람과 가치를 증진하는 길이 된다.
인간은 현실에서의 부귀영화를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삶을 통해 좋은 영혼을 거두어 마음의 평안과 행복, 그리고 인간완성에 이르기 위해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전생에 그 과를 받지 않고 현생에 그 과를 받는지? 그 생에 그 과를 받으면 안되는지 물었다.
그것은 과일나무에게 어차피 열릴 과일이라면 내가 먹고 싶은 때 안 열리고 왜 꼭 가을에 열리느냐고 따지는 것과 같다. 인과가 무르익지 않으면 어떠한 일이라도 생겨날 수 없는 것이다.
6. 인간의 행동에 대한 인과 결을 따지다 보면, 인간은 차라리 행동을 하지 않고 선업이든 악업이든 쌓지 않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또 선업의 + , 악업의 - 를 어떻게 계산하여 따져야 할까요?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고통이라는 염세적 사고방식에서는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태어난 이유와 가치가 있는 것이다.
길을 모르고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중생들에게는 산다는 것은 고해이다.
그러나 진리의 길을 알고 법계의 이치를 보며 자신의 완성을 위해 나아가는 진리의 수행자는 매일 매일의 삶이 보람이며 기쁨인 것이다.
요즘 사람들 중에는 사는 것이 고통스럽다고 죽어버리거나 짐승처럼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자신이 사라지고 싶다고 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한번 태어난 영혼은 영원히 그 과보를 받으며 존재하는 것이다.
다시 태어나지 않겠다고 자살한다면 그 영혼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매우 무기력한 영혼이 되어 미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며 짐승처럼 아무 생각없이 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죽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난 것을 매우 소중한 기회로 알아야 할 것이며 모든 생명체 중 가장 고귀한 진기를 띤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진리를 알아 인간완성의 경지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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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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