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진실을 찾아서
신으로 진화한 예수 본문
예수가 완전한 신이냐? 아니면 인간으로서 신성에 이른 완전한 인간이냐? 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쟁점이다. 기독교 신앙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종교가 되다보니 예수가 신이 아니고 인간이라면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구원은 어려워지기 때문에 기독교 신앙 자체가 성립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 전에 과거 기독교 역사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과거에 있었던 사실과 기록을 살펴보면 그 속에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와 같이 무조건 기적과 신화를 믿으라 하는 시기는 지났다. 사람들이 모두 교육을 받아 깨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실적인 이해와 상식적인 판단이 필요한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똑같다. 따라서 현재 일어나지 않는 일은 과거에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며 과거에 일어난 일은 현재에도 일어나는 것이다. 따라서 고대사회에 흔히 나타났던 신화란 원시시대 인간의 무지 속에서만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용될 수 없는 것이다.
예수가 신이 되기 위해서는 전지전능함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속에 나타나는 예수는 너무나 인간적인 한계와 고뇌 속에서 살았다. 물론 많은 기적을 행한 것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에는 흔히 있었던 신화나 전설과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예수가 처녀에게서 무염잉태했다는 것이나 김알지가 알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신화로 예수를 판단할 게 아니라 그분이 남긴 행적에서 과연 그분이 신의 아들인가? 아니면 인간 중 가장 크게 되신 분인가를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초기 기독교의 일반적 시각은 예수는 인간으로 최고의 경지에 오른 신인으로 보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3년반동안의 초월적 삶속에서 인간적 한계과 고뇌를 제자들은 많이 목격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가 전지전능함을 갖고 모든 것을 쉽게 해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는 전지전능하지도 못했고 대접을 받지도 못하고 핍박만 받다가 가셨다. 이것은 인류사에 나타난 모든 성자들의 공통된 삶이었다. 지금이야 너나 나나 모두 예수님을 잘 섬기지 못함을 안타까워하지만 당시에는 대부분 그분을 배척했고 따를 사람들이 없어서 핍박받고 무지한 어부와 창녀, 노예와 같은 하층계급들만 그분을 따랐을 뿐이다.
성경에 보면 얼마나 예수님이 외롭고 힘들게 살았는지 잘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은사를 받고 고향 나사렛으로 돌아갔는데, 고향사람들은 예수를 “저 이가 누구인가?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하며 경시하고 모욕을 주었다. 그리고 예수가 구세주를 자처한다하여 그를 절벽으로 데려가 밀어 떨어뜨려 죽이려 했던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제자들은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 밀싹을 훔쳐 먹어야 할 정도로 힘든 고난의 행군을 했으며 바리새인 시몬은 자기 집에 온 예수에게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기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초라한 행색이었다. 여기서 오병이어의 기적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가버나움에서 사마리아로 직접 내려오다가 거할 곳을 찾았지만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을 배척하자 갈 곳을 찾지 못하고 돌 세례를 당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신 것이다.
또 예수는 인간적인 모습도 보인다. 유다가 예수를 제사장과 로마관원에게 고발하기 전 예수는 산위에 올라 피눈물로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한다. “이 고통의 잔을 내게서 옮기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소서!”하고 인간적 고충을 호소한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모습에서 예수가 신이 아니라 인간적 한계를 지닌 사람으로서 그리고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친 위대한 성자의 안타까운 삶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고 물위를 걷는 전지전능을 행한다면 어찌 그가 몇 명의 유대교인들에 의해 제사장에게 끌려가 로마관원으로 넘어가 십자가의 희생물이 되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운명조차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인간적 육체적 한계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신으로 사셨기에 위대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성자들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위해 자신을 바쳤기에 위대하신 것이다. 부처님도 팔십평생을 편히 쉬지 않고 중생을 위해 법을 전하러 다니다 길가에서 돌아가셨고 소크라테스는 진리와 정의를 주장하며 뜻을 꺽지 않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고 예수님은 죽는 줄 알면서도 적의 소굴로 들어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던 것이다. 이러한 위대함이 있기에 그분들을 성자라 존경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신에 대한 모든 집착과 욕망이 사라지고 오직 진리와 세상에 대한 사랑만이 남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은 진리의 말씀을 전하러 오신 위대한 성자인 것이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수님이 깨달음에 이른 성자라는 것은 그 가르침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 <마태복음 7장 16~21>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아느니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태복음 12장 33~35>
이처럼 예수님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지는 영원히 존재하고 있는 이 세상의 진리를 보셨던 것이다. 즉 좋은 원인이 나쁜 결과를 맺는 일은 없으며 좋은 결과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좋은 원인이 있다는 것을 보신 것이다. 그래서 각자가 지은 대로 가시나무는 가시를, 포도는 포도를 낳고 잘못된 삶을 지은 자는 불에 태워지는 지옥의 벌을 받게 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님은 로마의 식민지로서 핍박을 받고 있으며 유대교의 우상과 위선으로 점철된 무지하고 불행한 유대사회에 양심을 깨우치는 바른 이치를 전했던 것이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라!』 고 외쳤고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태복음 7장 16~21>하신 것이다.
세상은 한치도 어김없는 진리와 사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어 짓는 만큼 결과를 받게 되는 것이며 짓지도 않은 일을 누가 대신해주는 이치는 없다. 즉 세상을 위해 양심을 깨우고 진리를 실천해야 구원을 받는 것이지 지은 것과 관계없이 신에 대한 믿음만으로 구원을 받는 수는 없다는 것을 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이 기존 신에 대한 우상과 미신으로 점철된 유대사회에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예수님의 진리의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만약 그분의 가르침에서 이러한 진리가 없다면 기독교는 전혀 생명력이 없었을 것이며 예수님은 절대 4대 성인의 한분으로 존경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리와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무도 좋아하지 않았다. 이것이 거짓된 세상인심인 것이다. 유대사회는 이를 받들어 실천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위선된 삶을 밝히는 예수를 도리어 살해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진리를 외면하고 인간의 도리를 실천하지 않는 유대민족은 나라를 잃고 수천년간 세계를 떠도는 유랑민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나자 이러한 생생한 진리의 가르침은 변질되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진리를 전한 기간이 3년반에 불과하여 너무 짧았기 때문에 그 가르침은 깊이 전해지지 못했고 기적의 신화와 전설만 남아 예수는 또 하나의 신으로 받들어지게 된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역사이다. 성자들이 나타나 기존 종교의 미신과 우상을 쳐부수고 진리를 전하면 기존종교와 어리석은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이치대로 살라는 성자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배척한다. 맑은 물에는 큰 고기가 살지 못하듯이 어리석은 백성들은 진리가 빛을 발하는 한 절대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들은 세상을 위한 사랑으로 진리를 전하지만 살아 생전에는 결코 대접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제자들이 나타나 이 가르침을 왜곡하면 점차 빛이 흐려져 탁한 물을 좋아하는 어리석은 중생들이 가까이하게 된다. 그리하여 진리가 왜곡될수록 신자들은 더욱 증가하며 그 공은 성자들이 아니라 성직자들이 챙기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일반적인 사례인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의 기독교를 보면 참으로 통탄하실 것이다.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신의 우상과 무지에서 벗어나 올바른 진리를 실천하라고 했는데 또 다시 자신이 가르친 진리는 사라지고 자신이 우상이 되어 신으로 숭배를 받고 있는 현실에 가슴이 아프실 것이다.
이것을 주도했던 것은 사도 바울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실제 속사도로서 예수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예수님이 돌아가실 즈음 바리새파의 율법학자로서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예수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 고난과 가르침에 대해 고뇌하다가 성령을 받고 예수를 영적으로 접하게 된다. 그는 예수를 성령으로만 만났기 때문에 예수는 인간이 아니라 신이었고 그의 뇌리에 있는 예수란 기적으로 미화된 신성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진리에 대한 가르침이나 율법보다는 성령에 의한 구원을 강조하고 믿음을 통한 손쉬운 구원론과 대속론을 주장했던 것이다.
바울이 이렇게 예수님에 대한 믿음만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는 교리를 전하자 그동안 예수님의 밝은 진리를 두려워하던 무지한 백성들이 구름처럼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만나지도 못한 속제자인 사도바울의 신앙적 교리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육친 제자들의 진리적 가르침을 누르고 기독교의 주된 흐름이 된 것이다.
그에게 예수는 하느님 그 자체였으며 믿기만 하면 구원을 주는 신성 그 자체였으니 그러한 존재에게 인간적인 탁함이 남아있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하느님과 그 아들인 예수 그리고 예수님의 영혼이 나타난 성령을 같은 존재로 보았다. 이것을 삼위일체설이라고 한다. 이러한 삼위일체설을 초기 교회의 기본 교리가 되어 나중에 알렉산드리아교회의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로 발전한다.
그리하여 예수님이 그토록 간구했던 신의 우상에 의한 미신과 위선으로 사악해진 유대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던 진리의 가르침은 제대로 밝혀지지 못하고 다시 유대교와 같은 영적 신앙의 형태가 되어 신을 섬기는 원시종교 형태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반하여 초기 제자들과 영지주의 그리고 오리게네스의 통찰을 근거로, 하느님만 신으로 인정하고 예수님은 피조물인 인간 중 가장 뛰어난 신성에 이른 존재로 보는 단일신론을 주장하는 것이 아리우스파이다.
당시는 교통이 불편하고 교회의 성장도 교부들에 의해 각 지역별로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교리도 바울주의가 일반적이었으나 각 지역 교회별로 차별성을 가지고 다양하게 발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로마 황실과 새로 나타난 게르만 사회에는 아리우스파가 우세했다. 로마교회가 교리에 대한 관할권과 권위를 내세웠지만 다른 교회에서는 이를 거부하는 등 절대적 권위가 확립된 것도 아니었기에 이단을 판단하고 정죄할 힘도 없었다.
교리논쟁이 본격적으로 불붙은 것은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기독교가 국교화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로마를 통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통치의 필요성에서 황제의 권위를 신으로부터 인정받을 필요성을 느꼈다. 그리하여 기독교를 국교로 선택하여 교회의 정치권력의 관할하에 두고 스스로 교회의 최고지위에 올랐다. 그런데 기독교가 하나로 통일되지 아니하고 여러 교파간에 갈등이 심각한 것을 보고 이를 하나로 통일시키고자 하는 필요성을 느낀다.
이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예수의 신성(神性)문제를 둘러싸고 단일신성을 주장하던 아리우스파와 삼위일체를 주장하던 아타나시우스파와의 대립이었다. 사실, 콘스탄티누스는 아리우스파 주교 몇 명뿐만 아니라 아리우스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는 점점 커져가는 교회의 분파를 끝내고 싶다는 바람이 강했기에 콘스탄티누스대제는 교회의 분열 문제를 공의회의 결정에 맡기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 쉽게 도달할 수 있는 소 아시아의 니케아(Nicea)에 각 지역의 교회지도자들이 모인 것은 서기 325년이었다. 정확한 참석 인원은 알 수 얹으나 약300명 정도로 추정 된다. 이 회의에서는 장로와 감독의 선출 및 안수, 교구간의 우선 순위, 유월절 등이 논의되었으나 가장 어려운 문제는 아리우스의 단일신성에 관한 논쟁이었다.
이 안건에 관하여는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 당시 교회 분위기는 사도바울의 신앙주의가 일반적 대세였으나 예수의 진리적 가르침에 초점을 맞추는 영지주의와 그리스 철학에 영향을 받은 오리게네스에 이성적 이론 또한 기독교계에 일반적으로 널리 번져있었다. 따라서 아리우스의 단일 신성론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고 각지의 교회 주교들도 개인적인 신앙의 문제로 대체적으로 이해하는 분위기였다.
회의에 참석한 교회지도자들은 3부류로 나뉘어지는데 우선 확신에 찬 소수의 아리우스주의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에 의해 통솔되고 있었다. 아리우스는 주교가 아니었으므로 회의에 직접 참석할 수 없었으며, 이 때문에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그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이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아타나시우스파는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주교였던 알렉산더에 의해 이끌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아리우스주의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위협하는 것이므로 분명히 그 가르침을 정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확신하였다. 알렉산더의 추종자들 가운데는, 당시 집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희의에 참석할 수 없었으나 그 후 니케아 정통의 수호자로서 그 이름을 떨치게 되는 아타나시우스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중립적 입장이었으며 라틴어 사용권인 서방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의 대부분은 이 논쟁에 관해 그다지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들은 당시의 논쟁이 동방교회 출신들 사이에 발생한 국부적 논쟁으로만 생각하였다. 다만 이들은 교회를 분열시킬 가능성이 있는 논쟁이 발생했다는 자체를 걱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회의 초기에 이들 교회지도자들은 시급한 다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이 문제에 대해서는 타협책을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회의가 진행되면서 처음에는 어느 편의 교리도 정죄함이 없이 화해와 타협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참석자들은 알렉산더 주교의 강력한 주장에 의해 가능한 한 가장 명확한 표현으로 아리우스주의를 정죄해야 한다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회의에 참석한 아타나시우스의 역할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 회의에서 아리우스파는 오직 하느님만 신으로 인정하는 단일신 주의를 주장했다. 따라서 예수는 신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창조받은 가장 으뜸되는 존재이며 그는 인간의 영혼이 아닌 진리 자체를 영혼으로 지닌 반신성의 존재로서 인성이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은 기원이 없지만 예수는 기원이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세대 이전에는 있지 않았으며 새로 태어난 존재라고 주장하며 성령은 성자가 만든 최초의 피조물이라 하여 삼위일체를 부인하게 되었다.
이러한 신이 아닌 성자로서의 인간적인 모습은 성경에 명확히 나온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인자(인간의 아들 son of man)라고 표현했다. 하느님에 비해 자신을 낮추신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나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한복음 14:6」고 하여 스스로 아버지 하느님과 다름을 밝혔으며
*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마태복음 27장 46절)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막 10:18]하는 구절 등에서도 자신과 하느님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타나시우스파는 신앙 제일주의의 입장에서 하느님인 성부와 예수이신 성자와 성령인 성신을 하나로 본다. 그들은 예수를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똑같은 하느님이시며, 참 하나님으로서 출생하시어, 만들어지지 아니하시었고, 성부와 한 본체로 하느님과 동일 본질이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가 계시지 않은 때가 있었다거나, 없는 것으로부터 새로 생겨 나셨다거나, 어떤 다른 존재나 본질로부터 창조되고 변화될 수 있다고 주장하면 이단으로 보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비교종교학이 발전한 시대에서 보면 한눈에 예수가 다른 4대 성인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시련을 극복하여 인간완성에 이른 성자임을 알 수 있으며 아리우스파가 더욱 정상적이며 이치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바울 이후 신앙적인 믿음이 기독교가 대세이던 시기라 예수의 절대적 신성과 무조건적인 믿음을 외치던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회의는 결국 아리우스주의를 이단으로 배격한 "니케아 신경(Nicene Creed)"에 합의한다. 그리고 서명을 거부한 유세비우스를 포함한 아리우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직분을 박탈하였다.
그리고 콘스탄티누스는 이러한 결정에 의거, 면직된 주교들을 각 자의 교회에서 축출해 버렸다. 그러나 교회 문제에 세속적 처벌을 실시한 황제의 이러한 행위는 그 후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교회의 문제와 교리에 관하여 세속 권력이 개입한 전례를 남기게 되었고 무자비한 정치권력이 이단 정죄라는 이름으로 교인들의 살육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황제의 뜻과는 달리 니케아 종교회의가 문제를 종식시키지는 못했다. 당시 교회는 각 지역별로 전통이 있었고 교리에 대해 다양한 견해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강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리우스파인 니코메디아 주교 유세비우스는 이날 직분이 박탈되고 정죄를 받았지만 그는 황제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었다. 그 친분성은 황제가 임종시 세례를 받은 사람이 유세비우스였다는 것에서도 잘 알 수 있다. 유세비우스는 아리우스의 단일신성 교리의 진리성을 강조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설득함으로써 다시 아리우스파를 불러들이게 만든다. 황제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자기의 조치가 지나쳤다고 생각하고 아리우스파에 대한 파문과 귀양을 풀고 아리우스를 성찬에 참여시키도록 명령하였다.
그리하여 복권된 아리우스파는 절치부심하며 세력을 만회할 길을 찾다가 339년 아타나시우스의 알렉산드리아 총대주교직 박탈을 결의했고(335년 8월 두로회의) 황제에게도 반기를 들었다는 혐의를 씌워 안디옥 회의에서 그를 파문했으며, 고울지방의 트리어(Trier, 오늘날의 독일)로 유배시켰다. 이 기간에 아리우스논쟁의 장본인인 아리우스도 세상을 떠나고 콘스탄틴 황제도 337년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세상을 떠났다.
그의 사후 로마는 그의 세 아들 콘스탄티누스 1세, 콘스탄스(constans),그리고 콘스탄티우스(constantius)에 의해 계승되었다. 콘스탄티누스는 본래 제국을 4등분하여 세아들과 조카가 다스려줄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가 죽자 혼란이 일어나 거의 모든 친척들이 살해되고, 세 아들이 제국을 물려 받았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동부지역(마케도니아, 그리스, 트레이스, 소아시아, 팔레스틴, 시리아, 그리고 일리리아)을, 그리고 콘스탄티우스는 서부지역(영국, 고울, 스페인)을 다스렸다. 막내인 콘스탄스는 이태리와 북아프리카를 차지했다.
콘스탄티우스와 막내인 콘스탄스는 서방의 입장을 따라 아타나시우스를 지지했다. 처음에는 니케아주의자들에게 유리한 듯하였다. 때마침 아리우스파의 지도자격인 니코메디아의 유세비우스가 341년 겨울 세상을 떠났다. 지도력 공백을 당한 아리우스파진영이 후임문제를 놓고 갈등을 겪는 사이 아타나시우스는 로마로 가서 교황 율리오 1세의 열열한 지지와 도움을 받았으며 343년 이탈리아 사르디카 교회회의에서 주교 50명이 만장일치로 그를 알렉산드리아의 유일주교로 선언한다. 또한 당시 이탈리아를 담당하던 서로마 황제 콘스탄스를 직접 만나 그의 신임을 얻고, 345년 서로마 황제 콘스탄티우스의 비호 아래 다시 알렉산드리아로 돌아와 복권하게 되는데 이때 콘스탄스는 형인 동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와의 일전을 불사하며 아타나시우스를 옹호하였기 때문에 콘스탄티누스1세는 굴욕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복귀시킬 수밖에 없었다.
340년 서로마에서 콘스탄티우스와 콘스탄스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고, 콘스탄티우스가 전사하는 바람에 서로마는 콘스탄스가 통치하게 되었다. 그러나 350년 아타나시우스의 옹호자였던 황제 콘스탄스가 죽자 다시 상황은 아리우스파에게 유리하게 전개된다. 동방의 황제인 콘스탄티누스1세는 자기 동생을 살해하고 서방의 황제가 된 마그넨티우스와 전쟁을 벌여 그를 제거하고 전 제국을 통일시켰다.
제국통일이 다시 이루어진 상황에서 무르사의 감독 발렌스가 황제의 고문이 되면서 사태는 다시금 급변했다. 콘스탄티우스 황제는 철저한 아리우스주의자였다. 콘스탄티누스는 그의 조언을 무조건 수용했고, 아르네스(Arles, 353)와 밀란(Milan, 355)에서 종교회의를 열어 아무런 이유없이 아타나시우스를 정죄했다. 그리하여 니케아파 지도자들은 또 다시 자기들의 도시에서 축출되고 반아리우스파들은 모두 귀양보냈다. 당시 가중되었던 황제로부터의 압력 때문에 노령의 코르도바의 호시우스와 로마 주교 리베리우스(Liberius)까지도 아리우스파 신앙 고백에 서명해야만 했다.
357년에는 일리리아의 시르미움에서 회의를 열어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설명하는데 있어서 예수가 하느님과 동일 본질(ousia)이라는 단어사용을 금했다. 다시 아리우스파가 승리한 것이다. 그리하여 세력을 잡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아리우스파는 아타나시우스를 제거하기 위해 여러 차례 시도했는데 이집트 민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 그를 숙청하기는 쉽지 않았다. 급기야 356년에는 군대를 파견하여 아타나시우스가 미사를 집전하고 있던 성 테오나시오 교회를 급습하고 수많은 신도들을 죽이는 유혈사태가 발생한다. 아타나시우스는 기적적으로 탈출에 성공하여 이집트의 사막에 있는 수도사에게로 피신했는데 약 6년간 계속된 도피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죽고 율리아누스 황제가 즉위하자 끝이 났다.
콘스탄티누스 2세에 이어 즉위한 율리아누스는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361년). 그는 엄격한 동방교회 의식으로 교육받은 자이지만, 기독교를 배척했고, 교회가 내부의 갈등으로 와해되기를 원했다.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아타나시우스파와 아리우스파가 더 과격하게 싸워 스스로 와해되기를 바랬다. 그 전술의 일환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소환하여 논쟁에 뛰어들게 했고, 니케아 신조 옹호자에 대한 박해도 중지시켰다.
이러한 여파로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알렉산드리아에서 긴급 회의를 열어 기독교 교리의 오해를 해소하고 일치점을 찾으려 하였는데, 기독교의 일치를 원치 않았던 율리아누스 황제는 아타나시우스를 362년에 다시 추방하였다. 그 후 율리아누스가 사산조 페르시아와 싸우다가 전사하고 발렌스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자, 아타나시우스는 다시 복권되었는데 그것도 잠시, 아리우스파였던 발렌스 황제는 365년 아타나시우스를 다시 추방하였다. 이에 알렉산드리아 시민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를 일으키자, 황제는 결국 아타나시우스를 366년에 다시 복권시켰다.
이런 상황속에서 아타나시우스는 373년 죽기까지 3인의 뛰어난 이론가(바실리오, 니사의 그레고리, 나지안조의 그레고리)와 함께 다른 주교들을 설득하여 아케아 신조의 정당성을 홍보하여 교회의 여론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만들었다. 379년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아타나시우스파의 삼위일체론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그는 380년 기독교를 국교로 반포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공의회를 열어 니케아 신조를 재확인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삼위일체론이 로마정부의 권력에 의해 기독교의 기본교리로 채택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하여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개최된 서기 325년의 니케아 종교회의를 시작으로 5차에 걸쳐 열렸던 종교회의에서 최종적으로 아타나시우스파가 승리함으로써 오늘날의 기독교 교리가 정립된 것이다.
만약 로마황제가 아리우스파를 선택했다면 오늘날의 기독교는 삼위일체가 아니라 하느님만 신으로 모시고 예수님은 가장 뛰어난 인간으로 모시는 이성적인 교리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즉 오늘날 성경과 삼위일체 교리의 성립은 한점 한획의 오류도 없는 신의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이 아니라 황제의 세속적 권력과 뜻에 의해 결정된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는 인간에서 신으로 승격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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